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46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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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와 목마름에 지쳐 녹초가 된 헤네티 하나가 빨갛게 잘 익은 망고나무를 가리키며 물었다.
“설마 이거 독은 없겠죠? 따 먹어도 되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저희도 먹는 거니까요.”
데이는 기이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드실 수 있을 때 맘껏 드십시오.”
그 헤네티는 망고 하나를 따서는 동료들의 눈치부터 보았다. 빤한 과일나무지만 다른 곳도 아니고 암살교단의 본거지에서 자라고 있어서인지 선뜻 입에 가져가지는 못했다. 하지만 ‘네가 먼저 먹어 봐.’라는 동료들의 매서운 눈빛에 그도 결국 입에 깨물었다.
“우음.”
달콤하고 잘 익은 단물이 입 안으로 흘러들었다. X특유의 예민한 감각기에 느껴지는 나쁜 성분도 전혀 없었다.
“맛있는걸.”
“정말?”
지난 며칠간 지겨운 비상식량에 미각도 엉망이 되었던 헤네티들은 달콤한 과일 향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나무에 달려들었다.
“괜찮을까요?”
선임사관의 물음에 사카도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평소 엄격하던 그이지만 지난 며칠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고생한 부하들을 이번만은 따로 제지하지 않았다.
“이거 진짜 맛있는데? 사 먹는 것하고는 달라.”
잠시 어린애로 돌아간 헤네티들은 이전의 그 사납던 전사들이 맞나 싶을 정도의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망고와 용과를 따고, 나무에 기어올라 잘 익은 바나나 송이와 코코넛을 떼어내 동료들에게 던졌다.
데이는 한쪽에 말없이 선 채 과일을 게걸스레 따먹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즐거워하는 부하들의 모습에 화가 조금 풀린 사카도 처음보다는 한결 온화해진 투로 물었다.
“우린 어디 머물면 되는 건가?”
“이 다음번 담 너머에서요.”
부하들이 과일을 물릴 만큼 먹을 때까지 기다려 준 사카는 다시 데이를 따라 움직였다. 뱃속이 든든해진 헤네티들은 한결 긴장이 풀린 얼굴로 다음번 문으로 걸었다. 이번엔 큰 돌들을 쌓아 만든 유달리 높은 담이 그들 앞을 막고 있었다. 거의 3, 4층 높이는 되는 담 앞에서 사카가 잠시 긴장했지만 이번에도 아무 일 없이 문이 열렸다.
“움?”
문을 나선 사카가 멈칫했다. 그곳은 모래가 깔렸을 뿐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터였다. 게다가 맞은편은 난간도 없는, 말 그대로 하늘만 보이는 깎아지른 낭떠러지였다.
낭떠러지 건너편에는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넓어지는, 마치 버섯 모양을 한 희한한 바위가 보였다. 바로 그 바위 꼭대기에 흰 대리석으로 지은 진짜 궁전이 서 있었다. 유명한 아라무트의 궁전이 분명했다.
“뮤 세네피스는 저기에 있습니다.”
데이가 낭떠러지 너머 궁전을 가리켰다. 이 공터에서 건너편 버섯 바위 꼭대기의 궁전 사이는 100척(30m)이 넘어 보였다. 아무리 헤네티라도 한 번에 뛰어넘을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뭘 어떻게 가라는 거야?”
사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양쪽을 잇는 구름다리는 공터 끄트머리의 낭떠러지 밑으로 축 늘어져 있었다. 건너편 궁전 앞에서 이 다리로 가는 줄이 이어져 있는 걸 보아 저쪽에서 줄로 다리를 끌어올려야 비로소 이어지는 모양이었다.
데이가 이번에도 웃음을 지으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다리는 낮에만 한 시간에 한 번씩, 10분간 연결됩니다. 해질 무렵 마지막으로 한 번 연결될 테니 그때 건너가십시오. 하룻밤 편히 묵고가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미녀들과 소년들이 정성껏 시중을 들 겁니다.”
과일로 기분이 한껏 좋아진 헤네티들은 ‘미녀’라는 말에 눈을 번득였다. 황제의 것 못지않다는, 아니 도리어 더 낫다는 아라무트 궁전의 하렘을 구경할 수 있다는 말에 혈기 왕성한 사내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냉정하게 표정이 변치 않는 건 사카 하나뿐이었다. 그는 막 돌아서려는 데이의 어깨를 붙들고 낮은 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이 공터에서 왜 이리 피 냄새가 나는지 이유를 알려줄 수 있나?”
데이가 씽긋 웃으며 돌아섰다.
“여긴 궁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자를 걸러내는 자리이기도 하니까요.”
사카가 눈살을 찡그렸다. 데이가 기이한 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잡은 그의 손을 떨쳐냈다.
“걱정 마십시오. 해질 때까지만 기다리시면 다리를 건너 들어가실 수 있습니다.”
데이는 사카 일행을 피 냄새 나는 공터에 놓아둔 채 휙 돌아섰다. 사카가 그의 뒤에 대고 말했다.
“밖에 내 부하 다섯을 남겨놓고 왔다.”
“알겠습니다. 당장 들어오게 하라고 문지기에게 알리지요.”
데이는 사카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는 혼자서 성큼성큼 온 길을 돌아서 멀어져갔다.
멀어지는 데이의 입가에 짧은 혼잣말이 스쳤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말이지.”
북쪽 절벽은 베흔 말대로 산을 타는 기술이나 체력으로 오르는 길이 아니었다. 추락하는 데만도 한참이 걸릴 만큼의 까마득한 높이에서 한 번도 겁을 먹거나 중심을 잃지 않고 묵묵히 같은 걸음을 내디딜 만큼 배짱과 집중력이 있는 사람만이 가능한 길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운도 필요했다.
“이씨, 또.”
꼭대기 부근에서 또다시 불어온 강풍에 세데스가 흔들렸지만 이번엔 바위에 기대어 어렵사리 중심을 잡았다. 그는 거친 숨을 씩씩대며 순전히 오기 하나로 이 끔찍한 발판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갔다. 그는 위도, 아래도 쳐다보지 않고 최대한 머리를 비운 상태로 그저 앞만 똑바로 보고 걸었다. 마치 터널처럼 주변 아무 것도 그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
날은 조금씩 어두워져 이제 어스름이 드리우고 있었다.
“여기.”
세데스는 눈앞에 불쑥 나타난 큰 손에 깜짝 놀라 이번엔 정말로 중심을 잃고 말았다.
“으악!”
“쉿!”
막 떨어지려는 그의 팔목을 파란 팔찌가 끼워진 큰 손이 덥석 붙들었다. 세데스의 두 발이 까마득한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파랗게 질린 세데스는 그제야 머리 위를 쳐다보았다.
“마지막 발판 몇 개가 부러졌으니 내 손 잡고 올라오라고 몇 번이나 말했더니만, 안 들렸나.”
이미 꼭대기에 발을 디딘 카렐이 자신의 손에 매달린 세데스를 보며 혀를 끌끌 찼다. 세데스는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황제를 멍하니 올려보며 짧게 공포감을 느꼈다.
“비명은 지르지 말게. 저쪽에 적이 있는 것 같아.”
세데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황제는 그를 한 팔로 번쩍 끌어올려 평지에 올려 주었다. 거의 한 시간 만에 단단한 땅을 디디고 선 세데스는 마치 딴 세상에 온 것 같았다.
세데스를 끌어올린 카렐은 몸을 잔뜩 낮추고 바위 뒤로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그곳엔 먼저 온 베흔이 망원경으로 어딘가를 뚫어지게 살피는 중이었다. 상대가 예민한 X 헤네티들이다보니, 그가 수화로 상황을 알렸다.
- 남쪽 길로 올라오는 우리 애들하고 교전중입니다. -
이곳 반대편인 꼭대기의 남쪽 모서리 부근에 옹기종기 모여 절벽 밑에 대고 무언가를 쏘아대고 있는 헤네티 5명의 등이 보였다. 카렐 일행은 그들의 뒤로 온 셈이었다.
카렐은 베흔과 세데스에게 손가락으로 재빨리 수화를 전했다.
- 난 9시 방향, 너흰 3시 방향 -
카렐의 수화를 받은 베흔과 세데스는 몸을 잔뜩 낮추고 그들 뒤로 접근해 들어갔다. 절벽 밑에서 올라오는 자이납 일행에 정신이 팔린 헤네티들은 등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계속 마우저 당기는 데만 열중해 있었다.
베흔과 세데스는 신발까지 모두 벗어던지고 그들에게 반 스타디아(75m) 거리까지 바싹 접근해 들어갔다.
“움?”
그들 중 예민한 한 명이 비로소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어슴푸레 지고 있는 놀 사이로 재빨리 움직이고 있는 두 사람의 형상을 바로 발견했다.
“5시 방향!”
뒤쪽으로 마우저를 휙 돌리려던 헤네티들은 그 둘보다 훨씬 가까이 다가와 있는 진짜 괴물은 아직도 모르고 있었다. 공중을 날카롭게 꿰뚫고 날아온 짧은 투척단검이 베흔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려던 헤네티의 귀밑을 정확히 뚫었다.
“4시 방향에 또…….”
단단한 바닥을 맨발로 소리도 없이 가로질러 뛰어온 검고 날렵한 괴물이 적의 첫발을 피해 공중으로 휙 뛰어올랐다.
“감히 누구에게 쏘나!”
카렐이 마우저를 쥔 오른팔을 대뜸 낚아채 아드득 소리가 나도록 비틀었다. 카렐을 쏘려 했던 헤네티들은 비명을 지르는 동료의 뒤에 몸을 숨긴 카렐을 보고는 잠시 움찔거렸다. 카렐은 그새를 놓치지 않고 단검으로 헤네티의 급소를 푹 찔렀다.
“우욱!”
그 불운한 헤네티의 목 뒤에서 불꽃이 이는 순간, 카렐은 막 타들어가려는 이자의 몸뚱이를 적들에게 힘껏 밀었다. 그들 중 하나가 반사적으로 동료의 몸을 받으려 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물러섰다.
“으, 으아앗!”
손과 가슴에 불이 옮겨 붙은 헤네티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물이라도 있으면 수습하겠지만 물은 고사하고 흙도 한 줌 없는 바위산 위에서 불을 끌 방법도 없어 혼비백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너도!”
카렐은 불이 옮겨 붙은 적을 일단 놓아둔 채 네 번째 적을 향해 돌아섰다. 칼과 방패로 제대로 무장한 이번 상대는 적이 동료 둘을 쓰러뜨릴 동안 조용히 기다리고 있어주지는 않았다. 카렐이 막 고개를 돌아선 순간, 그 헤네티가 기를 쓰고 휘두른 날카로운 방패 모서리가 카렐의 뺨과 코, 이마를 사선으로 길게 찢어냈다. 거의 같은 순간, 카렐의 칼에 잘린 그자의 목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이씨.”
네 번째 헤네티까지 쓰러뜨린 카렐이 칼을 짚고 휘청거렸다.
“너희가 두셋은 잡아준다며.”
카렐이 턱을 타고 주르르 흐르는 핏줄기를 손으로 막으며 그제야 한 명을 잡아놓은 베흔과 세데스를 째려보았다. 헤네티 다섯 중 넷이 그들의 무기와 함께 불에 타들어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베흔이 팔에 불이 옮겨 붙어 버둥거리던 헤네티의 목에 칼을 꽂으면서 일단 싸움은 끝이 났다.
“둘은 잡지 않았습니까.”
베흔은 무기가 없는 세데스에게 바닥에 떨어진 석궁을 주워 건네며 머쓱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사나운 카렐의 눈길에 베흔이 얼른 답을 바꾸었다.
“뭐, 그럼 ……하나 반이라고 해 두죠.”
“됐다.”
카렐은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난 깊은 상처 위에 대충 손수건을 묶고 몸을 일으켰다.
그는 절벽 밑에서 올라오고 있는 자이납과 2명의 가디언들을 확인했다. 출발할 때 자이납이 했던 호언장담처럼, 그들은 다섯 헤네티들의 견제 속에서도 꽤 가까운 곳까지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야속한 해는 이미 지평선에 가까워져 있었고 붉은 놀이 조금씩 드리우고 있었다. 카렐은 랜턴으로 그들에게 빨리 올라오라는 수신호를 보내고는 아라무트 궁전으로 돌아섰다.
“가자.”
“저 안에 나머지 헤네티들이 있을 겁니다. 자이납이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시죠.”
“어머니께서 안에 계신데, 지금 해가 지고 있는 게 안 보이나.”
카렐이 5구의 시체를 그대로 놓아둔 채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궁전 담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해가 지면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그제야 세네피스가 이곳에 온 ‘이유’를 생각한 베흔도 마지못해 그를 따라 걸었지만 불평불만은 여전했다.
“5명에도 얼굴이 이렇게 되셨는데 15명이 넘는 적들을 어떻게 당하시려고요.”
“가 보면 못 당할지 아닐지 알겠지.”
피로 범벅이 된 카렐은 뺨을 타고 계속 흐르는 피를 닦아내며 코발트빛 담 사이에 난 작은 문에 다가갔다.
“아무도 없습니다.”
먼저 발을 들여놓은 베흔이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문 주변은 물론이고 그 안의 모래 깔린 큰 훈련장도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을 만큼 텅 비어있었다.
“영감 이 인간 대체 무슨 생각이죠.”
베흔은 비어있는 훈련장이 맘에 걸리는지 내내 불안한 얼굴이었지만 카렐은 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훈련장을 가로질러 성큼성큼 걸었다. 훈련생들이 잘 다듬어놓은 모래 위에 세 사람의 발자국이 선명히 찍혀 흔적을 남겼다. 잠깐 새 훈련장을 가로질러간 일행의 앞에 두 번째 문이 나타났다.
“누군가 먼저 다녀갔습니다.”
베흔이 일단 황제가 들어오는 것을 막아서고는 먼저 안에 들어섰다. 갖은 과일과 꽃으로 가득한 식물원 바닥엔 앞서 헤네티들이 먹고 간 망고와 바나나, 용과 껍질이 가득했다.
“상황이 이렇지만 않다면 군침이 제대로 났을 텐데.”
과일 좋아하는 베흔은 식물원을 가득 채운 나무들 사이로 조심조심 걸음을 내디뎠다. 무성한 과일나무들 사이에 적이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잔뜩 경계를 하면서 한참을 나아갔지만 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맘 놓고 지나간 모양입니다.”
베흔은 흙바닥에 난 산만한 발자국과 과일껍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경계하면서 조직적으로 움직인 발자국이 아닙니다.”
“우리가 쫓고 있는지도 모를 테니까.”
카렐이 숨을 재차 가다듬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흔이 적들이 지나간 자리를 가리키며 이번에도 앞장서 나아갔다.
빽빽한 과일나무 숲을 지나고 나니 높은 담장이 나타났다. 카렐이 ‘침묵’을 손짓하며 그곳에 천천히 다가갔다. 담장 중간엔 작은 문이 있고, 잠겨 있지만 건너편에서는 남자들의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문에 귀를 대고 목소리 숫자와 크기, 진동으로 건너편 상황을 대충 어림한 카렐이 수화로 ‘20명 안쪽’이라고 전했다.
- 잠시 기다려. -
식물원으로 재빨리 돌아온 카렐은 남은 둘에게 손가락으로 자신의 양옆을 가리켰다.
- 담 위에서 공격한다. 내가 중앙, 베흔은 왼쪽, 세데스는 오른쪽이다. 소리 없이 움직여. -
- 자이납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
- 시간 없다. -
카렐은 웬만한 건물 3층 높이는 될 담에 매달려 엉금엉금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크고 거친 돌을 쌓은 수직의 담은 위험하기는 했지만 바위 타기의 전문가인 카렐이 못 오를 정도는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담을 오르던 베흔이 건너편 세데스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그의 바위타기 실력이 북쪽 절벽에서는 별반 소용이 없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능력을 보이겠다는 듯 틈새를 찾아 능숙하게 손을 짚고 위로 차근차근 올랐다.
담 꼭대기에 몸을 걸친 카렐이 눈을 슬쩍 내밀었다. 지평선 너머로 거의 사라져가는 해가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깎아지른 낭떠러지 너머에 저녁놀에 피처럼 붉게 물든 아라무트의 궁전이 보였다. 그렇지만 그곳으로 가려면 바로 담 아래의 넓은 공터에서 배낭에 기대 누운 채 잡담을 하며 떠들고 있는 16명의 헤네티들을 지나야 했다.
- 안쪽에서는 적이 못 기어오를 겁니다. -
마찬가지로 머리를 내민 베흔이 안쪽의 담을 가리켰다. 헤네티들이 있는 쪽의 벽면은 바위들이 튀어나와 우둘두둘한 이쪽과는 달리 기어오르기 거의 불가능한 매끈한 수직면이었다.
-도망갈 곳도 없으니 식은 죽 먹기다. -
카렐은 선착장의 적에게서 빼앗은 마우저를 들어 공터 안에서 여유롭게 쉬고 있는 헤네티들을 겨누었다. 황제로서 적의 무기를 쓰는 것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숨을 곳 하나 없는 이 넓은 공터에서 방어도 없이 널브러져 있는 적을 때려잡는 데는 이만한 무기가 없었다.
해가 지는 것을 본 카렐이 손가락을 들어 사격 준비를 지시했다.
바로 그때, 낭떠러지 건너편, 버섯 모양 바위 쪽에서 기다렸다는 듯 다리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곧 궁전과 이곳이 연결될 모양이었다.
“뭐야, 저건?”
카렐이 경악했다. 공터에 고립되어 있는 헤네티들을 여유롭게 쏘아 잡겠다던 그의 계획이 순간 엉망이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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