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70 회: 파트11.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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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유리감방에 머물던 주페는 무언가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직감했다. 매일매일 그를 찾던 세데스도 남극성당 교복을 입고 찾아왔던 날 이후로 보이지 않았다. 차갑고 쌀쌀맞은 여자였지만 매일 찾아와 한 마디라도 건네주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고 찾아왔던 날, 말없이 껴안아주던 세데스의 품은 적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따뜻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없는 며칠간의 빈자리가 묘하게 허전했다.
거기에 오늘은 감방을 지키는 경비병의 표정도 어딘지 뒤숭숭해 보였다.
“식사.”
문이 빠끔히 열리더니 간수가 식판을 쓰윽 밀어넣고 사라져 버렸다. 주페는 힘없이 식판을 들고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딱딱하게 굳은 빵에 볶은 양배추와 콩, 뭘 넣고 끓였는지도 모를 붉으죽죽한 죽 약간이 전부였다. 세데스가 있는 동안 항상 식단에 있던 고기는 그가 오지 않으면서 함께 사라졌다.
주페는 외로움과 서러움을 삼키며 음식들을 억지로 입에 넣었지만 껄끄러워 목에서 제대로 넘어가지를 않았다. 결국 절반도 먹지 못한 채 숟가락을 놓고 말았다. 그때, 식판이 들어오는 작은 구멍 밑으로 낮은 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방금 배식을 한 간수가 뭐가 그리 급한지 구멍을 엉터리로 닫고 떠나 평소보다는 소리가 좀 더 컸다. 주페는 타고난 감각을 최대한 살려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 여자가 정말 돌아올지 모른대?”
“몰라. 어쨌든 더 이상 우리 편은 아닌 것 같으니 몸조심하는 게 장땡이지. 한 성깔 하던데 열 받으면 난리도 아닐걸.”
“황제가 남부 사방팔방에 보안국 놈들도 쫙 깔아놨다던데.”
간수들의 수다가 물건 옮기는 소음과 뒤섞여 들려왔다. 황제가 자신을 찾고 있다는 말에 주페의 눈가에도 눈물이 핑 돌았다.
“엄마…….”
‘친엄마’ 아메스 황후는 여동생 크낙스만 예뻐했을 뿐 두 오빠들에겐 정을 주지 않았다. 엄마가 형을 힘들게 낳았다는 것을 안 후로는 그 상처를 보듬어주는 착한 아들이 되어보려 애썼지만 아메스는 여전히 아들들에게 냉랭했고, 주페에겐 ‘넌 황제를 너무 닮았어.’라는 이상한 핑계로 더 차가웠다.
그런 무심한 엄마 대신 그를 돌봐주고 키워준 건 황제와 대부 코리온이었다. 지금껏 억지로 생각하지 않으려 했었던 그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그때, 바깥에서 사람들이 끄응 하며 무언가 드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감방 앞을 지나갔다.
“둘째 칸에 남은 거 없나 확인해. 괜히 찌끄러기 남겨놨다가 밟혔다가는 끝이니까.”
“어디로 가는데?”
“허, 그런 걸 우리같은 쫄따꾸한테 알려주겠다.”
밖의 대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주페는 세데스가 더 이상은 이들 편이 아니라는 것과, 그 때문에 이들이 황급히 이사를 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꼬마는 마지막에 데려가는 거야?”
“쿠베 대장이 그러는데 교활한 놈이라 감방에 무슨 흔적 남길지 모르니까 집기까지 싹 치워놓으라던데.”
자신도 옮겨질 것이라는 말을 들은 주페는 맘이 급해졌다. 황제가 자신을 찾으려는 마당에 위치가 옮겨진다면 구출되는 건 더 어려워질 것 같았다. 주페는 절반도 못 먹고 치워놓았던 식판의 빵을 꾹 눌러 아랫도리 속옷 속에 쑤셔 넣었다. 지저분했지만 도망치지 못하게 거의 벌거벗겨 놓았다보니 달리 숨길 곳이 없었다.
그때, 감방 앞을 또 누군가가 지나가는 기척에 그는 얼른 딴청을 피우며 방 안을 괜히 콩콩거리며 뛰어다녔다. 밖을 오가며 안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테니 함부로 위험한 짓을 할 수가 없었다. 감방 안의 물건을 내어가는지 물건 끌리는 소리와 이런저런 고함이 한바탕 감방 안을 어지럽히더니 얼마 후 도로 조용해졌다.
사람들이 멀어지자 주페는 다시 감방 안을 혼자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아직 어리고 몸의 열기가 많아 콧잔등에 땀방울이 조금씩 배어나왔다.
잠시 후, 이번엔 바닥을 딱딱 끊어 디디는 군인 특유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를 직감한 주페는 식판의 볶은 양배추를 주물러 손바닥에 기름을 잔뜩 묻히고는 유리문을 휙 쳐다보았다. 예상대로 문이 열리더니 차가운 표정의 쿠베가 성큼 들어섰다.
“나와.”
“어딜 가는 거냐?”
“알아서 뭐 하게, 이 꼬맹이야.”
쿠베가 주페의 양 손에 수갑을 채우고는 팔뚝을 잡아 휙 끌어냈다.
유리감방에서 끌려나온 주페는 깜깜한 회전계단으로 들어섰다. 이곳에 잡혀올 때 이미 한 번 지나왔을 길이지만 그의 눈엔 낯설었다. 그때는 이들이 머리에 해 놓은 정체 모를 수술 때문에 정신이 혼미해 제대로 주변을 둘러볼 정신이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어차피 날 죽이진 못할 거야.’
계단은 불도 없이 깜깜했다. 주페는 X의 적외선 시야로 계단을 디디려 했지만 신경질적으로 당기는 쿠베의 힘에 계단에 몇 번이나 나뒹굴어야 했다. 거의 알몸으로 돌바닥에 계속 부딪치다보니 몸 곳곳에 자잘한 상처가 났다.
“천천히 좀 가지 못할까.”
주페가 화를 냈지만 쿠베는 들은 척도 않았다. 세데스의 배신으로 부아가 잔뜩 난 쿠베는 그가 넘어질 때마다 땀이 맺힌 꼬마의 팔뚝을 멍이 날 정도로 세게 움켜쥐고는 거칠게 잡아당겨 일부러 더 넘어뜨렸다.
“쓸모 있는 포로만 아니면 네놈을 이미 삶아먹었어.”
쿠베가 넘어진 주페의 귀에 대고 무섭게 속삭였다.
계단 꼭대기까지 올라온 주페의 앞에는 사방으로 미로처럼 난 좁은 복도가 보였다. 복도 양옆으로 있는 크고작은 사무실들도 이사 준비로 정신들이 없는지 사방에 짐을 나르는 사람들과 쓰레기들, 목적지를 외치는 분주한 고함으로 시끄러웠다.
“개판 오 분 전이네.”
막 짜증을 내던 쿠베는 안쪽에서 벌어지는 웬 소란에 고개를 휙 돌렸다. 유리관을 옮기고 있던 직원들이 실수로 관을 떨어뜨려 깨졌다며 옥신각신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에이씨, 저 새끼들 진짜.”
깨어진 관 안에서 세데스의 엄마 오르테 부인의 시체를 본 주페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쿠베가 주페를 경비병들에게 휙 떠밀었다.
“이 꼬마는 너희가 끌고나가서 2번 배에 태워.”
쿠베는 주페를 놓아둔 채 시체를 수습하러 서둘러 달려갔다. 세데스의 목줄인 저 시체도 주페 못지않게 중요했다.
“빨리 따라오십시오.”
주페를 떠안은 경비병 둘이 수갑을 찬 주페를 거칠게 잡아끌어갔다. 주페는 오르테 부인의 시체에서 마지못해 시선을 끊고 경비병들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매일 감방을 찾던 세데스의 눈가에 왜 항상 눈물자국이 있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좀 비켜!”
주페의 양팔을 하나씩 붙든 경비병들은 한두 명이 어깨를 부딪치고서야 겨우 지나갈 수 있음직한 좁은 복도를 거칠게 헤치며 길을 내고 나아갔다.
씩씩거리며 끌려가던 주페는 벽의 사무실에 붙어 있는 이런저런 서류들을 최대한 기억 속에 모두 집어넣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이 이곳에 끌려와 당한 치욕에 대한 앙갚음을 할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때, 그의 눈에 철수작업을 지휘하던 한 간부의 손에 들린 평면도가 들어왔다. 3개의 복도가 일렬로 나 있고 그 사이를 거미줄처럼 연결하는 모양새였다. 하지만 아직 주페는 이곳이 지하인지, 지상인지, 지상이라면 몇 층인지도 알지 못했다. 어쨌든 그는 도면도 얼른 머릿속에 담았다.
“뭘 봐!”
경비병이 주페를 다시 거칠게 잡아끌자 앞으로 중심을 잃은 주페가 다시 바닥에 나뒹굴었다. 주페는 버둥거리고 일어나며 손바닥에 발라놓았던 기름을 벗은 팔뚝과 어깨에 쓰윽 발랐다.
넘어졌던 주페가 막 일어선 그때, 교차하는 다른 복도에서 큰 캐비넷을 옮기는 4명의 사람들이 불쑥 나타나 길을 막아섰다. 주페를 데리고 가던 2명의 경비병들도 캐비넷에 가려 잠시 멈췄다.
“놔!”
주페는 경비병이 멈칫거리며 한눈을 판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그들의 손을 뿌리쳤다.
“엇!”
양쪽의 경비병이 주페의 팔뚝을 힘 주어 잡으려 했지만 온몸에 번진 땀과 기름이 문제였다. 소년은 경비병의 손아귀를 미끄러져 쏙 빠져나가 캐비넷 밑 틈새로 몸을 날렸다.
“이 꼬마 놈이!”
오른쪽 경비병이 주페의 손목을 온 힘을 다해 움켜쥐었지만 캐비넷을 옮기던 일꾼들이 놀라 바닥에 쿵 떨어뜨리면서 팔뚝이 그 밑에 깔리고 말았다.
“우악!”
팔을 끼어버린 경비병이 비명을 질렀다. 캐비넷 밑에 깔릴 뻔했던 주페는 어깨로 묵직한 가구를 힘껏 밀어버리고는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저놈! 저 꼬마 잡아!”
주페를 놓친 경비병이 고함을 지르며 캐비넷을 뛰어넘어 뒤를 쫓아오기 시작했고 팔이 깔린 경비병은 고래고래 소리만 질러댔다. 주페는 벌거숭이 소년의 모습에 어리둥절해진 어른들 사이를 번개처럼 빠져나가 계속 복도를 달렸다.
“이놈?”
직원 하나가 도망치는 주페의 어깨를 붙잡았지만 기름과 땀에 죽 미끄러지고 말았다. 주페는 어른들이 어어하는 새 좁은 복도에서 작은 체구로 틈새를 교묘하게 빠져나가 복도 거의 끄트머리까지 도착해서 조금 전 평면도에서 보았던 출구 쪽으로 돌아섰다.
“저기! 저놈 잡아!”
왼쪽을 돌아본 주페는 경비병들의 고함을 듣고 달려오고 있는 쿠베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주출입문는 이미 경비병들에 막혀 있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반대편 복도도 만만치는 않았다. 복도에는 밖으로 내가려던 사무용책상과 의자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주페는 수갑에 묶인 손으로 책상 모퉁이를 짚고 가구 더미를 다람쥐처럼 후다닥 뛰어넘었다. 방금 보았던 평면도에는 외부로 이어진 창문이 분명 있었다. 그는 지나 온 문의 개수를 세어가며 복도에 쌓인 이삿짐을 뛰어넘었다.
“여기! 4번 복도!”
두셋의 직원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고함을 지른 순간, 주페는 왼쪽으로 난 문을 힘껏 박차고 뛰어들었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고약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우읍.”
문을 잠그고 돌아선 주페는 놀라 주저앉고 말았다. 방 천장에는 누더기가 된 황실군 또는 보안국 제복 차림의 시체 몇 구가 고깃덩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미이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군데군데 찢기고 훼손된 시체는 지독한 고문 끝에 죽은 듯 보였다.
“보지 마, 보지 말자.”
주페는 매달린 시체들의 발밑을 엉금엉금 기어 이 시체창고의 제일 안쪽으로 들어갔다. 방금 본 도면대로라면 이 방의 반대편에 창문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신선한 공기 대신 흙냄새 섞인 차고 습한 공기가 오는 것이 어딘지 이상했다.
“이런.”
창고 끝에 다다른 주페가 움찔했다. 그곳에 있는 건 밖으로 난 창문이 아니었다. 그곳엔 막다른 블록벽과 어른 키 정도 높이에 작은 환풍용 팬이 있을 뿐이었다.
그때, 밖에서 직원들의 거친 고함이 들려왔다.
“문 열어! 빨리 뜯어내!”
주페가 화들짝 놀라 발을 동동 굴렀다.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안 돼, 또 잡힐 수는 없어.”
주페는 바닥에 있던 고기 꿰는 갈고리를 집어들고 벽을 기어올라 환풍구를 뜯기 시작했다. 블록벽은 비교적 최근에 세워진 듯했고, 환풍구 창살 너머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컴컴한 지하공간이 보였다. 지하 일부를 이렇게 블록벽으로 막아 개조해 사무실로 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엄마, 엄마, 제발 살려줘요.”
주페는 갈고리를 환풍기 틈새에 끼워넣고 온 힘을 다해 비틀었다. 뒤에서는 직원들이 쾅쾅거리며 문을 무언가로 내려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페는 눈이 빨개지도록 온 힘을 다해 갈고리를 쥔 손을 잡아당겼다.
“아쿠!”
환풍기가 나사와 함께 떨어져 나오면서 주페도 벽에서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리고 뒤에서는 문이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으엑!”
주페는 갈고리를 내던지고 환풍 팬이 빠진 구멍에 작은 몸을 무작정 쑤셔 넣었다. 머리는 빠져나왔고 한쪽 어깨가 통과했지만 반대편 어깨가 걸려 잘 나오지 않았다. 뒤에서는 그를 쫓아온 직원들이 매달린 시체를 헤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작은 구멍에 낀 주페는 뒤쪽의 발목을 누군가 덥석 잡을 것 같은 공포에 마구 몸부림을 쳤다.
“아, 아악!”
발목에 무언가 닿은 순간, 환풍구에 낀 주페가 지레 놀라 미친 듯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처음 주페의 발목을 잡았던 직원은 그의 거센 발길질에 얼굴을 차이고 뒤로 벌렁 쓰러졌다.
“놓치지 마!”
뒤에서 들려온 건 분명 쿠베의 고함이었다. 쿠베에게 잡히면 끝장이었다. 주페는 살이 긁히고 피가 나는 것도 아랑곳없이 온 힘을 다해 구멍 밖으로 몸을 빼냈다. 때맞춰 누군가의 손끝이 다시 그의 발목을 스쳤지만 거의 알몸에 기름까지 미리 발랐던 주페의 몸이 더 빨랐다. 반대편 어깨가 쑥 빠지면서 주페의 작은 몸은 좁은 환풍구를 쏙 빠져나가 반대편 바닥에 쿵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으읍!”
바닥에 떨어진 주페가 돌에 긁히며 비명을 질렀다. 조명 하나 없이 컴컴했지만 다행히 적외선 시야가 조금씩 앞을 밝혀주기 시작했다.
“대체 뭐 하는 곳이야.”
주페는 얼른 좌우를 둘러보았다. 좁은 굴이 양쪽으로 나 있고, 밑에는 레일이 깔렸던 자리가 있는 것을 보아 폐광 같았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망치, 곡괭이 같은 공구들도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찬 기운이 뼛속까지 파고들었지만 어쨌든 그는 수십 일만에 처음 자유의 몸이었다.
그때, 뒤에서 무언가 장비로 블록벽을 쿵쿵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크.”
깊은 생각 따위는 할 여유도 없었다. 주페는 몸을 잔뜩 움츠린 채 아무 곳으로나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는 쿠베와 경비병들이 블록벽을 부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코리온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세데스의 음흉한 시선도 모른 채 비가 내리는 셔틀 문가에 걸터앉아 혼자 십현금을 켜고 있었다. 악보도 없이 몇 곡을 연주하고 난 코리온은 울림통에 이마를 기대며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비 내리는 숲을 아름답게 울리던 현악 곡조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그의 그런 모습을 넋 놓고 쳐다보던 세데스가 팔을 뻗어 니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봐, 저 양반 왜 저 궁상이야? 보기야 멋있는데 지금 우리 시간 없는 거 아니야?”
“생각이 잘 안 풀릴 때 저러신다던데요.”
니사의 말에 세데스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석이 나올 가능성이 높고, ‘악마의 산’이라는 이름과 어울릴 지형과 인접한 곳을 가려내고 보니 이제 20여 곳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거기서 막힌 후로 한 시간이 넘게 진전이 전혀 없었다.
“저분 겉보긴 저러셔도 알고 보면 굉장히 열정적인 로맨티스트시라니까요. 스피드광에 노래실력하고 술 블렌딩하시는 실력도…….”
니사의 귀엣말에 세데스가 슬쩍 눈을 흘겼다.
“가만, 자넨 사교 성직자라며? 저 양반하곤 상극인데 지금 보니 뭐 그리 아는 게 많아? 혹시…….”
세데스의 의심어린 시선이 니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발끈한 니사가 뭐라 대꾸하려는 순간, 함께 온 보안국 요원이 둘 사이에 쓱 끼어들었다.
“본부에서 연락입니다.”
요원과 잠시 귀엣말을 나눈 니사는 십현금에 기대어 잠시 머리를 비우고 있던 코리온에게 슬그머니 다가가 입을 열었다.
“슈발츠발트 남쪽 포구에서 어부들을 만났는데, 숲에 이상한 배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돈대요. 민간용 스코프에도 전혀 안 잡히고 굉장히 빨라서 밤중에 충돌할 뻔했다나봐요. 아무래도 놈들이 배를 이용해서 숲속을 움직이고 있나 봐요. 그러니 우리 셔틀 정찰에도 안 걸렸죠.”
“배?”
갑자기 눈이 커진 코리온이 바깥의 빗줄기를 우두커니 내다보았다. 그렇게 움직임이 없던 그는 문득 안쪽으로 고개를 돌려 도면을 다시 쳐다보았다.
“……멍청한 서생 같으니. 문장에 빠져서 제일 중요한 걸 생각 안 했구나.”
코리온은 십현금을 내려놓고는 성큼성큼 들어와 복잡한 도면을 옆으로 휙 치워버렸다.
“그 수도원이 왜 그곳에 세워졌는가?”
“800년 전의 내용이라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니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원래 그 자리에 꽤 큰 탄광이 있었을 거예요. 처음엔 광부들을 위해 세운 예배당이었는데 50년쯤 캐내고 나서 경제성도 떨어지고 큰 폭발사고까지 나서 백 명이 넘게 죽었나봐요. 그 일로 폐광이 되고 나서 남아있던 예배당을 증축해 신입 성직자를 가르치는 수도원으로 만든 것 같아요.”
“그럼 탄광이 있을만한 지형으로 찾아야겠군.”
니사가 가방 안을 뒤적거려 오래된 탄광 도면을 내밀었다.
“그건 이미 저희도 생각했어요. 어차피 석탄 광상 가능성이 높은 곳을 필터링해 뽑은 거였으니까 별 소용없어요.”
“당시 상황도 생각했나?”
“예에?”
“개척 초기엔 기계와 강철이라고는 선조들이 타고 온 이주 수송선뿐이었다. 그들이 새로 만들 수 있는 기계래야 고작 마차와 나무배, 나무로 만든 도르래 정도였지. 수송선을 뜯어 첫 대형 제철소를 짓느라 51년이나 걸렸다는 걸 아는가?”
“그, 그런데요?”
몇 시간 전까지도 세데스를 글만 읊는 무식쟁이로 몰아붙였던 니사는 이번엔 거꾸로 궁지에 몰려 말까지 더듬거렸다.
“당시 광산은 땅을 깊게 팔 기술이나 장비가 없어 접근이 쉬운 노천광이나 얕은 광맥만 팠다는 걸 고려했느냐는 말이다. 당연히 육로 수송도 어려우니 물길이 가까운 곳이었겠지. 네 방금 전에도 배가 있다지 않았느냐. 그럼 그때도 지금도 인근에 강이 있는 곳이어야 하지.”
코리온이 니사가 내민 광산 도면을 재차 확인했다.
“지상에는 노천광이 있고 지하로는 12층 정도인 얕은 갱도만 있구나. 노천광이었다면 지형이 변한 흔적도 남았을 테지.”
코리온은 현재의 지도 위에 등고선을 따라 과거에 물이 찼던 곳을 분필로 죽 그려나갔다.
“3군데로군.”
코리온이 지도를 번쩍 쳐들고 벽에 붙이고는 세 군데에 붉은 분필로 표시를 했다. 멀지 않은 남쪽의 숲지대, 그리고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가까운 남동쪽 구릉, 마지막으로 이곳에서 제일 먼 북쪽의 험악한 고지대였다.
“셋이 확률이 비슷비슷하다면 가기 쉬운 곳부터 확인하는 게 순서겠네요.”
니사가 구릉에 1번을, 그리고 숲에 2번을, 고지대에 3번의 숫자를 써 놓았다.
“주변엔 경비병을 깔아놨을 테니 이 셔틀로 바로는 못 갑니다. 적당히 떨어진 곳에 내려서 도보로 몰래 접근해 확인해야 할 겁니다. 저희가 1번을 확인하는 동안 대기 중인 다른 보안국 팀에 2번과 3번을 확인하라고 할 테니…….”
니사의 말을 들으며 지도를 멍하니 지켜보던 코리온은 갑자기 셔틀 밖으로 터벅터벅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늦은 오후 빗속에 우뚝 서서는 주변을 멍하니 둘러보았다.
“몸 상하십니다.”
니사가 우산을 들고 허둥지둥 달려 나가 코리온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둘의 키 차이가 워낙 크다보니 우산을 머리 위로 한껏 치켜든 니사만 쏟아지는 비를 고스란히 맞는 꼴이 되고 말았다.
“춥습니다. 옷도 얇게 입으셨는데…….”
니사가 목소리를 키웠어도 코리온은 마치 넋이 빠진 사람마냥 아무 말이 없었다. 니사는 용기를 내어 이 무서운 현신 혈통의 눈을 슬쩍 올려보았다. 그는 정말로 무언가에 집중하며 북쪽과 남쪽을 번갈아 노려보고 있었다.
“현신님?”
니사는 귀싸대기를 한 대 얻어맞는 것을 각오하고 조심스레 이 말을 꺼냈지만 놀랍게도 그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니사가 용기를 내어 다시 물었다.
“현신님? 듣고 계신가요?”
멍하니 서 있던 코리온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북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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