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62화 (957/1,132)

< -- 962 회: 파트10. 그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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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내내 이어진 고된 산악 유격훈련에 지친 50여명의 X생도들은 가파른 바위 곳곳에 흩어져 점심으로 나온 소위 ‘똥국’에 질긴 빵을 게걸스레 뜯고 있었다.

이 ‘똥국’은 콩과 채소를 삶아 나온 누런 색깔덕분에 억울하게 고약스런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사병부터 지도자까지 모두 먹는 민병대의 기본 식단이었다. 게다가 X들에게 주는 똥국엔 주먹만한 고기까지 한 덩이씩 넣어주니 가난한 민병대 내에서는 꽤 괜찮은 메뉴에 속했다.

손에는 똥국이 든 통을, 등에는 빵 바구니를 진 오르는 더 달라며 손을 드는 생도들에게 달려가 국물을 더 부어주고 빵을 건넸다.

워낙 잘 먹을 나이에 덩치까지 어마어마하다보니 식사량도 상상을 초월해서, 빵 두세 개에 똥국 한두 국자 더 먹는 건 기본이었다. 그래도 속이 덜 찬 생도들은 배식을 하는 오르에게 비계 붙은 고기 한 덩이만 더 달라며 애원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어울리지 않게 눈웃음으로 애교까지 부렸지만 귀한 고기는 워낙 생도들 머릿수에 딱 맞춰 넣었다보니 그가 할 수 있는 건 바닥에 남은 부스러기 고기를 긁어주는 것뿐이었다.

“더 먹을 생도?”

고기 없냐며 묻는 생도에게 머쓱하게 부스러기만 한 국자 퍼 주고 일어선 오르는 외진 구석에서 번쩍 쳐든 손을 보았다. 3918생도는 오늘도 동기들에게서 뚝 떨어진 구석에 혼자 웅크려 앉아 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사실 동료들이 쫓아냈다기보다는 자기가 알아서 저기에 가 있었다. 동기들 사이에서 먹어 봤자 지난번처럼 식판이 엎어지는 봉변을 당하거나 음식을 빼앗기곤 했으니 자기 손해였다. 그리고 오늘도 똥국에 든 고깃덩어리를 시작부터 빼앗긴 후였다.

“기다려.”

무거운 똥국통에 빵까지 짊어지고 크고작은 화산암들이 흩어진 가파른 경사지를 걷는 건 보통 사람에겐 쉽지 않겠지만 워낙 산악에서 자란 그에겐 별 문제도 아니었다. 그는 바위들 사이를 능숙하게 깡충깡충 뛰어 빨간머리 생도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빵 상자 제일 안쪽에서 마르지 않은 부드러운 빵을 골라 건네주었다.

“그릇.”

더러운 흙바닥에 쭈그려 앉은 소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힘없이 그릇을 위로 쳐들었다.

그는 고기를 더 달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 아니 감히 못 하는 유일한 생도였다. 오르는 이번에도 배추와 양파, 토마토와 정체모를 채소들이 뒤섞인 건더기를 한 국자 가득 퍼 그릇에 채워주었다. 그릇이 묵직하게 출렁 하는 느낌에 소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화산재를 뒤집어써 하얗게 된 얼굴에서 초록색 눈동자 두 개만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르가 국물을 부어주며 작게 속삭였다.

“다음엔 고기 뺏기지 마.”

소년이 그릇을 살짝 들쳐보니 물러진 채소들 사이로 기름진 비계가 적당히 붙은 돼지고기 덩이가 살짝 숨어있었다. 첫 배식 직후 그가 동기들에게 빼앗겼던 것보다 두 배는 커 보였다. 오르가 국자를 통에 던져 넣으며 허리를 폈다.

“아깐 일부러 부스러기 준 거였어.”

머뭇거리던 소년이 국그릇에 숟갈을 꽂으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고마워.”

소년은 돌아가는 오르마즈의 뒷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번에도 개미만한 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밤은 거기 오지 마.”

“응?”

오르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소년이 고개를 국그릇에 처박은 채 돼지고기를 씹으며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오늘은 꼬마애 잘 지키고 있어.”

오르의 몸에 순간 전율이 감돌았다. 사환으로 일하는 어린아이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일은 흔했다. 지난 1년 동안 행방불명되어 못 찾고 있는 소년소녀들이 10명이 넘었지만 변태들에게 잡혀간 것으로 짐작될 뿐 아직 범인은 짐작도 못 하고 있었다. 이 빨간머리가 뭔가 알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지금은 자세히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알았어.”

오르는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생도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누나야, 오늘은 책 보러 안 가?”

“응, 오늘은 졸려서.”

“누나랑 이렇게 있으니까 진짜 좋다.”

불 꺼진 깜깜한 내무반에 오르와 함께 누운 와헷은 가슴을 파고들며 마구 얼굴을 부볐다. 2층 침대 10개가 있어야 할 내무반에 고작 1개만 놓았다 보니 방 공기가 유달리 썰렁했다. 허름한 나무문에 군데군데 테이프로 때워놓은 나무창문 사이로는 바깥의 찬바람이 쉴 새 없이 새어 들어왔다. 자그만 석탄난로가 하나 있기는 하지만 없는 것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다.

“좁아 죽겠는데 좋긴 뭐가 좋아.”

“누나 냄새 너무너무 좋아.”

항상 2층에서 혼자 자던 와헷이 1층 오르의 이불 속에 함께 들어온 건 오늘밤이 처음이었다. 와헷은 누나의 따뜻한 체온을 조금이라도 놓치지 싫다는 듯 그를 꼭 안았다. 사실 침대랍시고 들것 크기에 별반 다름없는 조그만 매트리스에 불과하다 보니 거의 포개지듯 찰싹 달라붙지 않으면 제대로 눕기도 힘들었다.

“누나야.”

“응?”

“내일도 모레도 이렇게 자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오르는 와헷의 어깨 위에 담요를 덮어주며 억지로 웃었다.

“너 매일 쑥쑥 자라는데 어떻게 계속 이렇게 자?”

“큰 침대 놓으면 되지.”

“큰 침대는 엄마아빠가 쓰는 거고.”

“그럼 누나가 엄마 해. 내가 아빠 할게.”

오르는 하마터면 웃음보를 터뜨릴 뻔했다. 그때, 내무반 밖에서 무언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쉿!”

순간 깜짝 놀란 오르마즈는 베개 밑에 숨겨놓았던 호루라기를 얼른 꺼내 손에 쥐었다. 혹시라도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면 이걸 불어 헌병들을 부를 참이었다.

“왜 그래? 누나야?”

“가만히 있어.”

오르가 잔뜩 감각을 곤두세우고 문 쪽을 응시했다. 문 밖에서 누군가가 계속 문고리를 달그락거리고 있었다. 전장의 막사도 아니고, 딱히 불침번도 세우지 않는 외진 숙소다보니 행여 나쁜 놈이라면 막을 도리도 없었다. 전투 상황이 아닐 때는 사병들에겐 무기도 주어지지 않았다.

“관등성명?”

오르가 물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침대를 슬그머니 빠져나간 오르는 평소 취침점호를 할 때 쓰는 유선 통신기에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아무 신호도 가지 않았다. 선이 끊어진, 아니 누군가 끊은 게 분명했다.

“뭐야, 이거.”

오르는 와헷에게 침대 위에 꼼짝 말고 있으라며 손짓하고는 문가로 조심조심 다가갔다. 허름한 나무문에는 밖을 보라며 구멍이 뚫려 있지만 섣불리 눈을 대지는 않았다. 헤크마 무리에 있었을 때, 비적들이 일부러 문을 흔든 후 틈새에 대고 창을 쑤시는 모습을 여러 번 본 일이 있었다.

‘어떤 놈이야.’

문 옆으로 살짝 비껴 선 오르는 화장실에서 주워 온 작은 거울조각을 틈새에 비스듬하게 댔다. 나무틈새로 마치 빨대 끄트머리 같은 작은 구멍이 보였다.

“으앗!”

무언가 잘못된 것을 직감한 오르가 급히 물러났다. 거의 동시에 문 틈새로 기다렸다는 듯 독한 산성 가스가 확 뿜어 들어왔다.

“우, 우읍.”

놀라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던 오르가 목을 움켜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틈새에 눈을 댔었다면 바로 정신을 잃었을 정도의 강한 독가스였다. 손에 쥐고 있던 호루라기를 불거나 크게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제대로 숨을 내쉴 수가 없었다. 언젠가 특수부대원들이 이런 식으로 실내의 적을 제압한다는 내용을 읽은 일이 있었지만 본부 영내에서 이런 일을 당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었다.

“누나야, 왜 그래!”

놀란 와헷이 침대에서 뛰쳐나와 오르에게 달려오려 했다. 그때, 창문이 휙 열리더니 크고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휙 들어와 와헷을 덥석 낚아챘다. 그리고는 꼬마를 겨드랑이에 끼고는 놀랄 만큼 빠른 몸놀림으로 유리창을 쑥 빠져나갔다. 오르는 저 그림자가 3918을 괴롭히던 동기 X생도 중 하나라는 것을 직감했다.

“저, 저……새끼가.”

오르는 타들어가는 목을 움켜쥐고 그림자를 쫓아 유리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지고 목구멍은 쓰라렸지만 와헷이 잡혀가는 모습을 본 이상 상대가 X건 누구건 더 이상 가릴 것도 없었다.

제대로 소리를 낼 수 없어진 오르는 입에 문 호루라기를 억지로 불며 그림자의 뒤를 쫓았다. 생도에게 잡혀가는 와헷의 비명소리도 간간히 들려왔고 뒤에서는 문 앞에서 가스를 쏘았던 한패거리 생도들이 쫓아오고 있는 것도 같았다.

“이씨.”

오르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쯤 소리가 났다면 옆방의 헌병들이 달려 나오거나 경비병들의 서치라이트가 일제히 켜졌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아무도 그를 도와주러 나오지 않았다.

와헷을 데리고 도망가던 생도는 무언가 당황한 듯 쫓아오고 있는 오르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와헷을 겨드랑이에 낀 채 단층의 긴 공동샤워장 건물 모퉁이를 휙 돌아 사라졌다.

“와헷! 기다려!”

오르는 재빠른 생도를 미련하게 뒤쫓아 가는 대신 재빨리 방향을 돌려 샤워장 처마를 짚고 지붕에 다람쥐처럼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지붕을 후다닥 가로질러 건물 반대편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어엇.”

와헷을 납치해가던 X는 건물 옥상에서 뚝 뛰어내리는 ‘일반인 사병’의 모습에 순간 당황해 멈칫거렸다. 제아무리 빼어난 조건의 X이고 훈련도 많이 받았다지만, 아직은 교관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에 익숙해 있는 햇병아리 생도였다.

“이 계급도 없는 병아리 새끼야! 난 그래도 계급장은 있거든!”

눈에 불을 켠 오르가 X에게 겁도 없이 맨손으로 달려들었다. 상대가 한 팔에 와헷을 끼고 있어 만만해 보였지만 오판의 대가는 참담했다.

“우압!”

X생도의 손날에 목을 제대로 얻어맞은 오르는 순간 몸이 굳어버렸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목이 부러졌을만한 충격에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의식이 아득해졌다.

“이, 이이익.”

주춤거리며 물러나는 오르의 목젖을 노리고 다시 손끝이 날아들었다. 특수부대원들이 상대를 맨손으로도 단번에 죽일 수 있도록 받는 훈련이었다. 오르는 손을 쳐내기는 했지만 목 옆이 깊숙이 할퀴어지며 피가 벌컥 솟았다.

“이 썩을 놈이!”

같은 순간, 독기가 오른 오르도 질세라 손가락 두 개를 세우고 상대의 눈을 향해 내질렀다.

“으익!”

아직 어린 이 X는 생각지도 못했던 상대의 잔인한 반격에 공포를 느끼고 움찔거렸다. 오르의 손끝은 약간 빗나가 상대의 미간과 눈꺼풀을 거칠게 할퀴고 지나갔다. 생명 같은 양 눈을 모두 다친 X 생도는 와헷을 떨어뜨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아, 아악, 눈, 눈.”

“어때? 훈련대로 안 되지? 이 풋내기야!”

아직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오르는 두 손을 깍지끼고 달려들어서는 상대의 귀를 사정없이 내리찍어 쓰러뜨렸다. 머리와 고막에 충격을 받아 넘어진 생도가 버둥대며 정강이를 걷어찼지만 아픔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너 뭐야! 뭔데 꼬마를 납치해!”

오르마즈는 쓰러진 생도를 깔고 앉아 마구 막주먹질을 휘둘렀다. 싸움을 체계적으로 배운 일도, 정식으로 교관에게 훈련받은 일도 없지만 순전히 악과 깡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눈앞의 생도를 두들겨 패는 데 정신이 팔려 있던 오르는 뒤로 누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그리고 웬 군화발이 오르의 등짝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웁!”

힘에 밀린 오르가 생도의 가슴 위에서 튕겨나와 흙바닥 위에 나동그라졌다. 바닥에 쓰러진 그는 어둠 속에서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거대한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너희 놈들 여기서 뭐 하는 짓이냐.”

거한의 목소리는 차갑고 절도가 있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오르는 상대가 생도들의 평가를 담당하고 있는 헌병대 주임상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르가 쓰러져 있는 생도를 가리키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상사님, 저 생도가 와헷을…….”

상사의 시선은 이번엔 코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생도를 향했다. 그때, 이번엔 오르의 뒤를 쫓아온 3명의 한패거리 X 생도들이 헐레벌떡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 문으로 가스를 쏘아 넣었던 놈들인 듯했다. 생도들은 꼬마를 떨어뜨린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료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일제히 부동자세를 잡았다.

상사가 생도들을 둘러보며 이를 드러냈다.

“이 쓸모없는 놈들 같으니. 너희들이었구나.”

“이놈들이 제 내무반에 들어와 와헷을 납치하려 했습니다.”

오르가 엉금엉금 기어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와헷을 끌어안았다. 생도에게 차인 종아리가 너무 아파 제대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누나야, 누나야.”

온몸이 굳은 채 강아지처럼 발발 떨고 있던 와헷이 오르의 품에 얼른 파고들었다. 와헷을 껴안은 오르마즈는 헌병 상사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기겁을 하며 꼬마를 더 꽉 안았다. 하지만 그는 오르의 옆을 무심하게 지나가 버렸다. 그리고는 방금 와헷을 납치하는 데 가담했던 생도들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누나야, 누나야.”

파랗게 질린 와헷이 오르의 목을 껴안고 바들바들 떨었다. 오르는 구타당하는 생도들의 비명과 애원이 난무하는 곳에서 일단 조금이라도 멀어지려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방금 맞은 정강이가 아파 제대로 일어나 걸을 수가 없었다.

“카파키 일병.”

등 뒤에서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에 오르의 심장이 딱 멎는 것 같았다. 그는 흙으로 더러워진 무릎을 급히 털고 끙끙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와헷을 뒤로 급히 숨겼다.

“예. 하메스타 상사님.”

오르마즈가 덜덜 떨며 엉거주춤 부동자세를 잡았다. 정강이를 맞은 충격에 자꾸 다리가 꺾이려 했다.

“이놈들은 내 알아서 처리할 테니 돌아가. 입단속 제대로 하고.”

오르는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소행은 괘씸하지만 괜히 일을 크게 만들어 지금까지 잘 지내 온 X 생도들과의 친분까지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어쨌든 생도들도 저렇게 먼지 나게 두들겨 맞았으니 일단 화풀이는 된 셈이었다.

“알겠습니다, 상사님.”

오르가 와헷의 손을 꼭 쥐고 뒤로 돌아섰다. 막 자리를 피하려는 그를 상사의 목소리가 다시 붙들었다.

“꼬마는 놔두고.”

순간 오르의 발끝이 땅바닥에 딱 얼어붙었다. 와헷도 무언가 공포를 직감했는지 오르의 다리를 꽉 껴안았다.

“증인이 있어야 이 새끼들 처벌을 할 것 아냐.”

상사가 당장 때려죽일 듯 이를 드러내며 오르를 노려보았다.

“그럼 저도 증인을 할 테니 같이 있으면 안 되겠습니까?”

“네가? 왜? 네가 X 두들겨 팼다고 조서에 올려주랴?”

“아, 알겠습니다.”

오르는 그제야 와헷을 떼어내 상사 쪽에 밀었다. 상사는 자신이 이 생도들을 잡은 것으로 처리하려는 듯 보였다. 헌병상사가 실적 하나 올리겠다는데 눈치 없이 나설 수도 없어보였다.

“누나야, 가지 마.”

혼자 남은 와헷은 무서운 상사 옆에서 사시나무처럼 떨며 멀어지는 오르를 무력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상사님이 곧 돌려보내 주실 거야. 누나 내무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걱정 마.”

“…….”

상사 앞을 물러나온 오르는 와헷을 불안한 느낌으로 샤워장 건물 모퉁이를 돌았다. 와헷을 일단 상사에게 맡기고 떠나기는 했지만 무언가 꺼림칙했다. 사환 아이들이 납치되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건 이미 10년 이상 전부터 줄곧 있어 온 일이라고 들었다. 그렇다면 고작 자신 또래의 저 생도들이 그 일을 다 저질렀을 리가 만무했다.

모퉁이를 돌아선 오르는 X부대 경비탑을 보았다. 방금 전까지 비어있던 경비탑에 이제야 경비병들이 기어오르고 있는 모습이 마치 누군가 꼬마를 납치하기 위한 시나리오를 미리 짜 놓았던 것 같았다. 네 명의 어린 생도들의 짓으로만 치부하기엔 분명 이상했다.

그는 온 길을 다시 돌아가 샤워장 건물 모서리에 몸을 숨기고는 조심조심 머리를 내밀었다. 이유는 몰라도, 보통 사람들의 기척은 멀리서도 숨소리부터 체온, 심지어 심장박동까지 귀신같이 잡아낸다는 저 X들이 신기하게도 오르의 기척은 제대로 읽지 못했다.

“뭐 하는 거지?”

오르가 어둠 속을 노려보며 눈가에 잔뜩 힘을 주었다. 상사에게 두들겨 맞은 4명의 생도들이 일렬로 물구나무를 서서 다시 얼차려를 받고 있었다. 언뜻 보기로는 상사가 저들을 엄하게 처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일병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평소 이 시간엔 꼬마 혼자 있었는데…….”

“닥쳐, 이 십새끼.”

상사의 잔뜩 화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났구나, X가 일반인한테 쳐맞고 있다니? 내가 방금 헛것을 봤던 거냐?”

“그놈 뭔가 이상합니다. 일반인이 그렇게 빠를 리가 없습니다.”

“닥치라고 했다!”

상사의 발길질에 생도들이 우르르 쓰러지며 바닥에 뒹굴었다.

“어디 뚫린 입이라고 그딴 개소리를 지껄여?”

상사가 변명을 하는 생도의 턱을 군화 뒷굽으로 꾹꾹 짓밟았다. 여전히 구석에 선 와헷은 그 끔찍한 구타를 다 지켜보며 공포에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오르는 패닉에 빠진 꼬마가 ‘누나야’라는 말만 작게 계속 반복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뭐야, 지금 대체 뭘 벌하는 거야?”

오르가 혼란에 빠졌다. 상사는 저들이 와헷을 납치한 것을 나무라고 있는 게 아니었다. 그때, 상사가 방금 전까지 생도들을 두들겨 패던 피 묻은 손으로 와헷의 작고 여린 손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그리고는 공동 샤워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소리 내면 너도 저렇게 돼.”

파랗게 질린 와헷은 왜 이러냐는 물음 한 번 꺼내지 못한 채 겁먹은 강아지처럼 상사를 졸졸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건너편에서 몰래 보고 있는 오르의 가슴도 까맣게 타들어갔다.

“설마, 설마.”

오르가 벽에 기댄 채 갈등에 휩싸였다. 그는 샤워장의 블록벽을 딛고 몇 발짝을 기어올라 환기창에 눈을 댔다.

“이런.”

오르는 눈앞의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파랗게 질린 와헷은 상사 앞에서 바지가 벗겨진 채 훌쩍거리며 울고 있었다.

“안 돼.”

오르마즈는 벽에 붙어있는 비상벨을 힐끔 보았다. 군데군데 설치된 저 벨은 의심스런 침입자를 발견했을 때 울리는 것이었다. 물론 그 외의 이유로 손을 댔다가는 군법회의감이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젠장.”

그는 눈을 꽉 감고 벨을 내렸다. 순간 귀청을 찢는 경보음과 함께 사방에서 서치라이트가 일제히 켜져 오르가 있는 샤워장을 비췄다. 철조망 너머 막사들에서도 수많은 병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르마즈는 얼른 샤워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와헷을 욕보이려 했던 상사와 생도들이 사방에서 켜져 창문으로 쏟아지는 불빛에 크게 당황한 듯 와헷을 둘러싸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출동한 병사들이 샤워장에 몰려드는 건 잠깐이었다.

“너.”

상사가 생도에게 장대를 집어 내밀고는 샤워장 한쪽의 깊은 수조를 가리켰다.

“꼬마 처리해, 저기 쳐 넣어서 누르고 있어. 내가 밖에서 시간 끌 테니까 확실히 없애. 우린 꼬마 시체를 찾은 거다. 알았나.”

명령을 내린 상사는 생도들을 놓아둔 채 샤워장에서 허겁지겁 나가버렸다. 상사의 명을 받은 생도들은 울고불고 애원하는 와헷의 입을 틀어막고는 수조로 거칠게 끌고 가기 시작했다. 와헷도 겁에 질렸지만 못지않게 생도들도 놀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닥쳐, 이 새끼.”

생도 하나가 소리를 지르려는 꼬마의 입을 틀어막았다. 샤워장 반대편 창이 살그머니 열리고 있었지만 그들의 귀엔 들릴 상황도 아니었다.

“들어가!”

그들은 버둥거리는 와헷을 사정없이 물에 밀어 넣었다. 물을 먹고 숨이 막힌 와헷이 버둥거리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생도들이 장대로 가슴을 꽉 내리눌러 물 밖으로 못 나오게 막았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누군가 타타탁 딛는 소리가 들려왔다.

“엇!”

뒤늦게 기척을 깨달은 그들이 고개를 휙 돌렸을 때, 손에 삽을 치켜든 오르가 붉은 눈을 부릅뜨고 막 휘두르려던 참이었다.

“피해!”

놀란 생도들이 이 정신 나간 병사가 휘두르는 삽을 피해 일제히 옆으로 피했지만 장대를 쥐고 있던 생도만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쨍 소리와 함께 오르가 휘두른 삽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생도가 와헷이 잠겨 있는 수조에 붕 날아가 풍덩 빠져버렸다.

“야, 이 변태새끼들아!”

오르가 찢어져라 큰 고함을 지르며 다른 생도에게까지 삽을 휘두르려 했지만 그의 행운은 여기까지였다.

“웁!”

다른 생도가 날린 주먹에 턱을 작렬당한 오르는 정신이 혼미해지며 삽을 떨어뜨리고 밀려나 물이 고인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몸을 움직이려 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 엄마…… 엄마.”

무력하게 쓰러진 그의 눈에 샤워장 천장의 대들보와 거미줄이 들어왔고, 어찌해야 할지 서로 눈치를 보는 생도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비상경보에 달려온 병사들이 무슨 소리냐며 샤워장 안쪽을 비추는 랜턴 불빛이 느껴졌다. 수조에서 기어 나온 와헷의 살려달라는 울음소리도 멍멍해진 귓속을 울렸다.

‘끝장이군.’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오르는 이런 생각을 했다. 그리 길지도 않았던 ‘민병대에서의 좋은 날’은 오늘로 끝난 것 같았다.

오르마즈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병상에서 깨자마자 헌병대에 체포된 오르마즈 카파키 일병은 ‘민병대의 보물 같은 재산’인 X생도에 대한 살인미수 혐의로 군법회의에 넘겨져 징역 20년을 선고받았고 생애 첫 번째로 죄수 신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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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이번 편도 짜르기가 애매하다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긴 글은 추천수나 코멘트가 줄어드는 징크스가 또 반복되면....=_=;;;

이제 다음 회부터는 카렐과 코리온, 주페와 세데스가 컴백하는

파트11. 내가 죽을 수 없는 이유

가 이어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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