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58 회: Part 5. 오염된 자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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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갈아입어.”
카렐이 방금 전 광산에서 입었다가 벗어서 구석에 처박아놓은 북부 치안군 군복을 휙 걸쳐 입었다.
“저 안이 얼마나 ‘정상적’인지 한 번 봐야겠다. 연락해. 우리도 들어간다고.”
“폐, 폐하 그건…….”
“폐하라고 하지 말랬다!!!”
카렐의 목소리가 갑자기 셔틀 안을 쩌렁 울렸다. 루스탐은 당혹스런 얼굴로 자이납을 돌아보았다. 황제가 저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분노한 모습을 보는 건 드문 일이었지만 이번만은 루스탐도 그의 앞을 막아서고 물러서지 않았다.
“안됩니다. 이젠 평범한 가디언이 아니십니다. 수천의 적군을 찾아내는 것보다 상의 안위가 더 중요합니다. 상선인 제게는 그렇습니다. 그동안의 답답함은 이미 조금 전 광산에서 풀지 않으셨습니까.”
루스탐이 무릎을 꿇으며 카렐에게 대뜸 목을 들이댔다.
“저 안을 확인하고자 하신다면, 차라리 소인를 들여보내 주십시오. 소인에게 아무 일도 없거든 그때 들어오십시오. 그것이 아니시거든 차라리 소인을 베고 가십시오.”
카렐이 입가를 씰룩거렸다. 격한 마음에 일단 나섰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루스탐의 말이 분명 합리적이었다. 카렐이 감정을 식히며 낮게 중얼거렸다.
“훗, 아들이라도 낳아놨으면 ‘제 아들을 부탁드립니다.’라고 아비 흉내를 고대로 냈겠구나.”
루스탐은 이 긴장된 상황에서 하마터면 웃음소리를 낼 뻔했다. 카렐은 구석에 쟁여놓았던 루스탐의 에키트 족 도끼를 불쑥 내밀었다.
“죽으려거든 썩어빠진 치안군 놈 대가리라도 부수고 죽어라.”
“아, 아니, 이런 걸 차고 들어가시면 누가 제대로 된 치안군으로 생각합니까.”
“저 안에 있는 치안군들은 제대로 된 치안군이더냐?”
카렐 역시도 보통의 치안군들이 쓰는 짧은 제식 검 대신 거의 허리까지 올라오는 긴 카타나와 도끼를 벨트에 꽂았다.
“접근합니다.”
일행이 탄 평범한 승용셔틀은 문제의 수송선에 바싹 다가가서는 조금 전 플레렌 가 치안군 셔틀 옆 여분 게이트에 조심스레 출구를 결합시켰다. 파란 불이 들어오자 루스탐이 바닥에 난 도킹용의 작은 출입구 위에 서며 숨을 가다듬었다.
“제가 안전하다고 말씀드리면 그때 들어오십시오. 그 전엔 내려오시면 안 됩니다.”
카렐은 루스탐 뒤에 대기하고 있는 자이납과 우베에게 눈짓을 보냈다.
“자이납, 해적 출신이니 네게 함교를 맡기겠다. 타자마자 우베와 함께 함교로 가라. 어찌해야 할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물론입니다.”
“내가 안쪽에서 이 문을 세 번 두드리거든 베네루스 너도 따라 들어와라.”
조종사인 자신도 들어오라는 말에 베네루스가 기겁을 했다. 자이납이 바닥의 문을 비틀어 열자 반대편인 수송선 안쪽에서도 그에 맞춰 천장의 문을 열었다.
“먼저 가겠습니다.”
루스탐은 반대편에서 들어오라는 말을 할 때까지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바닥에 난 구멍으로 서슴없이 뛰어내렸다. 그리고 자이납과 우베도 그를 따라 얼른 내려갔다.
혼자 남은 카렐은 혹시라도 비명소리나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귓가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그렇지만 걱정했던 그런 격한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대신 ‘우리 관내’ 라고 떠들어대는 누군가의 짜증스런 호통과 말다툼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루스탐의 신호도 없었지만 카렐은 더 기다리지 않고 바로 수송선으로 뛰어들었다.
사다리 양쪽 바를 붙들고 죽 미끄러져 내려온 카렐의 앞에는 방금 내려온 루스탐과, 그를 둘러싼 채 시비를 걸고 있는 대여섯 명의 서부 치안군들, 그리고 비슷한 숫자의 간부 선원들이 모여 있었다.
“이 꺽다리는 또 뭐야?”
서부 치안군들이 뭐라 하건 말건, 카렐은 곱지 않은 눈길로 이 수송선의 메인 홀을 훑었다. 수송선의 중심에 위치한 메인 홀은 함교, 선실, 화물 캐빈과 연결된 문이 있는 크지 않은 공간이었다.
“이봐, 여긴 우리 관내라고. 우리가 알아서 한다니까 뭣 하러…….”
검문반의 지휘관인 듯 보이는 플레렌 가 치안군 간부가 북부 치안군 차림새로 들어온 카렐에게 다시금 짜증을 냈다. 조금 전 할룩스로 [이상 없다]며 연락을 보내 온 바로 그 목소리였다.
“우리가 조사 다 끝냈다니까!”
홀 안에 무장한 정규군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카렐은 비로소 성큼 걸음을 내디뎌 그 간부와 바싹 마주섰다. 거의 머리 하나가 큰 장신의 여자가 눈을 부라리며 내려다보는 모습에 그 간부가 갑자기 주눅이 들었는지 뒤로 한 발 물러나려 했다.
“이놈 대체…….”
“언제부터 서부에서 항온 컨테이너에 농기계를 실었나?”
카렐의 큰 손이 간부의 멱살을 덥석 움켜잡았다.
“뭐?”
간부가 손을 떨치고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대의 돌덩이같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항온 컨테이너는 살아있는 가축들을 옮길 때 쓰는 것 아니었나? 지금 돌림병 때문에 가공 안 된 생물의 이동은 금지하고 있을 텐데?”
난데없이 나타난 깐깐한 치안군에 당황한 수송선 승무원들이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자자, 별 것 아닌데 좋게좋게 해결하시자고요. 말씀하시는 거 보니 이 바닥 모르는 분도 아니신 것 같고…….”
선장으로 보이는 여자가 실실거리고 웃으며 카렐의 허리춤에 봉투 하나를 쓱 꽂아주었다. 카렐은 그제야 간부의 멱살을 쥐었던 손을 슬그머니 놓고 봉투를 열어보았다. 그 안에는 웬만한 치안군 장교 두세 달 봉급에 맞먹는 1천 골드의 현금카드가 들어있었다.
카렐이 카드로 손등을 탁탁 치며 중얼거렸다.
“허, 수송선 안에 은행이 있는 건 아닐 테고, 이 많은 돈을 미리 마련해 뒀을 정도면 대체 얼마나 대단한 물건을 숨겨가는 거지? 아니, 얼마나 상습적으로 돈을 바쳐 왔던 거지?”
순간 치안군 간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새끼, 남의 관할 넘어와서 참견도 유분수지, 빨리 꺼지지 못해?”
그때, 카렐의 허리에 꽂혀 있는 긴 카타나를 비로소 발견한 간부가 도끼눈을 뜨고 카렐을 올려보았다. 보통의 치안군 조직에서는 사제 무기는 절대 허용되지 않는 것이 규칙이었다.
“너희 대체 어느 가문이야? 복장이 이 따위면…….”
간부가 한 발을 뒤로 내밀며 무기에 손을 가져가려 했다. 그렇지만 그보다 먼저 카렐의 운동장만한 발바닥이 먼저 그 간부의 가슴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우읍!”
무시무시한 충격으로 가슴을 채인 간부는 뒤에 서 있던 선원 둘과 휘하 병사를 함께 깔아뭉개며 굉음을 남기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발길질 한 번에 늑골이 산산조각난 간부와 선원, 병사들이 피를 토하며 내는 단말마의 신음소리에 다른 선원들과 치안군들이 경악을 하며 무기를 빼들었다.
“피맛도 참 오랜만이구나!”
망치를 들고 옆에서 달려드는 선원을 향해 카렐의 카타나가 칼집에서 첫 빛을 뿜었다. 칼의 궤적을 따라 가슴 위아래로 토막이 난 선원의 시체가 홀의 바닥 위를 피와 내장, 살점으로 뒤덮어 버렸다.
“공격해! 둘 뿐이야!”
당황한 치안군 두 명이 카렐의 양쪽에서 칼을 들고 덤벼들어왔다. 그렇지만 그가 휘두른 긴 카타나가 치안군이 쓰는 짧은 칼의 중간을 뚝 꺾어버리고는 뒤이어 머리까지 갈라놓았다.
“이크!”
뒤따라 덤비던 치안군은 동료의 머리가 조각나는 것을 순간 혼비백산해 돌아서며 등을 보였다. 물론 상대는 그런 적을 놓아줄 만큼 자비로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뒤쫓아온 카렐의 발에 허리를 차이고는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에 그대로 짓눌렸다.
“살려…….”
그자는 살려달라는 애원조차도 끝을 맺지 못했다. 카렐은 넘어진 병사의 뒷목과 뒤통수를 발 뒤꿈치로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목뼈와 두개골이 으스러지는 끔찍한 소리가 작은 홀 안을 울렸다.
“맙소사!”
도살에 가까운 끔찍한 광경에 혼비백산한 선원이 통신장비가 있는 선실 쪽으로 도망치려 했다. 그때, 그자의 뒤통수에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손도끼가 딱 소리를 내며 박혔다.
“어딜 감히!”
루스탐은 함교로 도망치려는 다른 선원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뒤로 휙 꺾어버렸다. 그리고는 공포에 질려 애원하려는 그자의 목을 도끼로 무자비하게 내리찍었다.
“이쪽은 다 잡았으니 폐…….”
루스탐이 황제를 향해 휙 돌아섰을 때, 이미 상황은 완료되어 있었다. 홀 안은 황제의 칼에 난도질당해 토막토막 흩어진 사람의 몸뚱아리 조각들, 어딘가가 으스러진 채 터지고 뭉개져 있는 끔찍한 시체들로 눈 뜨고 볼 엄두도 못 낼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 중간에 살아있는, 아니 살려놓은 사람은 사지가 완전히 부서진 채 가까스로 숨이 붙은 이 수송선의 선장과 치안군 간부 둘뿐이었다.
“하아.”
시체밭 중앙에 우뚝 선 카렐은 고개를 쳐들고는 홀 안에 퍼진 짙은 피비린내를 가슴 깊이 들이켰다. 그리고는 이전에 그랬듯이, 칼에 묻은 희생자의 붉은 피를 혀끝에 대고 죽 닦아냈다. 신선한 피맛을 느끼면서 그의 눈동자에 서린 파충류의 붉은 빛이 비로소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사람 맞아?”
그의 발밑에 쓰러져 있던 치안군 간부가 믿어지지 않는 광경에 전율하며 이 괴물에게서 조금이라도 떨어지려 버둥대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려두었다는 게 더 두려운 순간이었다. 카렐이 도망치려던 간부의 가슴을 지그시 발끝으로 밟았다.
“하긴, 너흰 어느 쪽이든 죽을 상황이었어.”
간부가 그의 큰 발을 치워내려 버둥대며 콜록거렸다.
“설마 해적……이시면 앞으로 잘 봐 드릴 테니…….”
“해적?”
카렐이 기이하게 웃으며 한쪽 송곳니를 살짝 드러냈다.
“네놈들이 여기서 싸우다 뒈진다면 최소한 유가족들은 공신 자녀로 돌봐줄 참이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들어가 죽음으로 확인해야 했으니까.”
“뭐?”
“지방 치안군들이 부패한 줄은 알았지만 눈앞에서 또 보니 아주 기분이 더럽구나. 너희 제후인 황비에게 짐이 한 마디 해 줘야겠다. 잠자리에서 조용히 말이다.”
“예에?”
자신이 마주한 상대가 누구였는지를 비로소 눈치 챈 치안군 간부가 온몸을 떨며 두 손을 앞에 모으려 했다. 이번에도 카렐은 그가 뭐라 입을 열 시간도 주지 않았다. 그의 발끝이 간부의 목을 무자비하게 내리눌러 뼈와 살점을 으깨어 버렸다.
그 광경을 보며 온몸 가득 한기를 느낀 루스탐이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껏 몇 년이나 황제를 모셨지만 한때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이 ‘등급 없는 가디언’의 진짜 모습을 눈앞에서 확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세상에.”
루스탐이 입 안에서 짧게 웅얼거렸다. 그는 피맛에 취해 있는 황제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평소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홀은 일단 정리된 것 같습니다. 이제 함교만…….”
“으익.”
함교에서 막 달려나오던 자이납이 중앙 홀의 끔찍한 광경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카렐이 그에게 힐끗 시선을 주며 짧게 물었다.
“함교는 장악했나?”
“다 없애고 부조종사 한 놈만 남겨놨습니다.”
“그놈도 필요 없다.”
카렐이 머리 위, 셔틀과 연결된 문을 탁탁 두들겼다. 타고 온 셔틀 안에서 잔뜩 긴장한 채 신호만을 기다리던 조종사 베네루스가 재빨리 사다리를 타고 내려오다가 놀라 손잡이를 놓치며 바닥에 쿵 떨어지고 말았다. 그는 손과 옷에 묻은 피에 경악을 하며 얼른 구석으로 기어 도망을 쳤다.
“네가 함교를 맡고 있어라. 난 갑판으로 가겠다.”
카렐은 루스탐에게 뒤를 따라오라고 눈짓을 보내고는 컨테이너가 있는 갑판실 쪽으로 향했다.
카렐은 마치 익숙한 선원처럼 수송선 복도를 성큼성큼 가로질러 걸었다. 루스탐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여기 구조를 다 아십니까?”
“이 정도면 내 스페이스 프리깃 면허가 뒷구멍 출신이 아니라는 건 증명된 셈이겠지?”
“그땐…….”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진 루스탐이 얼굴을 붉히며 입을 가렸다. 하지만 웃음도 잠깐이었다. 갑판실 앞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이봐, 누구…….”
홀에서 벌어진 일은 전혀 모른 채 갑판실 앞에서 노닥거리던 선원은 양 손이 피투성이가 된 채 다가오는 두 거한들의 모습에 경악을 하며 인터폰을 들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빨리 날아온 카렐의 손이 그의 팔과 목을 사정없이 비틀어 바닥에 동댕이쳤다.
“뭘 싣고 있는지 이제 보자꾸나.”
민간 스페이스 수송선의 갑판실은 카렐처럼 키 큰 사람은 목을 잔뜩 오그리고 걸어야 할 만큼 낮은 천장에 넓이는 거대한 운동장만한 특이한 공간이었다. 물 위를 떠다니는 ‘배’와는 위아래가 반대다보니 짐을 실은 컨테이너들은 바로 이 방의 바닥 아래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갑판 바닥엔 밑에 달린 컨테이너 내부와 연결된 원형의 ‘점검구’ 맨홀이 줄줄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싹 긴장한 루스탐이 그의 뒤를 따라가며 조심조심 물었다.
“외람되오나……이러실 거면 뭣 하러 치안군들을 먼저 들여보내셨습니까.”
“치안군이 들어온다면 무장한 자들은 최소한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숨기라도 했을 것 아니냐.”
“저 안에 뭐가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십니까?”
“글쎄.”
카렐이 입가의 피를 쓱 닦아내고는 건성 대답했다. 그는 바닥에 난 둥근 맨홀 중 하나를 확인해 보았다. 검문을 할 때 당연히 열어봤어야 할 곳이지만 아니나 다를까 손을 댄 흔적조차 없었다.
“열기 두려우냐.”
“아닙니다. 다만…….”
“걱정 마라, 밀항을 대비해 컨테이너 점검구는 안에서는 열 수 없으니. 비켜라.”
잔뜩 긴장한 루스탐을 옆으로 밀어낸 카렐은 손에 범벅이 된 피를 옷자락에 쓱쓱 닦고는 피 묻은 치안군 자켓도 벗어 옆에 내던졌다. 소매 없는 셔츠 한 장만 걸친 그는 언뜻 체격 좋은 수송선 선원처럼 보였다. 약간 마른 듯 보이는 몸이지만 딱 붙는 셔츠 사이로 드러난 근육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단단하고 선명했다.
루스탐이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수십 년 병마에 시달리는 도중에도 황제는 자신의 몸을 이전처럼, 아니 이전보다 강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데 강박관념을 보이곤 했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폐하.”
“됐다. 떨어져 있어.”
카렐은 팔에 힘을 주어 점검구의 레버를 비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뚜껑을 힘껏 당겨 올렸다.
“읍.”
밑을 내려다본 카렐이 움찔했다. 그곳엔 몇 명의 건장한 젊은이들이 찌뿌듯한 듯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모여 있었다. 자기들끼리 시시덕거리던 그들은 머리 위에서 갑자기 열린 작은 구멍을 빤히 올려보았다. 전혀 무장을 하지 않은 자들이 많았지만 중간중간 중무장을 하고 계급장까지 단 진짜 병사들도 보였다.
“이봐, 벌써 다 온 거야?”
구멍 너머의 사람을 선원으로 생각했는지, 그 젊은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카렐은 아무 대답도 않은 채 그들의 주변에 있는 마치 관 같은 상자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지난 제위전쟁 막판, ‘좀비 헤네티들’이 숨어 있던 그 상자와 거의 비슷한 모양이었다.
카렐이 그들을 내려다보며 난데없이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는 진짜 선원처럼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여행 괜찮았나?”
“몰라, 그냥 뭐에 맞아서 지독하게 아팠는데 중간에 뭔가 필름이 끊긴 것 같아.”
“이런 빌어먹을, 이 몸뚱이는 대체 뭐야.”
새 얼굴을 본 그들이 갑자기 봇물 터진 듯 떠들기 시작했지만 대단한 내용은 없었다.
“이봐, 페스트까진 아직 멀었어?”
“좀 더 가야 하니까 기다려.”
카렐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맨홀 뚜껑을 다시 닫았다. 그리고는 레버를 다시 돌려 꽉 잠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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