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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955화 (950/1,132)

< -- 955 회: 파트10. 그를 사랑하는 여러 방법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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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오십시오. 빨리요.”

토로는 겁에 질린 오르를 데리고 서둘러 빈 병력수송차로 향했다. 그는 차에 앉자마자 얼른 히터부터 틀어주었다. 따뜻한 온기에 손을 대려던 오르는 갑자기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잠깐만 기다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오르가 다시 돌아오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여위고 너저분한 몰골의 까만 머리 소년을 데리고 나타난 오르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꼬마를 따뜻한 온기가 나오는 토출구 바로 앞에 앉혀주었다. 꼬마는 치안군 사관 군복의 덩치 큰 남자를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오르의 팔에 와락 매달렸다.

“괜찮아, 좋은 아저씨야.”

오르가 소년의 등을 토닥이며 달래주었지만 겁을 잔뜩 집어먹은 꼬마는 오르의 팔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토로가 오르의 형편없는 몰골을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게 어떻게 되신 겁니까? 투르케스크 도련님에겐 부대가 전멸해 전사한 것 같다는 통지까지 왔다고 들었습니다.”

“내 전사통지?”

오르마즈가 기가 막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럼 내가 죽은 줄로 안 거야?”

“예, 이미 장례까지 마쳤다고 들었는데요. 아지드 마님께서 아가씨는 꼭 돌아오실 테니 마을을 지켜달라고 워낙 간곡히 부탁하셔서 자원해서 머물고 있었지만 전사하셨다기에 저도 떠날 참이었습니다.”

엄마 이야기에 오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엄마? 어디로 가셨는데? 내가 올 걸 아셨다면서 어딜 가셔?”

격해진 오르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토로가 얼른 목소리를 낮추라고 손짓했다.

“마님하고 동생분들 모두 저희 치안부대에 잡혀가셨습니다. 코메트로 넘겨져 수용소에 들어가게 된 것 같았습니다. 이송되면서 중간에 잠깐 마님과 대화를 나눴는데 온통 아가씨 걱정 뿐이셨습니다.”

“수용소? 우리 가족이 수용소에 갔다고? 어디? 어디 수용소?”

파랗게 질린 오르가 토로의 소매를 덥석 붙들었다. 교단의 악명 높은 수용소에 관해서는 이미 민병대에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터였다. 수감자들은 대개 1년을 넘기지 못했고, 수배자 가족들도 3년에서 5년을 버티지 못하고 하나 둘 죽어 나가다보니 웬만한 수배자들은 가족이 잡혀갔다는 말을 들으면 웬만하면 포기하고 자수를 하는 게 보통이었다. 야푸르 대신관이 고안한 악독한 방법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아버지는? 가족이 다 잡혀갔는데 그 인간은 어디서 뭘 하고 있냐고!”

격분한 오르가 다시 목소리를 높이자 토로가 급히 오르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하세요, 가문 정보파트에 알아보니 아가씨 전사통지 직후에 아케메니아 쪽 요직으로 승진되어 코윈을 떠나신 것 같다고 합니다. 민병대나 제니안에선 전사자 가족은 승진시켜 주는 게 관례이고 …….”

토로가 말을 잇기 거북한지 오르마즈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오르가 굳은 얼굴로 재촉했다.

“그 인간한테는 더 실망할 것도 없으니 그냥 말해도 돼.”

“가족이 수용소에 잡혀가면 식솔들 때문에 자수하는 걸 막으려고 새 짝을 붙여 재혼을 시키고 최대한 먼 곳으로 발령내는 게 보통이랍니다.”

“허. 대체 어떤 놈들이 더 나쁜 놈들인 거야? 그렇다고 처자식 버려두고 냉큼 가는 인간은 뭐냐고!”

오르마즈의 얼굴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듯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에 떨고 있는 그의 모습에 당황한 토로가 급히 말을 돌렸다.

“수용소는 워낙 여러 군데 있으니 어디로 가셨을지는 모릅니다. 수배자의 자수를 유도하기 위해 가족들을 잡아두는 거라서 자리만 잡으면 우편물 정도는 보낼 수 있게 한다고 들었습니다. 제게 보낸다고 하셨는데 검열 때문에 늦어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이것부터 드세요.”

토로는 차량의 한쪽에 실린 군용 비상식 2개를 오르에게 내밀었다. 먹을 것을 본 오르는 봉지를 뜯어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소년에게 먼저 건네주었다.

웬만한 사람은 입맛도 돌지 않을 뻣뻣한 영양바를 걸신들린 듯 먹고 있는 오르의 모습을 딱하다는 듯 바라보던 토로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아지드 마님께선 혹시라도 아가씨께서 돌아오시면 절대 가족을 찾지 말고 남극성당의 라카……무슨 박사에게 꼭 찾아가시라고 전하라 했습니다.”

영양바를 게걸스럽게 먹던 오르는 먹던 것을 뚝 멈추고는 낙인이 있는 자신의 팔뚝을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그도 나즈라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을 생각 안 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꼴로 돌아갔다가는 선량하게 잘 살고 있는 그까지 위험에 몰아넣을지 모른다는 걱정에 결국 그 생각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안 돼……, 이젠 너무 늦었어.”

오르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영양바를 힘들게 씹었다. 그제야 오르의 낙인을 본 토로도 낮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하필 헤크마 파벌의 낙인이군요……. 그쪽 무리는 워낙에 질이 나빠서 교수형도 아니고 무조건 화형에 처한다고 들었습니다.”

‘화형’이라는 말에 오르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절대 탈영 못 할 지독한 부대에 넣으라던 투르케스크의 말이 이렇게 돌아온 모양이었다.

“……나 그럼 이제 어쩌지?”

오르가 다 먹은 영양바 껍질을 초조하게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

“낙인을 지워보려고 별짓을 다 해 봤어. 흉터 없애는 약도 발라보고 칼로 긁어도 봤는데 아무 효과가 없어. 난 그냥 잡혀갔다 돌아온 것뿐이고 나쁜 짓도 안 했는데 이까짓 낙인 때문에 왜 내가 타죽어야 하냐고.”

억울함과 서러움을 견디지 못한 오르가 다시 무릎에 얼굴을 묻고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토로가 외투를 벗어 그의 등에 조심조심 덮어주었다.

“가족들을 구해야 돼, 어떡해야 하지? 빌루이 할아버지한테 부탁하면 되지 않을까?”

오르가 간곡한 표정으로 토로를 올려보았지만 그는 힘없이 고개를 젓기만 했다.

“종장님도 그동안 둘째도련님 일로 너무 많이 속을 썩으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참아 넘기셨지만 이번엔 좀 과했어요. 도련님이 민병대까지 영지 안에 끌어들이셨으니 그분께서도 가족들을 코메트에 인계하라는 명령서에 서명을 안 하실 수가 없었죠.”

“그럼 죄 없는 우리 엄마하고 동생들은 어떡하냐고?”

울고 있는 오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토로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어…….”

“응?”

“제가 군인으로서 이런 말씀 드리기 뭣하지만 ……차라리 민병대에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미쳤어? 안 돼, 난 그런 짓 못해. 민병대는 무슨 개뿔 민병대야, 미친 살인마들 집합소라고. 죽느니만 못해. 차라리 자수하고 엄마라도 만나고 나서 죽을래.”

오르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토로가 그런 오르의 팔을 꽉 붙들며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헤크마 무리 같이 더러운 강경파 반군들이 아니고 온건파 민병대 말입니다. 같은 민병대 이름을 달고 있지만 교단을 부정하는 게 아니고 종교자유와 정교분리만 주장하는 온건한 단체입니다. 강경파보다 숫자는 적지만 정예군이고 교단과도 협상한다고 들었습니다.”

“날 여기로 돌려보내면 어쩌고?”

오르마즈가 팔뚝의 헤크마 군벌 낙인을 다시 내보였다.

“아뇨,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아가씨 같은 이유 때문에 강경파에서 온건파로 도망치는 민병대원이 적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민병대에 제가 아는 장교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도 강경파에서 빠져나왔다고 들었습니다. 편지를 써 드릴 테니 이걸 갖고 아케메니아의 판지셰르라는 곳으로 가세요. 제게 빚진 게 있으니 제 부탁이라면 분명 온건파 부대와 연결해 줄 겁니다.”

토로가 그 자리에서 종이를 꺼내 급히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가진 돈을 모조리 털어 편지와 함께 오르에게 내주었다. 편지에는 ‘케레사스 솔로스 중위’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제가 아케메니아로 가는 화물선을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일단 이 친구한테 가셔서 보호받고 계세요. 아지드 마님 소식은 제가 받는 대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가씨께서 무사하시다는 걸 알면 마님께서도 기뻐하실 겁니다. 아셨죠?”

토로는 떨고 있는 오르를 꼭 안아주었다.

“이제부턴 혼자서 개척하셔야 합니다.”

“응, 알아.”

오르도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대신해 모녀를 지켜 준 이 무뚝뚝한 토로 아저씨의 우람한 등을 껴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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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때가 다 되어 일어난 아메스는 호기심어린 눈으로 황후의 재등장을 기다리는 시녀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오후 내내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일어난 그는 시녀들이 미리 준비해 둔 세숫물을 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목욕물을 받아놔야지 이게 뭐냐.”

“하루 정도 목욕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답니다. 머리도 감지 않으시는 게 좋고요.”

유모가 이번에도 여지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메스는 자느라 부스스해진 머리를 만지며 싫은 표정을 했다.

“이 꼴로 본가 ……아니, 사가에 가라고?”

“원정 직전에도 한 번 다녀오시지 않았습니까. 최대한 안정을 취하실 수 있도록 문병은 나중으로 잡지 그러셨습니까.”

“아버지께서 위험천만한 전장에서 중상을 입고 돌아오셨는데 딸이 나몰라라 할 수는 없잖아.”

아메스가 세숫물에 마지못해 손과 얼굴을 담그며 성의 없이 대답했다. 카이, 엘룬과 함께 페스트의 토벌전을 끝내고 돌아온 페로는 바에자와의 싸움에서 입은 부상이 워낙 커서 제국회의 무렵까지 적어도 며칠은 종가에 머무르며 요양을 해야 할 상황이었다.

“국구께도 문병보다는 회임 성공이 더 기쁜 소식이 될 겁니다.”

“됐어, 이보다 상황 훨씬 나빠도 임신 척척 잘들만 하는데 괜히 황실이랍시고 유난 좀 떨지 말라고.”

“베아트릭스 황빈 때 첫 임신 시도에 실패해 소중한 캡슐을 한 개 더 쓴 일도 있지 않습니까.”

“알았어, 알았어.”

끝도 없는 잔소리에 질린 아메스가 짜증을 내며 얼굴의 물기를 털고 돌아섰다.

“어차피 아버지 만나는 거니 대충만 차려입고 가지 뭐.”

친정으로 갈 그는 요란스런 황후의 정복 대신 저고리와 치마에 비단포와 머플러만 걸친 편하고 단출한 차림새로 꾸몄다. 그리고는 화장도 거의 하지 않은 맨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라면 체통 없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을 유모도 이번만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 늦기 전에 가자.”

아메스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마냥 경호 가디언을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140층의 전용 주기장으로 향했다. 그의 뒤에는 평소처럼 20여명이 넘는 시녀와 수행원들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 모두 지난 오후동안 ‘공주를 임신했을’ 황후에게서 무슨 반응이라도 없을지 잔뜩 긴장한 내색들이었지만 그는 침소를 나온 후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참다못한 유모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침대에선 알려드린 대로 잘 하셨는지요.”

“응.”

“그럼 돌아오셔서 저녁엔 내의원에서 다시 2차로 면역억제 주사를 맞으시고…….”

“친정에서 하룻밤 자고 올 거야.”

“예에? 또요?”

유모가 당혹스런 얼굴로 얼른 수행원들 눈치를 보았다.

“지난번 가셨을 때도 하루 주무시고 오시지 않았습니까. 황상이나 황태후께서도 안 계시온데 황후께서 또다시 외박으로 궁을 비우시는 건 옳지 않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하룻밤인데 뭐 어때. 황상께서 계실 때도 친정에서 자고 오는 건 맘대로 해도 된다고 하셨는데.”

아메스가 엘리베이터에서 목소리까지 높이며 버럭 화를 내자 유모도 마지못해 입을 다물었다. 원치 않았던 인공수정을 억지로 해야 했던 황후는 신경이 곤두선 기색이 역력했다. 유모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하룻밤만 쉬고 오십시오. 마음이 편하신 게 성공적인 회임에도 도움이 될지 모르겠네요. 내의원에는 주사제 처방을 페로관 측에 알려주라고 하겠습니다.”

아메스가 유모에게 눈을 흘겼다. 이 늙은 여자의 머릿속엔 온통 ‘임신’이라는 단어밖에 안 들어있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아메스가 주기장에 발을 딱 들여놓았다. 옛 하렘이 있던 곳을 철거한 자리엔 황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작은 규모의 주기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으음?”

보안 엘리베이터 앞을 지키던 경비 가디언들이 황후 일행의 앞을 갑작스레 막아서자 수행원들이 갑자기 술렁대기 시작했다. 같은 순간, 아메스의 낯빛도 백짓장이 되었다.

스캐너를 몇 번이나 거듭 확인한 친위대 가디언 장교가 당혹스런 얼굴로 황후에게 다가와 머리를 조아렸다.

“스캐너에 보안물품 반출이 잡혔습니다. 송구하오나 방금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수행원 중 누군가가 반출 금지된 물건을 갖고 있는 것 같사옵니다, 폐하.”

“내 아랫사람이?”

“수행원들의 몸검사를 해야 할 듯하니 부디 양해해 주시옵소서.”

아메스는 입술에 잔뜩 힘을 준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감사합니다.”

두 명의 경비 가디언들이 휴대용 감지기를 가져와 아메스 일행의 몸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두의 경호원부터 시녀와 비서관들 대여섯 명을 지나면서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서로 눈짓을 주고받은 그 둘은 황후 아메스를 건너뛰고 그 뒤의 유모에게로 다가가려 했다. 그때, 아메스의 치마 옆을 스치던 감지기에서 삑삑거리며 소리가 울렸다.

“엇.”

순간 당황한 가디언들이 얼른 상급자의 눈치를 보았다. 장교 가디언 역시 하필 황후에게서 이런 반응이 나오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장교가 아메스에게 다가와 모기만한 소리로 물었다.

“저, 저어, 화, 황공하오나 ……황후 폐하에게서 유전자은행에서 등록한 최고보안등급 반출 금지물품이…….”

“당연히 그러하겠지.”

아메스가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예에?”

난처해하고 있는 황후를 대신해 유모가 장교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여 주었다. 그제야 무엇이 잡혔는지를 깨달은 장교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한 발 물러났다.

“송구하옵니다. 소장 미처 몰랐사옵니다, 무례를 용서하소서.”

“설마 무언지 보여 달라고는 하지 않겠지?”

아메스가 심술궂은 질문을 던지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난감해진 장교는 붉어진 얼굴을 급히 추스르며 황후 일행에게 길을 터 주었다.

“셔틀 이륙 준비되어 있사옵니다. 항로도 확보해 놓았으니 안전한 방문 되시옵소서.”

출구의 검문을 일단 무사히 통과한 아메스는 전용 셔틀에 아랫사람들과 함께 올랐다. 상석에 앉은 그는 이륙하는 셔틀 밖으로 보이는 두껍고 탁한 구름을 지켜보며 멍하니 앉아있었다. 황도 위에 드리운 구름이 발밑으로 점점 멀어졌다.

“황도는 날씨가 너무 칙칙해서 싫어. 한 달 내내 해를 거의 못 본 것 같아.”

“하긴, 페로관이 있는 3번 도시는 사막 경계라 날씨가 훨씬 좋지요. 그러시면 모처럼 햇볕이라도 듬뿍 쬐고 돌아오십시오. 건강에도 좋을 겁니다.”

“또 아기 얘기 하려 했지?”

아메스는 옆자리의 유모에게 장난스레 말하고는 책 한 권을 꺼내들었다.

“나 출출한데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만 갖다 주면 좋겠어. 코코아도 섞어주고.”

“아, 예, 알겠습니다.”

유모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셔틀 한쪽의 탕비실로 사라졌다.

유모를 보내놓은 아메스는 치맛단에서 캡슐을 다시 꺼내어보았다. 황제가 매어놓은 깨알같은 친필 리본이 여전히 눈에 거슬렸다.

“이딴 소리 다 소용없어.”

카이 때 일을 떠올리며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오른 그는 리본을 확 빼내어 주머니에 쑤셔넣어버렸다.

아메스의 난산, 아니 아기가 배를 찢고 나올 뻔했던 상상하기도 끔찍한 사고가 황제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건 출산 직후였다. 아기의 제대혈을 채취하려 태반을 확인하던 모렌 박사는 태반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는 경악했다. 태반은 아버지 역할을 한 유전자로 만들어지니 결국 카렐 쪽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온전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주제에.”

아메스가 이를 갈았다.

이후 황제의 남은 세포들을 서둘러 고쳐 다른 비빈들은 비슷한 봉변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 일로 지옥 구경을 했던 아메스는 ‘내가 실험동물이었던 거냐.’라며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아메스가 황제의 아이는 죽어도 안 갖겠다고 처음 다짐했던 게 그때였다.

황제는 모두 자기 탓이니 아이는 미워하지 말아 달라며 눈물까지 보였지만 아메스의 분노는 가시지 않았다. 심한 산후 우울증에 빠진 아메스는 둘째 출산은 고사하고 황제와의 잠자리도 거부했고 ‘엄마를 찢어 죽이고 태어날 뻔했던’ 카이에게는 젖도 주지 않고 방치해 버렸다.

결국 아기 카이는 낳아 준 엄마의 사랑을 거의 받지 못한 채 황제의 품에서 유모의 젖을 먹으며 커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4, 5일에 한 번 황후전에 드는 것도 거부당한 카렐은 격무에 지친 몸으로 150층 자신의 침실에 돌아와 엄마를 찾는 어린 젖먹이 맏아들을 토닥이며 쓸쓸하게 잠이 들곤 했다.

그 와중에도 황제는 카파키 가를 이을 둘째 태자를 빨리 가지라는 주변의 압박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자신의 여생에 불안해하며 아메스의 맘을 돌리려 애썼지만 이미 그의 마음은 너무 차갑게 식어 되돌릴 수가 없었다. 아메스는 ‘당신 자식은 더 이상 갖지 않을 테니 아무 놈 세포나 가져다가 알아서 대를 이어라.’라며 고집을 피워 황제를 더 궁지로 몰아붙였다.

황후의 계속된 출산 거부와 둘째 태자를 가지라는 압박 사이에서 난감해하던 황제는 ‘제위를 물려주지는 않겠다.’는 조건 하에 코리온을 아버지로 둘째 주페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아메스도 자신이 자초한 일인 만큼 당시엔 차라리 속이 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주페의 존재가 점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가 자의 반 타의 반 딸 크낙스를 가진 건 그 소년의 존재에 대한 묘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물론 주페는 올곧은 성격에 어머니 아메스와 외조부 페로에 대한 효심도 지극한 착한 소년이었다. 그렇지만 친아들 카이가 병이 나 앓기 시작한 이후로 아메스는 얄미울 만큼 건강한데다가 외모는 물론이고 지능까지 황제와 코리온을 닮아가는 주페가 주는 것 없이 밉고 두려웠다. 결국 비밀을 지키겠다는 황제와의 약속을 깨고 아버지 페로에게 그 사실을 넌지시 암시해 주는 바보짓을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메스는 다시 딸세포 캡슐을 노려보았다. 마치 자신의 몸을 갈가리 찢으며 튀어나올 기생 괴물의 씨앗 같은 느낌이 들었다. 때려죽인다 해도 자신의 몸 안에 이런 흉물을 넣고 싶지는 않았다.

아메스는 시녀장을 손짓해 불러들였다. 황후전 2인자이고 황궁에서 수백 년 잔뼈가 굵은 그 시녀는 임신에 대한 압박과 책임감, 공포 사이에서 갈등하는 황후에게 황제에 관한 이런저런 정보를 얻어다 주고 이번 계획을 앞장서 조언했던 똑똑한 여자였다. 그는 책을 보고 있는 황후의 발치에 얼른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부르셨습니까.”

“내 말했던 대로.”

아메스는 시선을 책에 고정시켜 둔 채 캡슐을 시녀장에게 슬며시 내밀었다. 황제의 살아있는 세포가 담긴 캡슐을 받아든 시녀장의 표정에 순간 긴장감이 확 번졌다. 그는 행여 누가 볼까 얼른 캡슐을 소매 속에 감추었다.

아메스가 여전히 책을 보고 있는 척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흔적 남기지 말고 없애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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