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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967화 (962/1,132)

< -- 967 회: 파트11.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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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데스와 니사 일행이 주페를 찾아 남부의 숲을 헤매는 동안, 황제령의 남극성당에서는 황제가 교단의 주의를 끌 중요한 만남을 준비하고 있었다.

북반구의 프라임 지역이 늦겨울인 이 시기, 남극 해안은 폭풍우 시즌을 보내고 있었다. 남극성당엔 1년 내내 찌는 더위도, 살을 에는 추위도 없었지만 폭풍우 시즌만은 화창한 늦여름 날씨와 춥고 고약한 폭풍우 사이를 오가는 두 얼굴을 수시로 바꾸곤 했다.

이 무렵 교문을 사실상 닫아버리고 생도들에게 1달이 넘는 긴 방학을 주는 것도 열흘이 멀다하고 찾아오는 폭풍우 때문이었다.

“옛날엔 폭풍우 시즌동안 종교재판소에서 사형을 집행할 수가 없어서 늦가을에 사형수 수백을 한 번에 처리하느라 골머리를 썩었답니다.”

이디나는 옆에서 수다를 떠는 야투 박사를 흘끔 흘겨보았다. 조용히 있고 싶다는 대신관의 눈짓을 모르는 건지,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건지, 그는 셔틀 창밖으로 보이는 해안가 폭풍우를 가리키며 계속 떠들어댔다.

“여기 폭풍우 경험은 못 해 보셨죠?”

야투 박사가 몰아치는 거센 비바람 사이로 보이는 남극성당 해안을 가리켰다.

“저 자리에 있던 처형장에 시체를 하루 이상은 걸어놔야 하는데, 폭풍우라도 치고 지나간 다음엔 시체가 사방팔방 둥둥 떠다녀서 완전히 공포물이었답니다. 가끔은 바다 건너 타르서스에서 발견되기도 했었고요.”

이디나는 심야의 해안을 몰아치는 폭풍우를 멍하니 보며 여전히 말이 없었다. 불릿이나 전용 승용셔틀 대신 일부러 콩알만한 고물셔틀을 타고 왔다보니 바람이 세어질 때마다 기체가 이리저리 심하게 흔들렸다.

“내 따라오지 말라 했더니만, 이제 만족하는가.”

이디나가 흔들리는 좌석에 꼭 매달려 있는 야투 박사에게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비서 쿠마르만으로도 신경쓰이는 판에 이 늙은이까지 부득불 합류해 이디나의 처신을 더 곤란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디나는 원로 신관들이 자신을 아직 ‘1회용 대신관’ 정도로 여기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황제와의 이번 만남에서 혹시 엉뚱한 말썽을 일으키지나 않을지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때, 고장 난 완충장치 덕분에 한바탕 멀미를 하고 온 쿠마르가 백짓장이 다 된 얼굴로 화장실에서 돌아와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다.

“한두 번도 아니고, 왜 우리가 일 좀 벌이려 하면 날씨가 도와주지를 않죠? 아후.”

“우리가 티시트리야 신한테 밉보여서 그래.”

언제나 유쾌한 야투 박사가 퍽이나 성직자다운 대답으로 쿠마르의 의문을 해결해 주었다. 좌석 몇 개 앞에 앉아있던 조종사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밤에는 태풍의 눈이 앞바다를 지나가서 날씨가 더 험악해답니다. 돌아가실 길이 걱정입니다.”

“그냥 장소를 다른 데로 하시지 왜 하필……우욱.”

쿠마르가 입을 쥐고 허겁지겁 다시 뒤쪽 화장실로 달려갔다.

“곧 수학원에 착륙합니다.”

조종사가 좌표를 확인하며 방향을 돌렸다.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남극성당의 핵심 시설인 수학원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넓은 사각의 잔디밭 광장을 중심으로 강의동인 단층 회랑이 빙 에워싸고 있었다. 회랑의 내륙 쪽에는 중앙도서관인 규장각이, 반대편 해안 방향엔 고위 유학자들의 처소인 태학전이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황제가 와 있어.”

어딘지 소름이 끼치는 대신관의 웃음에 야투 박사가 몸서리를 치며 물었다.

“황제가 이번에 주페 태자 송환을 요구할 게 뻔한데, 어떻게 거절하실 참입니까?”

“글쎄.”

이디나는 말꼬리를 흐리며 분명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태자를 송환받는 데 실패한 황제가 힘으로라도 아들을 찾겠다고 나설 때를 대비하는 게 현실적이겠지?”

야투 박사는 이디나가 이미 협상 실패를 염두에 두고 길을 나섰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황제와의 이번 만남은 자식들을 찾고 싶어 몸이 달은 아트위야와 살름 두 마구스들을 달래주기 위한 쇼에 불과한 듯 보였다.

셔틀은 남극성당 외곽의 기숙사와 학습당 위를 낮게 날아 태학전 옆을 스쳐 잔디밭 위에 천천히 내려섰다. 그때, 강한 바람 속에서 기체가 기우뚱 하며 크게 흔들리더니 부서질 듯 요란하게 철퍽 내려앉았다.

“아쿠!”

충격에 목을 삐끗한 늙은 야투 박사가 뒷목을 쥐고 끙끙거렸고 이디나도 놀란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강풍에 밀려난 셔틀은 주기장에서 한참 벗어나 보도블록과 광장 연못에 걸쳐 기우뚱하게 내려앉아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한쪽 엔진은 연못 분수대에 걸려 있었다.

화장실에서 달려온 쿠마르가 조종사에게 버럭 화를 냈다.

“이게 어찌된 거냐?”

“죄송합니다. 갑자기 강한 하강기류가 꽂혀서…… 좌측 엔진과 제너레이터가 상한 것 같습니다.”

“이 빌어먹을 놈! 위대한 현신께서 타고 계신데…….”

쿠마르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이디나가 짐을 챙기며 조종사에게 물었다.

“셔틀 다시 띄울 수 있느냐?”

“랜딩패드가 연못에 빠졌고…… 엔진도 손봐야 할 것 같습니다. 동력도 일부 나간 것 같고요. 방금 남극지사가 이 일대에 12시간동안 비행금지령을 내렸습니다.”

“수리는 언제까지 가능한데?”

“밤새 작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새 셔틀을 부르겠습니다만 날씨가 너무 험해서 바로 오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비행금지 풀리는 시간이나 별 차이 없을 것 같습니다.”

“대신관의 특명사자 꼴 한 번 불만하군. 황제가 우릴 퍽이나 대단하게 보겠어.”

이디나가 가방을 들고 벌떡 일어서며 끙끙대는 야투 박사에게 빈정거렸다.

“비도 쏟아져 뼈골 쑤실 텐데 괜히 노구에 골병들지 말고 이 안에 있으시오. 보아하니 오늘밤 여기서 지내야 할 것 같은데.”

이디나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문에 다가갔다. 동력이 꺼진 탓에 조종사가 수동으로 문을 여는 중이었다. 이디나가 셔틀을 엉터리로 착륙시킨 조종사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잘했다.”

셔틀 문이 열리자 바깥의 비바람이 안으로 확 밀려들어왔다. 쿠마르가 얼른 망토와 우산부터 씌워주려는 것을 이디나가 급히 손으로 막았다.

“난 죄 짓고 아버지에게 억류당한 죄수다. 상전 취급하지 말라니까, 이 멍청아.”

셔틀이 엉뚱한 곳에 착륙하면서 주기장에서 기다리던 황실 보안국 요원들이 쏟아지는 빗속에서 이곳으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중이었다. 하지만 기체가 어정쩡하게 기울어 있는 덕분에 문에서 발판을 내렸어도 지면에 닿지를 않았다. 보안국 요원들 선두에서 도착한 마르고 키 큰 여자가 문가에 선 이디나에게 손을 뻗었다.

“잡아 줄 테니 내려오시오.”

여자의 차림새와 손목에 끼워져 있는 은빛 팔찌에 이디나는 그의 정체를 바로 깨달았다. 비옷을 둘둘 두르고 있는 다른 요원들과는 달리 몸에 딱 붙는 롱코트에 기름으로 발라넘긴 짧고 단정한 머리칼 그대로 쏟아지는 비를 다 맞고 있었다.

“감사하지만 이 친구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네요, 사에나 쉐너 국장님.”

이디나가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헤네티 둘이 먼저 셔틀에서 뛰어내려 이디나를 밑에서 받아주었다. 이디나가 그제야 우산을 펼쳐들었지만 그 잠깐 새 나름 단정하게 차려입은 비단포와 머리까지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황상께선 먼저 와 계시오. 그분을 기다리게 한 건 예법에 어긋나나 날씨가 날씨니 이번엔 넘어가라 하셨소. 들어가는대로 그분의 자비에 감사드리시오.”

사에나가 다분히 감정 섞인 투로 쏘아붙였다. 이디나는 그제야 자신이 만나러 온 사람이 제국 황제라는 무게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이지요, 황상께서 사자가 이 꼴로 왔다고 화내지나 않으실지.”

이디나가 짐짓 바보 같은 웃음을 지으며 사에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디나의 이런 태도가 내심 맘에 들지 않은 쿠마르가 뚱한 얼굴로 뒤를 따랐다. 사에나를 앞세운 일행은 거친 비가 내리치는 텅 빈 심야의 광장을 가로질러 회랑 제일 안쪽으로 향했다.

“비가 차갑습니다, 아가씨.”

쿠마르가 절반 젖은 채 앞서가는 이디나에게 걱정스레 말했다. 워낙에 강골도 아닌데다가 뱃속에 태아를 품고 있는 대신관이 찬 빗속을 걷는 모습이 영 마뜩치 않게 보이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디나는 못 들은 척 계속 걸음을 옮겼다.

-성전 기념관-

지하로 내려가는 문 앞에 이런 석판이 붙어 있었다. 이디나와 그를 따라온 헤네티들은 일부러 못 본 척 시선도 주지 않고 바로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계단 가파르니 조심하시오.”

사에나의 경고처럼 계단은 좁고 불편했다. 이름만 거창하지 방문객들을 환영하는 곳은 아니었다. 게다가 내려갈수록 으슬으슬 살을 떨리게 하는 추위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비 때문에 습기가 짙어지면서 하얀 입김까지 났다.

수학원의 지하도 황실의 다른 많은 시설들처럼 먼저 이 자리에 있었던 교단의 아프라시아 관 지하실을 그대로 재활용한 곳이었다. 수백 개의 기둥과 칸막이벽 때문에 끝까지 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수학원 지하를 모두 차지할 만큼 어마어마한 넓이였다. 하지만 이전 같은 화려함은 간 데 없고 교단의 마지막 유물들, 옛 민병대 군복과 무기 등등이 별 성의 없이 난잡하게 전시된 창고로 전락해 있었다.

사에나는 조명도 꺼진 깜깜한 지하실을 랜턴 하나만 켜들고 계속 앞장서 나아갔다. 뒤따르던 쿠마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제네르 하크로딘 상장군께서 생도 시절에 여기 청소를 했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일당 공짜로 받아 가셨던 모양입니다.”

쓰레기장에 가까운 몰골에 심사가 뒤틀린 쿠마르가 결국 사에나에게 괜한 시비를 걸었다. 사에나가 문득 멈춰 서서는 그를 힐끔 돌아보았다.

“협상하는 동안 네가 청소하면서 입 닥치고 있으면 내 일당 그 두 배로 주마.”

“쿠마르.”

사에나에 이어 이디나까지 입 다물라며 험악한 눈길을 주자 쿠마르는 무안하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디나는 수백 년 세월의 때가 탄 기둥과 벽들 사이를 지나 조금씩 안쪽으로 들어갔다. 한참을 들어가니 [대신전 노획 물품] 이라는 표식과 함께 조금 전보다 훨씬 규모가 큰 석상이나 성물들이 차례로 모습을 나타냈다. 그 제일 안쪽에는 횃불 두 개와 함께 이디나와 쿠마르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

“이제 도착했는가.”

세 마리 용이 등판과 양 팔걸이를 이룬 석제 옥좌가 그곳에 놓여 있었고, 큼직한 은빛 늑대털을 두른 장신의 전사가 가슴을 쭉 펴고 앉아있었다.

“예상치 못한 날씨 때문에 늦은 것을 자비롭게 용서하소서.”

카렐에게 깊이 허리를 굽힌 이디나는 조심스레 시선을 들고 황제의 얼굴을 올려보았다. 난생 처음 가까이에서 마주한 황제로서의 그의 모습이었다. 용 문장의 백금 서클렛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긴 적갈색 머리칼이 어깨를 지나 은빛 늑대털 위로 늘어져 있었다. 못 본 사이 얼굴 중간을 가로지른 큰 흉터가 나 있었고 으슬으슬한 추위 때문인지, 혈색은 창백해 보였다.

“고작 며칠인데, 뵌지 몇 년은 된 것 같사옵니다. 폐하.”

이디나가 황제를 올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술집에서, 그리고 화물선에서 만났던 ‘아프라시아 중랑’과 지금의 황제는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원래 대신관 옥좌였던 큼직한 저 용의 석상은 웬만한 사람이 앉아서는 작고 초라해 보일 정도였지만 황제에게는 마치 딱 재어 맞춘 듯했다. 팔걸이에 기대어 세워진 긴 칼도 조부 야푸르의 것이 분명했다.

“그때보다 건강해 보이는군.”

황제가 이디나에게 자신의 발치를 가리켰다. 그의 발밑에서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푹신한 비단 방석과 팔걸이가 준비되어 있었다.

“흐음.”

쿠마르가 자존심이 상한 듯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그렇지만 황제가 적대 세력의 방문객에게 이렇게 가까운 거리를 허락한다는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영광이옵니다, 폐하.”

이디나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 황제의 발치에 있는 방석에 무릎을 꿇고 단정히 앉아 머리를 조아렸다. 순간 그의 코끝에 황제의 체취가, 그것도 살아있는 그의 숨결이 느껴져왔다. 그는 카렐의 숨소리가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폐하?”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황제도 옥좌에서 몸을 잔뜩 구부리고 바로 위에서 그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둘의 눈이 다시 딱 마주쳤다.

“지난번보다 살도 붙고 많이 예뻐진 것 같군.”

이디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만나는 여자마다 다 해 주는 일상적인 공치사일 것이라는 생각과, 그 반대의 기대가 또다시 가슴 속에서 부딪치고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왼손에 끼워져 있는 5개의 결혼반지가 영 눈에 거슬렸다. 게다가 오른손에도 황소 뿔 모양의 다이아몬드 반지와 페리도트 반지가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저것들을 모조리 빼 버리고 싶었다.

“오늘 하루 저 말고 몇 명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요?”

황제가 픽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일으켰다.

“명색이 제국 황제가 공치사인들 가벼이 하겠는가?”

카렐이 용 조각이 된 등받이에 몸을 깊이 묻으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그럼 슬슬 본론에 들어가지.”

“황상께서 데리고 계신 포로의 안전부터 확인하고 싶사옵니다.”

카렐의 손짓에 수장고 구석에서 키 큰 여자가 입마개가 씌워진 채 보안국 요원들의 손에 끌려나왔다. 쿠마르가 얼른 달려가 살름의 딸 하페즈를 가까이에서 확인하고는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명은요?”

“잘생긴 오드아이 청년 말인가? 그 친구는 짐이 발견했을 때 이미 숨이 끊겼던데.”

이디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보안국 요원들이 관 하나를 들고 와 그의 옆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시신을 확인한 쿠마르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후우.”

이디나는 겉으로는 침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 차라리 다행이라고 여겼다. 아들이 살아있다면 아트위야가 더 절박하게 주페를 내주라고 그를 괴롭힐 것이 뻔했다.

“이젠 짐의 조건을 말할 차례겠지?”

이디나는 ‘내 아들 주페를 내놓아라.’는 황제의 말을 예상하며 입술에 힘을 꽉 주었다. 하지만 그는 황제 역시 이번 협상을 ‘제국 반대편에서 벌어지고 있는 주페 구출작전을 은폐하기 위한 연극’으로 시작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짐이 원하는 건.”

카렐이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타리프의 일지다.”

생각지도 않았던 요구에 당황한 이디나의 얼굴이 붉어졌다.

“예에?”

“짐의 고조부 타리프 카파키 신관이 고향행성을 다녀오며 남긴 일지 말이다. 지난번 수송함에서 짐을 만났을 때 갖고 있던 것을 보았으니 없다고는 안할 줄로 알겠다.”

이디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황제의 요구는 절대 안 될 말이었다. 타리프의 이야기를 알려주는 건 고향행성의 인류 절멸처럼 지금의 제국을 이끌어가려는 자신들의 계획을 모조리 노출시키는 자살행위였다.

“아버지께선…….”

“다른 조건은 관심 없다.”

황제가 이디나의 다음 말을 딱 자르며 의자에 몸을 묻었다. 이디나는 황제가 주페 태자를 얻어내기 위해 일부러 더 어려운 조건부터 내걸고 흥정을 시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큰 뜻을 위해 아들을 포기해버린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황제는 엎드린 채 갈등하고 있는 이디나를 묵묵히 쳐다보았고 이디나도 계속 시간을 끌었다.

“아버지에겐 왜 조건을 알리지 않는가?”

이디나가 순간 뜨끔했다. 그는 자신이 사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다. 눈짓을 받은 쿠마르가 비로소 허겁지겁 밖으로 달려 나가자 카렐은 눈꼬리에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사에나와 함께 구석으로 향했다.

“이 여자 수상하지 않나? 죄인의 눈빛이 아닌데?”

“여전히 아버지의 신임을 받고 있는듯합니다. 폐하의 동정심을 사려 죄인인 것처럼 거짓말을 했던 것 아닐까요.”

카렐이 이디나를 향해 능청맞게 눈웃음을 한 번 지었다. 이디나는 황제가 보안국장과 귀엣말을 나누는 광경을 보면서도 겁을 먹거나 표정이 흔들리는 전혀 기색이 없었다.

“그쪽 실세라면 더 좋지. 의도야 어쨌든 안면을 터 둔다면.”

잠시 후, 쿠마르가 돌아와 이디나에게 쪽지 하나를 건넸다. 물론 백지였지만 이디나는 짐짓 실망한 척 한숨을 푹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말씀하신 일지는 그날 추락하면서 잃어버려 소녀도 찾지를 못하였습니다. 대신 저희가 준비한 다른 것이…….”

“다른 건 필요 없다니까.”

옥좌로 돌아온 황제가 이번에도 단호한 말투로 이디나의 대답을 끊어버렸다.

이디나는 고개를 들고 다시 황제를 올려보았다. 황제도 실패를 예감한 듯 허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디나는 어쩌면 양쪽 모두 이번 협상을 성사시킬 맘이 애당초 없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폐하…….”

이디나가 말꼬리를 흐렸다. 협상이 꼬인 것과는 별개로 황제의 체취와 존재감은 계속 이디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있었다. 그저 느낌이지만, 황제 역시 자신을 보며 묘한 흥분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런 황제를 놔두고 황후는 왜 바람피울 생각을 했을까.’

이디나는 가슴 속에 품고 있는 황제의 세포를 떠올렸다. 이디나는 황제의 얼굴을 가로지른 큰 저 상처를 손으로 어루만져주고픈 충동을 느꼈다.

“저어.”

이디나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서 황제에게 성큼 다가서자 사에나와 주변의 보안국 요원들이 일제히 무기에 손을 가져갔다. 동시에 이디나를 따라온 헤네티들도 공격 자세를 잡았다.

“그만.”

카렐이 긴장한 보안국 요원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손짓했다. 이디나 역시도 따라온 헤네티들에게 같은 손짓을 보내는 중이었다. 대담하게 황제에게 다가간 이디나는 그의 귓가에 입을 바싹 대고 짧게 한 마디 건넸다.

“단둘이 이야기해야 뭐가 될 것 같습니다.”

카렐과 이디나가 서로의 숨결까지 느끼며 조용히 마주보았다.

카렐이 먼저 사에나에게 바깥을 가리켰고, 이디나도 쿠마르에게 나가라 손짓했다. 대신관을 감시할 양으로 따라온 쿠마르가 크게 당황했지만 그런 그를 사에나가 도끼눈을 뜨고 밖으로 몰아붙였다.

잠시 후, 컴컴한 수장고 안에는 이 둘만 남았다.

“속에 말을 숨기고 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은 카렐이 이디나에게 코끝이 닿을 듯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이디나도 엷게 웃으며 답했다.

“저도 두 마구스에게 면목은 있어야죠.”

“그래서?”

“일지는 못 드리지만 그에 못지않은 선물을 아버지 몰래 드릴 테니 제발 두 후계자들을 넘겨주세요.”

이디나는 비로소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카렐도 훨씬 온유해진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선물?”

“이 수장고보다 더 깊은 곳에 뭐가 있는지 알고 계시죠? 오르마즈 그 사람이 무너뜨렸다고 기록에 남아있는 곳 말이에요.”

카렐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디나는 그의 가빠진 숨결을 느끼며 목소리를 더 조심스럽게 낮추었다.

“제가 거기로 들어가는 길을 알려드리죠.”

“먼지구덩이 지하실 하나하고 소중한 포로를 바꾸자고? 누굴 바보로 아는가?”

“마하 대군도 자가면역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걸 알아요.”

이디나의 난데없는 일격에 카렐의 표정이 일순간 창백해졌다. 이디나가 그의 어깨에 살며시 얼굴을 기댔다.

“폐하의 강한 피 덕분에 10살 넘어까지 살아 버텼지만 일단 사춘기가 시작되면 날뛰는 면역체계를 더 이상 막기 힘들 거예요. 크낙스 공주가 급사한 것처럼 주페도, 마하도, 엘룬도, 곧 태어날 아기도 다 같은 길을 가겠죠. 일반인 엄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 모두요.”

당당하던 황제도 죽어가는 자식들 이야기에 위축된 지금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디나가 그의 뺨에 얼굴을 대며 말을 이었다.

“카이 장태자도 우리가 준 처방이 아니었다면 이미 황궁 뒷산에 묻혀있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남은 약으로는 두세 달 정도밖에 못 버틸 걸요. 아직 그 약을 카피 못 하셨죠? 약을 페로 대공이 쥐고 있는 걸로 아는데, 대공이 다른 비빈의 아이들에게 고작 두 달치 남은 손자의 약을 나눠줄까요?”

“그게 먼지구덩이 지하실과 무슨 관계지?”

이디나는 황제의 목젖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그 약의 주성분을 합성하는 미생물 종균이 보관된 게 거기니까요. 아프라시아 관이 함락될 때 미처 옮기지 못한 자료들을 거기 숨겼거든요.”

이디나가 카렐의 얼굴에 난 큰 상처와, 오똑한 코와, 반짝거리는 그레이오팔 눈가, 고운 턱선을 부드럽게 더듬어 보았다. 자식 이야기에 약해진 황제는 노골적인 손짓에도 차마 그에게 거칠게 나오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걸 조건으로 계산하고 장소를 여기로 택했나?”

카렐이 이디나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이디나는 그의 부리부리한 무지개빛 시선에도 전혀 기죽지 않고 살짝 눈웃음을 흘렸다.

“제가 왜 험악한 날씨를 무릅쓰고 여기로 왔겠어요.”

“10시에 맞춰 이 부근에 비행금지를 내려달라고 부탁했던 것도?”

“그래야 오늘밤 거길 보여드릴 시간을 벌 수 있을 테니까요. 어떤가요, 그곳과 두 후계자들을 교환하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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