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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898화 (893/1,132)

< -- 898 회: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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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드르 시가지 남쪽 벌판에 선 제네르는 먹통이 된 망원경을 자말에게 휙 넘겨주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찍부터 전장에 나온 그는 중장갑에 기병용 창칼로 제대로 무장하고 당장이라도 전장에 달려나갈 것 같은 기세였다.

“지금 몇 시냐?”

“새벽 6시입니다.”

중랑으로 승진한 자말이 자료를 뒤적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평소 새벽6시에 이러진 않았겠지?”

“6시면 훤했죠.”

“며칠째 해를 못 봤는지. 젠장, 산 중턱 위는 보일 생각도 않는군.”

제네르는 혼탁한 검은 안개로 무겁게 휩싸인 새벽의 벌판을 죽 둘러보았다. 무거운 대기에 설상가상으로 어두운 대지까지 분위기를 더 무겁게 만들고 있었다. 황실군이 주둔한 이곳도 원래 옥수수, 감자밭이었던 곳이지만 불량 종자가 퍼지는 것을 막으려 불을 놓아 모조리 태워 버렸다보니 대지까지도 온통 검은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확실히 검은 재야.”

제네르는 하늘을 올려보며 손바닥을 펴 보았다. 작전을 앞두고 이번에도 인공강우를 시도했지만 지난번과는 달리 변변한 구름이 없어 이슬비밖에 내리지 않았다.

“비는 괜히 뿌렸어. 돈만 버렸군.”

“그놈들도 바보는 아닌가봐. 그새 뭔 재주를 부려서 또 재를 뿌렸나?”

한 손에 여전히 붕대를 감은 네피가 사탕수수를 질겅거리며 숙영지 쪽에서 건들건들 모습을 나타냈다.

“글쎄, 뭔가 다른 수단을 쓰나보지.”

이번엔 뒤이어 나타난 시로가 네피의 손에서 사탕수수를 탁 낚아채며 말을 이었다. 만만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잔뜩 굳어 있던 제네르는 든든한 남편의 등장에 비로소 짧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왜 벌써 나왔어요? 날도 쌀쌀한데.”

시로가 걱정스런 얼굴로 제네르에게 바싹 다가갔다.

“몸도 덜 나았는데 후방에 있지.”

시로가 제네르의 붉은 상장군 망토 한쪽을 살짝 벗기고는 다친 어깨에 댄 보조대를 단단히 조여주었다.

“마우저인지 뭔지 상처가 지독하네요, 주변 살점을 다 찢어낸다면서요?”

“나가 싸울 건 아니니 걱정 마, 시로.”

제네르가 시로를 돌아보며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를 마주보며 함께 웃던 시로의 시선이 갑자기 목에서 딱 멎었다. 목을 보호하는 경갑 안쪽으로 지난번 목을 맸던 붉은 상처자국이 슬쩍 들여다보였다.

“잠깐만요.”

시로는 망토 안쪽에 걸치고 있던 얇은 머플러를 풀어 그의 경갑 안쪽에 감아주었다.

“찬바람 들어가요.”

“이러면 목이 안 돌아가잖아. 팔도 너무 조여서 못 움직이겠어.”

“그럼 움직이지 말고 나만 봐요.”

시로가 능청맞게 웃으며 그에게 살짝 입을 맞췄다.

“아이고메, 유치하긴, 눈꼴 시려 못 봐주겠네. 저 덩치로 손수건에 자수 놓을 때 알아봤다니까.”

옆에서 보고 있던 네피가 단물 빠진 사탕수수를 퉤 뱉어내며 둘에게서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그에게 뭐라 대꾸하려던 제네르는 자말의 표정이 그새 잔뜩 굳어진 것을 보고는 시로를 살짝 밀어냈다.

“그나저나, 저놈들이 문제군.”

말 돌릴 거리를 찾던 제네르가 남동쪽 지평선 부근을 노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황실군 숙영지 남동쪽 20스타디아(3km) 정도에 야트막한 언덕을 중심으로 간이 병영과 막사로 이루어진 또 다른 숙영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쳇, 저 썩을 놈들.”

네피가 새 사탕수수 조각을 입에 넣고는 신경질적으로 꽉꽉 씹어댔다. 저곳엔 1만의 이그나토 가 보병대와 2천의 기병대가 호드르 시를 포위한 황실군 4천의 배후에 보란 듯 자리를 잡고 무력시위를 벌이는 중이었다.

호드르 산이 폭도들에게 점령당한지 20일이 가까워오는 지금까지 황실군이 적극적인 공세를 시작하지 못한 것도 바로 저들 때문이었다.

“움? 누가 또 오는데?”

사탕수수를 질겅대던 네피가 뒤를 휙 돌아보았다. 황실군 숙영지 쪽에서 웬 행렬이 가랑비로 축축해진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다가오고 있었다.

“이런.”

흐트러진 모습으로 있던 시로와 네피가 얼른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행렬 중앙에는 주변의 기병들을 압도할 만큼 크고 건장한 검은 군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마와 발목, 갈기에 난 눈처럼 흰 털이 말의 무게감 있는 걸음을 따라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말이 워낙 크다보니 그 위에 앉은 은빛 갑옷 소년은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전장이니 경례는 생략하게나. 그 정도는 안다네, 상장군.”

소년은 고개를 숙이려는 제네르 일행에게 얼른 손을 저어보였다.

“그리고 비장이 상장군한테 경례를 받는 이상한 군대가 세상에 어디 있나?”

카이가 어깨에 단 비장 계급장을 가리키며 웃어보였다. 황실에서는 장태자이지만, 군대에서 그의 공식적인 계급은 최하급장교인 비장에 불과했다.

“척설오추는 시알피 못지않게 사납기로 유명한 말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

“그 말은 최소한 시알피만큼 사납지는 않다는 말인가?”

카이 장태자가 창백하고 여윈 얼굴에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어깨에 두른 은빛 늑대털을 추스르며 말의 목을 툭툭 쳐 보였다.

“내 황상의 허락을 받아 그 사나운 시알피도 잘 탔다네.”

카이가 가슴을 펴 보이며 짐짓 여유를 부렸지만 제네르의 눈엔 병약한 소년의 허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황실 문장의 화려한 갑옷과 무기도 주렁주렁 지니고 있지만 저 칼을 뽑아 제대로 휘두를 수 있을지나 걱정될 정도였다.

장태자 양옆에는 호위를 맡은 카토와 백마 ‘비전’에 탄 코리온의 시무룩한 얼굴도 보였다. 행렬 후미에선 놀이터라도 나온 양 기분이 잔뜩 들뜬 엘룬 옹주가 지난번 페로 관에서 가까워진 하심과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었다.

“상께서 이 광경을 보시면 정말 기뻐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제네르는 장태자가 데려온 100여명의 에키트 족 보병들을 돌아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카이가 10살이 되던 해에 황제가 비장 계급과 함께 ‘생일선물’이라며 몸소 뽑아 편성해 준 특별한 부대였다.

마찬가지로 엘룬도 10살 되던 해에 비장 계급과 함께 선물받은 바툴 가 경기병 25기 사이에서 우쭐하며 제법 지휘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엄마 베아트릭스를 그대로 닮은 엘룬은 이미 옆에 있는 바툴 가 기병들에도 크게 밀리지 않을 만큼 다부지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황자들의 이 ‘나름 친위부대’는 그저 장식품에 불과하지 않겠냐는 오해도 받곤 했지만, 실상 열흘마다 한 번씩 ‘상관의 다음번 용돈과 황제의 총애’를 놓고 황제 앞에서 모의결전을 벌여야 하는 고생스런 처지였다. 그렇다보니 황자들의 자기 부대에 대한 자부심과 집착도 강했고, 모의전투에서 분위기가 격해져 정말로 피를 보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때, 불에 탄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불어 온 차가운 바람이 일행이 든 깃발을 한바탕 펄럭거리게 하고 지나갔다.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선 사람들 사이에서 힘겹게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후우.”

제네르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괜스레 하늘만 올려보았다. 그때까지도 엘룬과 시시덕거리던 하심이 허둥지둥 달려가 카이의 호흡을 확인했다.

“주사를 다시 맞으시겠습니까?”

“됐어, 이제 90병도 안 남았잖아.”

카이가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제조법도 아직 모르니 최대한 아껴야지.”

카이가 한숨을 쉬었다. 아트위야와 그 일행들이 카이에게 처방해 주었던 ‘기적의 주사약’은 근 얼마간 카이의 병세를 놀랄 만큼 호전시켜 주었지만 이제 얼마 안 되는 예비분을 빼면 더 이상 그들에게서 약을 구할 수 없게 된 처지였다.

“막 쓰고 나면 그 후엔 또 방 안에 갇힌 애완동물 신세가 되라고?”

카이는 주사약을 꺼내려는 하심에게 몇 번이나 괜찮다고 손짓을 하고는 억지로 태연한 척 고개를 들었다.

“그땐 지금처럼 바깥바람을 쐴 수 있는 하루하루가 눈물겹게 그리워질지도 모르는데.”

“오늘 유독 안 좋아 보이십니다.”

“가끔은……이럴 때도 있어. 황상께서도 안 좋으신가봐…….”

카이가 자꾸 떨리는 손을 꾹꾹 주무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굳은 표정을 일단 지워낸 카이가 억지로 표정에 웃음을 씌우며 주제를 돌렸다.

“총리는 본부에서 병참 담당관들하고 야전식량을 몇 개씩 들려 보낼까를 놓고 한 시간째 씨름하고 있더군. 난 총사령관이라고 해서 지도 펴 놓고 멋있게 지휘봉 휘둘러대는 것만 생각했는데 지도는 고사하고 밤새 수송선 항로 확보하는 거하고 병사들 먹일 밥 고민만 하던걸. 총사령관 일이 원래 저딴 거였나?”

“환상과 현실의 차이지요.”

제네르가 진짜 전장에는 난생 처음 나와 본 이 소년에게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이번 전투는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이 많아 총사령관이 전투에 집중하긴 어려울 겁니다. 그래도 전하께선 사령실에서 밥통과 씨름하느니 전장이 더 궁금해서 직접 나오신 것 아니십니까.”

“현실보다 환상이 더 좋아.”

카이가 다시 억지스런 웃음을 보이며 이그나토 가 병영을 돌아보았다.

“그럼 저놈들은 어찌할 참이지?”

“위협만 주고 있지 공격은 못 할 겁니다.”

과할 만큼 자신에 찬 제네르의 모습에 카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도 제네르가 평소 신중하기로 소문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지금의 이런 태도가 어딘지 낯설기까지 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는데?”

“류한 그놈의 목적은 황실의 승인을 얻어내자는 것이지 반역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저기서 저러고 있는 것도 우리를 압박하려는 무력시위일 뿐입니다. 게다가 숫자만 많다뿐이지 정말로 공격하는 건 자살행위지요.”

제네르에 이어 시로까지 바로 그 편을 들었다.

“황실군이 훨씬 정예군이고 장비나 조직도 월등합니다. 게다가 우리 보병대에는 가디언들까지 있으니 2, 3배 정도의 남부 깡통보병 정도는 충분히 막아냅니다.”

옆에 있는 네피는 한때 자신이 사령관으로 있었던 부대를 고작 ‘깡통보병’ 정도로 폄훼하는 시로를 슬쩍 흘겨보았다.

“젠장, 이거 맞장구를 쳐야 되는 거야, 말아야 되는 거야?”

장태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물었다.

“검은 재를 만들어 퍼뜨리고 있는 일당들이 배후에 있는데도?”

“그들이 주는 떡이 황실에 반역해서 얻는 이득보다 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페스트를 빼앗겠다는 것도 아니고요.”

제네르의 대답이 워낙 자신에 차 있어서 카이도 뭐라 더 말할 수가 없었다. 그는 ‘가족이 몰살당해 감정이 앞서는 것 같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전혀 없는 그의 처지에선 황제의 최측근인 백전노장들이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주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상장군으로도 충분한데 왜 황상께서 총리까지 출정하게 하셨겠습니까.”

카이는 옆에서 들려온 또 다른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언제 다가왔는지, 대부(代父) 코리온이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에게 생각을 읽혔다는 것을 직감한 카이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는 불안정한 제네르를 제어하기 위해 일부러 페로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

“총리가 밥줄 고민하는 동안 자네가 야전을 맡는다지? 오늘 진입한다고?”

“예, 기병은 베아트릭스 경이, 보병은 여기 있는 가디언 시로 장군이 맡을 겁니다. 병사들이 아침식사 끝내는대로 호드르 시가지부터 진입할 참입니다.”

“적군은 얼마나 되는데?”

“그게 아직 미상입니다.”

제네르가 난감한 표정으로 답했다.

“지난번 발전소 앞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봤던 적군은 배신한 옛 근위대 3천 정도였는데, 발전소가 폭발하면서 1천 이상이 그 자리에서 타죽은 걸로 보였습니다. 여기에 ‘몸에 불 붙이는’ 자칭 헤네티들이 1, 2백 이상 되는 것 같았고요. 그래서 일단은 보병 2천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놈들은 죽여도 되살아난다고 들었는데?”

“죽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건 아니고요, 근거지 어딘가에서 다시 태어나는 걸로 보입니다. 다행히 되살아난 폭도들 3천이 이곳에 오고 있던 것을 차단해서 몰살시켰습니다.”

“그럼 그 뒤론 군수품이나 신병이 전혀 보충이 되지 않은 거고?”

“지금은 우리가 외곽에 빽빽이 방공망을 쳐 놔서 놈들 보급로도 막혀 있습니다만 방공망이 완성되기 전에 수송선 2척 정도가 들어온 걸로 보이는데 뭐가 실려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산에 숨은 적이 2천이고 우리가 공격하는 쪽인데 고작 보병 3천에 기병 1천으로 가능해?”

“여기 지리를 잘 아는 발더 분견대 50여명이 있습니다. 마자리크 경을 아직 따르는 이그나토 가 보병대 5백도 있고요.”

“내가 지금 5천을 잘못 들은 건 아니지?”

카이의 농담에 제네르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숫자가 많다고 효율적인 작전이 되는 건 아닙니다. 산세가 워낙 험해서 큰 병력이 오르내릴 수 있는 길은 정상까지 이어진 군사도로 하나뿐입니다. 정상 부근에 있는 지열발전소와 연결된 도로가 한때 있었지만 지진으로 붕괴되어 지금은 불통입니다.”

“사에나 경이 태워 없애버렸다는 그 발전소?”

“예, 보안국장이 검은 재가 보관되어 있던 발전소 터빈 건물을 날려버렸지만 이곳 상공에서 다시 검은 재가 짙어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남은 부속건물들에 생산시설이 있거나 보관중인 검은 재가 더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까지 모조리 없애야 제국민들이 집단으로 늙어죽는 끔찍한 상황을 막을 수 있습니다.”

“다른 곳에 혹시라도 샛길 같은 건 없고?”

어린 장태자의 짜증나리만큼 계속되는 물음에 제네르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지나가려고 맘만 먹는다면 천 길 낭떠러지는 못 넘겠습니까. 다만 위협을 가할 만큼의 대병력이 움직일 길은 없다는 것이지요. 혹시라도 도주를 꾀하거나 척후병으로 나온 자들을 잡기 위해 기병들이 산자락에 산개해 주변을 감시할 참이니 염려 마십시오. 놈들은 독 안에 든 쥐입니다.”

“그 말은 내가 직접 전장에 참여해도 된다는 뜻이겠군?”

장태자가 슬쩍 함정을 팠지만 그 정도에 걸려들 제네르가 아니었다.

“저 도시에 있는 폭도들은 겁을 준다고 도망치거나 무기를 놓을 자들이 아닙니다. 먼저 죽기 위해 물불 안 가리는 미치광이들입니다. 빨리 죽어야 새 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하께선 밖에서 일단 지켜보시고 안전이 확보된 후에 들어오시는 게 좋겠습니다.”

무어라 반박을 하려던 카이는 입술을 꾹 다물며 씁쓸하게 웃었다.

“알았네. 말단 비장이 하늘같은 상장군님 말을 잘 들어야지.”

제네르는 풀 죽은 그에게 북서쪽에 보이는 작은 언덕을 가리켰다.

“선봉으로 진입하는 것만 전투는 아닙니다. 엘룬 옹주와 함께 저기를 지켜 주십시오. 보병 100명에 기병 25기 정도면 딱 적당할 겁니다.”

‘지켜 달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인 카이가 얼른 눈에 망원경을 대고 그쪽을 살폈다. 산 서쪽 줄기 끝자락의 뾰족한 언덕 위에 낡은 방앗간 건물 하나가 보였다.

“풍차가 있는 저 언덕?”

“예. 산 중턱과 시가지가 모두 잘 내려다보이는 좋은 요지입니다. 지금은 끊겼지만 꼭대기의 지열발전소에서 내려오는 도로가 저 밑을 지납니다. 적 정찰대가 오갈 가능성이 제일 높은 위치니 이상동향이 보이면 꼭 알리셔야 하고요.”

제네르가 무언가 대단한 임무라도 되는 양 목소리에 잔뜩 힘을 주며 비장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실상 척후대가 이미 확인한 안전지대인데다가 시가지와도 제법 거리가 있고 주변엔 조건이 훨씬 좋은 다른 언덕도 여럿 있었다. 결국 밀 찧으러 갈 사람이 아닌 한 별반 쳐다볼 일 없는 곳이었다.

“이봐, 저 옆 언덕에 다른 소대가…….”

“쉿.”

제네르는 옆에서 눈치없이 떠드는 네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흐, 음. 부탁드립니다.”

“물론이네. 황상께서 돌아오시면 아뢸 일이 생기겠군.”

제네르의 계산을 알 리 없는 카이가 희색이 만연해지며 가슴 흉갑을 주먹으로 탕탕 두들겼다. 제네르는 황자들을 지키는 가디언 카토에게 슬쩍 수화를 보냈다.

- 나오지 말고 구경이나 하고 있으시게 해 -

카토가 헛기침을 하며 카이와 엘룬의 부대를 얼른 돌아보았다. 구경을 하건 참견을 하건, 어차피 저들을 지휘하는 건 사실상 그의 몫이었다.

“그럼 수고하게, 나도 꼭 시가지 안에 들여보내 주는 거 잊지 말고.”

사뭇 비장한 얼굴로 무기와 갑옷 매무새를 열심히 정돈한 카이는 뒤따르는 ‘자신의 작은 친위부대’에 전진하라며 손짓을 보냈다. 코리온의 눈짓을 받은 하심도 얼른 카이를 뒤따라 나섰다.

“엘룬, 너희 기병들 먼저 보내서 적이 있는지 정찰하고 앞서 나아가. 내가 보병들 데리고 따라갈게.”

어디서 본 건 있는지, 카이가 동생에게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이며 전방의 언덕을 가리켰다.

“알았어.”

엘룬이 부하들을 보내는 대신 4기의 기병들을 데리고 대뜸 앞장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당황한 카이가 달려가는 동생의 뒤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아, 아니 네가 가라는 말이 아니고!”

오빠가 소리를 질렀지만 붉고 빠른 준마에 탄 엘룬은 못 들은 척, 바람처럼 후다닥 말에 속도를 붙여 멀어져갔다.

“하여간, 애들은 애들이야.”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제네르는 누군가 듣기라도 했다가는 기절초풍할 혼잣말을 몰래 중얼거리며 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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