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63화 (958/1,132)

< -- 963 회: 파트11.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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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외출이시라 그런지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슈라는 바에자의 병실을 막 나선 이디나에게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새 대신관에 오른 이후 내내 크테시폰 궁에만 묻혀 살던 이디나의 첫 외출은 바에자가 입원해 있는 황제령 타르서스의 교단 병원으로 문병을 오는 것이었다.

“오랜만에 햇빛이라는 걸 받아서 그래.”

평상복 차림의 이디나는 환한 창밖으로 보이는 사막 오아시스 도시의 활기찬 아침 풍경을 내다보며 엷게 웃었다. 낮에도 해가 거의 없는 바하칼리와 코윈의 추운 극지에서 30년의 삶의 대부분을 보낸 그에게 새파란 하늘과 눈부신 태양, 땀이 날 만큼 더운 날씨는 정말로 낯설었다.

새 황제의 등극 이후로도 타르서스는, 아니 정확히는 타르서스를 지배하는 호족들은 여전히 황실에 적대적이었다. 30년 전 제위 전쟁 도중 황제의 뒤통수를 치고 황도에 적군을 끌어들인 사건으로 호족들 상당수가 처형을 당하고 세력이 위축되기는 했지만 의식수준이 낮은 타르서스 서민들이 문제였다. 그들은 부패한 호족들에게서 자신들을 해방시키려는 ‘외지인’ 황실보다는 자신들을 착취하는 호족들 편을 들어 황제를 철저히 실망시켰다.

이디나가 그간 춥고 외진 북부 황무지를 떠돌던 크테시폰 궁을 황제의 코밑에 떡하니 옮겨 세우는 데도 타르서스의 수도 마잔다란의 호족들이 힘이 되어주었다. 그는 약간의 뇌물만으로 크테시폰 궁 메인 블록 수송선의 등록서류를 위조했고, 서류에도 없는 사막의 폐 화물선 적치장을 빌릴 수도 있었다. 그가 근거지를 황제령으로 옮긴 건 제후들만 흔들 게 아니라 황실을 직접 쳐야 한다는 평소 지론에도 딱 맞는 선택이었다.

“바에자 현신은 괜찮아진 것 같다. 조만간 크테시폰 궁 내의 병원으로 옮겨 치료받으라고 했다.”

이디나는 페스트 귀환병들을 위해 병원 한쪽을 따로 내어 만든 비밀병동을 죽 돌아보았다. 황실의 서슬 퍼런 감시를 피해 교단 병원에서 이들을 치료해줄 수 있는 것도 타르서스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실 것 같았으면 궁으로 이송한 후에 만나셨으면 굳이 이렇게 외출까지 하실 필요도…….”

“왜? 못생긴 여자와 부부 행세하는 게 그리 불만이냐.”

이디나의 짜증스런 대꾸에 난처해진 슈라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화려한 치장을 모두 벗어버린 대신관은 이전처럼 ‘볼품없는 보통 여자’에 불과했다. 그래서인지, 크고 잘생긴 슈라와 부부 행세를 하며 함께 모처럼 시내 구경을 나온 이디나는 남 일 참견하기 좋아하는 타르서스 사람들에게서 ‘남자가 아깝네.’라는 비수 같은 속닥거림을 몇 번이나 참아 넘겨야 했다.

“천만의 말씀이시옵니다. 소장에게 이렇게 안전을 맡기셨다는 데에 무한한…….”

“됐다, 군말 집어 쳐.”

이디나는 잘 빗었던 머리를 일부러 손으로 흩뜨리며 짜증을 냈다.

“내 들어가 있는 동안 사카 여단장에게선 소식 없었나?”

슈라는 낮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이디나는 거의 한 시간마다 한 번 꼴로 사카에 관해 묻고 있었다.

“여단장이 이렇게까지 오래 자리를 비운 예가 없다보니 병사들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틀 후가 부대 창립 기념일이라 기념 예배도 주관해야 하는데…….”

“나를 위해 목숨을 건 용사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줘라. 죽음이 확인되지 않은 한 재생은 없다.”

이디나가 딱 잘라 대답하자 슈라도 더 이상 뭐라 하지 못하고 바로 물러났다.

“그러시면 이번 예배는 소장이…….”

“코런덤의 창립 기념예배는 내 직접 주재하겠다.”

“예?”

슈라가 화들짝 놀랐다. 핏줄 덕분에 대신관이 되었을 뿐 이디나는 아직 성직자 흉내도 내기 어려운 상태였다. 신학교와 콜로니 아카데미를 우등생으로 졸업하고 교구장까지 지내며 후계자로 자리를 잡은 아버지 아스탈과는 달리 이디나는 청소년기에 신학교 청강생이었던 것이 전부였고, 예배 주재는 고사하고 아버지를 도와 보조를 몇 번 해 본 것이 전부였다.

슈라는 ‘정말 가능하시겠습니까?’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위대한 현신의 첫 주재 예배의 참석자가 된다면 전사들이 모두 감격할 겁니다.”

“내 배운 것이 없어 그대처럼 말빨로 예배를 때울 능력 따위는 없어. 그네들에겐 어차피 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질책인지 뭔지 알쏭달쏭한 말에 슈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현신은 천한 인간들의 의식 속에 존재만 하면 그걸로 되는 거야. 내 일거수일투족에 밥 먹고 방귀 끼는 것까지 멋대로 해석해 교리로 만들고 장황하게 떠들어서 머리에 쳐 넣어 주는 건 인간 성직자나 신학자들의 몫이지.”

“물론입니다, 위대한 현신이시여.”

슈라는 바로 꼬리를 내리며 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아스탈이 죽던 그날, 야투 박사와 함께 앞장서 이디나를 지지했던 게 그였지만 속으로는 임기응변으로 세운 엉터리 추녀 대신관에게 신이 깃들었을 리 없다는, 헤네티로서는 벼락을 맞고도 남을 생각을 해 온 게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그의 시니컬함도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지금의 이디나 처지에 감히 예배를 주재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이라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스멀스멀 드는 게 스스로도 신기할 정도였다.

‘진짜 신이 깃든 걸지도 몰라.’

슈라는 꼿꼿하게 쳐든 이디나의 오만한 옆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참, 말씀하신대로 델루지 가 원로회에 오르테 부인 살해사건에 관한 자료를 넘겼습니다. 비서의 진술서와 무기, 옷은 물론이고 세데스가 시체 치우던 장면 촬영한 것까지요. 그네들도 오르테가 죽고 세데스 그년이 현장을 수습한 것도 이제 다 압니다.”

“심증은 확실해졌는데 물증인 시체가 없다? 누가 봐도 뻔할 뻔자가 됐군.”

이디나가 피식 웃었다. 세데스의 약점을 잡고 어떻게든 써먹으려 했던 아버지 아스탈과는 달리, 그는 못 믿을 여자를 협박만 해 가며 계속 쓸 맘은 추호도 없었다.

“우리가 협박만 하는 게 아니고 이렇게 멀쩡한 제후 하나를 한방에 보낼 수 있다는 걸 알렸으니 우리에게 코 꿴 나머지 제후 놈들도 이젠 정신이 퍼뜩 들겠지.”

“델루지 가 원로회장 마누엘 경이 존속 살인 혐의로 세데스의 종장 직위를 정지시켰습니다. 시신을 내놓고 정당한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 권한도 행사할 수 없다고 선포했으니 이젠 끝장입니다. 진작 이럴걸 그랬습니다.”

“세데스 그년 지금은 어딨지?”

“어제 집무실에 들어가려다가 저지당하고 쫓겨나 잠적했다고 합니다. 괜히 우리가 나설 필요는 없어보여서 그냥 두고 보기로 했답니다.”

“마누엘 그 녀석 생각보다 소심하군. 나라면 이 기회에 뒤집어 엎을 텐데 왜 뒤에 물러나 있는지. 하기야 그래서 500년 넘게 질기게 살아있기는 하지만.”

“2인자로 만족했던 게 장수해 온 수단이니까요. 꼭 누구처럼 말입니다.”

“어쩌면 이번에도 자기보다 더 멍청한 놈 하나를 종장에 세울지도?”

병동을 막 나서려는 이디나에게 교단 소속 병원장이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환자분은 만나보셨습니까? 이곳 환자들은 저희가 신심을 다해 모시고 있으니 염려 마십시오.”

“수고 많았다.”

이디나가 웃음 띤 얼굴로 병원장의 앞을 지났다. 이 병원장도 ‘특별한 환자’와 이 낯선 방문객이 정확히 누군지는 알지 못했지만 그의 방문과 동시에 주변에 깔린 헤네티들만으로도 거물임을 짐작하기는 충분했다.

“주차장까지 모시겠습니다. 따라오십시오.”

병원장을 따라 계단 한 층을 막 내려온 이디나가 산과(産科) 팻말 앞에서 머뭇거리더니 슈라를 돌아보았다.

“아참, 아까 보니 병원 맞은편 케밥 가게 냄새가 끝내주던걸. 입덧하기 전에 기름진 거 실컷 먹어둬야지.”

“예? ……아, 알겠습니다. 차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눈치 빠른 슈라는 산과 팻말을 보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후다닥 계단을 먼저 뛰어 내려갔다.

얼떨결에 이디나와 단둘이 남은 병원장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그게 말이야 ……동물 실험하는 친구 녀석이 약품 몇 가지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병원용 약품은 구매 절차가 복잡해서 ……많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조금씩만 구해 줄 수 있겠나?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고.”

이디나가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이며 미리 적어 온 목록을 내밀었다. 잔뜩 긴장했던 병원장은 목록을 보고는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아아, 인공수정용 약품이군요. 이 정도는 산과에 있을 테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약제실로 뛰어간 병원장은 몇 분 걸리지 않아 목록에 있는 약품들을 모조리 챙겨서 돌아 나왔다. 약 봉지를 확인한 이디나는 병원장의 어깨를 두드려주고는 흐뭇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주차장까지 나 혼자 갈 수 있으니 들어가게나.”

병원장을 떨어내고 혼자가 된 이디나는 계단을 서둘러 내려갔다. 한 층 더 내려가니 사람들이 별로 없는 층이 나타났다. 그는 외진 곳에 있는 여자 화장실에 뛰어들었다.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이디나는 바깥문을 잠그고 이전에 쿠마르에게서 받아놓은 쪽지를 꺼냈다. 황제의 비빈들이 임신 직전 내의원에서 받는다는 3일간의 배란 준비 과정이 차례로 적혀있었다.

“뭐 이리 복잡해.”

이디나가 고개를 저었다. 시녀와 주치의들이 항상 붙어 몸을 검사하고, 거추장스런 로브를 걸치고 지내야 하는 궁 안에서 몰래 하기는 위험천만한 것들이었다. 지난 이틀간 먹은 약품은 시녀들의 상비약통을 몰래 뒤져 구할 수 있었지만 오늘부터 필요한 약은 몰래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가 병원까지 몸소 행차를 나온 이유였다.

“첫 번째는……1번, 2번을 1알씩, 3번은 2알.”

약 봉지를 펼친 이디나는 쪽지 내용에 따라 급히 약을 세어 입에 넣고 삼켰다.

“두 번째로 피하주사, 빨리, 빨리.”

그는 주사약을 꺼내어 작은 피하주사기에 담았다. 주사를 놓아 본 일도 없고 비슷한 것을 배워 본 일도 없었지만 지금은 책에서 본 내용에 의지해 자신의 몸을 상대로 실습을 할 때였다. 그는 소매를 걷고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주사기를 피부 밑에 찔렀다. 주사를 겁내며 머뭇거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좌약을…….”

엄지손가락만한 좌약을 꺼내든 이디나가 공포감에 멈칫거렸다. 주사까지도 서슴없이 놓았지만 아직 그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던, 심지어 자위 한 번 해 본 일 없는 자신의 몸 안에 무언가를 넣는다는 건 쉽지 않았다.

“괜찮아, 남들은 섹스도 하는데 이까짓 작은 거.”

그는 옷을 벗고 좌약을 몸 안에 넣으려 했지만 너무 긴장을 해서인지 힘을 줘도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너무 아픈 나머지 눈물까지 찔끔 솟았다.

“빌어먹을.”

실패한 이디나가 재차 숨을 가다듬었다. 하필 그때,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맘이 급해진 이디나는 다시 약을 아랫도리에 대고 넣어보려 했지만 바깥의 소리에 놀라 더 경직되어버린 그곳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너무 아파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남들은 다 하는 것이 자신에겐 왜 이리 아픈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 다시 문을 두들겼다.

“이봐요, 누구 안에 있어요?”

“씨이.”

이디나가 엉거주춤 서서 한 손으로 눈을 가리고는 이를 꽉 악물고 무작정 힘을 주어 몸에 밀어 넣었다. 이젠 다른 도리가 없었다.

“아악.”

살이 찢기는 것 같은 지독한 고통과 함께 좌약이 조금씩 몸 안으로 밀려들어갔다. 눈물까지 흘리며 가까스로 몸 안에 약을 넣은 이디나는 급히 속옷을 챙겨 입고 세면대에 물을 받아 얼굴의 눈물자국을 훔쳐냈다.

누군지 또 밖에서 문을 두들겼다. 신분을 감춰야 하는 상황만 아니라면 당장 나가서 확 죽여 버리고 싶었다.

“곧 나갈 테니 기다려요.”

이디나는 남은 약을 얼른 챙겨 가방에 넣었다. 이젠 먹는 약과 주사만 시간 맞춰 챙겨주면 되니 큰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대충 세수를 하고 눈물자국을 지운 이디나는 화장실 밖에서 기다리던 두 여자들의 짜증스런 눈길을 무시하며 급히 밖으로 나섰다.

“끄응.”

태연한 척 복도를 가로질러 몇 발짝을 걸은 이디나는 벽을 붙들고 멈춰 서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약을 너무 억지로 넣었는지 아랫도리가 쓰리고 아려서 걷는 것도 고통스러웠다.

“별 것 아니라더니, 쿠마르 그 멍청한 새끼.”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이디나는 괜한 쿠마르 탓을 하며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 지독한 고통이 한 번 지나고 난 후, 그는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고는 다시 일어서서 병원 건물을 나섰다.

차 옆에서는 시킨 대로 케밥 봉지를 든 슈라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빛이 안 좋으십니다. 어디 아프십니까?”

슈라는 얼굴이 하얗게 변해 엉거주춤 다가오는 이디나의 모습에 정색을 하며 달려왔다.

“맙소사, 병원장 그놈은 어쩌고 혼자 오십니까!”

“병원장은 내가 들여보냈다. 그냥 다리에 쥐가 난 것뿐이야.”

슈라의 부축을 받은 이디나가 다리를 주물거리며 얼른 차에 들어가 앉았다. 푹신한 고급승용차의 상석에 앉아 몇 번 숨을 고르고 나니 미친 듯 저려오던 아랫도리도 훨씬 편해졌다. 운전석에 앉은 슈라가 얼른 차를 출발시켰다.

“얼른 궁으로 모시겠습니다.”

“됐어, 쥐가 난 거라니까. 오전 중엔 마잔다란 시장 구경하기로 했잖나. 고작 쥐 난 걸로 모처럼의 외출 망치고 싶지는 않거든? 그리고 만날 사람도 있어.”

이디나는 약봉지를 깊숙이 숨기며 퉁명스레 쏘아붙였다.

머뭇거리던 슈라는 크테시폰 궁으로 넣었던 좌표를 다시 시장으로 바꿔 넣었다.

“저어, 그런데…….”

슈라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방금 기다리는 동안 3번 도시에서 급한 연락을 받았습니다. 예상대로 황후가 시내로 나와 외간남자와 만난 것 같습니다.”

순간 이디나의 손에 힘이 확 들어갔다. 그는 방금 약을 넣어 쓰라린 아랫배를 무심결에 짚으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년이 바람난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그럼 캡슐은? 황제의 세포 캡슐은 구했나? 오늘 받을 수 있댔지?”

슈라는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사카의 실종에 이어 또다시 나쁜 소식이 분명했다. 이디나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물었다.

“빨리 대답해라. 성공했냐고.”

격분한 이디나의 재촉이 이어졌고, 슈라의 대답은 예상 그대로였다.

“죄송합니다. 운반책이 괴한에게 공격을 당했습니다.”

“뭐?”

나쁜 보고만 연거푸 받은 이디나가 당장 폭발할 듯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부르르 떨었다. 또다시 이런 소식을 전한 슈라는 ‘왜 하필 나야.’라고 몇 번이나 불운을 탓하며 최대한 태도를 낮췄다.

“2시간 전에 3번 도시의 축제장에서 우리 운반책이 웬 여자의 시체와 함께 변사체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럼 세포는? 설마 놈들이 도로 가져간 건 아니겠지?”

이디나가 절반 넋이 나간 듯 멍해진 얼굴로 아랫배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확인해 보니 운반책을 죽인 여자를 어떤 사내가 또 죽이고 가져갔다는데 경황이 없어 시녀장은 우리 편인 줄 알고 확인을 못 했답니다. 지금 최대한 파악하고 있는 중입니다.”

슈라는 아무 대답이 없는 대신관 쪽을 다시 돌아보았다. 상석의 이디나는 고개를 옆으로 축 늘어뜨린 채 아무 표정이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이디나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떤 놈인지 중간에 채간 놈을 절대 살려두지 말아라.”

대신관은 단단히 화가 난 듯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행선지를 바꾸지도 않았다. 이디나가 향한 곳은 마잔다란 시장 한복판의 북적거리는 찻집이었다. 좁은 시장 골목 모퉁이에 의자와 테이블 몇 개를 놓은 이런 허름한 찻집들은 차와 사교 문화가 발달한 타르서스 사막 사람들에겐 삶의 일부였다.

슈라를 골목 건너편에 떼어놓고 혼자 찻집에 들어간 이디나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지나는 행인들만 지켜보며 몇십 분을 하는 일 없이 앉아만 있었다.

‘뭐 하시는 거지?’

건너편 골목에 자리를 잡은 슈라는 일반인들 사이에 티 안 나게 섞여 있는 대신관을 계속 지켜보았다. 이런 시장통 찻집은 위세당당한 대신관이 근사하게 고독을 씹기에 그리 어울리는 곳은 아니었다. 지저분한 짐꾼들이 모래투성이 흙바닥을 뛰어다녔고, 심심하면 지나는 짐 당나귀와 수레들이 먼지를 쉴 새 없이 일으켜 찻잔의 차도 바로 마시지 않으면 버려야 할 정도였다.

‘이런 데서 누굴 만나신다는 거지?’

슈라가 연신 시계만 보았다. 원래부터 속내를 알기 어려웠던 사람이지만 이번에도 누굴 만날 건지 귀띔조차 해 주지 않았다.

그때, 길 건너편 찻집에 앉아있던 상인 차림의 작고 다부진 체구의 남자 하나가 불쑥 일어나더니 이디나 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슈라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지만 이디나가 가만히 있으라며 재빨리 손짓했다.

‘저놈하고 만날 생각이셨나?’

어리둥절해진 슈라는 품 안의 단검에 손을 댄 채 계속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남자는 슈라에게 등을 보인 채 이디나와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슈라가 잔뜩 귀를 기울였지만 시끄러운 마차 소음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대화는 길지 않았다. 남자와 작은 물건 하나씩을 서로 교환한 이디나는 그대로 찻집을 나서서 시장 바깥으로 걷기 시작했다. 슈라가 뒤를 쫓으려 한 그때, 그의 귀에 꽂은 할룩스로 이디나의 침착한 목소리가 전해져왔다.

“없애라. 흔적 남기지 말고.”

슈라의 표정이 확 굳었다.

이디나와 만났던 자그만 사내는 받은 작은 꾸러미를 품에 챙겨넣고는 가죽 공장이 있는 좁은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단층의 허름한 공장 사이로 난 골목에는 공장에서 풍겨오는 약품 냄새와 털 벗기는 기계 소음이 진동을 하고 있었다. 남자를 따라 골목에 접어든 슈라는 상대가 눈치 채지 않도록 적당한 걸음으로 뒤를 쫓았다.

그때, 잠시 멈칫거렸던 남자가 돌연 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빠르면서도 소리가 나지 않게 디디는 걸음에서 슈라는 자신이 들통 났다는 것을, 상대가 평범한 시장통 상인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사냥 방법을 달리해야 했다.

미행을 존재를 눈치 채고 최대한 빨리 걷던 그 남자는 모퉁이를 휙 돌자마자 재빨리 멈춰 서서 뒤로 고개를 내밀었다.

“음?”

방금 전까지 뒤를 쫓던 슈라가 하늘로 증발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서서 다시 가던 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그의 목이 무언가에 확 채이며 공중으로 치솟았다.

“우, 읍!”

남자는 목을 죈 가는 줄을 풀어내려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지만 지붕 위에서 내려 건 철사 올가미는 끄떡도 하지 않고 그의 몸뚱이를 바싹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거의 지붕 가까이까지 끌려올라온 남자의 머리를 누군가가 사정없이 옆으로 비틀어버렸다.

목이 옆으로 돌아간 남자의 몸은 벽에 걸린 채 축 늘어지고 말았다.

“별 것도 아닌 것이.”

슈라는 남자의 시체를 골목에 도로 던져놓고 옥상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그자의 옷 속을 재빨리 뒤져보았다. 남자의 몸은 수많은 흉터와 특수부대 문신, 범죄조직 문신이 뒤범벅이 되어 도화지 같았다. 퇴역군인 출신 직업 청부업자가 분명했다. 그자의 옷 속에선 암살수용 소형 석궁과 방금 이디나가 건넨 작은 꾸러미가 나왔다. 풀어 보니 금괴 한 덩어리가 들어있었다.

“대체 뭘 사신 거지?”

명령대로 증거물을 챙긴 슈라는 시체를 골목 옆 가죽약품 통에 넣어버리고는 재빨리 골목을 빠져나갔다.

“처리했나?”

먼저 차에 돌아와 있던 이디나가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위대한 현신의 뜻이지 않습니까.”

슈라는 석궁과 금괴를 내놓으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는 대신관이 방금 죽인 남자에게 금을 내어주고 대신 무얼 받은 것인지 퍽이나 궁금했지만 이디나는 그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금괴를 챙긴 이디나는 운전석과의 사이에 휙 하고 벽을 쳐 버렸다.

“피곤하다. 이제 돌아가자.”

승용차의 상석에 혼자 앉은 이디나는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비로소 방금 만난 청부살인업자에게서 받은 보자기를 풀어보았다. 그 안에는 필통 크기의 묵직한 납 상자가 하나 들어있다. 이디나는 조심스런 손길로 고리를 풀고 뚜껑을 열었다.

“후훗.”

이디나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납 통 안에는 검은 색의 손가락 한 마디만한 세포 캡슐이 투명한 보호통 안에 얌전히 자리하고 있었다. 보호통 위엔 [황실유전자은행 최고보안물품 - 인가 없이 봉인을 여는 자는 처형됨.] 이라는 붉은 경고문이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처형이라. 푸훗.”

이디나가 비웃음 띤 얼굴로 카렐의 세포가 든 통을 집어 살짝 입을 맞추었다. 황실도, 심지어 자신의 수하들까지도 죽이거나 속여 넘기고 어렵게 구한 보물이 이제 그의 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이젠 제가 맘 편하게 당신을 죽여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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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회부터 새 파트가 시작됩니다.

칙칙하던(?) 황궁 내명부를 떠나 인물도 바뀌고,분위기도 바뀝니다.

주페와 세데스도, 이디나도 나오고, 도도한 코리온과 질투에 열폭하는 카렐도.....

그러고보니 이번 회도 용량이 너무 많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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