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905 회: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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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군 기병대와 한나절 내내 피곤한 신경전을 벌인 남부 이그나토 가 1군단장 테나스는 임시로 만든 막사에 들어서며 무거운 장검과 망토를 휙 벗어 내던졌다.
사실 그의 제후군은 도시의 남쪽과 동쪽을 에워싸고 하루 종일 우두커니 서 있는 것을 빼고는 한 게 없었다. 아침에만 해도 이주민들을 구한다며 사기충천했던 병사들은 ‘왜 빨리 진입하지 않냐.’며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고, 거꾸로 일부는 황실군과 맞서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보이면서 이러다 군대가 두 파벌로 나뉘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교단에 패한 황실군이 시가지를 내주고 물러나면 그의 이그나토 가 보병대가 그들을 대신해 시내의 교단 폭도들을 ‘쫓아내고’ 아버지 류한을 앞세워 정정당당하게 호드르 시를 차지하는 게 그가 아스탈과 미리 짜놓은 시나리오였다. 물론 산에 은거한 교단은 ‘토벌’을 핑계로 대충 놔두는, 아니 사실상 지켜주는 것도 내용 중 하나였다.
그렇게만 되면 아버지 류한과 승장인 그는 가문의 영웅이 될 테고, 무능한 황실과 손을 잡고 이주민들까지 몰살시킨 전 제후 마자리크는 영영 쫓겨나 재기불능에 빠질 터였다.
“누구냐.”
흉갑의 고리를 풀며 막사에 들어선 그는 단검을 빼들며 휙 돌아섰다. 막사의 옷걸이 틈새에 번개같이 칼날을 내질렀던 그는 기겁을 하며 얼른 칼을 거두었다.
“맙소사, 제후 노릇 며칠만에 종치려고 거기 몰래 계셨나요?”
하마터면 상대 목을 찌를 뻔했던 테나스가 혀를 끌끌 차며 단검을 허리춤에 채웠다.
“테나스?”
딸의 칼끝에 비명횡사할 뻔했던 류한 델루지 경은 그제야 목을 더듬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난 또, 암살수인줄 알고.”
“예에?”
테나스는 겁에 질린 강아지마냥 떨고 있는 아버지에게 버럭 화를 냈다.
“아니, 뜬금없이 웬 암살수요? 명색이 군단장 막사라고요.”
“네가 소리도 없이 막 들어오니 그렇지!”
깡마르고 훌쩍 큰 그 남자는 죄 없는 테나스에게 괜한 화풀이를 퍼부었다. 무장인 어머니, 온화한 이미지의 유학자 형과는 달리 보기만 해도 고리타분하고 퀘퀘한 종이 냄새가 풍겨올 것 같은 관료 인상의 남자였다.
“아니, 그럼 신병마냥 막사 문 앞에서 관등성명 신고라도 할까요?”
“내가 안 이러게 생겼나 봐라.”
십년감수한 류한은 딸의 앞에 주먹만한 봉지를 불쑥 내밀었다. 별 생각없이 봉지를 열어보았지만 그 안에는 반쯤 먹다 만 빵 한 덩이 뿐이었다.
“제가 배고픈 건 어떻게 아시고요?”
“먹지 마!”
빵을 먹으려는 딸의 손을 류한이 거칠게 탁 쳐냈다. 테나스의 손에서 떨어진 빵이 바닥을 데구르르 굴렀다.
“너까지 늙어죽으려고 환장했냐!”
“예?”
멍해진 테나스가 바닥에 떨어진 빵과 겁에 질린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설마 오염된 빵…….”
“내 여기로 오는 셔틀에서 받은 저녁식사에 저 빵이 올라와 있었다고!”
“설마 저걸 드신 건가요!”
“조금.”
류한이 이마를 싸쥐며 울먹이듯 대답했다.
“빌어먹을.”
테나스는 잘린 빵을 이리저리 뒤집어보고 냄새도 맡아봤지만 ‘수명개조를 깨는 오염된 빵’이라는 흔적은 전혀 없었다.
“오염됐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아무 티도 안 나는데?”
류한은 품 안에 꼬깃꼬깃 지니고 있던 작은 쪽지를 딸에게 불쑥 내밀었다.
“빵 안에 그 쪽지가 들어있었다고.”
쪽지엔 누군가가 손으로 흘겨 쓴 글씨가 선명히 남아있었다.
- 이제 그 아가리에 검은 재만 처넣어주면 되겠구나. -
쪽지를 본 테나스도 무심결에 주변을 얼른 둘러보았다.
“황실 스파이일까요? 대체 어떻게 아버지 식탁에 오른 거죠?”
“몰라, 나도 몰라, 비엔에 있을 때 시종놈이 샀다고 하는데. 델루지 가에 일단 수사를 부탁해 놨다.”
자신의 수명개조가 깨졌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류한은 제후라고 하기도 민망할 만큼 완전히 공황상태였다.
“델루지 가에 검사기술 배운 비밀요원들이 있다고 하길래 데려오긴 했는데 이미 수명개조가 풀린 거라면…….”
“다행이네요. 이젠 괜찮아요.”
테나스도 ‘내가 먹은 건 혹시?’라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성을 잃은 아버지 앞에서 덩달아 설레발을 치지는 않았다.
“그럴 바엔 차라리 독극물을 넣어 암살하는 게 간단하지 왜 이런 짓을 해요?”
“내가 알 게 뭐냐!”
불안해진 류한이 머리를 싸쥐고 자리에서 벌벌 떨었다.
“보라고! 그놈들은 날 죽이려는 게 아니고 협박하고 있는 거라고! 알겠니? 젠장, 어떤 놈 짓인지 잡히기만 했다가는…….”
류한은 몇 번이나 거울로 얼굴을 보고 손등의 피부를 꼬집어가며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이러다 주름 하나라도 찾았다가는 당장 거품 물고 기절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자, 자, 아버지.”
테나스는 빵을 옆에 던져놓고는 떨고 있는 아버지의 어깨를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됐어요, 조금밖에 안 드셨으니 괜찮아요. 얼핏 듣기로는 신경계의 무슨 레트로 바이러스를 죽이는 물질이라던데 조금만 먹는 건 별 영향 없다고 들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 젠장, 황실 새끼들이 이런 엉뚱한 수단으로 협박할 줄이야, 세상에. 이건 아스탈이 협박하는 무기지 황실이 쓰는 무기가 아니었잖아!”
“쉿.”
테나스가 흥분해 목소리를 잔뜩 높이는 아버지의 입을 급히 틀어막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됐어요, 델루지 가에서 결과 보내줄 때까지 조심하시면 되고요. 그나저나.”
테나스는 아버지의 관심을 억지로 다른 데로 돌려버렸다.
“오다보니 취사병들 저녁 준비로 한창 바쁘던데 며칠치 가져오신 거죠?”
“5일치쯤 될 거다. 같이 온 수송선편에 가져왔는데 벌써 배식 시작했냐?”
류한이 마지못해 일단 주제를 돌렸다.
“지금까지 말라비틀어진 비상식량만 줘서 원성이 자자했거든요. 5일치면 여전히 빠듯하네요.”
테나스가 불만스런 얼굴로 바로 대꾸했다.
“가문에 남은 거 털어낼 만큼 다 털어낸 거야. 그렇다고 델루지 가에서 준 원조식량 가져왔다가는 세데스 그것이 길길이 뛸 게 뻔하고. 빌어먹을, 군량으로는 안 쓴다고 서약서까지 써 가면서 구걸하는 꼴이라니.”
류한이 자존심 상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어쨌든 됐어요, 이젠 제대로 먹일 수 있을 테니.”
테나스는 불안해하는 아버지를 자기 침대에 억지로 데려가 눕혀주었다.
“제 헌병들이 지켜주고 있고, 이상한 빵은 들어올 일 없으니 안심하세요. 아시겠어요? 먼 길 오느라 수고하셨으니 좀 쉬세요. 내일이면 개선장군이 되실 분이 이래서야 되겠어요.”
테나스는 막사 한구석에 있던 쿠키를 하나 집어 아버지 손에 쥐어주고는 씨익 웃어보였다.
착잡해진 테나스는 불안해하는 아버지를 놔둔 채 호위병 몇만 거느리고 숙소를 터벅터벅 빠져나왔다.
“저놈들은 뭐냐?”
테나스는 근위병에게 자신의 막사 문 앞에 쭈그려 앉아 불을 쬐고 있는 세 명의 민간인 일행들을 가리켰다. 단단한 체구에 키가 훌쩍 큰 까무잡잡한 피부의 여자가 마주앉은 왜소한 남자와 시시덕대며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고,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험상궂은 인상의 여자는 입술을 꾹 다문 채 혼자 무언가 생각에 빠져 있는 듯했다.
“모르겠습니다. 제후님께서 우리 편이니 놔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편?”
테나스가 다시 그들을 살폈다. 셋 다 실험도구를 넣는 큰 금속제 가방을 하나씩 끼고 있는 것을 보아 언뜻 연구원들 같았다.
‘저 놈들이 검사요원들인가보지?’
방금 전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테나스는 저들이 있다는 데 내심 안도하며 병사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숙영지를 떠나 황실군과 대치하고 있는 장병들은 별다른 막사도 없이 분대별로 옹기종기 모여 밤이슬을 그대로 맞아가며 저녁식사를 하는 중이었다. 날은 쌀쌀하고 흙바닥에 앉아야 했지만 긴장 속에서 하루를 보낸 병사들은 간만에 받은 제대로 된 저녁식사를 받아들고 나름 편안한 휴식을 갖는 중이었다.
“이게 새로 들어온 건가?”
병사들 사이를 돌아다니던 테나스는 각 분대에 빵과 기름이 둥둥 뜬 고기스튜를 나눠주던 급양대 분대장을 붙들고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군단장님. 본토에서 막 들어온 따끈따끈한 겁니다. 드시겠습니까?”
분대장은 군단장에게도 빵을 내주며 바로 대답했다.
테나스는 빵 하나를 집어 코에 대고 구수한 냄새를 맡아보았다. 지금껏 콩깻묵 섞인 구역질나는 저장빵만으로 며칠을 버텼던 먹었던 병사들은 간만에 먹어보는 부드러운 밀가루 빵과 양고기에 산해진미라도 맛보는 표정들이었다. 지금까지의 형편없는 빵도 기근이 든 고향에서 굶어 죽어가는 가족들 주겠다며 몰래 숨겨두고 굶는 병사들이 부지기수여서 지휘부에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설마 이 빵을 집에 가져간다고 숨기는 새끼들은 없겠지?”
“이건 돌아갈 즈음이면 곰팡이덩이가 될 텐데요.”
테나스는 별 생각 없이 빵을 쫙 갈라보았다. 물론 이 하얀 밀가루 빵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빵을 한 입 먹어보려던 그는 괜히 찝찝한 느낌이 들어 옆에 있던 병사들에게 휙 던져주었다.
“배부르게 먹고 푹 자라. 숨겨놔 봤자 곰팡이만 필 테니까. 내일은 중요한 하루가 될 거다.”
고립된 시청사에서 밤을 보낸 제네르 일행은 어제 종일도 모자라 밤까지도 계속 불타고 있는 시가지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다. 불을 꺼줄 사람도 없는 상황에서 버려진 낡은 시가지는 화마에게는 잔칫상이나 마찬가지였다. 광장에서 시작된 화재는 남풍과 서풍을 타고 번져 북쪽과 동쪽 시가지를 차례차례 태워갔고, 밤새 무서운 식탐을 과시하며 이미 도시 절반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터였다.
번갈아 토막잠을 자며 힘든 밤을 보낸 제네르와 시로, 네피는 해가 뜨기 직전, 아직 어둠이 드리운 옥상에 모여 호드르 산만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후우.”
제네르는 줄곧 산에 굳어 있던 시선을 풀고 조심스레 시청사 주변을 둘러보았다. 조금씩 여명이 비치면서, 어제와는 사뭇 달라진 풍경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거 밤새 딴 세상이 됐구만.”
제네르가 허탈한 얼굴로 말했다. 광장 주변, 그리고 시가지 북쪽과 동쪽 건물들은 어젯밤을 휩쓴 불로 모두 무너져 이젠 지평선까지 확 트인 숯덩이 벌판이 되어 있었고, 건물이 있던 자리엔 쓰러진 기둥뿌리와 옹색하게 선 흙벽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시청사 맞은편 2층짜리 벽돌건물 하나가 아직 무너지지 않은 채 시야를 막고 있는 것을 빼면.
“그래도 뭐 시계(視界)는 좋아졌네. ‘광장’이 넓어진 거나 마찬가지니 기뻐해야 하나.”
제네르가 자조 섞인 말로 중얼거렸다.
“자말이 있는 데가 무사하니 그나마 다행이야.”
제네르가 자말과 30여명의 병사들이 고립되어 있는 서쪽 시가지를 쳐다보았다. 서 있는 건물이라고는 깡그리 사라져버린 동쪽이나 북쪽과는 달리 그곳의 건물들은 아직 건재했다.
“그나저나, 오늘 중으로 반격을 끝낸다면서 산에서는 왜 아직 연락이 없지?”
매사 느긋하던 네피가 시계를 보며 안절부절 못 하는 모습에 시로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이 셋 모두, ‘산 중턱의 적 보급로에 매복하고 있으니 여기서 성공하는 즉시 전선 모두에서 동시에 반격 개시한다.’라는 페로와 마자리크의 지난밤 전문만 새벽 내내 곱씹는 중이었다.
“마자리크 경이 잘 했겠지.”
“그럼, 당연하지!”
네피의 목소리가 유독이 컸다.
“에휴, 누가 팔불출 돌쇠님 아니랄까봐.”
시로가 이 사내의 옆구리를 쿡 찌르는 모습에 제네르가 슬쩍 웃음을 지었다.
“그 양반도 그 양반이지만 이게 성공하면 정말 길 찾아낸 학장한테 이거 절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지 몰라.”
제네르가 시계를 보았다.
“5시네, 곧 환해질 텐데. 도로아미타불 아냐?”
그의 말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로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요! 저기 보세요! 불이에요!”
적외선 시야를 가진 가디언들이 제일 먼저 불꽃을 발견했지만 보통 눈의 제네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중턱에서 솟구치는 큰 불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전투다! 산에서 전투다!”
병사들이 옥상을 지키던 불침번의 고함에 헐레벌떡 서쪽 창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몇몇은 무기를 챙겨들고는 허겁지겁 옥상으로 뛰어올라왔다. 제네르는 메시지가 들어온 할룩스를 얼른 확인했다.
- 적 보급대 공격 성공, 식량과 장비 일체 소각하는 중 -
“됐다, 이제 반격 시각이다.”
만족스런 얼굴로 손뼉을 짝짝 친 제네르가 후다닥 계단으로 향했다.
“계획대로, 오늘 중으로 전투를 모두 끝낸다.”
“그렇게 서두르실 필요가 있습니까?”
시로가 그의 뒤를 따르며 불만스레 말했다.
“보급로를 잃은 건 저들인데 차라리 시간을 끌면서 말려 죽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
“그렇게 느긋하기엔 우리 숫자가 너무 적어.”
제네르가 단호하게 대답하며 계단을 재빨리 내려갔다.
“페로 대공이 왜 남부 파견군을 더 불러오지 않는 걸까요? 지금이라도 파견군 1만만 더 불러오면 이그나토 가 놈들까지 싹쓸이할 수 있을 텐데요.”
“비엔의 델루지 가 제후군이 10만이 넘어. 그 중 3만이 우리 황실 파견군 주둔지 부근에 있지. 그 알량한 황실 파견군 2만에서 절반을 빼내오면 어찌될지 생각해 봤어?”
제네르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면 황제령 본토 병력을 불러와야 하는데, 그건 반드시 황상의 사전 서면 승인이 필요한 사항이지.”
제네르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얼른 주변을 확인한 후 시로와 네피에게 속삭였다.
“어젯밤 대공한테 전해들은 내용인데, 어제 저녁부터 황상과 비상연락도 안 된다고 하더군.”
순간 낯빛이 창백해진 네피와 시로가 서로의 놀란 얼굴을 마주보았다.
“전에도 가끔 그러셨으니 쓸데없이 넘겨짚지는 말고.”
제네르는 시로의 쓸데없는 추측을 일단 가로막고 얼른 주제를 돌렸다.
“새벽에 장태자께 임시승인은 받았다지만 절차상 문제가 있으니 언제 올 수 있을지는 장담 못 해. 지금 있는 병력으로 어떻게든 끝낸다고 생각해야 돼.”
“그럼 저쪽에서 언제든 들어오려고 폼 잡고 있는 남부제후군 1만은 어쩌고요?”
“그쪽은 사에나 경에게 맡겨 둬.”
1층 로비까지 내려온 제네르는 준비 태세를 둘러보았다. 지저분한 청사 로비엔 밤새 병사들이 철제 문짝이니 사무집기, 뭐든지 단단한 것은 모조리 긁어서 엮어 만든 바리케이드들과 죽은 병사들에게서 거둬온 무기가 잔뜩 쌓여있었다.
제네르는 창밖에 손을 내밀어 바깥 날씨만 확인하고는 재빨리 안으로 몸을 숨겼다.
“남서풍이 부는군.”
“어제부터 내내 불었잖아요.”
“비를 뿌린 어제 새벽엔 북쪽의 산에서 바람이 불었고, 날이 맑아진 어제 낮부터는 반대로 남서쪽에서 바람이 불고 있어. 덕분에 광장에서 난 불이 시가지 동쪽과 북쪽만 태우고 끝났지. 후훗, 인공강우를 뿌린 게 아주 쓸모없지는 않았군.”
“언제 기상 공부까지 하셨나요.”
“장군이라면 기본이니까.”
제네르는 여명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바깥 풍경을 내다보며 묘한 웃음을 지었다. 잿더미 폐허 속에 이 시청사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생각해 보니 자말이 저기 있던 게 꼭 나쁘지만도 않겠어.”
시로는 밤새 자말 걱정만 했던 제네르가 느닷없이 딴소리를 하자 슬쩍 눈을 흘겼다. 제네르가 폐허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적 헤네티 놈들 말을 끌고 이리로 들어온 걸 후회하게 될 것 같은데.”
“예?”
“목조 건물들이 붕괴되면서 말을 타고 우리 몰래 휘젓고 다닐 수 있는 작은 골목이 모두 사라졌어. 말이 못 다니는 잿더미는 보병인 우리 편이지. 불을 질러 건물들을 무너뜨린 게 저놈들한테는 자충수가 됐어.”
제네르는 할룩스를 다시 들고 자말을 불러냈다.
“어머니? 아, 아니, 상장군님.”
피곤한 얼굴의 자말이 허겁지겁 할룩스를 드는 모습이 보였다.
“적 헤네티들이 아직도 거기에 있냐?”
“어제 50기 정도가 아군 보루를 공격하러 나갔습니다. 지금은 4, 50명 정도만 보이는데 나머지는 상장군님 계신 시청 주변에 있을 겁니다. 지금 시가지에 있는 놈들은 100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우리가 여기서 선제공격을 하겠다.”
제네르가 입술에 단단히 힘을 주고 말했다. 자말이 창백해진 얼굴로 되물었다.
“희생이 클 겁니다.”
“때로는 감수해야 할 때도 있다. 우리가 여기서 움직이면 네 주변의 헤네티들도 우리를 공격하러 자리를 비울 테니 바로 거기를 빠져나와라.”
“알겠습니다.”
“지도를 보니 시가지 서쪽에 산이 있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농수로가 있더군?”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말라붙었습니다.”
“상관없다. 길 하나 건너 6번가 31호에 연료 가게가 있다. 그걸로 농수로 서쪽 건물들에도 모조리 불을 놔라.”
“알겠습니다.”
“시가지 남쪽 건물들은 사령부 발리스타 사정거리 내니까 인화포탄을 쏘라고 하지.”
“바람 때문에 불이 광장 쪽으로 번질 겁니다.”
“그러니까 불을 붙이라는 거다. 놈들을 이쪽으로 토끼몰이해라.”
제네르가 입술에 야무지게 힘을 주었다.
“말은 불을 아주 무서워하지. 아무리 잘 훈련된 군마도 훨훨 불타고 있는 건물들 사이로 뛰어들지는 않아. 놈들 지휘관은 불을 피해 북쪽과 동쪽에 자신들을 노출시키거나, 아니면 불이 더 커지기 전에 정면 돌파해 서쪽으로 일단 피신하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할 거다.”
자말이 자기의 지도를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서쪽으로 피신한다면 농수로를 건너는 다리가 있는 길을 통과할 겁니다. 거긴 바로 옆에 화재가 났어도 충분히 말로 통과할 수 있을 폭입니다.”
“알아. 그러니 불을 붙인 후에 네가 지킬 곳도 분명해지지.”
그제야 제네르의 의도를 이해한 자말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불에 쫓겨 우릴 정면공격한다면 내가 놈들을 때려잡을 테니 너희가 뒤를 쳐라. 하지만 적이 그쪽으로 간다면 너흰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농수로를 건너는 다리를 사수해라. 실패하면 네게 불을 붙일 시간을 주려 희생된 병사들을 대신해 내 손으로 네 목을 치겠다.”
“알겠습니다. 소장 목숨으로 지키겠습니다.”
표정이 잔뜩 굳어진 자말이 가슴에 손을 가져가며 고개를 숙였다.
명령을 내려놓은 제네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는 뒤에 있는 시로와 네피에게도 지도를 보였다.
“불 놓아 사냥해 본 일 있어?”
네피가 주머니에 마지막 남은 사탕수수를 꺼내 이에 꽉 깨물었다.
“해 본 일은 없지만 재밌겠어.”
네피는 제네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먼저 옷을 툭툭 털며 일어났다.
“마누라 잘 둔 우리 둘이 나서야지, 안 그래, 시로?”
“하여간, 팔불출이라니까.”
시로가 뒤따라 문으로 향했다. 네피는 지난밤 실내에서 뜯어낸 철제 문짝과 책상 등등을 되는 대로 겹쳐 만든 바리케이드를 짚고 서서 시로에게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힘만 센 내가 앞장설 테니까 시로 넌 병사들 데리고 길 안 잃게 잘 따라와!”
“무식하긴. 가디언 제일이야.”
시로의 악의 없는 농담을 뒤로하고, 육중한 바리케이드를 앞세운 네피가 가디언들, 방패를 지닌 병사 십여 명과 함께 시청사 밖으로 조심조심 나섰다. 아니나다를까, 주변에 숨은 헤네티들에게서 동시에 마우저 사격이 날아들면서 몇 겹의 문짝으로 된 바리케이드를 쾅쾅 치고 찢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계속 쏴 봐라! 이 새끼들아! 마지막에 누가 이기나!”
바퀴도 없는 바리케이드는 바닥에 질질 끌리며 귀가 찢어질 만큼 요란스레 긁는 소리를 냈다. 광장 주변 헤네티들의 관심이 이 미련해 보이는―하지만 가장 위협적인― 쓰레기 무더기에 쏠린 사이, 시청 안에 숨어있던 장병들이 시로의 지휘를 받으며 하나 둘씩 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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