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29화 (924/1,132)

< -- 929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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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이디나는 과일과 갓 짜온 양젖, 갓 구운 잡곡 빵, 게살로 장식된 아침 테이블에 앉으며 물었다. 매일 아침 대충 먹던 눅눅한 피타와 달걀 정도와는 이젠 식사부터 완전히 달랐다.

“하렘을 둘러보고 계실 겁니다. 1홀의 새 방으로 짐을 옮기시는 중입니다.”

“뭐가 그리 급하셔서.”

이디나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여자들 중 목숨을 부지한 자들도 이젠 하렘에서 나가는 일만 남아있었다. 하지만 ‘대신관이 바뀐 것을 한동안 극비로 해 둬라.’라는 이디나의 명령 때문에 그들도 외부 연락과 출입이 일제 금지당한 채 감옥에 가까운 생활을 해야 할 판이었다.

그리고 대신관의 어머니 나키아는 하렘의 수장이 될 테지만 정작 새 대신관에게 남자도, 그렇다고 자식도 없으니 따져보면 당장은 아랫사람 하나 없는 빈껍데기 수장일 뿐이었다.

혼자서 빵을 뜯던 이디나는 문득 처소 구석의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그곳엔 그가 어젯밤 이곳에 들어올 때 입고 있던 옷과 소지품들, 개인 처소에서 가져온 얼마 안 되는 소지품들이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놓여있었다. 그가 헤네티들에게 체포당했을 때, 그러니까 카렐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갖고 있던 것들도 적잖이 섞여있었다.

짐들을 멍하니 보며 기억에 잠겨 있던 이디나는 누군가 문을 확 열고 들어오자 대뜸 낯을 찡그렸다. 여전히 대신관의 수석 비서관으로 남아있는 쿠마르가 식탁 아래 무릎을 꿇었다.

“남부 비엔의 쿠베에게 현신의 뜻을 전달했습니다. 곧 기회를 보아 세데스를 처리할…….”

“누가 널 들여보냈냐.”

“예?”

창백해진 쿠마르가 얼른 이디나의 눈치를 보았다.

“그게, 이전엔…….”

순간,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쿠마르가 바닥에 이마를 대고 파르르 떨었다. 일벌레였던 아스탈 때는 별 것 아닌 보고라 해도 시도 때도 올려도 별 문제가 된 일이 없었다.

이디나가 빵을 내려놓으며 눈을 매섭게 부릅뜨고 문을 지키는 시종을 노려보았다.

“위대한 현신이 식사중인데 알리지도 않고 들이닥치는 놈이나 그걸 아무렇지 않게 들여보내는 놈이나.”

이디나의 손짓에 문지기 시종이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이디나가 엎드린 쿠마르의 뒤통수를 꾹 밟으며 싸늘하게 말했다.

“언제든 그년 죽일 준비가 되었다는 보고가 내 아침식사를 가로막을 만큼 긴급하다고 판단한 것이냐.”

“아, 아니옵니다.”

겁먹은 쿠마르가 재차 머리를 조아렸다.

“네놈이 하도 자주 뒈져서 더 몸뚱이 낭비하긴 싫으니 이번은 봐주마.”

자신과 아버지의 차이를 확실히 각인시킨 이디나가 발을 떼고 다시 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자신을 끌고 옥상까지 올라가 죽이려 들었던 기억은 머릿속에서 억지로 지워냈지만 찌꺼기처럼 남은 불쾌한 감정까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너그러운 처분 감사하옵니다.”

이디나는 구사일생한 쿠마르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엉금엉금 기어 뒤로 물러나는 모습을 줄곧 노려보았다. 사실 지난밤 상황이 바뀌자마자 바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 자나 슈라보다, 분개하며 자신을 죽이려 칼을 겨누었던 여단장 사카 쪽이 훨씬 신뢰하고 싶었다.

조금 전의 소지품을 다시 돌아보았던 이디나는 시녀들이 그새 짐을 치우고 있는 모습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뭐 하는 짓이냐!”

“예?”

시녀들이 기겁을 하며 자리에 꿇어앉았다. 이디나는 어제까지 자신이 개인용으로 썼던 할룩스를 들고 있는 시녀를 손끝으로 가리켰다.

“너.”

“이건……이제 신분이 바뀌어 이전 물건들은 모두 폐기하실 것이라기에…….”

“네 모가지도 함께 폐기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예에? ……송구하옵니다.”

겁에 질린 시녀들이 이디나의 물건들을 급히 가져와 테이블 위에 차곡차곡 정리해 놓았다.

“잠깐,”

이디나는 황제를 만났을 때 입었던 새하얀 원피스를 펼쳐보며 새삼 감회에 잠겼다. 그날의 소동으로 군데군데 더러운 얼룩이 남은 그곳엔 황제의 긴 적갈색 머리칼과 이디나를 보호하려 안고 뛰었을 때 흘린 희미한 땀 얼룩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보관할까……. 말까.’

원피스를 무심코 코에 대어 본 그는 여전히 남아있는 황제의 내음에 취해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체취는 사람의 것이라기보다는 짐승의 것 같은 느낌을 주었지만 왠지 이디나에겐 숨이 막힐 만큼 강렬했다. 누군가 이 느낌을 향수로 만들어 준다면, 아니 그가 흘린 땀방울이라도 받아 가져다준다면 백만금을 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원피스를 코에 대고 깊숙이 숨을 들이켰다.

‘이런.’

갑자기 뜨겁게 반응하는 몸에 지레 당황한 그는 얼른 원피스를 내려놓고 물을 들이켰다. 마구 빨라지는 심장과 순식간에 말라붙은 입가, 심지어 예민해진 젖꼭지와 아랫도리까지, 일순간 미쳐버리는 몸이 야속할 지경이었다.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이래서 저주라고 하셨군요.’

이디나는 입술에 야무지게 힘을 주며 원피스를 옆에 휙 던져버렸다.

“태워버려.”

명을 받은 시녀가 얼른 옷을 주워 물러났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었다 놨다를 반복하던 이디나가 결국 다시 손을 들었다.

“잠깐.”

“예?”

이디나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태우지 마라. 그대로 어디 공기 안 통하게 밀봉해 놔.”

결국 결단을 내리지 못한 이디나는 멍청한 자신을 탓하며 참담해진 맘으로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태연한 척 식사를 계속하려던 이디나는 문지기 시종들이 웅성대는 것을 발견했다. 누군가 또 온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아랫놈들 습관 개떡같이 들여놓으셨군.’

그는 못 본 척 식사를 계속하려 했지만 그들의 입가에서 ‘아트위야’라는 것이 오가는 것을 듣고는 바로 맘을 바꾸었다.

“손님이 현신이면 들라 해라.”

새 대신관의 방침을 몰라 우왕좌왕하던 시종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문을 열어주었다. 예상대로, 아트위야와 살름이 초조한 얼굴로 대신관 개인 처소에 성큼성큼 들어섰다.

“어서 오십시오, 살름, 아트위야 현신.”

식사를 놓아둔 채 자리에서 일어난 이디나는 마구스들의 예법대로 그 둘과 서로의 어깨를 잡고 양쪽 뺨을 번갈아 맞대었다. 전혀 어색함이 없는 그의 익숙한 응대에 아트위야가 신기한 듯 다시 웃었다.

“대체 언제 연습하셨습니까.”

“30년 전부터요.”

이디나는 아무렇지 않게 냉큼 대답하고는 흐트러진 로브 자락을 얼른 가다듬었다. 그의 능청스런 대답에 아트위야가 여전히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속에는 섬뜩한 두려움이 번지고 있었다.

“이제 몸에 문신만 새시기면 완벽하겠습니다.”

‘문신’이라는 말에 이디나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건 좀 나중으로 미루려고요.”

“왜요, 하루라도 빨리 완벽해지셔야지요.”

“태아에게 안전할지도 알아봐야 하고.”

“태아라고요?”

이디나가 대충 둘러댔지만 그런 그를 보는 아트위야의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이디나도 저 오지랖 넓은 마구스라면 사실을 눈치 채고 있을지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런 생각을 바로 드러낼 만큼 생각 없는 현신은 아니었다.

“대신관 문신에 쓰는 색소는 선별된 무해한 성분입니다. 제가 약물 전문가라 누구보다 잘 알지요. 대신관이 몸에 용을 두르는 건 누구도 그 귀한 몸에 함부로 손대지 말라는 경고의 의미도 있답니다.”

“알고 있어요. 안 하겠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디나가 훈계조의 아트위야에게 딱 잘라 강경하게 대답했다. 상대의 만만치 않은 성격을 처음부터 긁어놓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아트위야가 멋쩍게 웃으며 한 발 물러났다.

“제가 안전한 색소 약물을 선별해드릴 테니 준비가 되면 연락 주십시오.”

“그러지요.”

이디나는 한편으로 빵을 뜯으며 무성의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엔지, 지금은 정말로 문신을 하고 싶지 않았다.

“저어, 아직 경황이 없으신 줄 알지만…….”

이 둘의 대화를 지켜보던 성질 급한 살름이 앞장서 본론을 꺼냈다. 이 둘의 방문 목적을 이미 짐작하고 있던 이디나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약속은 약속이니 저 역시 보답합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디나의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개인 연락처를 확보하고 있으니 최대한 빨리 황제에게 교환 협상을 제안하겠습니다. 그쪽에 내줄 포로 명단이나 미리 확보해 놓으시고요.”

후계자들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둘의 얼굴이 해사해졌다. 이디나는 차 두 잔을 직접 담아 유리 회전판에 올려 그 둘에게 돌려 보내주었다.

아트위야가 차를 들이키며 말했다.

“사자로는 이미 노출된 제가 가는 게 낫겠습니다. 황제의 당초 속셈이 협상을 핑계로 선대 대신관과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이었을 테니 새 대신관께서 오르셨다는 것을 그자가 모르는 지금이 적기입니다. 제가 적당히 속아주는 척 우호적인 제스처를 보이면 절 어떡해든 끌어들이려 속옷까지 다 벗어 내줄 겁니다.”

“그런데 황제가 아니고 자이센 총리 속옷을 벗기려는 것이죠?”

살름이 능글맞게 비꼬자 아트위야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흘겼다. 그가 경고의 의미로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살름 현신의 말은 못 들은 걸로 해 두시고……그쪽에선 총리가 나오게 해 주십시오. 좋았든 나빴든 저와 안면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고, 지난번 부상을 입어서 공무도 쉬고 있다니 이런 일엔 제격이죠. 남자라면 제가 충분히 다룰 수 있으니까요.”

아트위야가 푸른색과 황금색 오드아이를 차례대로 번득이며 능글능글하게 웃었다.

“원하시는 대로.”

이디나는 알고도 속아주는 척 고개를 끄덕거리며 별 생각없이 되물었다.

“그런데 여자인 황제가 직접 만나겠다면 어쩌고요?”

“그럼 안면 있는 R인 대신관께서 가서 다루시면 되죠.”

눈치꼬치 없이 또 농담을 하는 살름의 옆구리를 아트위야가 다시 쿡 찔렀다.

“황제여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그놈도 미녀라면 환장한다니 제 눈빛이 통할지도 모르죠.”

아트위야가 당장이라도 황제를 홀려 자기 품에 안을 수 있을 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럴까요?”

식사를 하던 이디나가 슬쩍 눈을 치켜뜨고 아트위야의 매혹적인 오드아이를 올려보았다. 도발적인 눈빛의 저 눈부신 미녀가 황제와 마주한다 생각하니 속에서 울화통이 확 치밀어 먹던 것이 도로 올라올 것 같았지만 그는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유지하려 애썼다. 물론 아트위야는 오직 남자에게만 관심이 있고, 요즘은 총리 페로를 낚아 볼 궁리에 빠져 있다는 것을 잘 알지만 황제가 저런 미녀와 함께 있는 상황을 상상하는 자체가 견디기 힘들었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갑자기 안 좋아 보이시는군요.”

대신관의 창백해진 낯빛을 귀신같이 읽어낸 아트위야가 대뜸 물었다.

“상중(喪中)인 제가 지금 낯빛이 좋으면 이상하지요.”

이디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지으며 차를 한 번에 벌컥 들이켰다.

“그럼 황제에겐 언제 연락하실 건가요?”

“최대한 빨리요.”

이디나는 그 운명의 날 가져갔던 할룩스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그곳엔 카렐과 주고받았던 개인 코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날 이후, 황제가 보낸 새 연락은 없었다.

“곧 할 테니 걱정 마시고요.”

이디나는 할룩스를 끄지 않은 채 서류철 안에 조용히 끼워놓았다. 하지만 마치 저 기계가 울리는 것만 같은 환청에 그는 식사 중에도 몇 번이나 그쪽을 쳐다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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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 처음 남극성당이라는 곳에 와 본 이 코윈 출신 가족은 누가 보기에도 ‘촌뜨기 냄새’가 풀풀 풍겼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오지 탐험이라도 하다가 온 듯 촌스런 모직 옷을 겹겹이 끼어입고 있었고, 제대로 깎지 않은 텁수룩한 머리가 양털모자 뒤로 삐죽삐죽 나와 있었다.

사실 간택자의 대부분이 명문가나 중산층 출신이었고 극빈층에서 나오는 경우는 정말로 드물었다. 그렇다보니 오늘 남극성당의 ‘간택자 성년 행사’에 참석하러 온 간택자들과 그 가족들은 ‘요즘은 대체 뭘 보고 간택하는지 모르겠어.’라고 투덜거리며 이 빈티나는 가족에게 곱지 않은 눈치를 주고 있었다.

숙소를 배정하던 남극성당 직원의 시선도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정말 간택자가 맞나 싶은 이 이상한 가족의 짐에 혹시 금지물품이라도 없는지 확인한다며 동생들에게 이런저런 시비를 거는 중이었다. 1, 2분이면 숙소 열쇠를 받아 들어가는 다른 가족들과는 달리 이 가족은 이미 몇 분째 숙소 문 앞에 붙들려 있어야 했다.

덕분에 뒤에서 와글와글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리는 다른 가족들의 불만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엄마하고 누나 대체 어디 갔어?”

생각보다 줄이 빨리 줄어들면서 혼자 수속을 해야 할 처지가 된 13살의 둘째 일라드는 직원들의 계속되는 질문과 길어지는 짐 검사에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이었다. 아빠를 그대로 닮아 생김새만은 이미 어른 못지않게 컸지만 행동은 딱 그 나이였다.

“아까 보니까 꽁돈 생겨서 엄마하고 뭐 하고 온다고 가던데.”

8살의 셋째 샤르나즈도 더 어린 동생들을 돌보며 맏언니를 초조하게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씨, 나한테 다 맡겨놓고 가면 뭘 어쩌라는 거야. 넌 누나 안 붙잡아놓고 뭐 했어. 씨이.”

일라드가 죄 없는 동생에게 팔을 번쩍 쳐들고 때리는 시늉을 했다. 외모로도 부족해 거친 성격까지 아빠를 조금씩 닮아가다 보니 사실 아지드에겐 가장 큰 골칫거리 아들이었다.

“으휴, 하여간 누나 엉뚱한 거 하나는 알아줘야 된다니까.”

일라드가 성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에서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그러니까, 간택자 본인 이름이 뭐냐고요. 집에서 부르는 거 말고 출생 등록된 이름 말이에요.”

“그, 그게요…….”

직원의 물음에 누나의 서류상 이름이 바로 안 떠오른 일라드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머뭇거렸다.

“아프…… 어쩌고 카파키요.”

“잠깐만요, 카…… 뭐라고요?”

직원은 일라드가 말한 ‘카파키’라는 말에 귀를 한 번 후비고는 짜증스레 다시 물었다. 하고 온 행색도 괴상한데다가 동생이 누나 이름도 제대로 모르고, 거기에 제국 최고 명문가로 꼽히는 가문 이름을 대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어, 성(姓)이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다시 불러주시겠어요?”

그때, 긴 줄의 뒤쪽에서 장신의 한 사람이 길게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열심히 헤치고 불쑥 나섰다.

“이런, 벌써 제일 앞까지 왔네?”

그는 가족들 험담을 하고 있던 뒷줄 다른 가족들에 능청맞게 씨익 웃어보이고는 안내선으로 쳐 놓은 허리 높이의 줄을 단번에 훌쩍 뛰어넘어왔다.

“아프라시아 오르마즈 카파키입니다.”

“카파키요? 설마 코윈의 카파키 가 말하는 거에요?”

직원은 카파키 가의 상징 같은 호리호리하고 큰 키를 올려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다른 곳에도 또 있나요?”

코윈 사투리가 잔뜩 섞인 걸걸한 목소리와 함께 그가 투박한 모자를 확 벗었다. 조각 같은 이목구비, 회색의 크고 부리부리한 눈매가 양털로 짠 촌스런 산악모자 밑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이 정도면 나름대로 용모가 준수하다는 간택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확 띄는 외모였다.

직원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급히 목록에 시선을 돌렸다.

“아, 그렇군요. 빌루이 종장님께선 잘 계신가요.”

목록을 확인한 직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안 해도 될 말을 더듬더듬 물었다. 오르마즈가 직원에게 한쪽 눈을 살짝 찡긋거리며 매혹적인 눈웃음을 지었다.

“요즘 반기 결산 시즌이라 많이 바쁘시죠. 우리 가문 분위기 아시지 않습니까. 할아버지 개인적으로 아시나 본데 안부 전해드릴까요?”

“그, 그러시군요. 괜찮습니다.”

오르마즈의 반격에 당황한 직원이 동료와 얼른 눈짓을 주고받았다. 겉보기만 누더기 차림새일 뿐 수려한 외모와 자신감, 16살이 맞나 싶은 세련되고 거침없는 말투는 누가 봐도 제대로 교육받은 최고 명문가 자제가 분명해 보였다.

일라드에게 줄 ‘구석지고 외진 객실’ 키를 만지작거리고 있던 직원은 제일 윗층의 큰 펜트하우스 키를 대신 꺼내어 오르에게 내밀었다.

“5층입니다.”

“고마워요. 정말로요. 정말이에요.”

오르마즈가 킥킥거리며 제일 큰 짐을 번쩍 들었다.

짐을 들고 숙소 건물 안에 성큼성큼 들어선 그는 문 안쪽에서 갑자기 뒤로 휙 돌아섰다. 그리고는 자기 때문에 한참을 기다린―그동안 내내 뒷담화를 늘어놓았을―다른 간택자 가족들 앞에서 누덕누덕 기워 만든 두툼한 양털 코트를 확 열어보였다.

“기다리는 동안 스타일 감상하느라 심심하지는 않으셨죠? 요즘 코윈 상류층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최신 빈티지 트렌드랍니다.”

큰 소리로 말한 오르는 털모자를 가슴에 대고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과장되게 큰 인사를 꾸벅 올렸다.

“곧 아케메니아에도 들어올 테니 잘 기억해 두세요.”

그는 마치 스타라도 된 양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동생들을 뒤따라 총총히 안쪽으로 향했다.

“대체 뭐 하고 온 거야.”

일라드가 동생들을 난처하게 한 누나에게 버럭 짜증을 냈다.

“그놈의 돈 때문에 동생들 다 미아 될 뻔했잖아.”

“이놈아, 머리통 굵었으면 값을 좀 해.”

오르가 한심한 동생의 머리를 툭 쳤다. 아케메니아까지 오는 여객선에서 오랜 비행에 무료해하던 그는 운 좋게 좌석 밑에서 주운 10세겔 동전을 들고는 갑자기 볼일이 생겼다며 휭 하니 사라져 버렸었다. 그리고는 두세 시간 후, 그 100배인 10다리크짜리 지폐를 흔들며 나타나 가족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오르는 엄마와 동생들의 집요한 추궁에도 그 뻥튀기의 비밀을 끝내 털어놓지 않았지만 결국 내릴 때 마주친 여객선 카지노 딜러가 카드는 언제 배웠냐며 아는 척을 한 덕분에 그의 비법 아닌 비법도 고스란히 들통나고 말았다.

난처해진 오르는 어린 게 벌써 도박에 손을 댔다며 길길이 화를 내는 어머니에게 ‘중요한 데 쓰려고 했다’고 쉴 새 없이 둘러대며 이곳까지 와야 했다. 그리고 이곳에 오자마자 정말로 ‘그 중요한’ 뭔가를 하러 엄마와 잠시 다녀온 터였다.

“이거.”

오르마즈는 옷깃을 열고는 목걸이 로켓을 슬쩍 내보였다. 뚜껑 안쪽엔 활짝 웃고 있는 아지드와 오르가 나란히 찍은 옛날 사진이 담겨있었다. 그가 쿠트라스에서 간택을 받던 날 함께 찍은 초라한 사진이었다.

“여기에 로켓 만들어주는 괜찮은 금은방이 있다고 해서 아까 그 돈 좀 썼지. 엄마하고 하나씩 나눠가졌어.”

“엄마는?”

“다른 볼일 있다고 좀 이따 오신댔어.”

오르는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어린 동생들을 엘리베이터 안에 안전하게 밀어놓고 문을 닫았다. 조금씩 높아지는 엘리베이터 창밖으로 다하카르 교단의 총 본산인 남극성당의 풍경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대체 뭐가 달라진다는 거지.”

교단의 번성을 상징하는 크고 화려한 건물들과 수많은 성직자들을 내려다보며 오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번 행사를 계기로 삶이 달라질 거라고 말하던 엄마의 속내가 대체 무엇인지 호기심과 걱정이 동시에 그의 가슴에 맺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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