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07화 (902/1,132)

< -- 907 회: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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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르는 테나스 이그나토 군단장은 8천의 군단병을 이끌고 베아트릭스의 기병대와 대치하면서 아침을 시작했다. 어제 저녁부터 제대로 배를 채운 병사들도 활기에 넘쳤고, 지난밤 반대편의 근위대가 황실군 세 보루 중 한 개를 쓰러뜨렸다는 말에 맘도 홀가분했다.

“이럴 때 좀 나와서 독려해 끼어주시면 어디 덧나나.”

테나스는 후방 막사에 숨어 못 나오고 있는 아버지를 의식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바람이라도 좀 쐬어라.’는 딸의 말에 ‘나갔다가 검은 재를 들이마시면 끝장이다.’라며 끝끝내 외출을 거부했다. 아버지 류한이 정말 수명개조가 풀렸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속내로는 아버지가 일찍 죽어 자신에겐 딱히 나쁠 것도 없지 않겠냐는 생각도 스멀스멀 드는 게 사실이었다.

‘미쳤지, 정신 차려, 이년아.’

“오늘은 시가지에 진입하는 겁니까?”

옆에 있던 작전참모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병사들이 이렇게 계속 서 있어 뭐 하냐고 불만이 큽니다.”

“오늘 중으로 결정난다.”

테나스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실군은 어차피 오늘 중으로 폭도들에 쫓겨 퇴각할 거라고. 우린 그때 어부지리로 무혈입성하면 되는데 뭐 하러 총대를 메?”

“이미 시가지는 다 타버렸습니다.”

“무슨 상관이냐. 진입한 걸로 의미가 있지.”

테나스는 재차 할룩스를 확인했다. 지금쯤 중화기로 보강된 반대편 근위대들이 서쪽 보루의 황실군을 거의 끝장냈어야 때였지만 싸움을 하는 아무 기미도, 연락이 없었다.

“왜 이리 늦어.”

테나스가 짜증을 냈다. 혼자 욕을 중얼거리던 그는 남쪽의 황실군 사령부 쪽에서 그의 군대로 누군가 말을 타고 다가오고 있는 모습에 문득 시선을 주었다. 눈에 확 띌 만큼 크고 아름다운 백마의 자태와 사뿐사뿐한 걸음걸이가 이그나토 가 장병들의 시선을 일시에 사로잡았다.

“저건 또 웬 놈이야?”

테나스가 망원경으로 그자의 모습을 얼른 확인했다. 숨쉬기도 어려울 만큼 빳빳하게 깃을 세운 타이트한 코트 차림새만 봐도 누군지 바로 알 것 같았다.

“드디어 납셨군.”

테나스가 빈정거렸지만 표정은 잔뜩 굳어있었다.

사에나는 평팽하게 대치하고 있는 군대 사이로 수하 하나 없이, 그것도 갑옷 비슷한 판대기 하나 대지 않은 채 마치 아침 산책이라도 하는 양 여유롭게 말을 몰아오고 있었다. 그에게 달린 위협적인 물건이라곤 허리춤의 일상적인 칼 한 자루와 허리춤에 달린 낡은 석궁 하나가 전부였다.

“보안국장이 여기 웬일이죠?”

정보참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비록 수하 하나 거느리지 않은 모습이지만, 제국 사람들이라면 거의 대부분이 갖고 있는 보안국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이그나토 가 전열을 무섭게 휙 스쳤다.

“한심한 놈들.”

테나스는 웅성대고 있는 참모진에 따갑게 일침을 가했다.

“고작 보안국장 따위에 이러면 황제라도 왔다간 똥오줌 지리겠구나.”

테나스는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사에나를 맞으러 다가갔다. 이 악명 높은 ‘얼음여왕님’은 날카롭고 정나미 떨어지는 인상에 미인이라 할 만한 얼굴도 아니지만 차림새만은 바늘로 찌를 틈도 안 보일 만큼 항상 말쑥했고, 뒤로 딱 붙여 넘긴 짧은 머리칼은 어느 한 가닥 따로 노는 것이 없었다.

“뒤에 백기라도 달고 오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국장님? 이 허여멀건 ‘조황비전’이 백기 대용은 아니겠죠?”

“백기? 내 헌병 출신이라 잘 아네만 백기는 교전 중에만 쓰는 것이라네.”

“예?”

사에나의 어처구니없는 반응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테나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어쨌든 양측은 ‘공식적으로는’ 마주하고 있을 뿐 절대 교전 상황은 아니었다.

“제국에서 제일 빠르고 아름다운 말에 ‘허옇다’고 하면 이 말이 화낼 텐데. 명색이 제국 3대 명마 중 하나라네.”

“지금 저희에게 오시는 것 아닙니까?”

“왜? 못 오게 막으려고?”

사에나가 홀쭉한 얼굴에 기이한 웃음을 지으며 앞니를 살짝 드러냈다.

“……물론 아닙니다. 맘껏 보십시오.”

똑똑한 테나스는 얼른 옆으로 비키고 그에게 길을 내주었다. 그의 옆을 스쳐 지나려던 사에나가 갑자기 말을 멈추고 물었다.

“아참, 식사는 잘 했나?”

“예?”

“요즘 자네 군대 배식사정이 말이 아니라지?”

사에나는 뜬금없이 안장 주머니에서 빵 한 덩이를 꺼내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배고프면 이거라도 먹게나.”

흥분을 죽이느라 빨갛게 달아 있던 테나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바로 지난밤 아버지 류한이 보여주었던 바로 그 빵이었다. 그는 손을 저으며 냉담하게 대답했다.

“새로 반입한 식량으로 든든히 먹어서 배가 안 고프군요. 우리 병사들도 마찬가지고요.”

테나스가 분을 삭이며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에게 벌어진 일이 보안국 소행이라는 건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터였다.

“앞으로는 기대하시는 만큼 배고플 일은 없을 것 같군요, 국장님.”

테나스가 잔뜩 감정을 실어 쏘아붙였다.

“그런가? 그럼 내가 한 발 늦었군.”

사에나가 그의 옆을 스쳐 지나 테나스를 따라온 참모진과 지휘관들에게 향했다.

“내가 자네들이라면……당장 여기서 짐 싸 도망칠 텐데.”

“협박이십니까?”

테나스가 얼른 부하들과 사에나 중간을 막아섰다.

“아니, 충고일세.”

“제가 국장님이라면 당장이라도 황제령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번엔 테나스가 질세라 받아쳤다.

“협박은 아니겠지?”

“천만에요, 충고를 드리는 겁니다.”

“고맙네. 안 그래도 곧 돌아갈 참이야. 이 더러운 검은 재를 삼키는 건 수명개조가 온전한 내게도 굉장히 기분 나쁘거든. 그나저나.”

사에나가 계속 덤비는 테나스를 힐끗 돌아보았다. 테나스의 허리에서 할룩스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안 받고 뭐 하나?”

“중요한 손님을 응대하고 있는데 이 까짓 게 중요합니까?”

“내 다시 충고하는데, 지금 안 받은 걸 후회할 거다.”

사에나가 음산하게 웃었다.

“제가 안 받으면 부장에게 다시 걸겠죠.”

그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이번엔 부장의 할룩스가 깜박거렸다. 군단장을 대신해 할룩스를 받은 부장이 창백해진 얼굴로 테나스를 휙 돌아보았다.

“……제후님이십니다.”

좋지 않은 소식임을 직감한 테나스가 얼른 사에나의 눈치부터 보았다.

“내가 후회한다고 했지?”

사에나가 이번에도 악마처럼 웃었다. 창백해진 테나스가 허둥지둥 부하들 사이로 모습을 감추고는 작은 소리로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테나스가 아버지와 통화를 하는 새, 혼자 남은 사에나가 그의 참모들을 돌아보았다.

“자네들은 아침 잘 먹었나?”

“…….”

“류한 경 혼자 내빼기 전에 자네들도 빨리 짐을 꾸려 검은 재를 피하는 게 현명할 거다. 어제 오늘 먹은 맛있는 빵의 정체를 안다면.”

“예?”

눈치 빠른 정보참모가 동료들의 눈치를 보며 난데없이 투구를 눌러썼다. 재빠른 자들이 급히 그를 따랐고, 영문을 모르는 둔한 무장들은 무슨 일이냐며 동료들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소용없다. 제식 투구에 달린 간이필터는 검은 재를 몇 분밖에 못 거르니까. 여기 있던 이주민들은 3일만에 다 죽었으니 여기선 대충 1시간이 1년 치쯤 되려나? 오늘 오후쯤이면 자네들은 중년이 되겠군.”

뒤쪽에 있던 테나스가 할룩스를 탁 끊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와의 연락을 끊은 테나스가 이를 빠득 갈며 사에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에나가 테나스에게 다가서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온 이유를 알려줘야겠군. 자네 본토의 곡물업자가 오염된 곡물을 군에 덤핑 납품하고 내뺐다는 첩보가 입수되었어. 그대들이 지금까지 한 소행은 괘씸하지만 어쨌든 자네 장병들도 제국민이니 보안국으로서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

“테나스 경. 말해 보게, 아비가 뭐라지? 델루지 가에서 검사 결과가 나왔다고 하지 않나? 자네도 수명개조가 깨졌으니 전투는 아랫것들에게 맡겨두고 빨리 빠져나오라고 하던가?”

겁먹은 몇몇 참모들이 주춤거리며 대오에서 천천히 물러났다. 어제 류한 경이 가져온 곡물이, 그들이 배부르게 먹은 저녁과 아침 식사가 이주민들을 몰살시켰던 오염된 식량들이었다면 이곳에 있는 매초가 그들의 수명을 갉아먹고 있을 터였다.

지휘부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감지한 보병대 분위기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무언가를 직감한 지휘관과 사관, 고참병들은 벌써부터 뒤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테나스 경 그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 수 있는 게 몇 시간밖에 안 남았다니 안타까워. 지금이라도 빠져나가면 황실에서 치료법을 찾아낼 때까지 할망구 얼굴로라도 목숨은 부지할지도 모르지만.”

‘할망구’라는 말에 격분한 테나스의 손이 허리춤을 잠시 맴돌았다.

“참게나, 지금 날 공격하면 뒤에 있는 황실군 기병들이 자네들을 늙어죽을 때까지 여기에 잡아둘지도 몰라.”

사에나의 한 마디에 테나스가 칼자루를 쥔 손을 천천히 놓았다. 일단 싸움이 벌어진다면 퇴각도 하기 어려울 터였다.

“군단장님, 어쩌죠?”

둔감한 참모들도 이젠 모두 상황을 눈치 채고 앞 다투어 투구를 쓰고 있었다. 윗사람들이 안절부절 못 하며 투구를 쓰는 모습에 바로 뒷줄의 보병대 일선 하급장교, 사관, 병사들까지 영문도 모른 채 차례대로 투구를 썼다.

그때, 이번엔 병사들이 시가지를 가리키며 웅성대기 시작했다. 시가지 상공에서 웬 파란색 불꽃이 빛을 뿜고 있었다.

“저게 뭐냐?”

넋을 놓고 있던 테나스는 그제야 저 불꽃이 황실군 단위부대가 승전을 자축하기 위해 쓰는 축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맞은편에 대치하고 있는 황실군 기병들이 웅성대는 듯 싶더니 누군가의 선창에 일제히 창을 쳐들고 떠나가라 함성을 울리기 시작했다.

‘이거 뭐야.’

지금껏 교단의 승전보만 기다리던 테나스가 혼비백산하며 할룩스를 확인했지만 여전히 아무 연락도 없었다. 옆에서 눈치만 보던 부장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혹시 황실군이 정말로 승리한 게 아닐까요.”

“말도 안 돼.”

테나스가 고개를 저었다. 어제까지 받은 시가지의 전황대로라면 당장 오늘 아침이라도 헤네티들이 시청사를 덮쳐 한바탕 유혈 참극을 벌였어야 했다.

그때, 그의 할룩스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밀 전문이 들어왔다.

- 시가지 내부와 서쪽 외곽의 전황이 어려우니 그쪽에서 황실군을 선제공격해 주시오. 쿠베. -

교단의 패전을 직감한 테나스는 자신의 선택이 점점 좁아짐을 느꼈다. 병사들은 모조리 늙어죽을 판이고, 설상가상으로 궁지에 몰린 교단은 이젠 대놓고 황실을 공격하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부장, 난 잠시 제후님을 뵙고 올 테니 여길 맡고 있어.”

테나스가 더듬더듬 말하며 조금씩 뒷걸음쳤다.

“예? 군단장님, 저, 저흰…….”

사색이 된 테나스는 몇 명의 호위병들만을 거느린 채 후방에 있는 군단장 막사로 헐레벌떡 멀어지고 있었다.

“잠깐, 군단장님 가시니 나도…….”

기회를 잡은 참모들도 부장 하나만을 놔둔 채 허겁지겁 뒤돌아 테나스를 쫓아갔다.

“군단장님?”

당황한 부장이 장병들의 분위기부터 얼른 확인했다. 하늘같이 따르던 지휘부 사람들이 앞 다투어 후방으로 멀어지는 모습을 8천여 장병들도 똑똑히 지켜보고 있었다.

“왜들 저러지?”

별다른 명령도, 적의 공격도 없는 상황에서 지휘부가 귀신에 쫓기듯 앞장서 물러나는 모습에 이젠 장병들까지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지휘부가 모조리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혼자 남은 부장도 속수무책이었다. 그저 먼저 도망가버린 군단장과 참모진들을 야속하게 돌아보는 것뿐이었다.

때맞춰 반대편의 황실군 기병대가 전진나팔을 울렸다.

“진격!”

베아트릭스를 앞세운 맞은편의 황실군 기병대는 넓게 횡대로 도열하고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 다가오고 있었다. 비록 장창 끝을 앞세우고 있지만 돌격해 오는 모양새라기보다는 상대를 조이고 위협하는 동작이 분명했다.

보안국장과 얼떨결에 단둘이 남은 테나스의 부장은 잔뜩 기가 죽은 얼굴로 그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잔챙이 따위엔 관심 없으니 부하들을 죽이든 살리든 이젠 네가 알아서 결정해.”

사에나는 벌벌 떨고 있는 부장을 놔둔 채 테나스가 간 길을 그대로 따라 혼자 말을 몰아가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던 부장은 결국 깃발을 크게 흔들기 시작했다.

“퇴각! 퇴각해! 숙영지로 물러나라!”

시가지 진입만 기다리며 기세등등하게 전열을 정비했던 이그나토 가 1군단은 난데없는 퇴각령에 아연실색했다. 그렇지만 지휘부가 이미 한참 뒤까지 물러나 있는 상황에서 자기들끼리만 미련하게 갈등할 이유가 없었다.

“퇴각! 퇴각!”

지휘관들 잃은 장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앞을 다투어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쫓아!”

황실군 쪽에서 크고 날카로운 돌격 나팔이 울렸다. 천천히 조여오던 황실군 기병대들은 그들이 퇴각을 시작하자 기다렸다는 듯 속도를 붙여 뒤를 무섭게 위협해왔다. 황실군 선봉에 있는 선무부대가 도망치는 그들을 향해 거대한 확성기로 쩌렁쩌렁 소리를 울렸다.

- 너희는 폭도들이 퍼뜨린 오염된 곡물로 수명개조가 해제되었다! 너그럽고 현명하신 황상께서는 너희 모두를 오염된 지역에서 소개할 것을 명하셨다! 도움을 요청하는 자에겐 이곳을 바로 떠나게 해 주고 무상 치료를 제공할 것이니 그 자리에서 무기를 버리고 움직이지 말라! 달아나 봤자 더 빨리 사망할 것이다! 반복한다! ……. -

“무슨 소리야?”

지금까지 영문도 모른 채 퇴각하던 장병들은 그제야 왜 지휘부가 제일 먼저 도망쳤는지, 왜 그렇게까지 겁에 질려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맙소사, 우린 어떡하라고!”

그때까지도 질서정연하게 물러나던 제후군들의 대오가 공포 속에서 일제히 붕괴되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호드르 시를 집어삼킬 듯 전진했던 이그나토 가 제후군 1군단은 칼 한 번 휘둘러보지 못한 채 이렇게 제 발로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사에나가 탄 조황비전은 앞 다투어 도망치는 적군들 사이로 여유롭게 또각거리며 조금 전 도망친 테나스의 뒤를 그대로 되짚어갔다. 그때, 그의 할룩스로 코나가 보낸 메시지가 들어왔다.

- 류한이 협조를 거부해서 테나스를 유인하는 데 실패한 것 같아. -

“하긴, 이 현신도 뭔가 할 일이 있어야지.”

사에나는 어머니가 물려준 에아 석궁을 만지작거리며 혼자 웃었다. 그리고는 도망치는 이그나토 가 병사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린 채 그들의 숙영지로 말을 몰아갔다. 코리온에게 빌려 타고 온 조황비전도 기분이 좋은지 하얀 꼬리를 흔들며 경쾌하게 걸음을 옮겼다.

“적당히 도망갔을 테니 슬슬 사냥해 볼까.”

“아버지!”

야영지로 돌아온 테나스는 텅 비어 있는 막사의 모습에 당황했다. 아버지의 짐도 모두 사라진 후였고, 아버지를 지키던 근위병들도 한 명도 남아있지 않았다.

“씨이! 이 양반이!”

아버지가 먼저 도망쳐 버렸다는 데 격분한 테나스가 옷걸이를 확 뒤집어엎으며 버럭 화를 냈다.

“잠깐, 뭔가 이상한데.”

테나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는 ‘지난밤 가져온 식량이 모두 오염되었던 것 같다’며 울먹였었고, 딸에게도 ‘너라도 빨리 전선을 빠져나와라’고까지 말해주었었다. 그런 아버지가 딸을 기다릴 새도 없이 이렇게 종적을 감춰버렸다는 것이 쉽사리 믿어지지를 않았다.

그는 할룩스로 급히 아버지를 찾았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다.

“위병! 위병!”

테나스가 허겁지겁 막사를 빠져나가 주변을 지키는 위병을 불렀다. 위병들도 평원을 새카맣게 뒤덮고 이곳으로 허겁지겁 되돌아오는 동료들을 넋 놓고 쳐다보는 중이었다.

“위병! 귀가 먹었나!”

“에…… 예?”

위병이 그제야 고개를 휙 돌렸다.

“제후께선 언제 어디로 떠나셨나! 누가 동행했어!”

“10분쯤 전에 경호원 2명만 데리고 남쪽으로 가셨습니다. 저희가 모시겠다고 했지만 여기서 장군님을 수행하고 있으라고 그러셔서……. 아참, 어제 함께 온 세 연구원들도 동행했습니다.”

“속았다!”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에 테나스가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그와 지휘부가 패닉에 빠져 도망친 새, 머리를 잃은 8천의 장병들이 채 1천도 안 되는 황실군 기병들에 쫓겨 아우성을 치며 도망치고 있었다. 수백, 아니 그 이상은 이미 황실군에 투항했는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무기를 놓은 빈 손을 위로 쳐들고 있었다.

“나팔수! 나팔수!”

테나스가 가까이 있는 나팔수와 장교들에게 목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집결나팔 불어! 전군에 집결나팔 불어서 황실군들을 막으라고 해! 황실의 거짓말에 속지 말라고 전군에 알려!”

명령을 받은 사령부 나팔수와 장교들이 도망쳐오는 장병들에게 허겁지겁 다시 연락을 보냈지만 이미 아수라장이 된 상황에서 혼란만 더 가중될 뿐이었다. 몇몇 장병들이 머뭇거리며 잠시 갈등을 보이기도 했지만 주변의 동료들이 모두 도망치고 있는 중간에서 그런 용감한, 혹은 멍청한 의지가 오래 갈 수는 없었다.

상황을 수습하기 불가능함을 깨달은 테나스가 허겁지겁 말에 올라서는 막사 옆에 있던 군단기를 번쩍 치켜들었다.

“군단장이 여기 있다! 여기 모여!”

테나스는 도망쳐오는 병사들을 향해 깃발을 크게 흔들었지만 그에게 모이는 병사들보다는 괜히 처벌받을까 겁먹고 더 멀리 도망치는 자들이 몇 배는 더 많았다. 망연자실함에 몸을 떨던 그는 남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후방에 4천의 병력을 남겨두고 온 터였다. 호드르 시 일대는 황실군의 방공망으로 셔틀이나 수송선을 띄울 수 없지만 그곳엔 아직 외부와 통할 수 있는 수송선도 남아있었다.

사수를 포기한 그는 급히 명령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퇴각한 죄를 묻지 않을 테니 전군 후방의 숙영지로 퇴각하라고 해!”

테나스는 얼마 되지 않는 병사들을 데리고 처음 주둔했던 숙영지로 허겁지겁 말을 달렸다. 얼마나 명령을 따라 그곳으로 갈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단 한 명의 병사라도 건져야 했다.

그의 할룩스에 발신자가 없는 짧은 문장이 들어왔다.

-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봐라. 대신 등 뒤는 잘 봐라. -

누가 보냈는지를 깨달은 순간, 그의 등줄기로 식은땀 한 방울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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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은 상황 전체를 끝까지 한 번에 죽 이어쓰려 했는데 한 편에 담자니 길어도 너무 길어서 포기했습니다. 대신 이번엔 다음 편을 하루쯤 빨리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호드르 토벌전 전체의 엔딩이 얼마 안 남았는데.....좀 놀라실지도....^^;;

그리고 코멘트 좀 마니마니 달아주세여~ 요즘 코멘트가 줄어서 심심합니당~

아참 요즘 작업 진도가 잘 나가서 3부 3,4권 출판은 전보다 조금 빨리 가능해질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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