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48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메리크리스마스입니다~~
예고한대로 연재 재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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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저 방법밖에 없겠어.”
뒤이어 고개를 든 카렐도 세데스를 뒤따라 같은 곳에 리프트를 쏘아 걸었다. 그리고는 베흔이 말릴 새도 없이 한 손으로 줄을 쥐고 세데스처럼 낭떠러지로 휙 몸을 날렸다.
“젠장! 도대체 누굴 닮은 거야!”
‘두 손녀들’이 모두 절벽으로 뛰어드는 모습에 창백해진 베흔도 어쩔 수 없이 뒤따라 리프트를 쏘려 했지만 그의 리프트 케이블 끝은 북쪽 절벽에서 망가져 쓸 수가 없었다. 줄을 타고 절벽 밑으로 내리꽂힌 카렐은 공중을 크게 맴돌며 다치지 않은 한쪽 팔만으로 느릿느릿 줄을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쏴! 쏴서 저놈들 못 가게 해!”
뒤따라 건너갈 수 없어진 베흔이 이미 다리를 거의 건너간 헤네티들을 향해 석궁을 당기며 뒤따라온 자이납과 가디언들에게도 고함을 질렀다. 줄 하나에 위태롭게 매달린 채 큰 배낭으로 앞을 막은 헤네티들도 서둘러 건너려 했지만 베흔의 지휘 하에 계속 날아드는 볼트와 마우저 탄 속에서 계속 걸음이 느려졌다.
그때, 자이납이 쏜 마우저 한 발이 제일 선두에서 막 땅을 디디려던 헤네티의 누더기가 된 배낭을 완전히 관통해 몸 한쪽을 찢어놓았다.
“우악!”
치명상을 입은 헤네티는 줄을 놓치며 커다란 불덩이가 되어 까마득한 절벽 밑으로 멀어져갔다. 그렇지만 바로 그 뒤의 헤네티가 몸을 휙 날려 제일 먼저 땅을 디디고 섰다.
“머뭇거리지 말고 황제부터 죽여!”
다리를 타고 뒤따라오고 있는 대장 사카의 고함에 그는 카렐이 매달려 오르고 있는 케이블을 끊으려 황급히 방향을 돌렸다.
“어딜!”
거의 같은 순간,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땅을 밟은 세데스가 그 헤네티의 등 뒤에 대고 투척도끼를 힘껏 날렸다. 기습에 놀란 헤네티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지만 도끼가 어깨 한쪽을 찍고 날아가면서 짧은 비명과 함께 휙 돌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제발 빨리 올라오십시오, 폐하!”
세데스는 누더기가 된 배낭으로 앞을 가리고 헤네티들이 건너오고 있는 다리로 돌진했다. 한때 그리도 지긋지긋하게 미워했던 황제이지만, 지금은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제가 이 다리를 자르면…….”
한 손에 칼을 빼들려던 세데스는 다리 중간의 헤네티가 쏜 마우저에 배낭을 명중당하며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배낭을 끌어안은 채 일어나려 했던 그는 옆구리에 힘이 안 들어간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손으로 만져보니 배낭은 완전히 뚫려 있고, 옆구리로는 끈끈한 체액이 주르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빌어먹을, 쿠베 그 새끼.”
악에 받친 세데스가 옆구리를 쥐고 악을 쓰며 일어나려 버둥거렸다. 그새 헤네티들이 하나 둘 땅을 밟았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줄을 타고 올라온 카렐도 오른손으로 이곳에 기어오르는 중이었다.
“세데스 경?”
세데스의 신음소리를 들은 카렐이 오른손에 나즈라, 아니 야푸르의 푸른 검을 빼들고 괴성을 지르며 마지막 남은 4명의 헤네티들에게 돌진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채 절룩거리며 달려오는 카렐을 본 사카가 칼을 빼들고 그의 앞을 막아섰다.
“이 가짜 대신관놈을 이제야…….”
“이 칼이 누구 것인지 알면 닥쳐라!”
얼굴을 향해 날아드는 마우저를 재빨리 몸을 돌려 피한 카렐은 앞을 막아서는 헤네티의 방패를 그대로 관통해 목젖까지 단번에 찢어냈다. 찢겨진 방패 조각과 살점에서 튄 붉은 피가 그의 얼굴은 물론이고 팔꿈치까지 온통 검붉게 물들였다.
“누가 진짜 주인인지 이제 깨달아 봐라!”
카렐은 부상을 입은 왼손으로 이곳까지 타고 올라온 긴 케이블을 마치 채찍처럼 주변에 크게 휘둘렀다. 끝에 작은 고리를 매단 보일 듯 말 듯 아주 가는 금속줄이 헤네티들의 목 높이에서 공중을 휙 돌았다.
“숙여!”
사카가 비명처럼 고함을 질렀다. 생각지도 못한 것이 무기가 되어 날아들자 놀란 헤네티들이 급히 머리를 숙였지만 한 명만은 그러지 못했다. 조금 전 카렐에게 마우저를 쏘았던 헤네티는 무기와 한쪽 팔, 목이 순식간에 긴 케이블에 엉키며 카렐에게 주르르 끌려갔다. 카렐은 줄에 걸린 이 불쌍한 희생물을 절벽 쪽으로 온 힘껏 잡아당겼다.
“우, 우, 우아악!”
줄에 엉켜 온몸이 옴짝달싹 못 하게 된 헤네티는 카렐의 괴력에 끌려 긴 비명을 남기며 절벽 밑으로 사정없이 동댕이쳐졌다. 또 한 명을 저세상으로 보낸 카렐은 마지막 남은 사카와 두 헤네티―그 중 하나는 다쳐 쓰러져 있는―에게 휙 돌아섰다. 순간 그의 눈앞에 무언가가 번쩍했다.
“엇!”
헤네티가 쏜 마우저가 무심코 치켜든 그의 손목을 때리고 미끄러지며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카렐의 손목에 아직까지 채워져 있었던 파란 색의 페로 가디언 팔찌가 쩍 소리를 내고 둘로 갈라지며 바닥에 뚝 떨어졌다.
“아, 아아악.”
급소에 일격을 당한 카렐이 손목을 쥐고 주춤거렸다. 페로가 특별히 만들어 준 두껍고 튼튼한 가디언 팔찌가 아니었다면 뇌간이 있는 손목이 갈가리 찢기며 즉사했을 터였다.
“걸렸다!”
비틀거리는 적의 모습에 흥분한 헤네티는 또 다른 적들이 있다는 것을 순간 잊고 말았다. 완전히 노출된 카렐의 손목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 무심코 몸을 일으켰던 그는 절벽 건너편에서 기회만 노리고 있던 베흔이 쏜 볼트에 어깨와 쇄골을 명중당하며 악 소리를 지르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제 성하게 남은 건 사카 하나뿐이었고, 그도 이번 기회를 버릴 맘은 없었다.
“난 한 분께만 충성한다!”
사카는 이미 카렐의 코앞까지 달려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엔 단검 하나뿐이었다. 건너편에서 자이납이 쏜 마우저가 사카의 팔을 찢어냈지만 그는 미동조차 없이 오직 카렐만 노려보며 달려들어왔다. 카렐이 칼을 휘두르려 했지만 방금 손목을 맞은 충격에 팔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함께 죽으려는 상대의 속내를 깨달은 카렐이 주춤거리며 물러났지만 다친 두 다리로는 제대로 도망칠 수가 없었다. 사카는 악을 쓰며 달려와 카렐의 가슴팍 옷자락을 덥석 붙들었다.
“같이 가자, 이 가짜야.”
막 카렐을 껴안으려던 사카의 몸이 갑자기 투명한 벽에라도 부딪친 것처럼 갑자기 출렁 하고 흔들렸다.
“너 혼자나 가! 이 좀비야!”
사카의 등 뒤에서 악을 쓰는 세데스의 목소리가 들려오면서 사카가 그 자리에서 파르르 떨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세데스가 리프트 케이블 끝을 손에 꽉 쥐고 끌려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그가 석궁으로 쏜 케이블 끝 고리가 이번엔 사카의 단단한 등판에 박혀 있었다.
“난 아직 못 가거든?”
카렐이 케이블에 박혀 더 이상 못 다가오고 있는 사카를 왼쪽 팔꿈치를 휘둘러 힘껏 쳐냈다. 팔에 맞은 충격과, 세데스의 당기는 힘에 밀려난 사카는 카렐의 옷자락을 움켜쥔 채 그대로 뒤로 붕 날아가 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아, 아흑.”
바닥에 나동그라진 사카가 칼을 주워 등에 박힌 케이블을 잘라내고 다시 일어나려 했다. 그렇지만 그는 이제 더 이상 남은 기회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함께 건너온 부하들은 부상을 입고 쓰러진 둘을 빼면 모두 죽었고, 건너편에 있던 베흔과 두 가디언들이 이미 다리를 건너오고 있었다. 게다가 손목을 맞은 충격에서 벗어난 카렐도 다시 칼을 고쳐 쥐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틀렸다.”
사카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 해는 완전히 저물어 주변은 완전히 깜깜했다. 가망이 없음을 깨달은 사카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부상을 입은 채 쓰러져 있는 두 부하들의 뒷덜미를 덥석 붙들었다. 그리고는 이젠 줄 하나만 옹색하게 걸려 있는 다리로 도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너희라도 살려서 돌아간다.”
사카의 입 안에 이 말이 낮게 맴돌았다. 부하들을 다리까지 끌고 간 그는 그들의 손을 다리의 밧줄에 꽉 쥐어주었다.
“놓치지 마라!”
그 순간, 조금 전 다리를 올려 걸었던 윈치가 주르륵 풀리며 다리를 다리 절벽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짧지만 치열했던 10분간 양쪽을 이으며 싸움터가 되었던 이 구름다리는 시간이 다 되자 여지없이 내려가며 양쪽을 끊어놓기 시작했다.
“뭐야! 이게 뭐야!”
다리를 건너려 했던 베흔은 건너편에서 줄이 풀리며 다리가 절벽 밑으로 무섭게 꺼지기 시작하자 혼비백산하며 되돌아가야 했다. 그새 다리 끝에 매달린 사카와 두 헤네티들도 풀리는 다리와 함께 절벽 밑으로 죽 멀어져갔다.
“도망가잖아! 잡아!”
카렐이 풀리는 다리를 타고 멀어지는 세 헤네티들을 보며 고함을 질렀다. 사카는 자신도 부상을 입은 몸이지만 자신보다 훨씬 큰 부상을 입은 부하들을 두 팔로 꽉 끌어안고 죽 내려가는 다리에 매달려 절벽 밑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쏴! 지금 죽여야 돼!”
가까스로 되돌아온 베흔과 일행들이 밑에 대고 석궁과 마우저를 마구 쏘았지만 맞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완전히 풀린 다리는 짙은 어둠이 드리운 까마득한 수직 절벽에 축 늘어진 채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리고 끝에 매달렸던 사카와 두 헤네티들도 중간에 떨어졌는지, 아니면 다른 곳에 매달렸는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저 몸뚱이로 여길 내려갈 수 있는 건 아니겠지?”
베흔이 다리가 있는 절벽 밑으로 몸을 내밀고 잔뜩 귀를 기울였다. 이 밑의 낭떠러지는 그의 기억으로는 이 아라무트 산 아래 정글까지 계속 수직에 가깝게 이어져 있었다. 그는 헤네티들의 비명이나 추락하는 충격음이 들려오기를 기다렸지만 밑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중간에 튀어나온 부분 때문에 그가 있는 쪽에서는 절벽 밑이 제대로 보이지를 않았다.
“그쪽에선 보이십니까!”
베흔이 건너편 낭떠러지의 카렐에게 물었다.
“글쎄.”
카렐은 헤네티들이 떨어뜨린 석궁을 주워 절벽 아래를 겨누었다. 다리 끝에 매달려 이곳을 도망간 사카가 더 큰 부상을 입은 두 부하들을 도와 어둠이 내린 낭떠러지 바위를 위험천만하게 타고 내려가는 모습이 그의 밝은 눈엔 선명하게 보였다.
“엇.”
위에서 자신을 겨누고 있는 것을 직감한 사카는 고개를 휙 돌려 카렐이 있는 곳을 올려보았다. 건너편 절벽 위에서 석궁 끝으로 자신의 등을 겨누고 있는 카렐과 그의 눈이 딱 마주쳤다. 깜깜하고 거리도 멀지만 서로를 알아보기는 충분했다.
“이런.”
공포에 질린 사카가 얼른 두 부하들을 몸으로 감쌌다. 그를 말없이 노려보던 카렐이 피로 뒤덮인 얼굴에 묘한 웃음을 지었다. 바위에 위험천만하게 매달린 저 손쉬운 표적을 당장이라도 쏠 수 있지만 카렐은 바로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네 진짜 주인으로서 한 번은 자비를 베푸마.”
카렐이 석궁을 옆에 내려놓았다. 그의 여유로운 웃음은 순수한 자비심은 아니었다. 지금 저 몸을 죽이고 기억이 리셋된 다음번 몸을 또 상대하느니 자신에 대한 기억을 그대로 가진 지금 저자를 다시 만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거든 네가 주인이라 잘못 알고 있는 자에게 전해라. 난 절대 죽지 않을 거라고.”
카렐은 그를 놔둔 채 뒤돌아섰다. 사카는 혹시라도 그가 다시 나타나 쏘지 않을까 웅크린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지만 카렐은 다시 나타나지는 않았다.
“우리가 졌다.”
참담해진 심정의 사카는 바위를 움켜쥐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품 안의 둘을 뺀 나머지 부하들은 전멸했고, 그 역시도 등에 중상을 입고 카렐의 팔에 맞아 어딘가가 부러진 것 같았다.
“돌아가자.”
사카는 부상을 입고 신음하는 두 부하들을 자신의 몸에 단단히 엮었다. 이 절벽을 내려가고, 다시 정글을 가로질러 살아 나갈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지만 이 정도로 포기한다는 건 그에겐 있을 수 없었다. 바위틈에 리프트 끝을 박아 넣은 그는 천천히 줄을 풀며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카렐은 한 손에 칼을 쥔 채 다친 다리를 절룩거리며 어둠이 짙게 드리운 사바브 교단의 궁전으로 향했다. 불빛은 하나도 없지만 궁전을 둘러싼 설화석고 담장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거려 가디언이 아니라도 충분히 찾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궁전으로 걷던 카렐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베흔과 다른 가디언들은 다리도 끊긴 절벽 건너편에 있고 세데스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카렐은 그들에게 돌아오겠다는 손짓을 하고는 혼자서 칼을 단단히 고쳐 쥐고 걸었다. 얼굴은 이마에서 흐른 피로 엉망이었고, 팔은 찢겼고, 다리엔 도탄이 박혔고, 손목은 얼얼했다. 사카의 손에 옷이 찢기면서 훤히 드러난 왼쪽 어깨와 팔에는 검은 용 문신이 피에 물든 채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다음엔 또 누구냐.”
카렐은 어디선가 튀어나올 피다이들을 예상하며 최대한 감각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그가 담장 중간의 철문에 거의 다가갈 때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인기척도 없었다. 사람 키 대여섯 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철문은 굳게 닫힌 상태였다.
카렐은 칼을 집에 꽂아 넣고 두 팔로 문을 힘껏 밀었다.
“으음?”
육중한 문은 쉽게 밀리지는 않았지만 잠겨 있지도 않았다. 그의 강한 힘에 밀린 양쪽의 거대한 철문은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천천히 밀렸다. 열린 문 사이로 환한 빛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의 눈에 처음 들어온 건 정사각형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카렐은 열린 문 앞에 서서 잠시 안을 노려보았다. 고요한 정원 중간엔 분수대가 물을 뿜어내고 있고, 색색의 조명이 회랑과 정원을 밝히고 있었다. 바깥의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모두 겪고 온 카렐에게는 이 조용하고 화사한 정원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불편한 다리를 끌고 텅 빈 정원에 천천히 들어섰다. 경비병도, 피다이도 없었다. 졸졸 떨어지는 물소리, 색색의 꽃과 나비들, 당장 가든파티를 열어도 될 만큼 잘 차려진 파티 테이블과 촛불, 수북이 쌓인 향기로운 과일들이 그를 마치 다른 세상에 온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때, 정원 안쪽의 계단 위 홀에서 흰 로브 차림의 노인이 느릿느릿 모습을 나타냈다. 홀 앞에 멈춰선 카렐은 앞만 노려보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전 이곳의 성주이고 사바브의 교주인…….”
소개를 하던 ‘영감’이 말을 멈추고 다시 카렐을 내려다보았다. 카렐은 정면을 노려보며 우뚝 서 있을 뿐 그를 올려보지 않았다.
“짐의 머리 위에서 떠들 수 있는 건 날짐승뿐이다.”
정면을 노려보는 무지개빛 눈동자가 살기를 뿜어냈다. 피로 물든 그의 시선을 말없이 쳐다보던 노인이 억지로 웃었지만 어딘지 어색했다.
“지금 폐하의 위신을 따지며 이렇게 시간을 끄실 상황이 아닐 것 같습니다만. 지금 저 안에선 황태후께서 굶주린 사내들에게…….”
카렐은 이를 악물고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카렐에게서 여전히 대답이 없자 억지로 웃고 있던 영감의 표정이 차츰 굳어져갔다. 그는 결국 웃음을 멈추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폐하를 맞으려 파티 준비를 해 놨습니다.”
영감이 카렐 앞에 똑바로 서서 여유를 부리려 했지만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이 황제는 여전히 입술에 힘을 꽉 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던 영감은 결국 황제 앞에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지금 보니 생고기를 준비하는 걸 미처 생각 못했군요.”
영감이 자존심 상한 듯 결국 한 마디를 쏘아붙였지만 카렐은 그런 영감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며 태연히 대답했다.
“짐이 왜 여기까지 와야 했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 자리에서 그대를 씹어먹어버릴 테니 상관없다.”
“그러시는 폐하께선 황태후가 왜 여기까지 와야 했는지 알고 계십니까?”
“나에 대한 시험은 끝난 것 아닌가? 하산 교주.”
카렐이 한쪽 입꼬리를 살짝 치켜 올리며 음산한 말투로 대답했다. 허리를 굽히고 있던 영감의 하얀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알고 오셨습니까?”
카렐이 비로소 그에게 허리를 들라 손짓했다.
“오르마즈 그 양반이 내가 어머니를 구하러 오지 않으면 어찌하라 했는가.”
“당신의 시신을 무책임한 자에게 넘겨주지 말고 지금 계신 곳과 함께 불태워 없애라 했습지요.”
“어머니는?”
“폐하께 돌아가지 못하도록 가둬두고 폐하께서 고통스런 죽음을 맞을 때까지 절대 풀어주지 말라 하셨습니다.”
영감이 고개를 들고 카렐을 올려보며 뻐드렁니를 드러내고 히죽 웃었다.
“나는 어찌하라 했고?”
“폐하는 어떡해서든 계속 살려놓으라 했습니다. 잔딕에 서서히 말라죽도록.”
“그 양반다운 탁월한 선택이군.”
카렐이 피투성이가 된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160년짜리 계약의 대가로 그대는 뭘 받았나?”
“제 교단 선조들께서 마구스 시절에 쓰셨던 오닉스 조각 정도면 나쁘지 않죠.”
‘영감’이 이마의 서클렛에 걸린 큼직한 오닉스 조각을 만지작거리며 천박하게 킬킬거렸다.
“시체를 훔치고 지키는 것까지는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폐하께서 시신을 거둘 자격이 있으신지 확인하려는 무대장치는 좀 힘들었지요.”
영감은 어린애 주먹 만한 작은 가죽 주머니를 내밀었다. 주머니엔 목에 걸 수 있도록 긴 줄도 달려 있었다. 안에는 몇 개의 보석과 열쇠, 그리고 꼭꼭 접힌 작은 쪽지가 들어있었다.
“제 의뢰인의 시신이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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