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73화 (968/1,132)

< -- 973 회: 파트11.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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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간동안 힘들게 산을 넘어 온 세데스와 코리온 일행은 어느새 문제의 탄광에 거의 접근해 있었다. 언덕 꼭대기에 오른 세데스는 망원경을 눈에 대고 주변을 확인했다.

“하아, 이거 어떻게 감사드려야 하죠?”

세데스가 몇 발짝 뒤에 있는 코리온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귀신같이 찾아내셨군요.”

세데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빽빽한 수풀 사이에 위치한 대리석 건물을 노려보았다. 지금은 나무로 뒤덮였지만 지면을 마치 큰 숟가락으로 푹 떠낸 것처럼 계단 모양으로 켜켜이 파낸 옛 노천광의 흔적은 분명했다. 코리온의 예상대로 트라카 교단의 옛 수도원 ‘까사 델 파즈’ 수도원은 노천광 측면의 가파른 비탈 중간쯤에 위치해 있었다.

“저곳 지하에 주페 태자가 있다고?”

세데스는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차가운 사내가 건물을 노려보며 어딘지 격앙되어 있는 것을 느꼈다.

“보안국 특수부대가 30분에서 한 시간 후면 도착할 거예요. 그때까지는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려야 해요. 근데 저놈들 이미 이사 시작한 것 같은데 큰일이네.”

세데스가 망원경으로 줄곧 수도원을 살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도원 앞에서는 사람들이 수레에 짐을 한가득 싣고는 지대가 낮은 강변 쪽으로 개미처럼 줄을 지어 내려가고 있었다.

“어부들이 봤다는 배를 저 밑에 대놨을지도 모르겠네요. 작은 평저선이라면 이 정도 작은 강은 충분히 지나갈 수 있을 거예요. 그나저나.”

세데스가 초조한 듯 시계를 보았다.

“황상 그 양반은 왜 여기까지 오신다고 난리람. 그냥 얌전히 궁으로 돌아나 가시지.”

1분이라도 함께 있고 싶은 맘에 코리온을 데려오기는 했지만 황제가 알면 얼마나 길길이 뛸지 안 봐도 뻔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황제는 지난 한 달간 외도 아닌 외도의  큰 수확물인 ‘아이들의 약’을 자랑스럽게 들고 비빈들 앞에 금의환향해 제국회의가 있을 수베르로 떠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아들 이야기에 결국 비빈들의 품도 버려둔 채 일단 이리로 직접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1시간이나 기다려도 될지 모르겠네. 우리가 너무 늦었나본데. 지금 같아선 지상으로 오는 건 포기하고 그냥 공중 기습을 하라고 해야 할 것 같네요.”

건물 안에서 계속 나오고 있는 물건들에 세데스가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보안국에 급히 메시지를 띄웠다. 이곳 상황을 미처 알지 못했던 보안국 특수부대는 나름 적에게 들키지 않고 기습하려 먼 거리에서 육로로 접근하고 있는 중이었다.

“진짜 이러다가…….”

이 말을 중얼거리던 세데스의 어깨가 들썩했다. 건물 안에서 병사들 몇이 부서진 유리관을 들고 나오는 중이었다. 그 안에 누워있는 건 분명 어머니 오르테의 시신이었다.

“엄마?”

세데스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오르테의 시신을 든 병사들도 앞서 짐을 옮기던 사람들처럼 강이 있는 언덕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초조해진 세데스가 코리온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우리 어머니라고요. 지금 놓치면 영영 못 찾을지 몰라요. 어디 실리는지만 보고 올게요.”

코리온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자신의 아들을 구하자고 어머니 시신을 되찾고 싶어 하는 딸을 묶어놓을 수는 없었다. 황제의 명이 어떻건, 설사 자신이 위험에 처하거나 목표를 못 이룬다 해도 도리에 어긋난 짓을 남에게 강요하는 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자식으로의 도리가 이끄는 대로 하게. 내 여기 가만히 있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세데스는 몸에 재빨리 위장포를 두르며 가디언들에게 뒤를 따르라고 손짓했다.

“보안국 특수부대가 오면 제가 밑에서 작전을 이끌겠습니다. 여긴 안전한 것 같으니까 제발 꼼짝 말고 계세요. 아셨죠?”

코리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데스는 그를 절벽 위 외진 곳에 놓아둔 채 가디언들을 데리고 강가로 서둘러 내려갔다.

“후우.”

혼자 남은 코리온은 밑의 건물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 안에 아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당장이라도 뛰쳐들어가고 싶었지만 그 혼자의 능력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수도원의 퇴각을 지휘하던 쿠베는 피가 바싹바싹 마를 지경이었다. 대신관이 정해 준 시한은 지났고, 옮겨야 할 짐들도 언덕 아래 강에 대 놓은 배에 거의 옮긴 상태였지만 도망쳐버린 꼬마 때문에 아직 출발을 못 하고 있었다. 게다가 남쪽 숲의 정찰대에서는 무장한 자들을 태운 정체불명의 셔틀을 보았다는 보고까지 들어와 그의 속을 태워놓고 있었다.

“대장, 정찰대가 보았다는 셔틀의 스케치가 들어왔습니다.”

쿠베는 휘하의 정보장교가 가져온 쪽지를 빼앗듯이 받아들었다. 쪽지에 그려진 그림을 본 쿠베의 표정이 파랗게 얼어붙었다.

“이게 뭐야? 불릿? 그 멍청이들이 봤다는 게 불릿이라고?”

장교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찰대 놈들이 불릿을 본 일이 없어서 그냥 ‘이상한 셔틀’이라고만 보고했던 것 같습니다. 황제에게 도둑맞은 불릿이 왜 여기 나타났을까요?”

“황제가 자식을 구하러 토벌대를 이끌고 곧 여기에 온다는 뜻일지도 모르지.”

수도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쿠베는 지상으로 뚫려 있는 폐광 입구를 짜증스레 노려보았다.

“조짐이 심상치 않다. 다 찬 배 한 척은 일단 출발시키고 나머지도 여차하면 내보내.”

“꼬마는 포기하시려고요?”

“위대한 현신께서 필요하면 그냥 없애도 된다고 하셨다. 그리고 물러날 땐 물러나더라도 조용히 떠나 줄 수는 없지 않냐고?”

쿠베는 주머니에서 폐광의 오래된 도면을 꺼내들었다. 단면도를 유심히 살피던 쿠베가 입가에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토벌대든 황제든 그 놈들 탄광에 기어들면 매운맛 좀 보여줘야지.”

코리온은 여전히 멀찍이에서 쿠베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쿠베는 등에 이상한 통을 짊어진 20여명의 병사들을 불러들여서는 무어라 이것저것 지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부터 갑자기 분주하진 저들의 분위기로 보아 무언가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설마 불릿을 본 건 아니겠지?’

코리온은 망원경을 최대한 바싹 당겨 보았다. 가까이 있다면 쿠베의 입을 읽어 상황을 파악하겠지만 워낙 많이 확대를 했다보니 화상이 흐려져 일반인 수준인 그의 눈으로는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장황하게 떠드는 중에 섞인 한 단어만은 마치 대못을 박듯 그의 가슴에 쿵 하고 박혔다.

“주페 태자.”

코리온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마도 아들과 관련해 무언가 명령을 내리는 듯했다.

쿠베에게 지시를 받은 병사들은 코리온이 있는 절벽 밑으로 줄을 맞춰 달려왔다. 놀란 코리온이 얼른 몸을 감췄지만 다행히 병사들은 그가 있는 절벽 위가 아니고 절벽 밑, 폐광 입구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온통 주페 생각에 사로잡힌 코리온은 절대 움직이지 말라는 세데스의 주의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병사들을 더 잘 지켜볼 수 있는 바위 위로 살금살금 기어서 움직였다. 병사들을 가까이서 보니 손에는 쇠사슬과 그물이 들려 있었고 그들이 멘 통은 농약이나 살충제를 뿌리는 기계처럼 보였다.

‘혹시 저기 있는 게 아닐까?’

코리온이 시계를 보며 초조함에 떨었다. 이상하게도 세데스가 말했던 건물 지하가 아니고 저 탄광 안쪽에서 계속 아들의 느낌이 전해졌다. 지금이라도 밖으로 뛰어나가 저 안에 들어가면 아들을 안아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대체 시간이…….”

코리온은 벌써 몇 번째 시계를 또 보았다. 보안국 특수부대가 도착할 시간은 그에게는 너무도 버티기 힘들었다. 그는 탄광 안으로 뛰어들라는 본능을 애써 억누르며 병사들을 계속 살폈다.

“음?”

코리온은 병사들이 방독마스크를 쓰고 있는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서로의 장비를 확인한 병사들은 등에 멘 통에 웬 약품 같은 것을 부어넣었다. 통에 쓰인 글씨는 읽을 수 없지만, 저들이 무언가 유독물질을 탄광 안에 넣으려 한다는 건 분명했다.

그때, 제복 차림의 한 명이 다시 달려오는 모습에 코리온이 몸을 움츠렸다. 갑주가 아닌 단정한 정장 제복 차림에 간단한 석궁으로 무장한 것을 보아 경비부대가 아닌 정보장교 같았다.

“지하 3층 위엔 없어! 더 밑에 숨은 것 같으니까 그 아래로 뿌려! 사무실 쪽 팀이 지하 4, 5층은 작업 시작했으니 너흰 6층하고 7층만 뿌리면 돼”

“에이, 빌어먹을 꼬마놈 하나 때문에 이게 뭐야.”

경비부대 초급장교로 보이는 한 여자가 병사들을 둘러보며 불평을 내뱉었다.

“둘이서 한 팀으로 갱도 하나씩 맡아 뿌린다. 앞도 못 보고 재채기를 할 테니까 숨어있어도 바로 알 수 있어. 일단 발견하면 위치 보고하고 그물로 붙잡은 후에 지원을 기다려. 쬐끄매도 기운이 센 놈이라니까 얕보고 접근하지 말고. 알았지?”

지시사항을 전달한 장교는 녹이 잔뜩 슬어있는 폐광의 자물쇠를 열고는 문을 당겨 열었다. 철문은 정말로 오랜만에 열리는 듯 귀를 찢을 것 같은 요란스런 마찰음을 내며 안쪽의 시커먼 입을 드러냈다.

“아우, 기분 더럽게 나쁘네.”

장교가 랜턴으로 앞을 밝히자 수백 년간 버려져 있던 폐광의 어둡고 음산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눠준 도면 잃어버리지 말고, 발판 같은 것 함부로 밟지 마. 워낙 오래되어서 다 삭았을지도 모르니까. 깊은 곳엔 메탄가스가 있을지 모르니 나눠준 검측기 확인하고, 멍청하게 불장난이라도 했다가는 죄다 통구이 될 줄 알아. 알았냐?”

장교는 줄을 지어 들어서는 부하들에게 이런저런 잔소리에 가까운 주의사항을 계속 떠들어댔다. 하지만 병사들의 얼굴에 뒤집어쓴 방독면 때문에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코리온은 바위 뒤에 잔뜩 움츠린 채 할룩스로 보안국에 급히 상황을 알렸다.

- 주페가 감옥에서 도망쳐 탄광 지하에서 쫓기고 있는 것 같다. 저들이 탄광에 독가스를 넣어 잡으려는 듯 하니 제발 서둘러 움직여라. -

코리온은 평소 거의 써 본 일이 없던 ‘제발’이라는 단어까지 넣어 긴급하게 메시지를 보내고는 다시 그들의 모습을 확인했다. 하지만 독가스를 짊어진 적 경비병들이 아들이 있는 곳에 들어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코리온의 절망감도 이제 극에 다다라 있었다.

그는 평상시에 가지고 다니던 유일한 무기인 작은 칼을 꺼냈다. 30여년 전, 즉위식 직후 황제가 이름을 함께 새겨 직접 하사한 단검이었다. 이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주페…….”

단검에 새겨진 황제의 이름을 노려보던 그는 할룩스를 끄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싸움도, 전법도 모르는 그가 믿을 건 하나 뿐이었다. 시간에 쫓기고 혼자 남은 그의 머릿속엔 얼마 전 비슷한 상황에서 수나가 시도했던―하지만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마지막 방법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부하들을 먼저 들여보내고 정보장교와 뒤에 남은 여자 경비장교는 손에 든 도면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할룩스로는 앞서 들어간 20여 병사들이 불안감을 씻기 위해 쏟아내는 이런저런 잡담, 길을 못 찾겠다는 하소연이 쉴 새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참, 여기 도면엔 12층까지 있는데 우리가 6, 7층 작업하면 8층 아래는 어쩔 거죠?”

“거긴 지하수가 차서 완전히 잠겼어. 지하수면은 강 수면보다 높아서 강보다 계속 물이 나오거든. 탄광 돌아갈 때야 배수펌프 돌렸겠지만 이젠 옛날 얘기니까. 8층까지는 분명히 잠겼는데 7층은 어떨지 모르겠네.”

“맙소사, 그런 데로 저희 애들을 넣으셨단 말입니까?”

“저어, 이보시오.”

정보장교와 투닥거리던 경비장교는 옆에서 들려오는 곱고 다정한 남자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그곳엔 생전 처음 보는 웬 미남자가 무기 하나 없이 태연히 서 있었다. 남자의 큰 키와 가슴까지 늘어진 아름다운 장발머리에 장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디 소속이십니까? 일반직원은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남자의 미모와 화사한 눈웃음에 순간 당황한 여자 장교는 상대를 의심할 생각도 못한 채 그저 자신이 모르는 이곳 사무직원이라고 생각해 버렸다. 그래서인지 험악한 명령조 지시가 차마 입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빨리 배로 내려가세요. 여긴 곧 소개될 예정이니…….”

장교는 자신을 응시하는 아름다운 남자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짙은 갈색 눈동자는 마치 사람을 통째로 빨아들이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때, 옆에 있던 정보장교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석궁을 빼들었다.

“맙소사, 이놈 ……제길! 눈 보지 마!”

정보장교가 코리온을 멍하니 보고 있던 여자 장교를 힘껏 떠밀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코리온과 눈을 맞춘 채 멍하니 서 있던 장교는 대뜸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는 자신을 구해주려는 동료의 목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강가에 정박해 있는 교단의 배를 지켜보며 바위 구멍에 숨어 있던 세데스는 배 밑에서 머리를 드러낸 부하 가디언에게 잘 했다며 엄지손가락을 번쩍 들어보였다. 그 가디언은 배 위 경비병의 눈을 피해 능숙한 몸놀림으로 잠수를 해 세데스가 있는 구멍까지 소리 없이 되돌아왔다.

“어우 추워.”

물에서 나온 가디언이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어른 키 정도 지름의 이 구멍은 한때 탄광의 배기구였지만 지금은 강물에 거의 꼭대기까지 잠겨 있었다. 덕분에 일행 셋 다 명치까지 잠기는 차가운 물 속에서 덜덜 떨고 있는 중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가디언이 떨리는 몸을 연신 비비며 입을 열었다.

“배 밑바닥에 추적장치 2개씩 부착했습니다. 이젠 달아나도 우리 손아귀 안입니다.”

그때, 세데스의 할룩스로 코리온이 보낸 짧은 문장이 들어왔다.

- 주페가 감옥에서 도망쳐 탄광 지하에서 쫓기고 있는 것 같다. 저들이 탄광에 독가스를 넣어 잡으려는 듯 하니 제발 서둘러 움직여라. -

“허어, 역시 똘똘한 꼬마였네. 그래서 아직도 못 출발하고 저러고 있구먼. 이번에 구해내면 과자라도 좀 사줄까봐?”

세데스는 저들을 출발 못 하게 잡아 준 주페에게 내심 감사했지만 ‘독가스’라는 말이 영 맘에 걸렸다. 그는 숨어있는 배기구 안쪽을 돌아보았다. 배기구는 들어갈수록 기울어서 몇 발짝 안쪽부터는 완전히 물에 푹 잠겨 있으니 사실상 막힌 길이었다.

“가만, 여기도 탄광 지하 9층에 연결됐다지? 여기라도 열렸으면 들어가 봤을 텐데.”

세데스가 품에서 탄광 도면 사본을 꺼내어 얼른 확인했다.

“메탄가스를 빼내는 구멍이라 원래는 지상으로 굴뚝이 있었나봐. 그런데 오래되어 없어지면서 여기로 물이 들어갔을 테니 9층 아래는 홀랑 다 잠겼겠군.”

“다행이네요. 안에서 독가스 나올 걱정은 없겠네요.”

“바보야, 지금 우리가 문제가 아니잖아.”

시커멓게 물로 찬 폐광 안쪽에서 줄곧 시선을 떼지 못하던 세데스는 보안국에서 들어온 ‘전체 통신’에 움찔했다.

- 작전 변경, 육로기습 포기하고 20분 후 총 공중 기습한다. 전원 셔틀에 탑승하라. ‘특별한 분’께서 몸소 지휘하실 것이다. -

“내 제안이 받아들여진 거야? 가만? 특별한 분이라니?”

세데스가 화들짝 놀랐다. ‘특별한 분께서 지휘하신다.’면 황제가 벌써 왔다는 의미가 분명했다. 세데스는 방금 물을 헤엄쳐 온 2등급 가디언에게 코리온이 있는 언덕 위를 가리켰다.

“난 여기서 배 떠나는지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넌 빨랑 돌아가서 그 서생님 지키고 있어. 혼자 버려놓고 내려온 거 그 양반이 알면 우릴 패 죽이려고 할지도 몰라.”

“옙.”

주인의 명령을 받은 가디언은 빽빽한 숲을 재빨리 가로질러 위쪽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디언이 올라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다급한 연락이 되돌아왔다.

“학장님이 안 보입니다.”

“안 보이다니?”

“모르겠습니다, 아까 그 자리에……이런, 맙소사.”

가디언의 신음소리와 함께 급히 어딘가로 몸을 피하는지 소음과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어떻게 된 거냐?”

“죄송합니다, 적 경비병들이 와서 자리를 급히 옮겼습니다. 학장님이 혼자 탄광에 들어가신 것 같습니다.”

“무어?”

“탄광 입구에 웬 목 잘린 시체가 있습니다. 적 경비병들이 방금 시체를 발견해서 지금 탄광 안으로 몰려 들어가고 있습니다. 40명 이상이고 적 가디언 쿠베가 직접 지휘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제길할.”

‘쿠베’라는 말에 세데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고 보니 ‘코리온을 통제할 수 없을 테니 절대 개입시키지 마라.’는 황제의 지시가 있었다는 것이 새삼 떠올랐다.

“멍청한 양반 같으니. 완전 헛똑똑이 아냐?”

세데스의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제 황제가 오면 뭐라 변명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떡할까요? 병력이 열세라 일단 보안국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인간, 진짜…….”

“쉿.”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세데스의 어깨를 옆에 있던 3등급 가디언이 덥석 짚으며 손으로 ‘누군가 접근한다.’는 신호를 보냈다. 세데스가 입을 꾹 다물며 가디언과 함께 배기구 벽에 납작 달라붙었다. 가디언의 손짓대로 누군가 물을 헤치며 이 배기구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 바이탈 사인이 가디언이나 헤네티 같습니다. -

가디언의 수화에 세데스의 가슴도 쿵쾅거렸다. 옆에 3등급의 우수한 가디언이 있지만 헤네티라면 동료에게 알리기 전에 죽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가디언은 검을 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시커먼 그림자가 구멍 옆에서 쓰윽 드러났다.

“오빠?”

살금살금 들어오던 자그만 그림자는 배기구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물이 깊어지자 밑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우, 웁!”

발밑이 푹 꺼지면서 놀란 이 어설픈 괴한은 바로 물을 먹고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엉?”

세데스는 이 자그만 침입자의 뒷덜미를 얼른 붙들어 물에서 끄집어냈다. 어른이라면 웬만해선 빠져죽을 깊이가 아니지만 이 서툰 꼬마 괴한에게는 사정이 달랐다.

“옹주 마마?”

세데스는 물에 빠진 생쥐가 되어 파닥거리는 꼬마를 보며 기겁을 했다. 분명 일행이 불릿에 두고 왔던 마리안이었다. 물에 빠져 입술이 새파래진 마리안은 익숙한 얼굴을 확인하고는 목을 덥석 끌어안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쉿, 쉿. 조용히 하세요.”

세데스는 자칫 소리가 날까 조심조심하며 꼬마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어떻게 여길 ……뭐 어떻게 된 겁니까?”

“셔틀에서 떨어졌는데 나쁜 어른들 쫓아와서 당숙 간 길 쫓아왔어요.”

“우리 뒤를 따라왔다고요?”

“아저씨 다리에 고약한 약냄새 나잖아요.”

마리안이 맞은편에 있는 3등급 가디언을 손으로 대뜸 가리켰다. 그의 손끝에 지레 놀란 가디언이 지은 죄도 없이 화들짝 놀라며 괜히 종아리를 만지작거렸다. 세데스와 함께 갔던 아라무트 정글에서 작은 악어에 물렸던 그 자리였다.

“아니, 냄새는 냄새고, 그 거리를요?”

세데스가 혀를 찼다. 정말로 아이의 옷은 군데 찢어져 말이 아니었고 뽀얀 얼굴도 덤불에 긁혀 자잘한 상처투성이였다. 세데스도 아이를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번엔 무서워 떨고 있는 이 소녀를 꼭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때, 탄광 입구 쪽에 가 있던 가디언에게서 다시 연락이 들어왔다.

“적이 입구를 봉쇄하고 있어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어쩌죠?”

“보안국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떡해. 헛똑똑이가 알아서 죽겠다고 들어간 걸 우리보고 어쩌라고.”

세데스는 시계를 보며 짜증을 냈다.

“오빠가 이 안에 있어요. 정말이에요.”

마리안이 세데스를 안은 채 물로 가득한 터널 안을 가리켰다.

“알아요, 우리도 안다고요. 곧 황상께서 오실 테니 기다려요. 이쪽은 물로 차서 못 들어가요.”

“오빠가 아파요. 정말이에요, 오빠 아픈 것 같아요.”

마리안이 계속 물 속을 가리키며 버둥대고 생떼를 썼지만 세데스는 아이가 못 움직이게 꽉 붙들고는 시계만 보았다. 곧 황제가 올 판국에 괜한 바보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주페가 아프다는 아이의 말이 한편으론 영 맘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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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편에 이어.....사고뭉치 황족들이 연타석으로 안타를 칩니다. ㅎㅎㅎ

얼떨결에 말려든 세데스만 죽을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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