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95화 (890/1,132)

< -- 895 회: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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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출산을 겪었지만 아지드로서는 남들 하는 산후조리 같은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투르케스크가 준 얼마 안 되는 돈은 이웃집에서 석탄과 살림살이 사들이는 데 다 써버려 당장 입에 넣을 빵 살 돈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아기를 낳고 이틀만에 사금 채취를 배우러 추위가 몰아치는 강변 사금장에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병원이나 학교를 열어 그나마 편한 돈을 벌고 싶었지만 쫓기는 처지에 그런 짓으로 신분을 드러내는 건 바보짓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공립학교만 나온 아라무트 노동자 출신’으로 스스로를 밝혔지만 그것도 나중에 후회를 해야 했다. 이 마을에선 학교를 나오고 글을 읽을 줄 아는 것만으로도 똑똑한 사람 취급을 받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 탓이었다.

글도 읽을 줄 알고 이런저런 재주도 많은 아지드는 바깥세상과 거의 담을 쌓고 살아 온 폐쇄적인 오지마을 사람들에게 나름 반가운 존재였다. 그는 까막눈인 마을 사람들에게 글을 읽어주거나 대필해 주었고, 몇 안 되는 기계류도 직접 고쳐주며 며칠 만에 인심을 얻을 수 있었다. 대신 그들에게서 사금 채취하는 법을 배웠고, 구식 화덕에서 빵 굽는 법, 잿물로 빨래하는 법, 바느질 같은 것들을 배울 수 있었다.

어쨌든, 그는 이곳에서 더 이상 엘리트 신관도, 의사도 아닌 평범한 사금채취꾼 아낙에 불과했다. 농사지을 땅도, 사냥할 동물도 거의 없는 고산에서 할 수 있는 건 눈에 불을 켜고 사금조각을 찾거나, 드물게 ‘사금관광’을 오는 외지인의 길안내를 맡는 행운을 바라는 정도였다.

당장 아기 먹일 젖이 시급한 아지드는 매일아침 누구보다 일찍 강변에 나가 칼날 같은 산바람 속에서 종일 불편한 자세로 쭈그려 앉아 물, 모래와 씨름을 했다. 젖도 안 뗀 아기를 집안에 혼자 놓아둔 채 나가는 건 괴로운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고개도 못 가누는 갓난아기를 추운 강변에 데려나갈 수도, 집안에 들어앉아 아기를 굶겨죽일 수도 없었다.

벌이는 신통치 않았다. 어쩌다 운 좋은 날은 며칠 먹을 귀리 살 돈을 구하기도 했지만, 아직 서툰 그에게 금빛은 꿈속에서나 보는 날이 더 많았다. 몸도 고되고 굶는 날이 많아 젖도 잘 나오지 않았고, 어느 날은 너무나도 고기가 먹고 싶어 눈 딱 감고 쥐를 구워먹어도 보았지만 결국 속에서 받지 않아 모두 게워내고 말았다.

다행히 아기는 그 형편없는 환경 속에서도 잔병치레 한 번 하지 않고 건강하게 버티어 아지드의 고민을 덜어주었다. 그렇지만 모녀가 찢어지게 힘든 두세 달을 지내는 동안, 투르케스크는 고개 한 번 디밀지 않았다.

금조각 하나 건지지 못한 채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도 워낙 여러 날 겪고 나니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날도 빈 쟁반과 체를 들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온 아지드는 빠끔히 열린 문 안에서 희미하게 나오는 불빛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뭐야.”

집안에 아기 혼자 있다는 걸 떠올린 그는 일순간 숨이 탁 막히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에 오만가지 끔찍한 상상이 다 흘렀지만 그는 당장 문 안에 뛰어들고픈 맘을 가라앉히고는 집 옆에 있던 곡괭이를 움켜쥐었다.

‘어떤 놈인지 대가리를 그냥.’

그가 바싹 여윈 손에 힘을 주어 곡괭이를 꽉 움켜쥐었다. 이미 대신관의 아들딸까지 죽인 마당에 이젠 누군가에게 흉기를 휘두르는 것 따위는 문제도 아니었다. 그는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가 문틈에 눈을 들이댔다.

“읍.”

곡괭이를 꽉 쥐었던 아지드의 손에서 힘이 확 풀렸다. 침대맡의 어두운 기름램프 불빛에 누런 무명포 차림새의 키 큰 남자 옆모습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아지드는 곡괭이를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고 계속 안쪽을 지켜보았다.

투르케스크는 침대 옆에 우두커니 서서 누더기에 싸인 아기를 굳은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 낯을 가릴 때가 아니어서인지, 아기는 이 낯선 남자의 등장에도 큰 눈만 말똥말똥 뜬 채 가만히 누워 있었다. 희미한 불빛에 아기의 회색 눈동자와 투르케스크의 선명한 무지개빛 눈동자가 서로를 응시했다.

그렇게 한참을 눈만 맞추고 있던 아기가 갑자기 ‘아빠’에게 두 팔을 들며 까르르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허.”

지금껏 굳어 있던 투르케스크의 입가에 처음으로 웃음이 번졌다. 그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아기를 안아들었다. 그리고는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과 작은 손, 옅은 회색 그레이오팔 눈가를 만지작거렸다. 지나가는 누구를 붙들고 물어도 바로 부녀사이라고 답할 만큼 빼다 박은 이목구비였다.

신기한 듯 아기를 이리저리 확인하는 투르케스크의 미소도 점점 밝아졌다.

“엇.”

아기에 정신이 팔려 있던 투르케스크는 문 열리는 소리에 뒤를 휙 돌아보았다. 집에 막 들어서는 아지드와 눈이 딱 마주친 그는 얼굴에서 웃음을 얼른 지워냈다. 그리고는 아무 관심도 없는 척 아기를 침대에 툭 내려놓았다.

“내가 그랬죠? 당신 닮았다고.”

“…….”

투르케스크는 못 들은 척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빈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를 한참이나 빤히 쳐다보던 아지드는 어디선가 풍겨오는 익숙한 냄새에 한쪽의 주방을 힐끔 쳐다보았다. 허름한 식탁 위에 바싹 말린 생선과 고기 몇 묶음, 큼직한 곡물 포대가 놓여있었다.

먹을 것들을 본 아지드는 갑자기 울컥 할 뻔했다.

“갑자기 단속이 심해져서 서원 문을 한 열흘만 닫기로 했소.”

투르케스크가 아지드의 시선을 외면한 채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지드가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얼마나 있다가 가려고요?”

아지드의 싸늘한 물음에 분위기는 더 어색해졌다.

그렇게 멀뚱하니 마주하고 있던 둘은 갑자기 들린 아기 웃음소리에 화들짝 놀라 동시에 시선을 주었다. 분위기도 모르고 혼자 방글방글 웃는 아기를 멍하니 쳐다보던 투르케스크가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3, 4일 이따가 아버지에게 가 봐야겠소. 손녀가 태어났다고 말씀드려야지.”

아지드는 마치 남의 집에 와 있는 듯 잔뜩 풀이 죽은 이 남자의 눈을 새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할 말 못할 말 가리지 않고 마구 쏟아내던 지난번과는 어딘지 달라진 모습이었다.

아지드는 침대에서 혼자 방글거리고 있는 아기를 안아 구석에 처량하게 앉아있는 ‘아빠’ 투르케스크에게 불쑥 내밀었다.

“저녁은 먹었어요?”

잠시 머뭇거렸던 투르케스크는 비로소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아기를 품에 안았다.

“아니요.”

“……30분만 기다려요.”

살가운 대화 같은 건 없었지만 아지드에겐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는 아기의 웃음소리와, 얼러주는 투르케스크의 목소리를 들으며 빵 반죽을 시작했다. 그는 처음으로 삶이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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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안국 훈련요원들은 발밑에 뭐가 있는지 알기나 할까요?”

루스탐이 주변을 둘러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알 게 뭐냐.”

펜지켄트의 능선 꼭대기에 선 카렐은 군데군데 눈으로 덮인 얼어붙은 골짜기를 내려다보며 모처럼 숨을 가다듬었다. 능선 북쪽의 자작나무 숲은 30여년 전, 교단 헤네티들에게 쫓기던 베흔이 성전 시절 옛 동료 이트닌을 품 안에서 떠나보낸 곳이었다. 그리고 베흔을 지키려는 카렐의 군대와 야투 박사가 이끌던 교단의 군대가 처음으로 맞붙어 싸움을 벌였던 전장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사연이 뒤엉킨 이 야트막한 야산자락에 지금은 일반인의 출입이 엄중히 통제되는 보안국 특별훈련소인 [이트닌 캠프]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머리 위에서 누가 쳐다보고 있는지 알면 저기 누운 유생 양반들이 더 까무러치겠죠.”

모처럼 이곳에 온 베흔이 유학자들의 성지인 [13선지자의 묘]가 있는 능선 남쪽 저지대를 가리켰다. 그런데 바로 그 뒷산 중턱에선 외부엔 기밀로 감춰져 있는 지하의 [대신관 묘]가 얄궂게도 그곳을 위에서 거만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때론 모르는 게 약이지, 뭐.”

마지못해 끌려온 기색이 역력한 자그룰라 모렌 박사가 어깨에 멘 큰 가방을 추스르며 베흔을 흘겨보았다

“루스탐, 가방 네가 대신 들고. 빨리 따라와.”

카렐은 모렌 박사의 큰 가방을 루스탐에게 휙 떠넘기고는 골짜기를 성큼성큼 앞서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루스탐이 가방을 짊어지고 깡충깡충 뒤따라 뛰며 물었다.

“그나저나 코나하고 자이납, 우베가 아까 내릴 땐 분명 있었는데, 어디로 사라진 거죠?”

카렐이 앞장서서 성큼성큼 나아가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남부에 보냈다. 사에나 쉐너 부장이 입에 뭘 좀 쑤셔 넣어줄 놈이 있다고 하더군.”

“에……예에?”

“그럴 일이 있어.”

카렐은 루스탐의 물음을 넌지시 무시하며 사람이 지나다닌 흔적이 전혀 없는 가파른 덤불에 훌쩍 뛰어내렸다.

“그 벽창호가 대신관 묘를 뒤적거리는 꼴을 퍽이나 속 편하게 보고 있겠다.”

카렐은 바닥에 놓인 넓적하고 큰 바위 하나를 툭툭 두드리고는 옆으로 힘껏 밀어냈다. 루스탐이 도우려 했지만 장정 대여섯이 달라붙어도 꿈쩍도 하지 않을 어마어마한 무게다보니 그의 도움 정도는 별 의미도 없었다. 바위가 밀려나면서 지하로 이어진 시커먼 구멍이 입을 벌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루스탐 넌 누가 오지 않나 여기서 두 눈 부릅뜨고 지키고 있어.”

카렐은 낑낑대며 비탈을 내려오는 모렌 박사에게 불쑥 하네스를 내밀었다.

“맙소사, 이거 꼭 써야 하나요? 전 그냥 폐하 뵙는 줄 알고…….”

멋쟁이 모렌 박사가 애써 꾸며 입은 원피스와 잘 손질한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베흔을 노려보았다.

“이런 데 간다고 말 안 했잖아요. 전 이런 거 쓸 줄도 모른다고요.”

“먼저 내려갑니다.”

가방을 챙겨 든 베흔은 모렌 박사의 불평을 못 들은 척 구멍 안으로 먼저 휙 들어가 버렸다.

“후우.”

카렐이 낮은 한숨을 내쉬고는 모렌 박사의 허리를 한 팔로 꽉 껴안았다.

“다른 뜻 아니니 오해하진 말게나.”

카렐은 얼굴이 새빨개진 모렌 박사의 귀에 낮게 속삭이고는 구멍에 휙 뛰어들었다. 바깥에 혼자 남은 루스탐은 구멍 안에서 울려나오는 여자의 비명소리에 한참이나 귀를 막고 있어야 했다.

거의 300척(90m) 깊이의 좁은 수직 환풍구를 통과한 카렐은 초대 대신관 아프라시아의 거대한 석상 어깨를 밟고 서며 얼얼해진 귓가를 몇 번이나 후벼야 했다.

“올라갈 땐 베흔보고 업고 가라고 해야겠어.”

“예에?”

카렐의 목이 부러져라 안고 있던 모렌 박사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을 번쩍 쳐들었다.

“지금부터 입 한 번이라도 더 뻥긋하면 그럴 테니 알아서 해.”

모렌 박사의 입을 막아버린 카렐은 거대한 석상의 팔과 허리, 다리를 차례대로 붙들고 다람쥐처럼 후다닥 내려가 비로소 대리석 바닥을 제대로 딛고 섰다.

“대신관들의 파티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먼저 내려와 있던 베흔이 전력 스위치를 확 올렸다. 즉위 초, 보안국 요원들이 이곳을 조사하면서 설치했던 조명들이 일제히 빛을 뿜어냈다.

“다시 봐도 멋지군. 하긴, 지난번엔 눈이 잘 안 보여서 제대로 못 봤지.”

카렐이 고개를 치켜들고 주변을 죽 훑었다. 일행의 눈앞에는 직경 200척(60m)나 되는 거대한 돔 모양 대리석조 공간이 불빛 아래 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곡선이 진 벽을 빙 둘러 파인 30여개의 벽감마다 사람 키의 3배가 넘는 역대 대신관의 석상과 석관이 이전에 왔을 때와 같은 모습으로 카렐을 맞아주고 있었다.

“이거 감회가 새롭네.”

베흔이 등에 멘 플람베르주를 만지작거렸다. 중얼거리는 그의 작은 목소리도 돔 구조 때문에 웅웅거리며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런데 여긴 지난번에 보안국이 며칠이나 조사했다고 들었는데 뭐가 또 문제인 거죠?”

석관들을 툭툭 치며 건들거리고 걷던 베흔은 누군가 손목을 거칠게 낚아채는 느낌에 화들짝 놀랐다. 그가 휙 돌아봤을 때, 황제가 무지개빛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서 있었다. 카렐이 베흔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가슴을 쿡쿡 찔렀다.

“날 존중하듯 이 관들도 존중해 주게나, 베흔. 날 얼마나 존중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흠흠, 무, 물론입니다.”

베흔이 그제야 무안한 얼굴로 손에 장갑을 끼었다.

“이번에 관심 있는 건 이거야.”

대신관들의 석상 앞을 하나씩 세며 지나친 카렐은 30번째 제단 앞에서 멈췄다. 그곳 제단엔 ‘야푸르 아르잔 빈 다하카르’라는 이름과 함께 지난번 의문을 자아냈던 반쯤 삭은 나무관이 여전히 놓여있었다.

“야푸르 대신관 자리를 그동안 대신 차지하고 있던 놈.”

“이건 그럼 대체 누구라는 말이죠?”

“궁금하면 깨워서 물어보게나.”

카렐이 잔뜩 삭은 나무뚜껑을 조심조심 들어냈다.

“이전 대신관 29명의 시체는 외모가 쌍둥이처럼 유사해서 굳이 유전자 조사를 할 필요도 없을 정도였지만 이건 딱 봐도 아니다 싶던걸.”

카렐이 변색된 아마포를 벗겨내자 보통의 제국민들보다는 좀 왜소한 체구의 남자 시체가 잔뜩 웅크린 미라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역대 남자 대신관은 평균 신장 5척9촌(177cm)이었는데 이 시체는 죽기 전에도 5척6촌(168cm)밖에 되지 않았던 걸로 추정되거든.”

카렐이 미라의 얼굴에 눈을 바싹 대고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대신관들은 전형적인 계란형 얼굴이고 이렇게 광대뼈와 턱뼈가 두드러지지도 않았어. 이목구비도 훨씬 분명했고. 예상대로 유전자 검사도 아무 혈연이 없다고 나왔지. 사망연도도 기원 195년 내외로 추정되니 시기상으로도 말이 안 돼.”

“그럼 누가 왜 이런 엉뚱한 시체를 갖다놓은 걸까요?”

“이트닌 하산 부장이 말했던 게 기억나. 말년의 오르마즈 경이 중요한 물건이라면서 13선지자의 묘 지하에 물건들을 갖다놓았었다고 말이야. 그때 가져다놓은 건지도 모르지. 이미 미라가 된 상태에서 가져가놓은 것 같거든.”

카렐 손으로 관 구석구석까지 직접 꼼꼼하게 살폈지만 시체와 시체를 싼 아마포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카렐이 낯을 찡그리며 다시 시체를 제 위치에 놓았다.

“그때 받은 보고서에 따르면 이놈 아주 고약하게 죽었더군. 예리한 칼로 목 양쪽 경동맥이 잘렸고. 양쪽 쇄골이 모두 부러지고 쇄골하동맥이 찢겼지.”

“다 급소들인데요?”

“맞네. 표현이 좀 그렇지만 누군가 일부러 급소 공격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4번이나 짧고 정확하게 치명상을 입혔어. 하나하나 솜씨만 봐선 분명 전문가 소행인데 이런 과잉살해는 전문가가 할 짓이 아니니 이상하다는 거지. 누가 옛날에 그런 것처럼.”

카렐이 베흔을 슬쩍 흘겨보았다. 베흔이 그의 시선을 얼른 피하며 엉뚱한 말로 둘러댔다.

“누군지 단단히 화가 나게 했었나 보죠.”

“골격과 골밀도, 피부와 근육의 상태로 봐선 죽은 이놈도 고도의 훈련을 받은 군인이었던 같다더군.”

“군인이면 세나우스 2세 때부터 데이터베이스가 있을 텐데요.”

전문가 모렌 박사가 머리를 들이밀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역대 군인의 유전정보 데이터베이스를 모두 뒤졌어도 전혀 검색이 되지를 않는 거야. 제후군과 근위대 모두.”

“그럼 정규군이 아니고 제후 쪽 비밀요원일 수도 있겠군요. 자료 말소자를 썼을 수도 있으니.”

“비밀요원인지 암살수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거기서 조사는 탁 막혀버렸지. 결국 보안국에선 더 이상 이 시체 조사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고. 오르마즈 경이 대신관 묘를 모욕하려고 가져다놓은 시체 정도로 결론을 내렸거든.”

카렐은 아무 답도 해 주지 않는 시체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잔뜩 찡그렸다.

“젠장, 이 답답한 양반 같으니, 여기에 발자국을 찍어놨다더니 무슨 까치발만 하고 지나갔나.”

“풉.”

옆에서 웃을 뻔했던 베흔이 얼른 입을 가렸다.

“흠흠.”

그는 시체 여기저기를 꾹꾹 눌러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런데 시체의 왼쪽 가슴 아래가 안으로 힘없이 쑥 들어갔다.

“어, 고약한 게 또 있는데요?”

“알아, 늑골도 골절이라더군.”

“그냥 골절 정도가 아닌데요? 보십시오, 왼쪽 하부 늑골들을 아주 가루를 내 놨습니다. 이 정도면 운 좋게 즉사 안해도 그대로 주저앉아 저항불능이 됐겠죠. 이렇게 뼈를 뽀개는 건 시민 힘으론 불가능합니다. 힘 좋은 오르마즈 경 정도라면 몰라도요. 그 양반 급소만 골라 치는 당수는 저도 겁날 정도였으니.”

“잠깐. 이 양반이 날 테스트하나 본데.”

베흔을 따라 시체를 만져 본 카렐이 갑자기 이마를 짚었다.

“지난번 보고서는 멋모르는 학자들이 쓴 거니 접어두고 우리 싸움꾼 눈으로 다시 보자고. 가디언이라면 무기가 없어도 힘으로 목을 비틀면 되지 저렇게 4번이나 쓰잘데기 없이 칼질을 하진 않아.”

“기본이죠.”

“오르마즈 경이 죽인 거라고 치면…… 최고의 암살수가 한 상대에 4번이나 급소 공격을 한다는 게 말이 되나?”

카렐의 눈빛을 받은 베흔이 이맛살을 잔뜩 찡그리며 시체를 노려보았다.

“일격필살을 못했으니 암살수로서는 망신감이죠. …… 목이 잘려도 바로 안 죽는 그놈들만 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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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편부터 [파트7. 그들처럼 될 수는 없기에.]가 시작됩니다.

이번 무대는 지난번 제네르와 코리온, 황후 일행이 봉변을 겪었던 남부 페스트와 주페가 갇혀 있는 비엔입니다. ^^

아참, 팬카페의 작가게시판에 R과 S의 가계도를 그려서 올려놓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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