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96화 (891/1,132)

< -- 896 회: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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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를 챈 모렌 박사가 큰 가방을 뒤져 몇 개의 시약병과 휴대용 기기를 들고 달려왔다. 카렐이 시체에서 머리털을 떼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뭘 검사해야 하는지는 알겠지?”

“물론입니다.”

잠시 후, 데이터를 확인한 모렌 박사가 굳은 얼굴로 카렐을 돌아보았다.

“맞습니다. 하시시입니다.”

카렐이 입술에 힘을 꽉 주며 관 속의 시체를 노려보았다.

“피다이.”

“허, 그래서 늑골을 부숴도 소용없고 4번이나 급소를 그어댔군요. 이놈도 마약중독자였군요.”

베흔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눈앞에 웅크려 있는 자그만 체구의 미라는 목이 잘려도 바로 안 쓰러진다는 악명 높은 아라무트 암살수 ‘피다이’가 분명했다.

“195년 무렵이면 유평황제가 돌아가시고 태자들이 제위다툼을 벌이던 때인데…… 그 양반이 피다이와 싸울 일이 대체 뭐였을까? 자넨 알 것 같은데?”

카렐이 흘끗 노려보자 놀란 베흔이 얼른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저하곤 관계없습니다. 근위대에 넘쳐나는 게 가디언 암살수들인데 미쳤다고 힘들게 피다이를 고용합니까? ‘산 위의 영감’이 거절이라도 하면 사자까지 황천행인데……다만…….”

“다만?”

“그맘때 북부최고제후 투르케스크 공이 오넬론 황제를 반대하는 오르마즈 경을 제거하려고 피다이들을 고용했다는 정보가 있었죠.”

“어쨌든 이 친구가 그때 죽은 놈이라 치고, 여기 갖다놓은 이유는?”

카렐이 베흔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르마즈 경의 시체를 훔쳐간 자들에 관해 내게 말한 게 기억나나? 남부3제후이고 황제의 고모였던 권력가 카산드라 경까지도 시체를 되찾을 엄두도 못 낼 만큼 무서워할 상대라고? 자, 이제 말해보게, 오르마즈 경의 시체를 가져간 게 누구일까?”

베흔이 어깨를 으쓱하며 바로 대답했다.

“아라무트 산 위의 영감님.”

카렐이 웃기 시작했다. 이번만은 정말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양반다운 선택이야, 정말 존경스러워, 누가 감히 그네들에게서 시체를 되돌려 받을 엄두를 내겠어.”

카렐이 갑자기 진지해진 얼굴로 돌변하며 베흔을 휙 돌아보았다.

“시신을 잃어버린 책임을 지고 내 밀사로 아라무트에 갈 텐가? 절반은 영영 세상에 안 나온다지?”

“예에? ……그 무서운 놈들이 설마 의뢰인을 밝히겠습니까?

얼굴이 새하얘진 베흔이 정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의뢰인? 의뢰인은 이미 알아. 오르마즈 그 양반이 죽기 전에 미리 자기 시체 둘 곳을 정해뒀겠지. 문제는 지금 누가 시체를 갖고 있느냐야.”

“그리고오…… 요즘 시라즈 일이 너무 바빠서요. 거, 거긴 들어가면 며칠은 연락도 안 된다던데……급한 일이라도 생기면……”

이리저리 궁하게 둘러대는 베흔을 보며 카렐이 혀를 끌끌 찼다.

“됐네. 보낼 생각도 없었어. 아라무트의 영주 아샤드 경을 내 밀사로 보낼 참이네.”

미라에서 일단 관심을 끊은 카렐은 그 옆자리로 움직였다. 그곳엔 야푸르의 후계자인 ‘31대 아르잔 대신관이 누웠어야 할 제단이 텅 빈 채로 놓여있었다. 제단 뒤쪽 벽감에도 제대로 만들어진 석상 대신 거대한 대리석 원석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역사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던‘ 대신관이었다.

“어디 솜씨 좋은 조각가라도 구해야겠어.”

“여긴 영영 비어있을 자리인데요? 야푸르가 마지막 아닙니까.”

베흔이 참견을 하며 카렐의 눈치를 힐끔 보았다.

“설마 아스탈 그자를 새겨주시려는 건 아닐 테고……누굴 새기시게요?”

“시라즈 일이 바쁜데 뭐 그런 것까지 다 궁금한가?”

카렐은 무언가 냄새를 맡은 듯 보이는 베흔을 흘겨보며 대놓고 비꼬았다. 그리고는 그 옆 ―이 대신관 묘에서 마지막 위치에 있는― [32대 대신관]을 위한 빈 자리 앞에 섰다. 초대 대신관 아프라시아를 정면으로 딱 마주보고 있는 자리였다.

“32라, 2를 5번 곱하면 나오는 수라고 해서 한때 신성한 수로 여겨졌다지. 그래서 이것만 이렇게 클까?”

빈 제단 위를 만지작거리던 카렐은 뒤로 휙 돌아섰다. 32대 대신관의 자리는 다른 대신관들의 것들보다 제단과 석상 모두가 유독이 커서 마주보는 아프라시아와 비슷한 정도였다.

“잠깐.”

카렐은 아프라시아의 석상에서 한참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지금 보니 저 얼굴이 왜 이리 익숙할까.”

카렐이 갑자기 몸을 떨며 양 팔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그의 미묘한 변화를 읽어낸 건 눈치빠른 베흔이었다. 지금까지 내내 건들거리기만 하던 베흔이 진지해진 얼굴로 한 발 다가섰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저기, 저기에 뭐 다른 게 안 보이나?”

카렐이 창백해진 얼굴로 아프라시아 석상을 가리켰다. 그제야 석상들을 돌아본 베흔이 별 생각없이 대답했다.

“아뇨, 우리 셋뿐입니다.”

“아니, 저, 아프라시아 석상만 뭔가 다르지 않냐고!”

베흔이 그제야 석상들을 죽 살폈다.

“그야……아프라시아만 노년기 모습이고……나머지 대신관들은 모두 한창 젊을 때 모습인걸요? 하지만 역대 남자 대신관들은 늙어서는 어차피 다 저 모습이었을 겁니다.”

“빌어먹을, 맞아.”

카렐이 이를 빠드득 갈며 다시 팔짱을 끼고 자신의 양 팔을 꽉 움켜쥐었다.

“꿈에서 날 괴롭히는 게 저…….”

“폐하, 괜찮으시냐고요!”

베흔이 카렐에게 다시 한 발 다가섰다. 손톱에 짓눌린 그의 팔뚝에서 피가 조금씩 배어나오고 있는 것을 발견한 모렌 박사가 비명을 질렀다.

“이런! 발작이에요!”

모렌 박사의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묘 안을 울렸다. 베흔이 스프링처럼 확 튀어 달려와서는 바닥에 쓰러지려는 카렐을 얼른 어깨로 받쳤다.

“제기랄! 이런 거였어? 뭘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놀라고 당황한 베흔은 거품을 물고 버둥거리는 카렐을 얼른 바닥에 눕혔지만 그 이상은 어찌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몰라요! 나도 말만 들었지 처음이라고요!”

“의사가 모르면 누가 알아!”

“지금까지는 몸 안좋은 채로 주무실 때만 발작이 있었지 온전하게 깨어계실 때는……맙소사, 더 심해지는 건가?”

“이런! 혀 깨물겠어!”

카렐의 혀가 이에 걸친 것을 본 베흔이 기겁을 하며 턱을 옆으로 힘껏 비틀고 입에 단검자루를 물렸다. 붉어진 눈은 이미 뒤집어졌고 손톱에 할퀸 팔에서 피가 줄줄 흘러 옷을 붉게 물들였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비명과 함께 거칠게 휘두르는 카렐의 팔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베흔이 옆에 사정없이 나동그라졌다. 천하의 베흔으로서도 이런 상황은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헐레벌떡 일어난 그는 플람베르주로 발광하는 카렐의 어깨를 온 힘껏 내리눌렀다.

“아아아악!!!”

카렐이 고개를 저으며 목구멍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베흔이 기를 쓰고 그를 누르며 소리쳤다.

“진통제 없어? 빌어먹을! 루스탐 그 새끼 불러! 빨리 내려오라고 해!”

카렐은 억지로 고개를 쳐들고 아프라시아의 거대한 석상을 똑바로 보려 했다. 노인의 하얀 대리석 석상이 ―그의 눈에는― 자신에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저항하려 했지만 손도, 발도 전혀 말을 듣지 않았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카렐이 고개를 저었다. 묘를 가로질러 걸어온 석상의 거대한 발이 그를 머리 위에서 짓밟으려 하고 있었다.

- 이 잡종 같으니. -

카렐의 귀에 이 말이 메아리쳤다.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큰 발이 그의 몸을 사정없이 짓눌렀다. 머리가 깨지고, 배와 가슴이 터져 내장이 쏟아져 나오고, 손발이 부서지는 것이 그의 눈에, 그의 귀에, 그의 감각기에 그대로 느껴져왔다.

“아아아악!!!”

그는 몸이 죽처럼 으깨어지며 땅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끔찍한 고통에 계속 비명을 질렀다. 그때, 그의 귀에 모렌 박사의 희미한 외침이 작게 메아리쳤다.

“꿈이에요! 폐하, 다 잔딕의 환각이고 꿈입니다! 황자들 생각해서라도 제발 버티세요!”

카렐이 무작정 손을 뻗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큰 손 하나가 고통에 떠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아주었다.

“살려줘요, 제발…….”

카렐은 눈꼬리로 무언가가 주르르 흐르는 것을 느꼈다. 환각이든 아니든, 도저히 견딜 수없는 고통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길고 긴 고통이 지난 후, 힘겹게 세상과 이어져 있던 의식이 어둠 속으로 조금씩 희미해져갔다. 모렌 박사가 내쉬는 안도의 한숨과 ‘왜 이리 늦게 내려왔냐’며 쏟아내는 베흔의 욕지거리도 그의 의식과 함께 점점 흐려졌다.

“어머니…… 살려줘요.”

그는 또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것을, 하지만 죽음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는 것을 느꼈다.

남부 2제후 세데스는 주페 태자의 감방 유리문 앞에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등 뒤로 다가오는 남자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나 좀 놔두면 안 돼?”

쿠베는 세데스의 등을 슬며시 끌어안으려 했지만 얼른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흐흠, “뭐 안 좋은 일 있으신가요?”

“가문 원로들이 냄새를 맡은 것 같아. 마누엘 숙부 수하들이 요즘 어머니 행방을 캐고 다닌다더군. 내게도 얼굴 볼 때마다 어머니 근황을 떠 보곤 하고.”

“제국총회에서 황실에 확실히 승기를 잡아서 인기몰이를 한 후에 공식적으로 부고를 내면 그땐 아무 말 못 할 겁니다. 대의를 위해 잠시 묻어뒀다고 해도 남부인들은 다 납득할 테고요. 어차피 어머님은 남부인들 사이에선 그다지 인기가 없지 않았습니까.”

“…….”

“그나저나, 여길 너무 자주 오시는 건 좋지 않습니다. 뒤라도 밟히시면 어쩌려고요.”

세데스가 눈을 흘겼다. 유일한 조언자였던 어머니가 없어진 상황에서 그에겐 세상 모두가 가시밭이었다. 아직 슬픔을 채 떨치지 못한 그에게 맘이 편한 곳은 어머니의 관 앞 뿐이었다. 그가 미행당할지 모른다는 위험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이곳을 찾는 것도 그런 평온함을 찾기 위해서였다.

세데스가 시선을 감옥 안에 둔 채 표정 없이 물었다.

“북부에 갔었다지? 뭐 하러?”

“기근 지역이 늘었다기에 확인차 갔었습니다. 기뻐하셔도 되겠습니다.”

쿠베는 세데스가 웃어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북부에서 사실상 유일한 농지인 센지도 소출이 절반 이하로 줄었답니다. 황제령도 가까스로 자급자족하는 수준이니 이젠 남부의 곡물이 없으면 제후 지역은 다 굶어죽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기뻐해야 되는 거지?”

세데스가 그제야 억지로 짧게 웃었다.

쿠베가 이번엔 억지로 껴안는 대신 그냥 바싹 다가서며 말을 건넸다.

“제국총회가 머지않았습니다. 제후들의 지지를 잃은 황실이 우리 비엔의 곡물을 원할 테니 대가를 최대한 얻어내십시오. 제후들과 손잡고 황제령을 치겠다고 협박하면 황제도 백기를 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알려줘야죠.”

“…….”

“1차로 카이 장태자를 폐위시키는 조건을 관철시키셔야 합니다. 거기에 이 꼬마까지 죽여 놓으면 황실은 적통(嫡統)이 끊깁니다. 황제도 곧 죽을 테니 30년 전 같은 기회가 다시 찾아오게 됩니다. 그러니 빨리 죽여야…….”

“어차피 손 안의 새인데 뭘 그리 서둘러.”

세데스가 버럭 짜증을 냈다.

“지금 황제도 어차피 적통은 아니니 선례는 이미 깨졌어. 장태자를 폐위시키고 이 꼬마를 없애 봤자 네페티 그 여자한테나 좋은 일 시켜주는 거지. 딸 마하가 바로 그 다음 순위니.”

쿠베는 세데스의 눈치를 얼른 보았다. 그는 세데스가 황실에서 가장 미워하는 사람이 황제도, 장태자도 아닌, 조모 네페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에게 네페티는 그저 아버지 제롬을 찔러 죽인 ‘그 여자’일 뿐이었다.

쿠베가 세데스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마하 대군도 어차피 얼마 못 갑니다.”

지금껏 무심해 보이던 세데스가 비로소 쿠베를 휙 돌아보았다.

“무슨 말이야?”

“마하하고 엘룬 옹주도 죽은 언니 크낙스하고 같은 결함을 갖고 있거든요. 지금껏 살아있긴 해도 언제 골로 갈지 모르는 시한폭탄들이죠.”

쿠베가 킥킥거리며 목을 쓱 그어보였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세데스는 유리벽 안쪽의 주페를 가리켰다.

“그럼 저 꼬마는?”

세데스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진지했다. 뾰로통해진 쿠베가 냉담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저놈은 잘 모르겠는데요.”

세데스가 입가를 찡그리며 다시 주페를 응시했다. 이마의 반창고를 떼어낸 소년 주페는 침대에 쭈그려 앉아 혼자 책을 읽는 중이었지만 표정은 무거웠다.

“저놈 이마에 박은 게 뭐라 했지?”

“……그냥 추적 장치라니까요.”

“나도 추적 장치가 뭔지는 알아. 손목이나 발목에 채우는 것도 있는데 왜 내가 생전 처음 보는 짓을 저질러 놓은 걸 추적 장치라고 납득당해야 하냐고?”

“신기술이죠.”

궁지에 몰린 쿠베가 괜스레 넉살을 떨며 더 이상의 대답을 회피했다. 그는 세데스에게 ‘잔딕’을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죄다 비밀 투성이군.”

이 남자가 제대로 답을 안 해줄 것임을 직감한 세데스가 낯을 찡그리며 주제를 돌렸다.

“지금 무슨 책을 보는 거지?”

“이름 똑같은 할아비가 쓴 책이죠.”

“주페 대태자? 그 양반 책은 어렵기로 유명한데?”

세데스가 눈가에 잔뜩 힘을 주고는 주페를 계속 응시했다. 주페는 책을 옆에 내려놓으며 우두커니 천장을 올려보았다. 옅은 쌍꺼풀이 진 소년의 큰 갈색 눈동자가 오늘은 어딘지 휑해 보였다. 세데스는 소년의 긴 눈썹 사이에 눈물이 맺힌 것을 보았다.

“아무리 포로지만 태자인데……너무 박대하는 거 아냐?”

심통이 난 세데스가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정말로 주페는 처음 봤을 때에 비해 뺨도 홀쭉했고 몸도 여위어 보였다. 절반 정도만 비운 채 방구석에 치워져 있는 초라한 식판이 그 이유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참 잘 먹고 클 나이인데 저게 뭐야.”

세데스의 입에서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쿠베가 그 옆에서 빈정거리듯 말했다.

“지금 안 죽이고 계속 키워주면 조만간 저보다도 큰 덩치가 되어 공에게 칼을 겨눌 텐데요?”

“그렇겠지, 몇 년만 더 크면…….”

세데스의 입에서 씁쓸한 웃음이 흘렀다. 그때, 계단 쪽에서 누군가가 후다닥 달려 내려와 쿠베에게 알렸다.

“대장, 벨에게서 급한 연락입니다.”

“잠깐만, 먼저 자리 좀 비우겠습니다.”

“맘대로 해, 언제는 내가 막는다고 안 갔나.”

쿠베는 세데스의 짜증에 찬 시선을 뒤로하고 서둘러 감옥 밖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세데스는 다시 소년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벽 안의 주페는 고개를 숙인 채 혼자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길고 고운 소년의 속눈썹에서 보석 같은 눈물방울이 무릎 위로 똑 떨어져 내렸다.

“빌어먹을, 내가 왜 이런 걸 보고 있지.”

유리벽 앞을 떠나려던 세데스는 결국 도로 주페를 향해 돌아섰다. 이상하게도 소년에게서 눈길이 쉽사리 떨어지지를 않았다.

“간수.”

“예!”

“문 열어 봐라.”

“지금 이 감방 말씀이십니까?”

감방을 맡은 헤네티가 당혹스런 얼굴로 되물었다. 세데스가 조금 전 쿠베에게 그랬듯 버럭 화를 냈다.

“그럼 넌 내가 빈 감방 들어가 낮잠이라도 자겠다는 건줄 알았냐?”

“저 꼬마는 위험합니다. 힘도 웬만한 성인보다 훨씬 세고 교활하기까지 합니다.”

“내가 저 꼬마만도 못해 보여서?”

세데스의 인상이 험악해지자 헤네티가 마지못해 보안키를 가져와 유리문의 잠금장치를 끌렀다. 그리고는 재빨리 들어가 주페의 손에 수갑을 채우고는 침대에 줄을 연결해 놓았다. 난데없이 손이 묶인 주페는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인지 낯빛이 창백해졌다.

“됐다, 나가 있어.”

감방에 들어선 세데스는 처음으로 이 어린 태자와 단둘이 마주했다. 잠시 놀랐던 주페는 문 밖에서 나타난 세데스의 모습에 턱에 힘을 꽉 주었다.

“그대였군요, 아까부터 밖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계속 서성대더니.”

막상 감방에 들어온 세데스는 ‘내가 여길 왜 들어왔지?’ 싶었다. 태자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정치적으로도 그의 운신의 폭을 좁히는 멍청한 짓이었다.

“날 풀어주러 온 건 아니겠지요, 세데스 델루지 경?”

주페는 손을 묶은 쇠사슬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식사라도 제대로 하시지 저게 뭡니까.”

막상 첫 말을 뱉은 세데스는 ‘정말 멍청한 소리군.’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탓했다.

“설마 황궁에서처럼 으리으리한 식사라도 원하시는 건가요?”

음식이 그대로 남아있는 식판을 힐끔 쳐다보았던 주페가 힘없이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요. 빵하고 채소를 많이 먹으면 속이 안 좋을 뿐이요.”

세데스는 그제야 아차 싶었다. 육식동물의 피가 절반 섞였으니 일반인의 식사를 제대로 먹을 리가 없었다. 식판 위엔 몇 입 베어 먹은 빵과 손도 안 가게 생긴 삶은 채소 약간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미안합니다, 제 불찰이군요.”

세데스는 주페에게 바싹 다가가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춰 보았다. 크고 선해 보이는 눈매에 균형이 잘 맞은 오뚝한 코, 모나지 않은 갸름한 얼굴선이 누가 봐도 퍽이나 잘생긴 용모였다.

세데스는 죽은 어머니 오르테가 이 꼬마와의 약혼을 종용하며 했던 말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레곤에게 전해들은 말로는 제안을 받은 황제도 나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고까지 했었다.

“어쩌면 다른 모습으로 이렇게 마주했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말이요.”

주페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되물었다. 자신을 억류하고 있는 어른이, 그것도 크고 당당한 체구의 무서운 제후가 이렇게 똑바로 쳐다보면 제아무리 태자라도 지레 기가 죽어 시선을 피할 법도 했지만 주페는 세데스의 시선을 마주한 채 큰 눈을 깜박거리기만 했다.

소년과 한참동안 눈을 맞추고 있던 세데스는 별 생각 없이 얼굴을 만져보려다가 멈칫하며 손을 도로 거두었다.

“이젠 궁에서처럼 돌봐줄 사람도 없으니 앞으로는 스스로 몸을 챙기시라는 말입니다.”

“경이야말로 날 어린애 취급하려 들지 마시오. 난 제국의 태자고, 그대에게 복종을 명할 수 있소.”

주페가 눈을 부리부리하게 치켜뜨며 분명하게 말했다.

“날 무슨 목적으로 잡아놨는지 몰라도 그대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세데스는 말도 안 되는 호기를 부리는 태자의 모습에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황제가 아들은 제대로 키워놨군.’

세데스는 내심 죽은 엄마의 선택이 정말로 탁월했다고 생각했다. 이 꼬마는 부주의하게 공격적이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비굴하게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

“그럴까요.”

세데스는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주페의 뺨을 살며시 만져보았다. 보드랍고 따뜻한 느낌이었다. 슬슬 어른이 될 준비를 시작했는지, 코와 턱 밑에 보송보송한 솜털이 만져졌다.

‘내가 왜 엄마한테 싫다고 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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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이러다 변태(?#[email protected]^&&@)로 잡혀가지 않나 걱정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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