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23화 (918/1,132)

< -- 923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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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장! 그럼 뭘 타고 돌아가!”

사면초가가 된 카렐이 등 뒤의 조종실을 돌아보았다. 함교 조종실은 이 수송선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시설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었다.

“이 수송선은 움직일 수 있는 상태냐?”

“아뇨, 도크에 고정되어 있어 못 움직일 것 같아요. 어쩌죠? 시라즈를 부를까요?”

“어느 세월에! 자폭시킬지도 모르는데!”

카렐은 다시 아래층 계단으로 몸을 날리고는 난간을 딛고 다시 한 층을 훌쩍 뛰어 내려갔다. 그의 어깨에 얹힌 이디나는 그의 겨드랑이에 팔을 꽉 낀 채 그가 달리는 엄청난 속도와 순간순간 뛰어오르는 무서운 점프에 겁에 질려 꼼짝도 못 했다.

“저기, 제발, 살살 좀 달려요.”

이디나가 용기를 내어 황제의 얼굴을 올려보았지만 힐끗 시선만 주었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입과 뺨을 가린 머플러 위로 부릅뜬 그의 두 눈이 붉게 변해 있었다.

복도 끝까지 달려온 카렐은 불릿이 안 보이는 새 재빨리 창밖의 주기장을 내다보았다. 그가 타고 온 작은 중고셔틀은 이미 연기를 내뿜으며 타고 있고, 5명 정도의 헤네티들이 그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중이었다.

“이런 맙소사.”

카렐의 어깨 위로 고개를 든 이디나는 셔틀에 불을 지른 무리들 사이에서 코런덤 부여단장 슈라의 모습을 발견했다.

‘끝장이다.’

이디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저자가 왔다는 건 이번 일을 아버지 아스탈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네코가 약점을 알고 있는 자신을 이 기회에 끝장내려 아버지에게 밀고하고 계략을 꾸몄다는 것밖에는 다른 시나리오가 나오지 않았다.

카렐이 다른 창으로 달려가 더 멀리를 둘러보았다. 남쪽 저지대에서 몰려든 십여 대의 병력수송차와 셔틀이 이미 수송선 주변에 바싹 접근해 있었고, 그들 중 몇은 이미 차에서 내려 수송선 주변에 다른 차량이나 셔틀을 막는 자기무기를 설치하는 듯 보였다. 수송선에서 못 도망가고 시간을 더 끌었다가는 끝장이었다.

“자이납! 수송선 하부 선창에서 밖으로 나가는 문이 혹시 열려 있나?”

“아뇨, 다 잠겨서 갑판에서 외부로 내려가는 수밖에 없어요! 그냥 그 여자 없애 버리세요! 폐하 추스르기도 힘든데 어떻게 데려가시려고!”

“아스탈 그놈 딸이라며!”

“이미 하페즈란 놈 데리고 있잖아요!”

“시끄러!”

다시 복도를 달려간 카렐은 주기장 반대편의 브리지 창을 열고는 3층의 허공으로 그대로 몸을 날렸다. 공중을 새처럼 휙 날아오른 그는 이디나를 짊어진 채 수송선의 상갑판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무릎으로 최대한 충격을 받아냈지만 둘의 체중이 상당했는지 갑판이 약간 찌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괜찮나?”

카렐이 어깨에 멘 이디나의 눈을 확인하며 제일 먼저 물었다. 반쯤 넋이 나간 이디나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조금 전까지 보였던 황제의 붉고 두려운 눈동자가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짧게나마 다시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어디로 내려가라고?”

카렐이 수송선 갑판 위를 두리번거렸다. 제아무리 카렐이라도 건물 수십 층 높이에 달하는 초대형 수송선 갑판 위에서 바로 뛰어내렸다가는 온몸이 박살날 각오를 해야 할 판이었다.

“자이납! 지상으로 내려가는 계단이나 사다리 없어?”

이디나를 짊어진 카렐은 외부 계단을 찾으려 급히 갑판 모서리로 달렸다. 공중을 맴돌던 불릿과 셔틀을 불태우고 주기장 주변을 뒤지던 헤네티들이 그 모습을 발견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저기다!”

주기장에 모여 있던 다섯 명의 X 헤네티들이 함교에서 뛰어내린 카렐을 발견하고는 일제히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교 주변을 맴돌던 금빛 불릿도 방향을 돌려 그의 머리 위로 서치라이트를 비추며 접근해왔다.

“젠장, 이 말썽쟁이 놈 어딨어!”

빠른 발로 번개처럼 추격자들과의 거리를 벌리던 카렐은 자이납을 찾으려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기요! 저 여기 있어요!”

주기장 주변에서 적을 감시하며 숨어있던 자이납이 슈라의 헤네티들에 쫓겨 헐레벌떡 카렐의 뒤를 따라왔다.

“내려가는 계단은 선수 쪽 좌현에 있어요!”

“그걸 이제야 얘기하냐, 이놈아!”

카렐이 화난 듯 소리를 질렀지만 실상 자이납과 속도를 맞춰주려 걸음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물론 뒤따라오는 헤네티들이나 불릿도 이 둘이 온전히 빠져나가게 놔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카렐은 그 정신없는 소음이 오가는 가운데에서 무언가가 장전되는 미세한 소리를 느꼈다.

“또 마우저야?”

상갑판 좌현 족 모서리를 따라 달리던 카렐은 이디나를 안은 채 바닥으로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하지만 생각보다 미끄러운 상갑판 위에서 제대로 마찰이 잡히지 않으면서 둘의 몸이 갑판 끝 모서리까지 죽 미끄러졌다.

“이크!”

까마득한 지면으로 그대로 추락할 뻔했던 카렐은 상갑판 모서리의 날카로운 센서를 덥석 붙들고 가까스로 제동을 잡았다. 그때 이번엔 공중에서 한 발의 마우저가 날아와 카렐의 코앞을 스쳤다.

“저건 또 뭐야!”

카렐은 이전엔 공중에 떠 있는 불릿에서 마우저로 이쪽을 겨누고 있는 적을 발견했다. 적은 등 뒤와 공중에서 동시에 그를 노리고 있었다. 카렐은 뒤따라오는 자이납 쪽을 휙 돌아보았다.

“빨리 따라와!”

“엄마야!”

뒤꿈치 부근에서 튕겨오른 도탄에 기겁을 한 자이납이 갑판 중간의 안테나 탑 밑에 머리를 처박으며 비명을 질렀다. 불릿 안에서 마우저로 저격을 하고 있는 한 명과, 뒤쫓아 달려오고 있는 X헤네티 5명, 도크를 포위하고 좁혀오는 수많은 적들까지 합치면 이 운 없는 황제와 절반 가디언이 상황을 뚫고나갈 가망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때, 공중에서 날아온 또 한 발이 카렐의 어깨 위를 휙 스쳤다.

“저놈?”

이디나를 안고 납작 엎드렸던 카렐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격이 빗나가자 불릿은 재빨리 고도를 낮춰 갑판 아래로 사라졌다.

‘날 노리는 게 아닌가?’

카렐이 손에 작은 투척단검을 단단히 빼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불릿에 탄 저격수는 뒤를 쫓아오는 5명의 헤네티와는 달리 X도 아닌데다가 자신이 아니고 이디나를 노리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이 양쪽이 ‘소속이 다른 세력들’ 같았다.

“저 새끼들 어디다가 쏴!”

이디나가 대신관의 딸이 있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마구 마우저를 쏘아대는 정신 나간 헤네티들에게 울부짖었다.

“괜찮냐!”

상갑판 모퉁이의 난간에 몸을 숨긴 카렐은 안테나 탑 밑에 웅크리고 있는 자이납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런 그를 놀리듯 또 한 발의 마우저가 탑 중간에 명중해 제법 굵은 기둥을 단번에 꺾어놓았다.

“으엑!”

머리 위로 쓰러지는 탑에 깔릴 뻔했던 자이납이 헐레벌떡 일어나 카렐에게 필사적으로 달려왔다. 카렐로서는 자신을 위해서도, 자이납을 위해서도 무언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그때, 조금 전 갑판 밑으로 사라졌던 불릿이 또다시 수송선 선체 아래에서 소리도 없이 유령처럼 쓰윽 나타났다.

“이익!”

무심코 고개를 든 카렐의 시선과, 문 안쪽에서 그를 겨눈 헤네티의 눈이 그리 멀지 않은 정면에서 딱 마주쳤다. 난간과 불릿과의 거리는 고작해야 50척(15m) 남짓이었다. 카렐을 겨누고 있던 네코의 바유 교단 헤네티가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겼지만 상대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고, 이 백전노장 가디언은 불릿이 부주의하게 표적에 가까이 접근한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런!”

저격수가 자신의 일격이 명중하지 않았음을 직감한 순간, 반대편에서도 무언가 번쩍거리는 시퍼런 것이 날아와 그의 양쪽 눈 사이를 정확히 때렸다.

“아악!”

단번에 두개골이 두 조각나고 절명한 헤네티는 마우저를 떨어뜨리며 그대로 셔틀 안에 나동그라졌다. 덕분에 불릿 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린 채 그대로 노출되었다.

“여자를 지켜!”

이디나를 자리에 놔둔 채 벌떡 일어난 카렐이 갑판을 모서리를 박차고 까마득한 공중으로 훌쩍 몸을 날렸다. 안에 있던 다른 헤네티가 쓰러진 동료의 자리를 급히 대신하려 했지만 그 짧은 순간 번개처럼 안에 뛰어든 이 괴물만큼 빠르지는 못했다.

“비켜!”

카렐은 막 마우저를 들려는 헤네티의 목을 단숨에 비틀어 옆에 내버리고는 지체 없이 조종실로 돌진했다.

“이크!”

조종간을 직접 쥐고 있던 마구스 네코는 카렐이 뛰어든 순간 위험을 직감하고 조종실 옆 비상문을 막 열어젖히는 중이었다. 그는 몸에 강하 케이블을 걸고는 셔틀 조종간을 옆으로 휙 비틀어놓고 비상문 밖으로 몸을 날렸다.

“이 새끼 어딜!”

카렐이 몸을 날려 네코의 옷자락과 케이블을 붙잡으려 했지만 조종사를 잃은 셔틀이 갑자기 옆으로 무섭게 기울기 시작했다. 중심을 잃고 미끄러진 카렐은 네코가 빠져나간 비상문 밖으로 튕겨나가 그대로 추락할 뻔했다.

“으앗!”

조종석 의자를 붙들고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카렐이 허둥지둥 조종간을 붙들었다. 동작은 빨랐지만 문제는 그가 조종할 줄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조금 전 ‘매뉴얼’로 보기는 했었지만 생전 다루어 보지도 않은 낯선 조종간과 시스템은 두뇌와 빠른 운동신경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이거 왜 이래!”

카렐이 소리를 질렀다. 통제를 상실한 ‘불릿’은 거의 살인적인 속도로 옆으로 빙빙 돌며 카렐의 정신을 쏙 빼 놓았다.

“뭐가 이래!”

카렐이 위에서 조종간을 붙들고 쩔쩔 매는 사이,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케이블로 강하하던 네코도 머리 위 셔틀이 빙빙 돌면서 제대로 내려가지 못하고 공중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마구스를 눈앞에서 놓친 카렐이 코앞의 표적에 가슴을 쳤지만 지금은 밑에 매달린 마구스 따위 잡는 게 중요한 때가 아니었다. 그의 조종 지식, 물리학, 역학, 감각기는 제자리에서 미쳐 날뛰는 불릿과 아주 짧은 시간 목숨을 건 대결을 벌여야 했다.

“제발 말 좀 들어!”

카렐이 악을 썼다. 제자리를 빙빙 돌던 불릿의 뾰족한 기수가 수송선 선체를 거의 긁을 듯 확 스친 순간, 끝장임을 직감한 카렐도 조종간을 포기하고 네코의 케이블을 타고 밑으로 뛰어내리려 했다.

그가 조종간을 놓은 순간, 갑자기 회전을 멈춘 기체가 옆으로 기우뚱하며 문가에 있던 헤네티 시체가 튕겨나가 아찔하게 먼 땅바닥으로 추락하는 광경이 보였다.

“어?”

카렐은 조종간을 중립에 놓자 그제야 기체가 자동으로 중심을 잡는 것을 보고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조종간만 똑바로 하면 자동으로 설 것을 낯설고 당황한 나머지 이것저것 마구 손댄 것이 화근이었다.

“자이납! 빨리 타!”

흔들리던 불릿이 일단 자리에 멈추자 카렐이 밖에서 이디나를 보호하고 있던 자이납에게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너무 멀어요!”

“착륙은 못 시키겠으니까 대충 가까워지면 뛰어 타!”

카렐은 조금 전 기체가 제멋대로 흔들렸을 때의 감각을 되살려 서투르게나마 이 셔틀을 수송선 갑판 위의 자이납에게 접근시켰다.

“으악!”

불릿이 수송선 갑판 위로 움직이자 이번엔 그 밑에 매달린 채 지면으로 내려가다가 중간에 못 움직이던 네코 쪽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케이블이 딸려가면서 그도 수송선 측면에 쿵 하고 부딪치고 말았다. 수송선 선체 밑에서 보고 있던 교단 헤네티들이 네코에게 비명을 질렀다.

“줄 끊으세요! 줄 끊고 그냥 뛰어내리세요!”

헤네티들이 이미 마우저로 불릿의 조종석을 겨누고 있지만 밑에 매달려 있는 이 젊은 마구스 때문에 차마 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불릿 쏘지 마! 빌어먹을! 네코 현신께서 계시다!”

선체에 부딪쳐 한 번 튕겼던 네코가 공중을 빙 돌아 두 번째로 부딪치면서 다시 비명을 질렀다.

“저걸 어떻게 해!”

지상의 헤네티들이 불릿을 가리키며 악을 썼지만 셔틀이 날뛰지 않게 붙들고 있는 것만도 다행인 카렐에겐 밑에 매달린 사내가 부딪쳐 까무러치건 추락해 즉사하건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그는 최대한 감각을 발휘해 셔틀을 갑판 위에 가까이 댔다.

난간에 숨어 헤네티들의 사격을 피하고 있던 자이납이 불릿을 모는 카렐에게 소리를 질렀다.

“좀 더요! 더 가까이요!”

문 열린 불릿이 머리 위로 가까워지자 자이납이 이디나를 업고 힘껏 공중으로 뛰어올라 문에 매달렸다.

“가요! 빨리요!”

“꽉 잡아!”

둘이 매달린 것을 확인한 카렐이 셔틀의 고도를 천천히 올리기 시작했지만 워낙 둔하다보니 불청객이 들이닥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어딜 도망가!”

그 새 이디나와 카렐 일행을 뒤쫓아온 슈라가 불릿의 조종석을 향해 마우저를 번쩍 겨누었다. 그는 ‘황제를 죽일 수 있다면 이디나는 죽든 말든 상관없다’는 명령을 받았고, 이젠 다른 선택이 없었다.

“잠깐만요!”

그를 쫓아온 부하 헤네티가 마우저를 쥔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네코 마구스께서 아직 저 밑에 매달려 계십니다! 쏘지 마십시오!”

“뭐?”

멈칫한 슈라가 마우저를 거둘 수밖에 없었다. 저대로 불릿이 통제를 잃고 추락한다면 네코도 함께 끌려가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씨이!”

마우저를 거둔 슈라는 둔중하게 이륙하고 있는 불릿에 번개처럼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막 문으로 기어오르려던 자이납의 다리를 노리고 공중으로 힘껏 뛰어올랐다.

“으아악!”

이디나를 업고 거의 문까지 기어 올라갔던 자이납은 갑자기 다리에 매달리는 육중한 체중에 놀라 도로 밑으로 죽 미끄러지고 말았다.

“엄마야!”

문틀에 한 손으로 겨우 매달린 자이납이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그의 어깨엔 이디나가, 다리엔 슈라까지 두 명분의 체중이 걸려 있었다. 자이납은 여자를 먼저 올라가라고 놔 줄까도 생각했지만 아직 이 여자의 본심이나 정체도 모르는 상황에서 먼저 들여보내는 건 더 위험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냐!”

슈라가 그의 바짓자락과 허리띠를 차례대로 붙들고 불릿 문 쪽으로 악착같이 기어올랐고, 자이납도 이 물귀신 같은 헤네티를 떨어뜨리려 마구 발버둥을 쳤다. 그가 자신의 몸을 타고 불릿 안에까지 들어가 자살공격을 했다가는 안에서 조종하고 있는 황제까지 끝장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가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었다.

“안되겠어요, 폐하, 저, 저 그냥 여기서…….”

슈라가 쉽사리 떨어지지 않자 자이납이 거의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문틀을 쥔 손을 놓을까 말까 갈등하던 그때, 슈라가 이번엔 자이납에게 업힌 이디나의 옷자락을 덥석 붙들었다.

“아이, 씨! 이 찰거머리 새끼야!”

자이납도 이디나를 안 떨어뜨리려 한 손으로 이디나의 허리춤을 움켜쥐었고, 슈라도 조금이라도 더 위로 오르려 이디나를 붙잡은 손아귀에 잔뜩 힘을 주었다.

“으악!”

이디나의 짧은 비명과 함께 그의 옷자락이 북 찢기며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이크!”

자이납의 등에서 미끄러져 추락할 뻔했던 이디나가 슈라의 허리띠를 붙들고 다시 공중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렸다.

“이런.”

자이납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중간에 슈라가 있으니 이젠 그로서도 이디나를 더 이상 건사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에겐 황제가 우선이었다.

“그냥 떨어져!”

이디나가 떨어지면서 한쪽 손이 자유로워진 자이납이 재빨리 단검을 뽑아 자신의 등에 매달린 슈라의 어깨를 위에서 힘껏 내리찍었다.

“떨어져! 이 찰거머리야!”

“아악!”

어깨 위를 찔린 슈라가 비명을 지르며 한 손을 놓치고 버둥거렸다. 자이납은 등을 붙든 그의 나머지 한 팔도 힘껏 베어버렸다. 팔이 풀린 슈라가 짧은 비명과 함께 공중에 핏방울을 그리며 갑판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매달려 있던 이디나도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이런!”

추락하는 순간, 슈라가 반사적으로 이디나를 와락 껴안았다. 대신관이 죽든말든 상관없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를 일부러 죽일 수는 없었다. 슈라는 공중에서 몸을 틀어 바닥에 안전하게 떨어져 보려 했지만 생각만큼은 잘 되지 않았다. 그는 상갑판에 떨어져 발목과 무릎이 꺾이며 이디나를 안은 채로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꼴 좋다! 엿 먹어라!”

몸이 가벼워진 자이납은 재빨리 불릿 위로 뛰어올라 문을 쾅 닫아버렸다.

“아, 아악.”

슈라와 함께 갑판에 추락해 신음하던 이디나는 막 방향을 돌리는 불릿의 조종석 안쪽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황제와 마지막으로 눈이 딱 마주쳤다. 그로서도, 황제로서도, 이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방향을 돌린 금빛 불릿은 평소보다는 못하지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헤네티들의 시야를 벗어나 남쪽 크레인 쪽으로 멀어져갔다. 빼앗긴 불릿은 그곳에 잠시 머물러 있었지만 헤네티들에게 저격할 시간까지는 주지 않고 바로 먼 하늘로 사라져 버렸다.

“으, 으으윽.”

이디나를 안고 떨어지면서 그 충격을 고스란히 다 받아낸 슈라가 바닥에서 파르르 떨었다. 그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할룩스를 빼들었다. 지금 자신의 꺾인 다리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네코, 네코 마구스께선 무사하시냐?”

“다행히 줄을 끊고 뛰어내리셨습니다! 발목을 다치셨지만 생명엔 지장이 없습니다.”

십년감수한 슈라가 숨을 탁 내쉬며 멍하니 하늘을 올려보았다. 황제는 결국 이번에도 그들의 손아귀에 순순히 잡혀 주지는 않았다. 그때, 그의 가슴 위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들, 왜, 왜 날 쐈냐.”

슈라의 희생 덕분에 부상을 모면한 이디나가 멍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아직 정신이 온전히 돌아오지 않은 그가 바보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난 아버지를 배신한 게 아니라고.”

“뭐라고요?”

슈라는 이 상황에서 이런 엉뚱한 소리나 하는 이디나를 확 노려보았다.

“전 알 바 없습니다. 명령만 수행할 뿐입니다.”

슈라가 애써 냉담한 표정을 지었다. 정확히 2시간 전, 딸 이디나가 황제와 눈이 맞아 배신을 하려 한다는 네코의 밀고를 접한 아스탈은 처음엔 ‘오해겠지.’라며 쉽사리 믿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네코가 이디나의 ‘연인’이 누군지까지 확인해 준 순간, 그의 딸에 대한 믿음은 배신감과 분노로 돌변했고, 이제 이디나는 돌아가도 어차피 무사하지 못할 운명이었다.

“난 황제를 죽이러 온 거라고. 왜 날 공격하냐, 이 멍청아.”

이디나는 계속 분통을 터뜨리며 슈라의 멱살을 붙들었다.

“너희가 훼방만 안 놨어도……왜 끼어들어서 다 된 걸 망쳐 놔!”

이디나가 슈라의 멱살을 흔들며 미친 듯 울부짖었다.

“네코가 그랬지? 네코 그놈이 그랬지 않냐고! 그놈이 지금까지 나하고 다 같이 계획해 놓고서는 날 죽이고 내 공을 가로채려 든 거라고! 그 빌어먹을 놈이…….”

“……네코 그분은 현신이십니다. 진정하십시오.”

눈치 빠른 슈라가 흥분해 악을 쓰는 이디나에게 입을 다물라고 눈짓했다.

“자비를 얻어 목숨이라도 건사하시려면 현실을 파악하셔야죠.”

슈라가 격분한 나머지 네코에게 욕을 퍼부으려는 이디나의 입을 얼른 틀어막았다.

“그러면 뭘 해, 난 이제 끝이라고.”

이디나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진짜인가?’

이디나의 너무도 서글픈 울음에 당황한 슈라도 잠시 혼란에 빠졌다. 눈치라면 누구보다 빠른 슈라였지만 웬만한 사람이라면 얼떨떨한 정신에 아무 생각도 못 할 이런 상황에서도 억울함부터 호소하는 이디나의 행동이 그저 살기 위한 연극인지, 진짜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난 함정에 걸렸다고.”

슈라를 따라온 헤네티들이 주저앉은 이디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포박을 지웠다. 이디나는 개처럼 묶여 끌려가던 그 순간까지도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할 수 없지.”

이디나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슈라가 체념하며 고개를 저었다. 비참한 꼴로 끌려가는 저 여인도 지난밤 ‘대신관의 사랑을 받고’, 내일 저녁이면 교단 최대 제련소까지 손에 넣어 막 실권자의 발판을 다질 위치에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거침없이 승승장구하던 대신관의 장녀 이디나는 지금 이 순간 이후 목숨조차 장담하기 어려운 몰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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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맥을 끊지 않으려다보니 좀 많이 길어졌네요....

다다음편부터는 좀 적당히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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