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80 회: Part 6. 저승길에 남겨놓은 발자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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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와도 정말로 매혹적인 곳이야.”
아트위야는 고급스런 클럽 밀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눈밭을 가리켜 보였다.
“정말 멋있지 않나?”
중간을 가른 지평선 하나에 물감 두 색이면 누구나 그릴 수 있음직한 지겹고 단조로운 풍경이지만 이런 풍경을 보겠다며 일부러 찾아오는 갑부들 사이에서는 제법 명소로 알려진 곳이었다. 물론 그런 명성의 밑바닥엔 드나드는 고객의 신분과 행실을 철저히 감춰주는 북부 클럽들만의 불문율이 깔려 있었다.
“물론 보기만 좋지 이런 차림새로 나갔다가는 칼바람에 바로 얼어 죽겠지. 160년 전 카파키 가 사람들처럼.”
아트위야는 맞은편 의자에 앉은 여자에게 이를 드러내고 웃어보였다.
“그네들이 갓 낳은 강아지들처럼 발발 떨며 떼거지로 죽어가던 꼴을 자네도 봤어야 하는데. 거기에 오르마즈가 없었다는 게 약간은 섭섭하지만.”
아트위야가 잔을 들며 여자에게 권했지만 그는 그레이오팔 눈동자를 냉담하게 옆으로 돌려버렸다.
“말 돌리지 말고 왜 날 여기 데려왔는지부터 말하시죠.”
계속 공격만 당하던 밀리타가 결국 가시를 세우며 아트위야를 맞받아 노려보았다.
“오호, 그렇게 날 세우지 말게. 그대에게 이렇게라도 할 일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대신관 하렘에서 외출할 기회나 있었겠나.”
지금껏 짓궂게 밀리타를 도발하던 아트위야는 비로소 솔직한 웃음을 지으며 밀리타의 잔에 독한 술을 부어주었다. 마지못해 잔을 들었던 밀리타는 그 특유의 향기에 화들짝 놀라며 입가에서 거리를 벌렸다.
“제게 왜 자꾸 이러시는 거죠?”
밀리타가 잔을 든 채 아트위야에게 일갈했다.
“현신께선 교단에 약속한 대로 오르마즈 머리에 박힌 12번 잔딕만 찾으내시면 되지 않습니까? 전 그런 흉물하곤 관계 없다고요.”
“미안하네, 자네가 옛 기억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는지 테스트해 본 거야. 악의로 그런 건 아니니까 이해하게나.”
아트위야가 내보인 술병에는 바하칼리 산(産) 최고급 럼주의 상표가 붙어 있었다. 분개한 밀리타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이 달콤한 향을 죽도록 좋아했던 사람을 아직 기억하냐고요? 물론 기억하지요, 그래서 어쩌라고요? 이미 죽은 사람을? 동정인지 놀림인지 몰라도 그 따위 거 필요 없으니 이러려면 차라리 하렘으로 되돌려 보내주시죠.”
“이런, 이런, 하렘에 오래 처박혀 있더니 성깔만 늘었군. 내 본론이나 들어보라고.”
아트위야는 독한 럼주를 들며 본론을 꺼냈다.
“우리 세작이 그러는데, 어제부터 오르마즈 그놈의 묘 주변에 의심스런 놈들이 갑자기 알짱대기 시작했다는 거야. 이상한 정보도 들어왔고.”
‘오르마즈의 묘’라는 말에 밀리타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무슨 지질조사를 한답시고 그 주변에서 계측기 들고 돌아다니는 것도 이상하고 말이야. 정말로 보안국에서 입수한 비밀정보까지 맞아떨어져. ‘매우 신뢰성 높은 정보원이 내용 확인했으니 최대한 빨리 작업 개시해라’는 사족까지 있고 말이야. 구체적으로는 안 써 있지만 뭘 하려는 건지는 빤한 것 아니겠나. 내 그래서 구경이라도 좀 가 보려 하네.”
“주인도 없는 관을 뭣하러요.”
“글쎄, 그게 의문이야. 제위 전쟁 직후에 보안국 놈들이 호지 가를 이 잡듯이 뒤졌었거든. 죽은 카산드라 경의 아들놈이 어미가 오르마즈 시체 훔치려다가 엉뚱한 놈한테 도둑맞은 것도 이실직고했고 말이야. 또 시체도 없는 가짜 장례식을 주도했던 게 근위대장 베흔이었는데 설마 그걸 황제에게까지 말 안 했을까?”
“충분히 그랬을 수도 있는 놈이죠. 그래서 제게 하고픈 말이 뭔데요?”
아트위야의 의도를 일찌감치 눈치 챈 밀리타가 계속 시비조로 물었다. 아트위야가 그에게 바싹 다가가 물었다.
“성급하게 굴지 말고 끝까지 들어 봐. 황제가 관이 빈 걸 알면서도 굳이 몰래 열어보려는 속셈이 뭐일 것 같나?”
“황제에게 직접 물어보시죠.”
아트위야가 처음으로 살짝 낯을 찡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제1개국공신의 묘에 손을 댄다면 정치적으로 모험이니 분명 ‘최후의 수’여야 하는데 빈 걸 알면서도 너무 일찍 덤비니 말이야. 게다가 보수적인 보안국에서 ‘매우 신뢰성 있는 정보원’이라고까지 언급할 정도면 충분히 의심할 만하지.”
“허, 애당초 황제의 잔딕을 푸는 법이 든 문서를 그쪽에 빼앗기지만 않았어도 이런 어처구니없는 고민 따위는 할 필요 없었겠죠. 황제가 죽음을 코앞에 두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거기라도 파헤치겠다고 나서는 게 그리 이상한가요?”
자신의 지난 실패를 꼬집어내는 말에 아트위야의 얼굴이 일순간 붉어졌지만 곧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의 옅은 하늘색 눈동자가 밀실의 스포트라이트 밑에서 살벌하게 반짝거렸다.
“알면서 딴청피지 말게. 관의 상태를 마지막으로 본 게 자네였어.”
“제가 팠을 때도 관에는 엉뚱한 시체가 들어있었다고요! 왜요? 제가 시체를 보고서도 안 봤다고 했을까봐요?”
“아주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 솔직히 그놈 시체는 나도 탐났거든.”
아트위야가 한때 오르마즈가 즐겨 마셨던 독하지만 달콤한 럼을 입술 사이에 흘려 넣었다. 밀리타가 질세라 그에게 응수했다.
“네크로필리아께서 어련하시겠습니까, 지난번에 파 오신 이오타 요아킴 옆에 나란히 세워두고 콜렉션을 빛내고 싶으셨겠죠.”
럼을 마시던 아트위야의 목에서 순간 짧게 힘줄이 곤두섰다.
“그놈 죽는 날까지도 맘에서 못 지웠다는 걸 다 알아. 이 럼의 향기까지 기억하는 자네라면 말이지. 그런 자네 맘을 이해하네만 100%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까지 부인하지는 않겠네.”
좋은 말인지, 협박인지 알 수 없는 말에 밀리타가 입가를 씰룩거렸다.
“그나저나, 이미 용의자를 맘에 두고 계시면서 왜 제게 이러시죠?”
“그놈들은 아무리 캐물어도 시인도 부인도 않고 있어. 우리가 사자를 보낼 때마다 잡아 죽이는 데만 재미가 들려 있지. 우리가 제안한 액수가 올라가는 게 더 관심사인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시체를 갖고 있다면 그렇게 뒤로 뺄 놈들이 아닌데.”
“그래서, 호지 가에서 도둑맞은 걸로 알고 있는 시체가 어쩌면 오르마즈 경의 관에 멀쩡히 되돌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충분히 가능하지. 자네 보고서 이후로 우린 그놈 무덤에서 관심을 끊었었으니까. 정말로 오르마즈 그놈이 160년 동안 등잔 바로 밑 그늘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었을지 누가 아나? 황실의 정보망도 이젠 옛날처럼 녹록하지 않아. 어쩌면 정말로 대단한 정보를 얻었을 수도 있어. 뭐, 아니면…….”
“제가 옛날 황실에 있었을 때 그걸 말했을까봐요?”
밀리타의 눈가가 더 험악해졌다.
“왜 그러나, 난 그런 말 하지 않았어.”
아트위야가 씽긋 웃으며 얼른 한 발 물러났다.
“어쨌든 그 동안 찍어놨던 용의자가 협상에 너무 소극적인 걸 보니 아무래도 우리가 헛다리를 짚고 있던 것 같아서 말이지. 이젠 방향을 좀 바꿔보려고.”
아트위야가 부담스러운 미소와 함께 밀리타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리자 아트위야는 재빨리 의자 뒤에 몸을 기대며 방금 전처럼 도도한 자세로 되돌아갔다.
“들어와.”
대조적인 체구의 두 남자가 밀실 문 앞을 지키고 선 두 헤네티들 사이를 지나 안에 들어섰다. 밀리타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지만 아트위야는 빙긋이 웃음까지 지으며 그들을 맞았다.
“어서 오게나, 슈라? 오호, 새 몸은 어떤가? 탈피를 하고 나니 이젠 꽃미남 소년 같군?”
아트위야의 찬사에 밝게 웃음을 지은 슈라가 가슴에 손을 모으고 바닥에 이마를 가져갔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신께서 이 천한 헤네티를 그리 좋게 불러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나이다.”
페스트에서 대신관 아스탈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장렬히 불 속에서 사라졌던 슈라는 새로 태어나기 이전의 몸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능글맞은 찬사로 이 미녀 마구스를 한껏 기쁘게 해 주었다.
“솔직히 전의 몸이 좀 낡아 보이긴 했어. 한 2, 30년쯤 썼던가? 지금 몸은 꼭 10대 후반 같군. 그래도 골격 보니 몸은 다 여물었는데.”
슈라가 붉게 혈기가 도는 소년처럼 화사하고 고운 뺨 사이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슬쩍 웃었다. 이전의 얼굴만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같은 사람인지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도 그의 두툼한 코트에는 코런덤 부대 부사령관을 뜻하는 작은 브로치 장식이 여전히 붙어있었다.
“약간 덜 여문 곳이 없을지 내심 걱정이옵니다.”
“제대로 여물었는지 아닌지 궁금하다면 내 아무도 없는 곳에서 기꺼이 확인해 주지. 후훗. 그런데, 이 자리에 갑자기 끼어들 정도면 뭔가 중요한 일이겠지?”
“물론입니다.”
이 덩치 큰 헤네티 슈라와 아트위야의 대화를 옆에서 뚱한 얼굴로 지켜보던 왜소한 몸집의 쿠마르가 냉큼 대답했다. 그가 손에 들고 온 두툼한 방한용 특수외투를 내밀었다.
“지금 저녁 11시입니다. 카파키 가 묘에서 보안국 놈들이 움직임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하. 내 풍경에 빠져서 깜빡 넋을 놓고 있었군.”
아트위야가 그제야 잔을 훌쩍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슈라가 무기를 쥐고 그의 곁에 바싹 다가섰다.
“지난번 같은 불상사가 없게 소인과 헤네티 10명이 현신의 곁을 지키겠나이다.”
“자네도 일어나게나.”
그때까지도 자리에서 상황을 외면하고 있던 밀리타가 고개를 휙 돌렸다. 아트위야가 그에게 두툼한 외투를 불쑥 내밀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오르마즈의 묘에 같이 가서 뭐가 나오는지 보세나. 아참, 혹시라도 거기서 진짜로 오르마즈의 시체가 나온다면 저 앞 눈밭에서 이걸 빼앗으라고 하시더군, 위대한 현신께서.”
밀리타의 도톰한 아랫입술이 분노와 공포에 파르르 떨렸다. 밀리타는 조금 전 받아들었던 바하칼리 산 럼을 훌쩍 들이키고는 빈 잔을 벽 구석에 신경질적으로 내동댕이쳤다. 잘게 깨진 크리스탈 잔 조각이 창밖의 눈송이처럼 방 안을 반짝이며 수놓았다.
“거기서 누굴 만날지 몰라도.”
밀리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아트위야의 손에서 외투를 거칠게 낚아챘다,
“빼앗아 보시죠, 그럼.”
오르마즈의 눈물 같은 달콤한 럼이 그의 목구멍을 태우며 몸 속으로 뜨겁게 흘러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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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대에 누운 아지드 비스 모간은 잔뜩 긴장한 듯 몇 번이나 마른 침을 삼켰다. 그의 지나치리만큼 비장한 표정에 스캔 화면을 보던 의학교 동기생이 웃음을 터뜨릴 정도였다.
“야야, 누가 보면 불임치료 수십 년 받다가 첫 임신한 산모인 줄 알겠어.”
동기생의 악의 없는 농담에 아지드가 억지로 웃어보려 했지만 그것 역시도 꽤나 어색했다. 사실 그는 여자 치고는 상당히 큰 체격에 미인도, 인상 좋은 얼굴도 아니다보니 표정이 약간만 경직되어도 바로 맞은편 사람에게 경계감을 주기 딱 좋았다.
“엄마가 얼어붙어 있으면 아기도 놀라서 꼼짝 않는 거 알지?”
“됐어, 그만 하고 본론이나 얘기해. 잘 크고 있다는 거지?”
“겁쟁이 엄마 때문에 얼음땡하고 있는 것 빼고는.”
동기생 부인과 의사가 아지드 앞에 태내 스캔 화면을 켜 보였다. 아지드의 안도의 숨과 동시에 꼼짝도 않던 뱃속의 작은 아기가 갑자기 꿈틀거렸다. 아지드가 정색을 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에, 봤어? 봤어? 움직였어, 너도 봤지?”
아지드의 호들갑에 동기생 의사가 잠시 참던 웃음을 또다시 뻥 하고 터뜨렸다.
“하여간, 글자도 못 읽는 부랑자나 신학교 의학교 모조리 수석 졸업한 성직자 선생님이나 여기 누우면 어쩜 죄다 똑같아질까.”
“닥쳐, 나도 오지에서 봉사의 할 때 태아 스캔은 많이 봤다고. 저렇게 힘차게 움직이는 태아는 본 적 없어.”
“알았다, 알았어. 나중에 콜로니를 호령할 영웅호걸로 클 거다. 암, 어련하실까.”
동기생 의사가 친구의 몸에서 검사 장치를 떼어내면서도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런데, 애 아빠가 누군지 끝까지 얘기 안 해줄 거야? 출산 전에 결혼 날짜라도 알려야 눈칫밥 안 먹는다? 아무리 세상이 달라졌지만 너도 명색이 성직자라고.”
“상관없어. 결혼은 무슨 결혼.”
아지드가 킬킬거렸다.
생각 없이 장치들을 거두던 동기생 의사의 손이 딱 멎었다.
“자, 잠깐. 너 혹시…….”
“됐어, 끝났으면 나 간다.”
“그렇구나! 너 설마 성스런 대…….”
입방정을 떨 뻔했던 동기생이 기겁을 하고 입을 가리며 얼른 주변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뜨고는 아지드의 뒤에 대고 물었다.
“그치? 맞지? 너 그거 된 거야? 정말이야?”
“그만 해. 잘 나왔으니 됐어.”
아지드는 계속 캐묻는 동기생을 밀어내며 옆에 벗어놓았던 검은색 다하카르 교단 성직자 로브를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말 좀 해 보라고, 너 정말 현신의 아기를 수태한 거지? 그치?”
“얘가 진짜, 제정신이니.”
아지드가 눈을 흘기자 동기생 의사도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설사 아지드가 정말로 ‘성스러운 대리모’가 맞다 해도 그 사실을 감히 입에 담는 건 밤중에 소리 없이 사라져도 할 말 없는 큰 죄였다.
“이제 낳은 후에나 보겠구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동기생이 최대한 돌려서 결국 또 물었다. 아지드는 그에게 슬쩍 눈웃음만 보이고는 큰 책가방을 들고 부인과 진료실을 나섰다.
병원 문을 나선 아지드는 무거운 몸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걸음으로 거리를 걸었다. 아기의 움직임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선 내내 웃음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콜로니 제일의 번화가인 아케메니안 궁 앞길은 다른 곳에서는 웬만해서는 보기 힘든 성직자들을 ‘발에 차이도록’ 볼 수 있는 곳이지만 최고교단인 다하카르 교단 로브 차림새에 어딘지 무게감이 느껴지는 인상에 큰 책가방도 모자라 나머지 손에 경전까지, 학자냄새 풀풀 풍기는 그는 여기서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여기에 모범생 인상을 주는 큼직한 안경까지 썼으니 지나가는 사람들이 눈치를 보며 얼른 길 옆으로 비켜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책을 너무 많이 봐서인지 몰라도 근시가 항상 속을 썩였지만 임신에 혹시라도 영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미 잡혀 있던 수술 날짜까지 출산 이후로 미뤄놓은 터였다.
아케메니안 궁으로 걷던 그는 갑자기 느껴진 강한 태동에 화들짝 놀라 배로 손을 움직이다가 경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이런.”
성직자로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놀란 그는 얼른 경전을 집으려 몸을 숙였다. 그런데 걸음걸이는 나름 경쾌해도 몸을 숙이는 것만은 무거운 배 때문에 도저히 쉽게 할 수가 없었다. 엉거주춤 몸을 숙이던 그를 대신해 누군가의 손이 바닥에 떨어진 두꺼운 경전을 얼른 집었다.
“몸도 무거우신데 짐을 이리 많이 드시다뇨.”
내심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아지드는 몇 번 안면이 있던 노점상 주인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어디로 가시는지 몰라도 가까우면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성직자님.”
“아, 아니, 이 정도는…….”
괜찮다는 아지드에게서 가방과 책을 기어이 받아든 주인은 스낵 수레를 대충 구석에 밀어놓은 채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8개월쯤 되신 것 같은데 태동 느낀 게 처음이신가요.”
“초산이라서요. 이런 느낌은 참 낯설군요.”
아지드는 또다시 느껴진 태동에 멈칫거리며 배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조금 전의 이런저런 걱정에 아기가 난 괜찮다며 화답하는 것 같았다. 분명 자신과 유전자는 전혀 섞이지 않은 아기였지만 지금 어머니로서 느끼는 감정은 그 이상으로 소중했다.
“제 아기라고요.”
아지드가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그럼요, 당연하죠. 누가 배 아파 낳는데요.”
책과 가방을 들고 따라오던 주인은 당연한 소리를 새삼 한다는 듯 풋 웃음까지 지으며 답했다.
노점상 주인과 동행한 아지드는 아케메니안 궁 남문을 지나 정원에 들어섰다. 거의 40층 높이의 이 검은빛 피라미드 모양 거대한 건물은 콜로니를 사실상 지배하는 12교단 연합체 ‘침묵의 자매들’의 총본산이고 그들의 권위와 비밀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었다.
이마 489년, 이후 ‘기원 원년’으로 더 익숙하게 알려질 이 시기의 모든 사람들은 이 궁전이 앞으로도 영원히 교단의 위엄을 상징하리라는 사실을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도움 줘서 고맙습니다. 여기부터는 혼자 가야겠군요.”
궁 앞에 도착한 아지드는 성직자가 축복을 내릴 때처럼, 중지(中指)로 자신의 이마에 박힌 푸른 사파이어와 여주인의 미간을 차례대로 짚으며 짧은 경문을 암송해 주었다.
“다하카르의 권위가 그대를 보호해 줄지니.”
성직자의 축성에 바로 표정이 화사해진 주인은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흐뭇한 얼굴로 온 길을 되돌아 멀어져갔다.
다시 책가방과 경전을 든 아지드는 낑낑대며 궁 출입문을 지키는 경비 헤네티들에게 다가갔다.
“어서 오십시오, 아지드 비스 박사님. 또 특별 자료실에 가시나요?”
낯이 익은 헤네티가 그의 가방에서 출입증을 대신 꺼내 출입자 등록 장치에 꽂으며 평소처럼 익숙하게 물었다.
“아니, 꼭대기로 간다.”
‘꼭대기’라는 말에 창백해진 헤네티가 주변에 누구 듣는 사람이 없는지 얼른 주변을 확인했다. 출입증이 꽂힌 보안화면에서 나타난 ‘특이사항’에도 굵은 글씨로 중요한 전문이 나타나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기밀 사료(史料)를 다루는 사서로 대했던 헤네티들의 태도가 싹 달라졌다.
“그분께서 기다리고 계시군요. 제가 모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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