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904화 (899/1,132)

< -- 904 회: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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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리끼리라도 쏘겠습니다!”

제대로 교육도 못 받은 장전병들이 두 황자들과 함께 일단 발리스타에 매달렸다.

“여기!”

엘룬이 다시 창을 짊어지고 달려와 장전해 넣었다. 저격수 때문에 포격이 끊긴 사이 기세가 오른 근위대들은 이젠 더 가까이 근접해 있었다.

“발사!”

이번엔 엘룬이 혼자 토크를 조이고 레버를 힘껏 내렸다.

“돌격!”

그 순간, 근위대 쪽에서 지휘관의 큰 고함이 들려왔다. 그리고 상대방을 그저 ‘보통 보병’들로만 알고 있는 근위대가 와아 하는 함성을 올리며 마지막 가파른 언덕을 우루루 몰려 올라왔다.

“그래, 기왕 이리 됐으니 너희 원하는 대로 싸워 봐라!”

카토의 명령에 에키트 족들이 ‘지긋지긋한’ 석궁을 휙 내던졌다. 소질도 없는 사격을 하며 갑갑해하던 에키트 족 전사들에게는 도리어 지금이 더 피 끓는 순간이었다.

“엄호사격!”

후방의 발리스타와 예비 보병들이 쏜 포탄, 볼트에 바툴 가 전사들이 날리는 투창까지 이 근위대의 앞에 쏟아지면서 대오가 잠시 흩어졌다.

“도끼 들어!”

에키트 보병들이 손에 익은 큰 도끼와 방패를 움켜쥐었다. ‘전장에서 죽기 위해 산다.’고 굳게 믿는 이 건장한 야만족 전사들이 몰려오는 적군 앞에서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30년만에 주어진 ‘죽을 기회’였다.

“이제야 죽을 곳이 생겼구나!”

“나가!”

“으아아아!”

거구의 에키트 족들이 가디언 사관들을 앞세우고 숨어있던 곳에서 동시에 튀어나가 근위대를 덮쳤다. 상대가 에키트 족이라는 것을, 그것도 황제의 손에 특별히 선발된 부족 제일의 거친 전사들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는 근위대 보병들은 언뜻 무질서하게 달려오는 듯 보이는 ‘이상하게 덩치들이 큰’ 황실군에 1대 1로 자신만만하게 맞섰다.

“걸렸다!”

무언가에 홀린 듯 붉은 눈을 부릅뜬 에키트 족들은 도끼를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 한때 근위대였던 이들의 방패와 머리를 사정없이 조각내고 짓밟으며 무자비하게 돌진했다. 근위대의 우렁찬 돌격의 함성이 일순간 찢어지는 비명으로 돌변했다.

“이놈들 뭐야!”

근위대는 최정예라고 자부했던 동료들의 머리를 단번에 쪼개고 쏟아진 내장을 짓밟으며 괴물처럼 돌진하는 ‘황실군’의 모습에 놀라 멈칫거렸다. 무모하게 정면으로 맞섰던 그들도 무질서한 진격을 서둘러 멈추었지만 이미 그 괴물병사들은 1열의 대오를 산산이 짓뭉개고 놀라 흩어지는 병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한 번 전투에 휩쓸리면 거의 이성을 잃고 전투에만 몰입하는 것이 이들의 가장 큰 장점이자 약점이기도 했다.

“그냥 보병이 아니야! 이 새끼들…….”

병사들에게 막 고함을 지르던 사관의 미간에 추장이 날린 투척도끼가 퍽 소리를 내며 꽂혔다. 질서 정연한 전투와는 거리가 먼, 미친 듯 치고받고 물어뜯는 난전이었다. 자신만만하게 돌진하던 근위대의 전방 대오가 순식간에 박살나 조각조각 흩어졌다.

“기병 돌진!”

이번엔 2선 대기하던 바툴 가 경기병 20기도 질세라 돌진해 흩어진 병사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같은 시간, 뒤에 있는 카이와 엘룬의 발리스타도 정신이 없었다.

“포탄을 머리 위로 넘겨야 합니다! 각도를 조금 높이세요! 잘못하면 아군을 덮칩니다!”

포수들 중 유일하게 아직 숨이 붙은 한 명이 반쯤 잘려 너덜거리는 한쪽 팔을 꽉 쥐고 쓰러진 채로 두 황자들에게 바삐 주의사항을 알렸다.

“엘룬!”

발리스타를 장전하던 카이가 동생 엘룬에게 뒤쪽 풍차를 가리켰다. 장애물을 쌓느라 병사들이 문짝을 모조리 뜯어내 지금은 흉물스러운 모습이었다.

“내가 발리스타를 맡을 테니까 넌 예비대 병사들하고 저 위에 올라가서 적 후미에서 오는 놈들을 쏴! 저놈들 중화기가 없다니까 괜찮을 거야! 알았지! 네 사격 솜씨 발휘해 보라고!”

“알았어!”

조금 전 일로 자신을 얻은 엘룬은 석궁과 볼트 상자를 들고 헐레벌떡 풍차로 달려갔다.

엘룬을 보내놓은 카이와 장전병은 함께 발리스타의 머리를 최대한 치켜올리고 레버를 확 내렸다. 발리스타에서 힘차게 날아오른 포탄은 한참 난전이 벌어지고 있는 전장을 훌쩍 넘어 그 뒤로 다가오는 적 후미 병력의 머리 위를 덮쳤다. 같은 순간, 풍차 지붕에 올라간 엘룬과 보병들도 적의 후방에 대고 볼트를 쏟아 붓기 시작했다.

기세가 오른 카이가 직접 발리스타를 당겨 레버를 확 내렸다.

“이거나 처먹어라!”

사람 머리통만한 포탄이 한참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에키트 보병대의 머리 위를 휙 넘어 그 뒤로 다가오는 근위대들의 머리 위를 덮쳤다.

“다시!”

비록 옛날부터 꿈꾸었던 멋진 무장의 모습은 아니지만 자신도 무언가 역할을 한다는 데 신이 난 카이가 포탄을 받아 발리스타 위에 쿵 소리가 나게 얹었다. 2대의 발리스타에서 쉴 새 없이 날아오른 포탄과 풍차에서의 사격이 근위대의 보충 병력 발목을 계속 붙들면서 공격하는 근위대도 점점 어려움에 처해갔다.

그때, 길고 희미한 나팔소리가 적군 쪽에서 울려왔다. 적의 퇴각나팔임을 직감한 카토가 칼을 앞으로 겨누고 외쳤다.

“기병들은 양 옆으로 돌아서 퇴로를 차단해! 보병은 계속 밀어붙여! 한 놈이라도 잡아 죽여!”

카토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지만 굳이 필요도 없는 명령이었다. 피에 굶주린 에키트 족들은 적이 도망치는 모습에 더 기세를 올리며 뒤를 맹렬히 쫓았다. 20여기의 기병들은 숫자는 얼마 되지 않지만 동료들에게 처질까봐 화급히 물러나는 근위대들의 측면을 계속 치며 발목을 붙들었다. 그들은 바위언덕 곳곳에 흩어진 100구가 넘는 시체들을 버려둔 채 허겁지겁 물러나야 했다.

이쪽의 추격이 거세어지자 후방에 대기하던 2백 정도의 근위대 예비부대도 퇴각하는 동료들을 도우려는 듯 전진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기세가 올라 추격하는 이쪽 장병들의 기세를 꺾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때, 후방에서 발리스타를 쏘던 카이의 격한 목소리가 카토의 할룩스로 들어왔다.

“우리 바로 남쪽에 있는 보루 봤어? 저긴 상황이 좀 안 좋아 보여! 여기서 우리가 견제해 줘야 되는 거 아냐?”

“예?”

카토는 저 소년이 이런 상황에서도 주변 전장까지 파악했다는 데 내심 전율하며 바로 남쪽에 위치한 중간 보루를 돌아보았다. 세 보루 중 가장 경사도 완만하고 앞뒤로 탁 트여 있어 방어에 불리한 곳이었다. 카토가 포격지원을 묻는 장태자에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보였다.

“여기서 석궁을 쏘기는 거리가 멉니다. 가져온 포탄도 얼마 안 남지 않았습니까.”

“아직 20발은 남았어!”

“안됩니다. 그건 두 분을 지키는 데 써야…….”

카토의 대답에 카이가 흥분했는지 잠시 씩씩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는 갑자기 낮고 차가워진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내가 장태자가 아니고 그냥 평범한 말단 비장이라도 그렇게 결정했겠어?”

“예, 에?”

카토는 어린 장태자에게서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느낌에 움찔했다. 사정거리 내의 아군 보루가 공격을 받는다면 거리가 닿는 무기로 무조건 지원을 해 주는 것이 분명 원칙이었다. 하지만 그는 황자들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에 그런 원칙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다.

“황상의 대리인으로 내가 결정한다!”

카이는 카토의 허락도 받지 않고 무작정 발리스타를 남쪽으로 돌렸다. 곧 2대의 소형 발리스타가 남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시뻘건 불꽃을 뿜는 살상용 포탄을 쏘아 올렸다. 비록 소형이라 위력이 강하지는 않지만 중간 보루를 거의 무너뜨릴 듯 돌격하던 근위대들이 움찔거리게 하기는 충분했다. 그때, 제일 먼 남쪽의 보루를 맡은 지휘관에게서도 ‘적들이 퇴각중이다’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휴우.”

카토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세 곳 중 두 곳이 사실상 적을 물리쳤으니 이제 중간 보루에서만 적을 꺾으면 다 잡은 승리처럼 보였다. 그쪽에 양쪽 보루의 포격까지 집중되면서 근위대의 사기가 꺾이는 듯 보였다. 세 보루 모두를 대상으로 오후 내내 이어진 첫 공세는 근위대의 피해가 막심해지면서 실패가 분명해 보였다.

바로 그때, 풍차 꼭대기에 있던 엘룬에게서 다급한 연락이 전해져왔다.

“어, 봐봐! 시내에서 뭐가 나와! 기병이야! 시내에서 웬 새까만 기병들이 시내에서 나와서 중간 보루로 가고 있어!”

“예?”

눈앞의 전투에 정신이 팔렸던 카토가 그제야 시가지로 시선을 돌렸다. 거의 50기에 가까워 보이는 검은 기병들이 시내에서 튀어나와 지금 한참 막판 힘씨름을 하고 있는 중앙 보루의 후방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시가지 서쪽에서 제네르 일행을 공격했던 그 헤네티 기병이 분명했다.

“맙소사! 뒤를 봐! 뒤를 보라고!”

카토가 얼른 할룩스를 켜고 중간 보루쪽에 경고를 전했다. 그렇지만 이미 근위대를 막기 위해 병력 대부분을 전면에 투입해 놓은 상태에서 곧바로 뒤쪽까지 방어를 확장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루의 몇몇 병사들이 허겁지겁 위치를 옮겨 기병들에게 사격을 하는 듯 보였지만 기병들의 어마어마하게 빠른 속도 앞에서는 숫자도, 속도도 역부족이었다.

“발리스타 한 대 저쪽으로 돌려요! 빨리요!”

방금 전까지도 발리스타를 못 쏜다고 했던 카토였지만 다 잡은 승리를 놓치게 된 그가 더 격앙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근위대 보병들을 쏘던 카이의 발리스타가 돌격하는 검은 기병들의 머리 위로 불덩이를 쏘아 날렸다. 하지만 기병들을 조금 흩어지게 한  정도가 한계였다.

“포탄이 다 떨어졌습니다!”

“아무 거나 못 쏴? 돌! 돌도 쏠 수 있다고 했잖아!”

“전용 포탄이 아니면 1스타디아도 못 날아갑니다! 저 거리는 어림도 없습니다!”

“이씨!”

발끈한 카이가 텅 빈 발리스타를 주먹으로 쾅 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젠 이쪽에서 직접 달려 나가지 않는 이상, 저들을 도울 방법이 없었다. 근위대들이 정면에서 황실군들을 붙잡아놓은 새, 반대편의 헤네티 기병들이 돌진해 보루 정상에까지 뛰어들었다. 사실상 끝이었다.

“그만! 이웃 보루가 넘어갔다!”

거의 언덕 아래까지 적을 쫓았던 카토가 급히 손을 저었다. 지시를 받은 나팔수가 서둘러 정지를 명하는 낮고 긴 나팔소리를 울렸다. 흥분한 에키트 족들이 퇴각나팔을 못 들은 척 계속 나아가려 하자 가디언 사관들과 기병들이 황급히 그들 앞을 막아섰다.

“퇴각나팔 못 들었나! 언덕으로 돌아가!”

“지금 기세가 붙었을 때 밀어붙여야 합니다!”

“정신 나갔나! 옆 보루가 넘어갔다고! 지금 함부로 나갔단 다 죽는다!”

“예에?”

전투에만 미친 듯 몰두했던 에키트 족들과 기병들이 그제야 추격을 포기하고 허둥지둥 보루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다 잡은 듯했던 승리를 놓친 에키트 족들이 곳곳에서 욕을 내뱉고 분통함에 어쩔 줄을 몰라하고 있었다.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헐레벌떡 언덕을 뛰어올라 카이 곁으로 돌아온 카토는 남쪽을 지켜보며 떨고 있는 이 소년의 어깨를 조심스레 짚었다. 소년의 뺨으로 눈물이 주르르 흐르고 있었다.

“저걸 어떡해.”

중간 보루의 언덕 위는 제정신으로는 보기 힘든 끔찍한 도륙이 벌어지고 있었다. 말에 탄 헤네티들은 방어선이 뚫리면서 혼비백산 흩어지는 병사들을 사냥하듯 휩쓸고 돌아다니며 맘껏 피의 향연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먼 거리와 뿌연 검은 안개 덕분에 그곳 상황이 뚜렷이 안 보이는 것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저곳 부대 전체의 할룩스를 폐쇄합니다.”

“그래.”

카이가 힘없이 망원경을 내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면 공신으로 추서해 달라고 말씀드려야겠어.”

카이가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눈물을 뚝뚝 흘리는 어린 소년을 보다 못해 카토가 최대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우리 진지는 물리치지 않았습니까.”

“절반의 성공일 뿐이야.”

“황상께선 패전도 경험하셨고 목숨을 위협하는 암살 시도도 이겨내셨습니다. 이 정도로 약해지시다뇨.”

갑자기 옆에서 모진 말을 던진 건 하심이었다. 항상 카이를 감싸주기만 하던 하심이 지금은 원리주의 유학자다운 엄격한 표정으로 그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황상께서 전하께 선물해 주신 전사들이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보십시오. 이 앞에서 눈물을 보이시다니, 민망하지도 않으십니까!”

하심이 언덕 아래를 가리켰다. 이 풍차 언덕을 공격하다가, 혹은 퇴각하다가 죽은 수많은 근위대의 시체가 언덕을 따라 죽 널려있었다.

“미안하네, 못난 모습 보여서.”

그곳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카이는 눈가의 눈물자국을 얼른 닦아내고는 고개를 꼿꼿이 쳐들었다.

“그런데 솔직히……그분이 너무 보고 싶어.”

일선 소식들을 받으며 발만 동동 구르던 페로는 해가 저물 때까지도 코리온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자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낮에 보안국장 사에나 경이 예고도 없이 잠시 다녀갔던 때를 빼고는 페로의 얼굴에서 단 한 번도 짜증이 거둬진 때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 종일을 기다리다 못해 결국 코리온의 처소에 다시 찾아간 페로는 공중촬영 사진을 보며 태평하게 선만 찍찍 긋고 낙서만 하고 있는 이 유학자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이 새끼를 그냥.’

맘 같아서는 당장 답을 안 내놓으면 목을 비틀어 버리겠다고 협박하고 싶었지만 최소한 지금은 저 성깔 사나운 유학자의 속을 긁어놓아 좋을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답만 내놔 봐라. 내 확.’

페로는 이를 갈며 뒤로 휙 돌아섰다.

“대공 각하, 시가지 서쪽 보루 중 하나가 적에게 넘어갔습니다.”

킵이 막사 문을 열고 뛰쳐들어와 황급히 알렸다.

“카이는? 카이는 무사한 거냐!”

페로가 킵의 옷자락을 덥석 붙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자기 입으로도 지금은 지원 못 한다고 못을 박았던 페로였지만 사실 오후 내내 ‘카이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지’라며 벌벌 떨었던 터였다.

“다행히 그분께서 계신 언덕은 무사합니다.”

“지금 연락할 수 있는 거야?”

“지금은 곤란합니다. 전투 직후 탈진하셔서 하심 예킨터스 교수가 주사약과 안정제를 투약해서 재워드렸다고 합니다.”

“제기랄, 괜히 데려왔어. 젠장! 내가 왜 이 짓을 했남!”

페로가 얼굴을 싸쥐고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백지에 이런저런 그림만 그리고 있던 코리온이 ‘장태자’라는 말에 그제야 눈꺼풀을 슬쩍 치켜뜨고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그 거친 사내를 힐끔 쳐다보았다. 마음이 급해진 페로가 결국 참다못해 그의 노트를 확 빼앗아들었다.

“뭐요, 낙서 좀 그만하고 제대로 생각 좀 하시라고요! 밖에서 사람이 죽고 있는데!”

“낙서라고요?”

코리온은 페로의 손에서 노트를 도로 빼앗으며 퉁명스레 되물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이게 지금 낙서로 보이십니까.”

페로가 다시 욱했지만 이번까지는 꾹 참았다.

“이 균열이 보이십니까.”

코리온은 산 중턱의 넓은 바위지대 위에 흰 분필을 들어대며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지진에 화산, 용암분출이 반복되면서 이렇게 그물처럼 작은 균열과 화산굴이 산을 온통 덮게 되었죠. 대개는 그리 크거나 길지는 않습니다.”

“그래서요?”

“그렇지만 개중엔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크고 깊은 균열이나 굴도 있지요. 그런 곳들을 걸러서 연결하면 이런 길이 나옵니다.”

코리온은 복잡하게 얽힌 수천 개의 균열들 사이를 마치 미로처럼 백묵으로 천천히 그려나갔다.

“정찰병이 없는 7부 능선부터 이 균열을 타고 내려오면 4부 능선까지, 지상에 노출되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정말로 선이 끊어지지 않고 귀신같이 산허리 아래까지 이어져 내려갔다. 코리온이 그어가는 선을 지켜보던 페로의 눈이 점점 커졌다.

“그놈들이 지진으로 무너진 땅 밑으로 왔다고요?”

페로는 그림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균열은 사람 키 몇 배는 되는 대로만한 곳도, 쪼그려서 모로 겨우 지날 만큼 좁고 얕은 곳도 있습니다. 여긴 해가 충분히 기니 잘 훈련된 근위대라면 야음을 틈타 1천 이상이 지날 수 있을 겁니다.”

페로는 코리온이 그려놓은 그림을 따라 3차원 입체지도를 죽 확인해 보았다. 선은 매복해 있는 정찰병들의 시야를 귀신같이 피해서 이어져 있었다.

“정말이네.”

생각지도 못한 그림에 페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다리가 무너진 골짜기는요? 지열발전소에서 이쪽으로 내려오려면 거길 넘어야 한단 말입니다.”

“대공께선 지진 전 과거 사진만 보셨더군요.”

“예?”

“지난번 내린 큰 인공강우로 다리가 걸려 있던 골짜기 한참 위쪽에 사태가 났었더군요. 그건 안 보셨습니까?”

코리온은 사진의 아주 구석, 정말로 아슬아슬하게 찍혔다고 할 만한 곳 위에 크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는 과거에 만들어진 지도를 그 위에 대 보았다. 지도의 지형대로라면 분명 깊은 V자 골짜기여야 할 곳에 큰 바위가 쌓인 것이 보였다.

“다르죠?”

“맙소사.”

페로는 그제야 아차 싶어졌다. 곡물들이 거의 말라죽어 기근이 들 만큼 2년 넘게 비가 거의 안 내리던 곳에 난데없이 폭우가 쏟아졌으니 단 며칠만에 지도가 완전히 변할 수도 있으리라는 건 미처 상상조차 못 했던 터였다.

“어쩌죠?”

생각 없이 물었던 페로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아차 싶었다. 다행히 코리온은 별 반응 없이 조금 전처럼 냉담한 투로 되물었다.

“대공께선 적이 내려온 길로 역습하시려는 것 아닙니까?”

페로는 이번에도 속을 읽힌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움찔했다.

“……그런데요?”

“적들이 서쪽 절벽을 찾아보면 몰래 접근할 길이 있다는 사실을 사실상 우리에게 알려줬으니 잘 내려왔다고 칭찬을 해 줘야 할까요? 하지만 같은 길로 올라가는 건 자존심 센 대공께는 창피한 일 아닌가요?”

“지금 농담할 때가 아닙니다!”

버럭 화를 내는 페로에게 코리온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가능한 길이 하나 더 나오더군요. 근위대가 나온 곳보다 조금 더 서쪽에서 시작하는 또 다른 길입니다.”

코리온이 이번엔 붉은 색 분필로 갈라진 바위틈 지도에 또 다른 선을 긋기 시작했다. 바위틈을 타고 꼬불꼬불 올라간 붉은색 선은 교단의 지휘부가 있는 지열발전소 부근 깎아지른 절벽 밑에서 끝났다.

“이런 길도 있는데 내려올 길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었다니, 정말 무책임했군요, 총리.”

코리온의 핀잔에 페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번엔 화가 났다기보다는 창피함에 할 말이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페로는 지도들을 허겁지겁 거둬들고 코리온의 처소에서 달려나왔다. 그리고는 밖에서 그가 나오기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참모들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출동 준비해. 이젠 우리가 오늘 밤에 적들 목숨줄을 끊으러 간다.”

“등 뒤에 있는 1만이 넘는 이그나토 가 제후군은 어쩌고 말입니까?”

킵의 물음에 페로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글쎄, 그쪽은 보안국장 사에나 경이 칼 한 번 안 쓰고 박살내겠다고 큰소리를 치더군. 믿어봐야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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