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28 회: 파트9. 그의 마지막 꿈이 있는 곳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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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수확이 괜찮아.”
소형 수송선의 화물용 선창에 선 카렐은 손상되지 않도록 겹겹이 포장해 적재해 놓은 불릿의 동체를 탕탕 두들기며 나름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자이납 너도 수고했다.”
“네에.”
불릿 밑에 쪼그려 앉은 자이납이 잔뜩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말로는 표현하지 않지만 황제도 다 잡은 아스탈의 딸을 놓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놓친 이디나만큼이나 황제를 아쉽게 한 건 그가 갖고 있던 ‘타리프의 일지 3권’ 이었다. 이디나가 셔틀에서 떨어지면서 그의 어깨에 걸려 있던 가방도 함께 그의 손에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게다가 조선소 도크에 세워져 있던 4척의 수송선들도 제후군과 황실군이 뒤늦게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후였다.
“저어……다음엔…….”
“괜찮아, 함정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살아 돌아온 게 어디냐. 이런 근사한 것도 구하고.”
카렐이 웅크린 자이납을 억지로 끌어내서는 움츠러든 어깨를 한 팔로 안아주었다.
“이디나 그 여자는 어쩌시고요?”
“무섭고 잔인한 여자라고 하니 앞으로도 조심해서 살펴야지.”
황제의 눈치를 보던 자이납이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저어, 이런 거 여쭤도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음?”
카렐이 우물쭈물거리는 자이납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요.”
자이납이 다시 눈치를 살폈다.
“그 여자 눈빛이 폐하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았어요.”
카렐은 아무 대답도 않고 도로 셔틀로 시선을 돌렸다.
“어쩌면 폐하를 해칠 맘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여전히 말이 없던 카렐이 작은 소리로 답했다.
“어쩌면 임무와 감정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았던 건지도 모르고.”
“저어, 정말로 혹시라도요.”
“우물쭈물하지 말고 술술 털어놓지 못해, 이놈아, 듣다 숨넘어가겠다.”
자이납의 어깨를 안고 있던 카렐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한 팔로 목에 초크를 걸고 마구 꿀밤을 때렸다. 목이 졸린 채 아둥바둥거리던 자이납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게, 그 여자가 또, 또 만나자면…… 어쩌실 거냐고요.”
카렐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다시 자이납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야, 이 멍청한 놈아, 그 여자가 미쳤냐, 그렇게 당하고 또 날 만나자고 나서게? 이미 지 아비 손에 죽지나 않았으면 다행이지.”
잠시 무언가 생각한 자이납이 그제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하긴, 그렇긴 하네.”
자이납을 놓아 준 카렐은 ‘개인 연락용’ 할룩스를 꺼내어 보았다. 그곳엔 지난번 이디나를 만났을 때 교환했던 이디나의 개인 할룩스 코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곳에 연락을 할 수는 없었다. 이제 서로가 상대의 정체를 알았고, 심지어 아스탈의 수하들까지 주군의 딸이 황제와 만났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미 제거되었거나, 설사 살아있다 해도 이전처럼 자유로운 상태는 아닐 터였다.
그렇다면 카렐이 이 코드로 연락을 하는 건 이디나에게 죽으라고 손짓을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폐하께서도 그 여자 걱정하고 계시잖아요.”
조심스레 말하는 자이납에게 카렐이 다시 눈을 흘겼다.
“적 우두머리 딸네미 죽든 말든.”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한 카렐은 다시 불릿으로 관심을 돌렸다. 하지만 자이납도 카렐이 어젯밤 내내 저 할룩스에서 관심을 끊지 못했다는 것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폐하, 출발 준비 끝났답니다.”
선창 위층에서 달려 내려온 니사가 카렐에게 알렸다. 카렐은 선창에 실린 불릿을 아쉬운 듯 툭툭 쳐 보고는 출구 쪽으로 돌아섰다. 자이납이 불릿과 황제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저어, 근데 이걸 어디로 보내시는 건데요?”
“학장이 이거 받고 기분이 조금이라도 나아졌으면 좋겠구나.”
아들 주페를 떠올린 카렐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리쿠 학장님한테 주신다고요?”
“셔틀 광이니 특징이나 구조도 제일 먼저 알아내지 않겠냐. 내가 이거 달라붙어 연구할 새가 어딨어.”
카렐을 뒤따르던 자이납이 갑자기 불릿 쪽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쳤다.
“근데요, 이거 중간에 해적이나 교단 놈들이 되찾아가려고 덮칠지도 모르는데 아무래도 제가 지키고 가는 게…….”
“이놈아. 니가 없어도 니사 신관이 잘 갖고 갈 거거든?”
카렐은 불릿에 매달리려는 자이납의 귀를 덥석 붙들고는 선창에서 질질 끌어냈다. 자이납이 황제에게 질질 끌려가며 볼멘소리를 했다.
“아, 아야야. 이건 해도 너무해요. 저 깡통셔틀 팔자가 저보다 더 좋잖아요.”
“넌 대신 황제의 사랑을 듬뿍 받잖냐.”
자이납을 수송선 밖으로 끌고나온 카렐이 그의 귀에 대고 능글하게 속삭였다.
“그러니 닥치고 내 옆에 있어.”
“쳇, 그런다고 언제 한 번 안아주지도 않으실 거면서.”
“왜, 미남들 줄줄이 소개해 줬잖냐. 남자까지 만들어 주는 좋은 황제가 세상에 어딨냐.”
카렐은 수송선 브릿지에 대고 이륙하라고 손짓했다. 자신의 새 마구스에게 줄 특별한 선물을 갖고 가는 니사가 환한 얼굴로 안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수베르의 사막 한중간에 세워져 있던 소형 황실 수송선은 이 비밀스런 짐의 새 주인을 찾아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침 카렐의 할룩스가 울렸다.
“마스터 케스난??”
카렐은 얼른 할룩스를 받아들고 휙 돌아섰다.
“얼굴색이 안 좋군? 어젯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서 제대로 못 잤나?”
카렐의 농담 비슷한 물음에 케스난이 그보다 훨씬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폐하, 교단 내에서 뭔가 일이 난 것 같습니다.”
“뭔가 일이라니? 그런 뜬구름 잡는 보고가 어딨어?”
평소 매사 확실한 케스난답지 않은 두루뭉술한 보고에 카렐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케스난은 그런 그에게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저도 그 이상은 파악하지 못했어요. 어젯밤 살름하고 만났다가 바하칼리의 제련소 화입식에 계획에도 없이 끌려갔는데 거기서 교단 수뇌부 사람들을 봤어요. 그런데 그네들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았다고요.”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니까.”
“살름하고 아트위야 둘이 뭔가 사단이 난다면서 다급하게 어딘가 가 버렸는데 행사 끝날 때까지도 안 돌아와서 저도 혼자 돌아와야 했거든요.”
순간 카렐의 머릿속에 이틀 전 헤네티들에게 잡혀간 이디나 생각이 퍼뜩 스쳤다. 보고를 하던 케스난을 카렐이 살짝 앞서갔다.
“잠깐, 혹시 아스탈 그자 가족과 관계된 건 아니고? 지나가는 말로라도 ‘이디나’라는 이름 혹시 못 들었나?”
“그 말씀 드리려던 참이었어요. 거기 제련소 간부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가동준비를 총괄하던 사람 이름이 ‘이디나’라고 했어요. 그런데…….”
“그런데?”
“그 여자가 첫 소장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변경되어서 실무자들이 당황하는 분위기였어요. 그 여자가 연단에 나와서 소장 자리를 넘겨주고 다른 부서로 간다고 말했는데 그 태도가 꼭 억지로 외운 각본처럼 읽는 모양새였죠. 표현이 맞는지 몰라도 꼭 처형장 끌려가는 사형수 같았죠.”
“맙소사.”
카렐이 이마를 짚으며 눈을 감았다.
“그 여자를 다시 못 봤고?”
“아뇨, 그 뒤로 사라져서 만찬장에서도 보이지 않았어요. 그 후임자라고 소개한 금발남자도 안 보였고요. 정작 화입식엔 교단 주역들이 다 빠져서 완전히 맥이 빠져버렸죠.”
“금발남자? 푸른 눈에 머리칼이 어깨까지 내려오는 잘생긴 미남 아니었나? 다리를 좀 다쳤을지 모르는데?”
“그 남자를 어떻게 아시죠?”
이번에 놀란 건 케스난 쪽이었다. 루스탐이 조심스레 옆에서 거들었다.
“아무래도……숙청당한 모양입니다.”
루스탐도 차마 ‘죽었을 것 같습니다.’라는 말까지는 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 카렐에게 잠시 치기 섞인 어리광을 부렸던 자이납도 창백해진 그의 얼굴에 당황한 듯 다시 헛기침을 하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카렐은 ―아마도 죽었을― 이디나와의 유일한 연락선이 되어버린 개인 할룩스를 꺼내어 다시 확인을 해 보았다. 그곳엔 여전히 아무런 수신 내용도, 메시지도 없었다.
표정을 가다듬은 카렐은 그 기계를 끄거나 파기하는 대신, 조용히 다른 짐 속에 묻어놓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별궁으로 가자. 베흔 그놈이 돌아올 때가 다 되어가는구나.”
“훌륭하십니다.”
대신관으로 눈을 뜬 첫날, 아침 몸 관리를 끝내고 큰 거울 앞에 알몸으로 선 이디나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몸에 바른 향유를 닦아주던 늙은 시녀 수장이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루만에 만족스러워지지는 않으실 겁니다. 하룻밤 변신으로는 훌륭하십니다.”
“솔직하니 좋구나.”
이디나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일에 쫓기느라 제대로 관리 못해 너저분하던 머리도 단정히 다듬어 뒤로 넘겼고, 매일아침 비눗물과 찬물세례 정도밖에 대우를 못 받던 피부도 전신 마사지와 관리를 받아 매끄럽고 탄력이 보였다. 일에 쪼들려 겉늙은 인상은 어느 정도 털어냈지만 그렇다고 다하카르 가문의 자랑이던 ‘곱상하고 아름다운 외모’가 없다가 돌연 생겨나는 건 아니었다.
“새 로브를 가져왔습니다. 다행히 지난번 원피스를 만든 치수가 남아있어서……재봉사가 지난밤 꼬박 새워 최선을 다해 지었습니다. ……잘 맞으실 겁니다.”
시녀들이 잔뜩 눈치를 보며 그에게 새 옷을 올렸다. 다하카르 신이 새 육체로 갈아입고 들어온 지난 저녁, 이곳 크테시폰 궁에서 벌어진 참사는 궁에 있는 사람들 모두를 공포에 몰아넣었고, 이 시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전 대신관을 바로 곁에서 모셨던 이들로서는 그 공포가 더 뼈저릴 터였다.
“내가 무섭냐.”
이디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위, 위대한 현신의 앞에서 어찌…….”
시녀 중 상급자가 더듬거리며 답했지만 이디나의 말이 그 중간을 끊어버렸다.
“위대한 현신이 무섭지 않으면 뭐가 무서워야 하지?”
시녀들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지만 다행히 이 무서운 신임 대신관은 그 이상 이들을 몰아붙이지는 않았다.
“입어보자, 얼마나 잘 지었는지.”
이디나가 거울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섰다. 발목까지 완전히 덮는 검은색 로브와 빳빳한 목깃이 달린 케이프, 화려한 보석으로 대신관 문장을 수놓은 에이프런과 정강이까지 내려오는 긴 머플러가 차례대로 그의 몸을 장식했다. 그리고 사슬 귀고리와 이마 위로 큼직한 사파이어를 늘어뜨린 황금 서클렛까지 얹어 마지막 장식을 끝냈다.
천천히 고개를 든 이디나는 완전히 달라진 자신의 새 모습을 보며 엷은 웃음을 지었다. 그 안에는 호리호리하고 큰 키의 젊고 당당한 새 대신관이 서 있었다. 항상 그의 자신감을 깎아먹었던 보잘것없는 외모도 위엄 넘치는 차림새에 압도되어 이젠 별반 의식이 되지 않았다.
그때, 처소 문이 열리며 건장한 두 명의 무장이 불쑥 들어와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현신이시여.”
바닥을 짚은 그 둘의 손과 옷에는 바싹 말라붙은 피가 여전히 남아있었고, 집 안에 날을 감춘 칼자루에는 지난밤 있은 질척한 죽음의 흔적이 두껍게 칠해져 있었다. 그들의 등장에 시녀들 사이에서도 차가운 공포의 기운이 번졌다.
“끝났는가?”
이디나가 손에 낄 반지를 고르며 무심히 물었다.
“전통에 따랐사옵니다.”
여단장 사카가 가슴에 손을 대고 이번에도 아주 짧고 간결하게 답했다. 지난밤 새 신분으로 이곳 크테시폰 궁에 개선한 이디나가 내렸던 명령도 이 여단장의 취향에 맞게 아주 간단했다.
- 전통에 따라 처리해라. -
밤늦게 하렘에 들이닥친 X헤네티들은 ‘전통에 따라’ 새 대신관에 오르지 못한 이전 대신관 아스탈의 자녀들 13명과 그들의 어머니들을 무자비하게 학살, 아니 강제 도태시켰다. 그리고 황실과 내통한 혐의로 감옥에 갇혀 있거나 비밀리에 조사를 받고 있던 100여명을 모두 제거해 새 대신관의 행보를 가볍게 하는 것도 그 ‘전통’에 포함되어 있었다.
원리원칙에 병적으로 충실한 헤네티들은 전통을 수행한다는 사명감에 기뻐하며 피의 만찬을 만끽했지만 현실적인 신관들은 달랐다. 야투 신관을 비롯한 성직자들은 이디나에게 아직 자녀가 없으니 이복 남동생 하나는 살려두는 게 어떻겠냐며 애원했지만 이디나도 예비용 패 하나를 더 남겨두려는 음흉한 신관들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신관들의 눈앞에서 손아래 남동생의 목에 칼을 꽂아 그들이 되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다리까지 서슴없이 끊어버렸다. 그리고는 경악하고 있는 그들에게 자신만의 비장의 카드 하나를 내보여 기세를 꺾어버렸다.
이디나는 시녀장이 추천해 준 오닉스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백금반지를 중지에 깊숙이 끼며 고개를 쳐들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학살을 마무리하고 돌아와 등 뒤에 엎드려 있는 사카와 슈라의 모습이 비쳐보였다.
“이제 하나만 마무리하면 됩니다.”
사카가 재차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선대께서 남기신 절차에 따라 순장할……”
“지금?”
내심 기가 막혀진 이디나가 저 고지식한 여단장을 돌아보았다.
“급하지 않으니 그건 나중에 해도 돼.”
“뮤를 잡아와야 장례를 진행할 수 있습니다.”
사카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미 절차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답답해진 이디나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례절차’는 모든 대신관이 즉위와 동시에 작성해 보관해야 했고, 죽은 아버지 아스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이번에 공개된 문서엔 그가 20여년 전 추가해 놓은 ‘내가 죽으면 뮤-세네피스도 함께 입관할 것.’문장이 있어 이디나의 골치를 아프게 하고 있었다.
‘순장은 금지되어 있다.’라고 말하려 했던 이디나는 괜한 교리 논쟁을 피하려는 맘에 일단 입을 다물었다. 순장은 인신공양과 함께 종교법으로 금지되었지만 한편으로는 ‘대신관은 모든 법 위에 있다’고 되어 있는 게 문제였다. 아스탈이 직접 써 놓은 문서엔 세네피스에게 무슨 옷을 입혀 어느 자세로 넣어야 하는지, 심지어 무슨 약을 먹여 사지를 마비시키고 자신의 옆에서 최소 몇 시간 의식을 유지하게 한 후 산 채로 보존처리를 해야 하는지까지 구체적으로 다 정리가 되어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셨군.’
이디나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가 보기엔 딱히 정리된 문서라기보다는 아버지가 혼자의 엽기적인 몽상을 횡설수설 끄적거려 놓은 소설에 불과했지만 고지식한 헤네티들은 달랐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세네피스를 ‘정말로’ 사냥해 신을 기쁘게 해야 한다며 어제부터 들끓고 떨고 있었다.
“때가 되면 그 임무는 네게 주마. 됐냐?”
“한시바삐 선대 시신을 편안히 모시고 싶사옵니다.”
이디나의 타협책에 사카도 일단 한 발 물러났다.
“잘했다. 밤새 수고했으니 모두 숙소에 돌아가라. 내 특별히 준비한 선물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충분히 즐겨라.”
“현신 곁에는 누군가가 있어야…….”
대신관의 말뜻을 재빨리 이해한 슈라가 둔하게 딴소리를 하는 동기 여단장의 팔을 덥석 붙들고 자리에서 급히 일어섰다.
“사려 깊으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그 둘이 자리를 비운 후, 이디나가 시녀장에게 물었다.
“다 해 놨겠지?”
“지정하신 여신도들과 시녀들을 들여보내 놓았습니다. 현신께서 몸소 짝을 지워주셔서 모두 기뻐하고 있습니다.”
“잘했다.”
이디나가 슬쩍 입꼬리를 치켜올리며 웃었다. 코런덤 헤네티들은 어릴 때 거세당하는 사촌 가디언들과는 달리 정자를 못 만드는 것을 빼면 완벽한, 아니 일반인보다 훨씬 더 왕성한 본능을 지닌 남성이었다. 그런데도 여자에겐 도통 관심 없는 대신관 덕분에 그동안은 특별한 때를 빼면 금욕에 가까운 생활을 강요당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이디나는 ‘충성스런 성전사였고, 동시에 훌륭한 남자들이었던’ 옛 헤네티들을 예로 들며 그들에게 전보다 여자를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을 약속했고, 오늘은 손에 피를 칠하고 돌아온 완벽한 보답이었다. 그리고 한때 반기를 들었지만 뒤끝 없는 여단장 사카에게는 특별히 고른 신심 깊고 아름다운 최고의 시녀를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디나는 다시 거울을 보았다. 그 안엔 대신관이 혼자 서 있었다.
‘나는?’
다시 생각해 보니, 정작 자신에겐 이전에도, 지금도 짝이 없었다. 그는 아마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처녀 대신관일 터였다. 허탈해하고 있는 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녀장이 그에게 침소와 연결된 식당을 가리켰다.
“수태될 태아를 위해서라도 아침은 최대한 잘 드시는 게 좋습니다. 체중도 좀 불리시고요. 건강에 좋은 특별한 요리로 준비는 다 해 놨습니다.”
“알았다.”
이디나는 숫처녀의 몸으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혔지만 일단 시작한 연기는 끝장을 봐야 했다. 남동생을 하나 살려놔야 한다며 새 대신관과 첫 기싸움을 시도하던 신관들을 그가 제압한 수단이 바로 있지도 않은 ‘아기’였다. 그는 남동생을 지키려 드는 신관들 앞에서 배란유도제를 꿀꺽 삼키는 연기로 그들의 2세 핑계를 잠재워 버렸던 터였다.
그들 모두 이디나가 이틀 전, 아스탈과 잠자리를 한 것으로 알고 있으니 둘 사이의 아이는―있기만 하다면야― 두말없는 제일의 후계자감이었다. 그러니 자진해 임신을 택한 대신관 앞에서 그들로서도 뭐라 토를 달 수가 없었다.
이 속임수가 위험하다는 건 그 스스로도 알고 있지만 있지도 않은 뱃속의 아기가 이 위험천만한 권력 초기에 단 몇달만이라도 자신을 지킬 방패가 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연기라도 할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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