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33화 (928/1,132)

< -- 933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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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네피스를 데려갈 데이에게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일러준 이디나는 일단 그를 밖으로 내보냈다. 피다이 하나에 거의 패닉에 빠졌던 대신관 집무실은 그가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저 녀석 은근히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아트위야의 뜬금없는 한 마디에 이디나가 눈을 크게 떴다. 눈 높기로 소문난 이 현신이 미남도 아니고, 권력가도 아닌 일개 피다이에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 내심 기가 막혔지만 어쨌든 이디나 보기에도 그 사내가 보통은 아닌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사람으로 삼고 싶을 정도였다.

볼일을 마친 아트위야는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 그럼 이만.”

“괜한 데 목숨 걸지 마시고 웬만하면 그냥 보내십시오.”

이디나의 농담에 아트위야가 대답 없이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베일 밖으로 나가려던 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대신관을 휙 돌아보았다.

“아참, 황제와의 포로 교환 협상 제안은 하셨는지요.”

좋은 분위기에 갑자기 나온 기습적인 질문에 이디나는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저나 살름과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제 아들과 살름의 딸을 찾아와 주시겠다고요.”

대답을 못 하는 이디나에게 아트위야가 잔뜩 굳은 얼굴로 다시 채근했다. ‘원죄를 지고’ 대신관이 된 그를 앞장서 지지해 주었으니 대가를 내놓으라는 명백한 요구였다.

잠시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던 이디나는 가까스로 핑계거리를 생각해냈다.

“두 교단에서 내놓을 교환포로 명단을 주셔야 황제에게 연락을 하지요.”

“우리가 가진 피라미 포로가 그쪽 성에나 차겠습니까. 황제는 보나마나 아들 주페 태자를 요구할 텐데…….”

이디나는 말을 바꾸는 아트위야를 슬쩍 흘겨보았다. 처음엔 자기 교단이 가진 것을 모조리 털어 내줄 듯 하던 그가 이번엔 다하카르 교단이 가진 최고 거물 포로를 내놓아야 한다는 식으로 슬쩍 분위기를 이끌고 있었다.

“태자는 남부 세데스를 잡아놓는 무기니 하늘이 무너져도 못 돌려보냅니다. 일단 그쪽 명단부터 주시죠.”

이디나는 말이 길어지기 전에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대신관의 강경한 말투에 눌린 아트위야도 일단은 입을 다물고 한 발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그럼 최대한 빨리 보내드리지요.”

아트위야를 내보내고 집무실에 혼자 남은 이디나는 맘이 무거웠다. 아트위야와 살름에게서 연거푸 재촉을 받고 있지만, 이디나는 쉽사리 카렐에게 연락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볼 자신이 없어서였다.

이디나는 집무실에 남은 헤네티들과 시녀, 시종들까지 모두 내보내고는 금고 안에서 카렐의 코드가 있는 할룩스를 꺼냈다.

“어쩌지.”

할룩스를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해 가며 고심에 고심만 거듭하면서도 쉽사리 용기를 내지 못한 그는 탁자를 열고 안에 있는 봉투를 꺼냈다.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단단히 밀봉된 그 봉지 안에는 지난번 잘 보관해 놓은 흰 원피스가 들어있었다.

그는 행여 바람이 많이 빠질까 조심조심하며 그 원피스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곳에 살며시 코를 대고 그 느낌을 음미해 보았다. 여전히 황제의 체취가 남아있었다.

“후우.”

이디나는 힘없이 원피스를 떨어뜨렸다. 조금이라도 맘이 편해지기를 원했지만 도리어 간절한 맘만 더 강해졌을 뿐이었다. 그는 할룩스를 들고 충동적으로 [연결]을 눌렀다.

“이런.”

연결을 시도하고 있다는 메시지가 보인 순간, 정신을 차린 그는 아차 싶었다.

‘차라리 받지 말라고.’

무슨 심보인지, 할룩스가 연결을 시도하고 있는 짧은 시간 중에도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는 몇 초 버티지 못하고 ‘연결 해제’를 눌러버렸다.

“젠장.”

그는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새삼 돌아보았다. 이 모습으로 황제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미 약속을 했으니, 언젠가는 반드시 황제와 다시 마주해야만 했다.

“그래, 포로 명단 가져올 때까지만…….”

이디나는 할룩스를 도로 금고 안에 넣어버렸다.

졸업식 축하차 간만에 모교 남극성당에 찾아온 세데스의 맘은 무겁다 못해 침울했다. 쿠베와 교단 수하들은 태자 주페와 어머니의 시체를 확보한 채 언제든 그를 몰아내고 숙부 마누엘에게 권력을 넘길 수 있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었고, 이제 그의 제후 자리는 황제와 교단 사이에서 작두타기를 해야 하는 한심한 처지에 있었다.

‘날 죽이려는 쪽으로 기운 걸까.’

그는 남극성당 교복인 흰 무명포와 금색 머플러를 두른 채 혼자 생각에 빠져 교정을 걸었다.

졸업생과 그 가족들이 온통 모이는 오늘은 1년 중 교정이 가장 북적거리는 날이었다. 세데스도 집안에서 제후랍시고 떵떵거릴 때보다 교복을 입고 동문 생도와 인파 사이에 존재감 없이 파묻힌 지금이 맘이 훨씬 더 편했다. 뒤따르는 이 남자만 없다면.

“빌어먹을, 내 꼴이 이게 뭐냐.”

세데스는 망토를 뒤집어쓰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따라오는 무표정한 사내를 힐끔 돌아보았다. 교문에서 자신의 보증으로 ‘개인경호원’이라 신고하기는 했지만 사실 저자의 이름도, 출신도 알지 못했다. 그가 아는 건 저자가 제국 제일의 암살수인 피다이라는 것 정도였다.

‘피다이라는 거 누가 눈치 채는 건 아니겠지?’

세데스는 주변을 의식하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듣기로는 가디언들 중 아주 예민한 극소수가 좁고 밀폐된 실내에서 피다이 특유의 약냄새를 맡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렇다면 이런 야외에서, 그것도 향을 뿌린 망토를 뒤집어쓴 상태에서 이자의 정체를 날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어제, 졸업식 참석을 준비하던 그에게 쿠베가 난데없이 저자를 피다이라며 소개시켜 줬을 때, 세데스는 ‘이제 끝이구나.’ 했었다. 하지만 쿠베는 저 녀석의 부탁을 꼭 들어주라고만 전하고 자기는 자리를 비워버렸다.

사실 저 피다이가 자신을 황태후 면전에 데려다 달라고 말했을 때, 세데스는 ‘날 죽이는 방법도 가지가지군.’하고 기가 막혀 했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의 임무가 암살이 아니고 아라무트에서 황태후에게로의 메시지 전달이라고 확인해 주었지만 그 말만 덥석 믿고 맘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놈이 가져온 메시지가 대체 뭘까.’

세데스는 걷는 내내 계속 머리를 굴렸다. 아라무트의 유명한 ‘영감’이 황태후에게 대체 무슨 볼일이 있어 사자를 보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영감은 정치적 사안에서는 절대 나서는 일 없이 중립을 지켰고, 그저 ‘의뢰인’과의 계약에만 수동적으로 충실할 뿐이었다.

‘좋은 내용은 분명 아닐 텐데.’

세데스는 뒤따라오는 피다이를 힐끔 돌아보았다. 그는 임무에 투입되는 사람이 맞나 싶을 만큼 태평스런 표정이었다. 도리어 그의 외투 안쪽에 도청장치와 추적장치를 몰래 달아놓은 세데스가 혹시라도 들키지 않을까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놈 임무가 사자가 아니면 어쩌지?’

세데스는 바지 허리띠 속에 감춘 동물 뼈칼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쿠베의 협박에, 그리고 최소한 암살 공범이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에 억지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혹시라도, 정말로 혹시라도 이자가 자신을 속인 것이라면 그땐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 이자부터 죽이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죽어버릴 참이었다.

사실 그는 자신이 무언가 결단을 내릴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 쿠베는 달라진 게 없다며 매번 태연한 척 했지만. 세데스는 자신을 대하는 교단 내 분위기가 요즘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교단에 아예 굴복하든……황제에게 백기를 들든……둘 중 하나뿐이야.’

세데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으로 떠나오기 직전, 그는 마지막으로 인질 주페를 만나볼 수 있었다. 며칠 전, 쿠베는 앞으로는 주페를 보여주지 않겠다고 했었지만, 임무를 갖고 떠나는 오늘은 그도 세데스의 변심을 걱정했는지 웬일로 주페를 만나게 해 주었다. 쿠베는 목격자 겸 인질을 살려뒀으니 언제든 널 구렁텅이에 넣을 수 있다는 의미였겠지만 도리어 그 소년의 반응은 달랐다.

주페가 그의 머플러를 고쳐주며 작게 속삭인 한 마디가 지금도 그의 맘을 불편하게 하고 있었다.

- 나 때문에 잘못된 선택을 고집하지 마세요. 지금이라도 옳은 선택만 한다면 난 무덤까지 입을 다물고 그대의 결정을 지켜줄 겁니다. -

세데스는 대답 대신 그 소년을 한 번 꼭 안아주었다. 자신의 선택 때문에 어쩌면 그 소년이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그밖에는 달리 생각나는 행동이 없었다.

‘빌어먹을, 괜히 왔어.’

세데스는 고위 유학자들이 머무는 건물인 태학당 꼭대기를 올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머, 안녕하세요.”

세데스는 누군가 아는 척 하는 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말한 사람의 얼굴을 본 순간, 지레 놀란 세데스의 어깨가 들썩했다. 그곳엔 흰 무명포에 무늬 없는 금색 머플러를 걸친 황빈 솔이 두 명의 가디언 경호원과 함께 다가오는 중이었다.

‘하필 이런 때에.’

세데스의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는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간만에 뵙습니다. 황빈 마마. 올해 학부 졸업이시죠?”

세데스는 황빈에게 고개를 적당히 까딱거리는 선에서 최소한의 예의만 보였다. 바깥 세상에서야 큰 윗사람으로 대해야 했겠지만 남극성당의 행사장 안에서는 박사과정 졸업생 대 말단 학부 생도일 뿐이었다. 그 사실을 아는 솔도 웃으며 목례로 답했다.

“음?”

세데스는 솔의 뒤에 가려 있던 꼬마를 그제야 발견했다. 그곳엔 ‘미니사이즈 황제’인 막내황자 마리안 옹주가 엄마와 똑같은 차림새로 엄마의 옷자락을 꼭 붙들고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오는 중이었다. 이 아이도 다른 황자들처럼 성장이 늦다보니 고작해야 6, 7살 내외로 보일 만큼 정말 작았다.

세데스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마리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예의를 표했다.

“세상에, 황빈 마마와 똑같이 맞춰 입으시니 정말 인형 같으시네요. 조만간 진짜 교복을 입고 선후배로 뵙게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옷이 참 귀엽죠?”

세데스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솔이 딸의 작은 무명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페스트에서 돌아온 직후에 황태후께서 선물해 주셨어요. 모녀가 똑같이 입으니 좀 웃기긴 하죠?”

“대제학께서요?”

황자들에게 쌀쌀맞기로 소문이 자자한 세네피스 황태후가 이 꼬마에게 무명포를 선물했다는 말에 세데스도 내심 ‘웬일이야.’ 싶었다. 솔이 마치 그런 속을 읽은 것처럼 한 마디 덧붙였다.

“웬걸요, 리쿠 학장께서도 그 말을 들으시곤 난데없이 파예드 교복도 맞춰 주셨는걸요. 그쪽 것도 입혀봤더니 까만색에 보라색 머플러가 정말 예뻐요. 두 분이 겉으론 엄격해 보이셔도 은근히 속정이 있으시다니까요.”

세데스의 입으로 ‘서로 지기 싫은 거지 정은 무슨.’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꼬마는 세데스와 그를 따라온 정체불명의 경호원을 향해 큰 눈만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옹주, 인사하지 않고 뭐 하세요. 남부 2제후 세데스 델루지 경입니다.”

당황한 솔이 딸의 고개를 꾹 눌러 억지 인사를 시키고는 머쓱하게 웃었다.

“죄송해요, 페스트에서 오빠가 납치당하는 걸 눈앞에서 보고 나서는 애가 경계가 부쩍 심해졌어요. 주페 태자가 얘를 제일 예뻐해 줬었는데.”

‘주페’라는 말에 세데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솔이 계속 말을 이었다.

“아참, 작년에 박사 졸업하셨죠? 올 박사 졸업생 목에 머플러 걸어주러 오셨겠네요.”

그때, 광장 한쪽에서 졸업식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울렸다. 서서 잡담을 하던 둘은 다시 졸업식이 열릴 태학당 앞 광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동안 황실 내명부 일에 옹주 양육에 학업까지 병행하느라 고생 많으셨겠습니다.”

세데스가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의 솔에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세데스의 아버지 제롬이 옛날에 몹쓸 짓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솔은 황실 내명부에서 그가 유일하게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다. 수백 살이 기본인 제국 최상류층에서 비슷한 나이의 말이 통하는 여자도 드물었고, 무어라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이상하게 서로 끌리는 동질감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솔 역시 당시 어린 꼬마였던 이 젊은 제후에게 죽은 그 아비의 죄를 들이댈 만큼 생각없이 행동하지는 않았다.

“이젠 옹주도 많이 컸고요, 다른 비빈 분들께서 많이 봐 주셨죠. 뭐, …… 제일 고생하신 거야 물론 황상이시지만요. 후훗.”

솔이 마지막에서 살짝 목소리를 낮추며 큭큭거리고 웃었다. 세데스도 웃을 뻔했지만 재빨리 표정관리를 한 덕분에 결례는 피할 수 있었다.

“누가 황상께 4분의 1짜리 남극성당 졸업장 드려야 한다고 하던데요.”

결국 먼저 웃음을 터뜨린 건 솔이었다.

“에스더 귀인 덕분에 이젠 1/5이에요.”

세데스도 뒤따라 웃고 말았다. 솔이 생도로 있는 동안, 4일마다 한 번 황제가 밤중에 기혼자 기숙사까지 몰래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는 기밀 아닌 기밀이 이미 생도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특별대우는 받고 싶지 않다는 솔의 고집 덕분에 황제까지도 사람들 눈을 피해 기숙사를 찾는 수고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줄어들어서 섭섭하시겠어요.”

세데스가 능글맞은 표정을 지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섭섭하긴요. 그분 워낙 기운이 좋으셔서 밤이건 낮이건 시도 때도 없이…….”

별 생각 없이 ‘자랑’을 하려 했던 솔은 어느 순간 뺨이 새빨개지며 얼른 뒤따라오는 딸을 돌아보았다. 이해하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린 마리안이 앞서가는 엄마의 옷자락을 붙든 채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빤히 올려보는 중이었다.

“흠흠.”

딸의 시선에 난감해진 솔이 얼른 주제를 돌렸다.

“어쨌든 오늘이면 기숙사 정리하고 궁에 눌러앉을 수 있게 되어서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2황빈전이 유령의 집 같았거든요.”

세데스가 태학당을 올려보며 지나가는 말로 입을 열었다.

“고거지학과 졸업 준비하려고 여기 지하 자료실 창고에서 먼지 많이 드셨겠어요.”

“1년 동안 햇빛 못 봐서 얼굴이 누렇게 떴죠.”

세데스의 물음에 솔도 웃으며 농으로 답했다.

“이런 얘기 해도 되나 모르겠지만 옛날 교단 사람들 정말 대단해요. 수백 년 된 지하 구조물이고 위에 있던 건물이 통째로 바뀌었는데도 벽에 금 하나 간 곳 없이 완벽하다니까요.”

평소 말수 적던 솔도 전공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자 갑자기 말이 빨라지며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듣자하니 여기 태학당 자리에 교단 때도 큰 건물이 있었다죠.”

“‘아프라시아 관’이라는 8층짜리 건물이 있었다더군요. 그 꼭대기가 대신관하고 다하카르 교단 고위 신관들 처소였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아요?”

세데스가 풉 하고 짧게 웃음을 터뜨리며 태학당 꼭대기를 올려보았다. 세네피스 카파키 대제학과 부제학들 집무실이 있는 곳 높이도 대충 7, 8층 정도 되어보였다.

“대신관이 숨 쉬던 저 윗 공기를 이제 대제학께서 마시고 계시니 세상 참…….”

세데스의 푸념에 솔도 따라 웃었다. 지금이야 유학자 머플러를 두르고 도리를 외치는 명문가 유학자들이지만, 사실 그들 족보를 되짚어 올라가면 아마도 대다수는―세데스와 솔을 포함해― 수많은 교단 고위 신관 조상들의 이름과 맞닥뜨릴 터였다.

“세상이 바뀌기는 한 걸까요? 아니면 겉으로 그렇게 보이기만 하는 걸까요?”

“그러게요.”

두 또래 여자들은 짧은 웃음과 함께 어쩌면 위험천만할 수도 있는 대화를 나누며 태학당 밑을 지났다. 솔이 손으로 땅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출입할 수 있는 건 지하 2층까지 뿐이에요. 그 밑에 뭔가 있는 것 같던데 오르마즈 경이 여길 점령했을 때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입구를 무너뜨려 폐쇄해 버렸대요. 이제와 통로를 뚫었다가는 위의 태학전이 무너질 거라고 그래서 탐사할 엄두도 못 내고 있다죠.”

“듣자하니 오르마즈 경이 거길 폐쇄한 게 거기서 죽은 성직자 귀신들을 만나서 악전고투 끝에 부하들을 다 잃고 혼자 돌아오셨기 때문이라죠? 세상에 그런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한 무용담이라니.”

모처럼 학창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에 세데스가 짓궂은 농담까지 꺼냈다. 솔이 깔깔대고 웃으며 손을 저었다.

“하기야, 그런 괴담 하나 없으면 학교생활이 무슨 재미겠어요.”

“음?”

갑자기 뒤통수가 간지러워진 세데스는 여전히 엄마 옷자락을 쥐고 꽁무니를 따르는 마리안 옹주를 문득 돌아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자신과 피다이를 계속 곁눈질하는 저 꼬마 소녀의 시선이 왠지 불안했다.

“아, 시간이 늦어서 그럼 전 이만.”

광장에 들어선 세데스는 자신이 나온 경세학과 쪽을 가리키며 솔에게 급히 인사를 했다. 그리고는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마냥 허둥지둥 멀어져갔다.

“엄마, 엄마.”

마리안이 앞서가는 엄마의 무명포 자락을 툭툭 잡아당겼다.

“응?”

뒤돌아보는 엄마 솔에게 마리안이 세데스가 사라진 곳을 가리켰다.

“아까 그 여자한테서 주페 오빠 냄새 나.”

솔은 애타는 눈길로 엄마를 올려보는 딸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얘야.”

그는 딸의 앞에 쭈그려 앉아 한 번 꼭 안아주었다.

“주페 오빠는 황상께서 곧 구해오실 거야. 걱정하지 말고 그분 믿고 기다려. 알았지?”

“정말이야. 그 여자 옷에서 오빠 냄새 났어.”

평소 고분고분하던 마리안이 이번엔 갑자기 고집을 부렸다.

“그 여자 따라온 남자한테서도 고약하고 매운 냄새가 났어. 뭐 이상한 거 먹었나 봐. 정말이라니까.”

솔은 매일같이 오빠를 찾는 딸의 모습을 떠올리며 딱한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리고 아이의 난데없는 고집이 당연히 오빠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알았어. 엄마가 알아볼게.”

솔은 어린 딸을 한 팔에 번쩍 안아들고 들어가며 침울해진 이 아이의 기분을 뭘로 돌려줘야 할까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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