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22 회: 파트 8. 어머니와 딸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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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나를 따라 브리지를 오르던 카렐은 수송선의 상태를 유심히 관찰했다. 한때 황실 주력 수송함이었던 만큼, 카렐도 이곳의 구조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30여 년 전 도난당한 것이지만 그동안 누군가 제대로 관리한 듯 상태는 완벽했고, 연료와 다른 조건만 갖춰 있다면 직접 키를 잡고 이륙시키는 것도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앞서가던 이디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아세요? 저 아직 당신 연락처도 몰라요.”
“할룩스 코드 말이요? 까짓 거, 나누면 되지.”
이디나를 따라 좁은 계단을 오르던 카렐은 별 의심하는 기색도 없이 ‘개인용’으로 따로 준비해 둔 할룩스를 그의 것에 대 주었다. 상대가 아무렇지 않게 연락처를 넘겨주자 이디나는 이 사람을 의심했던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또 혼란스러워졌다.
“여기에요. 들어오세요.”
그를 안내한 이디나는 브리지 주 계단 꼭대기까지 올라 [선장실]이라 쓰인 마지막 문을 열어 보였다. 안에 발을 들여놓은 카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제 이렇게 준비를 해 놨죠?”
카렐은 그곳에 미리 꾸며져 있는 작은 술 테이블에 내심 당황했다. 그곳엔 지난번 그가 이디나에게 주었던 ‘데킬라 아네호’ 두 잔과 다른 독주 몇 종류가 죽 늘어져 있었다.
‘하필 술이…….’
걱정이 든 카렐은 온 감각을 총동원해 주변에 이디나를 제외한 누군가가 없는지를 확인했지만 인간 특유의 체취와 호흡의 느낌, 생명 반응, 혹은 몰래 촬영을 하는 기계장치가 내보내는 미세한 전자파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자이납과 루스탐이 미리 확인했던 대로, 수송선과 조선소 내엔 분명 아무도 없는 듯했다.
“조용하고 멋진 곳에서 당신하고 근사하게 한잔 하고 싶어서 미리 차려 놨죠.”
이디나가 희미한 촛불 네 개로 밝혀진 선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사방으로 통유리의 훤한 창이 난 이곳은 방금 전 청소한 듯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고 심지어 한쪽 구석의 큰 침대까지도 아무도 손대지 않은 새 시트와 침구가 마련되어 있었다.
방을 둘러보던 카렐은 구석의 안락의자에 놓여 있는 이디나의 가방과 그곳에서 삐죽 머리를 내밀고 있는 ‘타리프의 일지’ 3권을 발견했다. 순간 그의 가슴이 다시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저것까지만 얻는다면 과거의 웬만한 비밀은 모두 밝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죠?”
이디나가 데킬라 잔을 집어 카렐에게 불쑥 내밀었다. 잔에서 올라오는 독한 알콜 향에 머리가 어질어질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그는 미소까지 지으며 이디나와 황금빛 잔을 가볍게 톡 맞대고는 팔을 엮어 입술에 가져갔다.
‘장치 안 했으면 일 날 뻔했군.’
잔을 입에 가져간 카렐은 아랫입술에 감춘 작은 주머니를 열고 안으로 술을 살짝 흘려 넣었다. 지난번 실수로 마신 약간의 데킬라에 바로 까무러쳐버린 황제를 보고 자이납이 낸 작은 아이디어였다. 그가 입에 넣은 데킬라는 혀 밑의 봉투로 빨려 들어갔다. 몇 방울이 혀끝을 거쳐 목구멍으로 스며들었지만 그 정도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 술은 어때요?”
카렐의 반응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이디나가 약간은 혼란에 빠진 표정과 함께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술의 강한 쓴맛에 살짝 얼굴을 찡그렸던 카렐이 억지로 웃었다.
“지난번 키스만큼이나 화끈하군요.”
잔을 내려놓은 카렐이 이디나를 품에 안으며 그의 귓가에 입술을 바싹 대고 속삭였다. 온몸을 감쌀 만큼 넓은 가슴에 푹 안긴 이디나는 이 정체모를 연인이 그새 등 뒤에서 손바닥으로 살짝 술을 뱉어낸 것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오늘은 그날보다 더 화끈하게 해 주면 안돼요?”
이디나가 고개를 쳐들고 카렐의 얼굴을 빤히 올려보았다.
‘이 사람 정말 맞을까?’
희미한 촛불에 비치는 얼굴과 눈 색깔은 사진의 ‘황제’와는 달랐고, 거침없이 술을 마시는 것도 그의 예상에서는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귀 모양과 긴 적갈색 머리칼, 무언가에 긁혀 나는 듯한 걸걸한 목소리도 황제의 특징이라 들은 일이 있었다.
“오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디나가 카렐의 가슴에 얼굴을 부볐다. 그는 자신이 가슴을 맞대고 있는 이 사람이 적의 수괴이고 절반 사촌인 동시에 자신처럼 R을 가진 황제이기를 바라는 것인지, 아니면 부담 없이 만나고, 아니다 싶으면 걷어찰 수 있는 평범한 장교에 불과하기를 바라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지난번처럼 용두사미 되지 않게…….”
이디나의 손길은 다시 카렐의 옷깃 단추로 향했다. 막 난처해지려는 카렐을 살려준 건 그의 코트에 들은 할룩스의 요란한 ‘비상호출’ 신호였다.
“이런 빌어먹을.”
카렐이 짜증을 내는 척 할룩스를 꺼내들고 그곳에 나온 메시지를 켰다. 니사가 보낸 긴급한 내용을 확인하는 데는 채 1초도 걸리지 않았다. 눈가가 잠시 미세하게 떨렸을 뿐, 그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왜 비번한테까지 이런 걸 보내고 지랄이야.”
카렐은 짜증을 내는 척 아래에 있는 자이납에 급히 연락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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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를 파악한 후에 납치할지 포섭할지 결정하겠다.
혹시 모르니 브리지 입구를 지키고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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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이제 안 올 거요.”
능글맞게 웃어 보인 카렐은 대뜸 촛불을 모조리 꺼 버리고는 이디나에게 성큼 다가갔다. 온통 새까만 암흑 속에 파묻힌 이디나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카렐은 못 본 척 그를 살며시 다시 안았다.
“오늘은 당신 아버지가 훼방 놓지 않겠죠?”
“그럼요.”
이디나가 표정을 가다듬고 카렐의 가슴에 두 손을 얹었다. 두툼한 가슴근육 안쪽에서 세차게 뛰고 있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경험은 전혀 없지만, 상대 역시도 자신의 존재에, 손길에 흥분하고 있다는 것에서 그도 묘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카렐은 스스로 단추를 풀고는 그의 손을 가슴 안에 살며시 당겨 넣으며 물었다.
“다른 누구에게서 이런 느낌 받은 일 있어요?”
“글쎄요.”
이디나는 근육이 선명히 만져지는 카렐의 가슴과 배, 옆구리를 조심조심 더듬었다. 다른 누군가의 맨몸을 만져보는 건 처음이지만 놀랄 만큼 다부지고 강한 몸이라는 것만은 느낄 수 있었다. 가슴엔 보통의 남자들과는 달리 잔털 하나도 없이 매끄러웠고 복부에서는 자글자글한 근육의 결과 핏줄까지 그대로 만져졌다. 군살이라고는 하나도, 아니 지나치리만큼 적은 것 같았다.
이디나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는 가쁜 숨을 고르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몸 느낌이 이런 것 같지는 않은데요?”
카렐이 이디나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조그맣게 속삭였다.
“비교하려면 나중에 다른 사람 만져봐야 할 텐데?”
“당신 몸부터 다 만져보고.”
불빛이 없어 아무 것도 볼 수는 했지만, 이디나는 카렐의 웃옷에서 무작정 단추를 끄르고 벗겨내려 보았다. 암흑 속에서 그림처럼 완벽한 몸매의 실루엣과 붉게 빛을 내뿜는 눈동자가 희미하게 보였다.
그는 상대가 황제인지 아닌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아니, 이 멋진 몸매의 사람이 정말 황제이고, 아버지가 말한 대로 정말 ‘색골’이면 차라리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카렐의 나머지 옷까지 벗기려 했지만 그의 거친 포옹에 밀려나 더 이상은 맘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디나는 상대방이 갑자기 공격적으로 나오자 방금 전까지 적극적으로 대쉬하던 것도 까맣게 잊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바싹 움츠렸다.
“이, 이봐요.”
이디나가 무심결에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카렐은 그가 어어하는 새 비상 계기판 판넬이 있는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 모두가 워낙 순식간에 벌어졌다보니 이디나가 할 수 있던 건 그의 어깨를 몇 번 의미 없이 탁탁 친 것이 전부였다.
“왜 이렇게…….”
카렐을 밀어내려던 이디나는 그의 입술이 닿은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그 와중에 카렐이 손을 뻗어 벽의 판넬에서 ‘음성 조작’장치를 꺼버렸다는 것도 알 수가 없었다.
“잠깐, 잠깐이요.”
입맞춤에 홀려 잠시 넋을 놓았던 이디나가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침대 위에 눕혀져 있었다.
“맙소사.”
그가 처음 카렐을 여기까지 끌어들이며 원했던 시나리오는 사실 이것까지는 아니었다. 순간 겁이 덜컥 든 이디나가 몸을 반쯤 일으키려 했다.
“조명!”
어둠 속에서 스위치를 찾지 못한 이디나가 음성으로 불을 켜려 했지만 조명이 들어오지를 않았다.
“어두워서 무섭소?”
이 정체모를 연인은 당황하고 있는 그의 가슴 위에 얄미울 만큼 침착하게 몸을 기울이며 웃었다.
“다른 부분들처럼 먹통인가 보오.”
카렐이 그에게 코끝이 닿을 듯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가 내뿜는 길고 뜨거운 숨결을 느낀 이디나는 그를 억지로 밀어내려던 생각을 다시 접었다.
“기왕 왔으면 계속 해요.”
그때, 멀리 어디엔가에서 이디나의 할룩스가 소리를 냈지만 그는 못 들은 척 카렐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보나마나 네코가 황제 맞냐며 다시 묻는 내용일 터였다.
“가지 말고.”
그는 할룩스 소리에 멈칫하는 카렐을 바싹 끌어당겼다. 상대가 진짜 황제건 아니건, 지금 이 순간만은 누구에게도 훼방받지 않고 ‘끝까지 가 보고’ 싶었다.
“이대로 놔두고 가면 내가 죽여 버릴 테니까.”
이디나가 여전히 장갑에 감싸여 있는 그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이건 대체 언제 벗을 건데요.”
카렐이 그에게서 살며시 손을 빼내고는 다시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그리고는 능글맞은 웃음과 함께 속셈을 드러냈다.
“당신이 이렇게 내 품에 들어온 진짜 이유를 알고 나서.”
“뭐라고요?”
잠시 어리둥절해졌던 이디나는 그가 무언가 계속 말을 하려다가 움찔하는 것을 느꼈다.
“이크!”
카렐이 이디나를 끌어안고는 침대 옆으로 휙 몸을 날렸다. 영문도 모른 채 그와 엉켜 침대에서 떨어진 이디나는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사정없이 부딪쳤다.
“웁!”
이디나는 카렐의 가슴 위에서 떨어져 바닥을 구를 뻔했지만 다행히 카렐이 그를 얼른 붙잡아 손으로 머리를 감싸 주었다.
“뭐죠, 뭐 하는 거예요!”
“조심하시오!”
당황한 이디나가 고개를 들려 했지만 카렐이 그의 고개를 품 안으로 끌어당겨 침대 위로 머리를 못 내밀게 했다. 그때, 선장실 밖에서 웬 서치라이트 불빛이 도깨비불처럼 확 나타나 안쪽을 비췄다.
“대체 누구야.”
카렐이 이를 갈았다. 그의 품 안에서 억지로 고개를 든 이디나는 선장실 창밖을 맴돌고 있는 금빛의 불릿과 구석에서 다시 울리고 있는 자신의 할룩스를 보았다.
“저 멍청한 새끼!”
이디나가 버럭 화를 냈다. 연락이 되지 않자 네코가 불릿을 타고 다시 돌아와 밖에서 상황을 확인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미, 미안해요, 저 멍청한 친구가…….”
이디나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다. 서치라이트 불빛이 벽에 반사되면서 선장실 전체에 희미한 빛이 번지고 있었다. 환하지는 않지만, 그는 자신을 안고 있는 사람의 얼굴과 몸을 비로소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흐읍.”
카렐에게 뭐라 변명하려던 이디나의 입술이 순간 움츠러들었다. 이 ‘연인’의 벗은 상체와 그 위에 새겨진 검은 용 문신은 그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섬세하고 화려한 색조의 아버지 아스탈과는 달리 단순하고 직선적인 필치라는 것만 다를 뿐, 분명 다하카르 도안이었다.
“당신…….”
놀란 이디나는 용이 휘감은 그의 가슴과 어깨를 손으로 짚은 채 눈을 떼지 못했다. 밖을 쳐다보고 있던 카렐도 그가 자신의 문신을 넋 놓고 보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놀랐나?”
카렐이 퉁명스레 물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당신 아버지 것과 똑같아서?”
“예?”
상대 역시도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 이디나는 그의 품 안에서 바싹 얼어버리고 말았다. 이젠 이 연인 아닌 연인이 자신의 목을 비틀어 죽인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일단은 살아야 했다.
“당신…… 아니, 폐하이신지 정말 몰랐어요, 정말이에요. 제발.”
그때, 이번엔 카렐의 할룩스로 다급한 연락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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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지대 쪽 600스타디아 전방에서 10여대의 정체불명의 무장 셔틀이 접근중입니다.
빨리 빠져나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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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함정을 판 거냐?”
카렐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이디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장셔틀 10대면 대체 몇백 명을 동원한 거냐?”
“아니에요, 아니라고요.”
이디나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네코에게 혹시 모르니 바유 교단 헤네티 50여명을 준비시켜 달라고는 했지만 조선소에서 최대한 멀리 두고 자신의 연락이 없이는 절대로 투입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던 터였다. 네코의 이번 행동은 분명 이상했다.
‘네코 그놈이 혹시?’
이디나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자신도 황제처럼 네코의 함정에 빠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디나는 네코가 아버지를 죽이고 마구스에 올랐다는 것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지금까지 그것을 약점으로 그를 쥐고 흔들 수 있다고 믿었던 터였다.
‘내가 이 상태로 들키면……?’
이디나의 머릿속에 미처 예상 못했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스쳤다. 그는 아버지에게도 알리지 않고 황제와 단둘이 이곳에 와 있었다. 앞뒤사정 모르는 누군가가 본다면 이디나 자신은 영락없는 배신자였다.
‘네코 저 새끼가 내게 누명을?’
이디나의 숨이 탁 막혀왔다. 다시 생각해 보니 네코는 후계자 시절에 이미 황제를 이런저런 행사에서 실제로 본 일이 많았다. 방금 전 밖에서 만났을 때, 이미 그는 이 ‘치안군 장교’가 황제라는 것을 확인하고 자신을 일부러 함정에 빠뜨린 것이 분명했다. 이대로는 함정에 격분한 황제에게 죽거나, 배신에 분노한 아버지에게 죽거나 둘 중 하나였다.
같은 시간, 이 돌발 상황으로 궁지에 몰렸기는 카렐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상황이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어쩌면 적과 맞서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은 카렐은 얼굴에 쓰고 있던 거추장스런 마스크와 시야를 망가뜨리는 렌즈를 휙 벗어버렸다.
그 짧은 순간, 이디나는 사진에서만 보았던 황제의 진짜 얼굴과 반짝거리는 ‘진짜 그레이오팔’ 을 눈앞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도 잠시 잊은 채 그의 얼굴을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이디나가 황제의 진짜 외모를 볼 수 있는 건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이크!”
카렐이 다시 이디나의 머리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불릿이 있는 곳에서 발사된 강력한 무언가가 창을 뚫고 들어와 집기들을 박살을 내 흩어놓았다.
“마우저니 여기서 움직이지 마시오.”
카렐은 이디나를 놓아둔 채 스프링처럼 몸을 휙 날려 침대를 넘어갔다. 한 발의 마우저가 다시 창을 뚫고 들어왔지만 그의 빠른 발을 잡지는 못했다. 방을 번개처럼 가로질러 달려간 카렐은 벽의 제어 판넬 투명 창을 깨고 붉은색 ‘비상 버튼’을 눌렸다.
귀를 찢는 경보음이 울리며 선장실 창 사방에서 금속제 보강 셔터가 일제히 내려졌다. 그리고 실내는 다시 암흑에 휩싸였다.
“미안해요.”
그제야 조금이나마 안정을 찾은 이디나가 조금 전까지 그의 연인이었던 사람에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 둘 사이에 짧고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낮은 한숨에 뒤이어 카렐이 옷을 챙겨 입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에요,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이디나는 다시 그에게 다가가려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 일어나던 그는 어둠 속에서 무언가에 걸려 앞으로 쓰러질 뻔했지만 다시 돌아온 카렐이 바로 그의 앞에 와 있었다.
“우읍!”
이디나는 자신을 붙들어 준 카렐의 팔을 부러져라 꽉 잡았다. 다행히 황제는 바로 그를 죽일 맘은 없어 보였다.
“……고마워요.”
이디나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황제의 환심을 자아내려 애썼다.
“서로를 알았으니……차라리 맘이 편하네요. 아닌가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카렐은 아무 대답 없이 휙 돌아섰다.
“시간 없으니 나가야겠다.”
카렐은 벗겨진 이디나의 옷을 급히 추슬러주고는 방 한쪽의 가방까지 챙겨 그의 어깨에 걸었다.
“쓸데없이 움직이면 허리 부러질 테니 움직일 생각 마라.”
이디나에게 단단히 주의를 준 카렐은 그를 대끔 어깨에 번쩍 짊어졌다. 깜짝 놀란 이디나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지만 돌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편이 빠를 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얼굴을 머플러로 가린 카렐은 이디나를 어깨에 짊어진 채 선장실을 황급히 나서 좁은 선실 복도를 번개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상황이 카렐도, 이 여자도 생각 못한 전혀 이상한 방향으로 꼬여가는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어쨌든 말로 하는 포섭이 실패했으니, 이젠 이대로 납치하는 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때, 자이납에게서 다급한 연락이 들어왔다.
“큰일 났어요! 방금 금색 셔틀을 타고 온 놈들이 우리 셔틀을 차지하고 불을 질렀어요! X 헤네티들인 것 같아요!”
“X라고?”
자신의 셔틀이 불타고 있다는 말에 당황한 카렐이 창밖 주기장 쪽을 내다보려 했지만 여전히 이곳 주위를 맴돌며 조명을 비추고 있는 금색의 ‘불릿’ 때문에 제대로 머리를 내밀 수도 없었다.
“젠장! 그럼 뭘 타고 돌아가!”
사면초가가 된 카렐이 등 뒤의 조종실을 돌아보았다. 함교 조종실은 이 수송선을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시설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었다.
“이 수송선은 움직일 수 있는 상태냐?”
“아뇨, 도크에 고정되어 있어 못 움직일 것 같아요. 어쩌죠? 시라즈를 부를까요?”
“어느 세월에! 자폭시킬지도 모르는데!”
카렐은 다시 아래층 계단으로 몸을 날리고는 난간을 딛고 다시 한 층을 훌쩍 뛰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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