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55화 (850/1,132)

< -- 855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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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이 완전히 가라앉아버린 아스탈은 야투 박사와 함께 전장 멀찍이에서 힘없이 기분을 삭이고 있었다. 병력은 압도적이었고, 굳이 그가 끼지 않아도 잘 훈련된 1연대와 바에자 정도면 알아서 적들을 박살내고도 남을 터였다.

야투 박사가 발전소 옥상에서 떠오르는 이그나토 가 수송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적들이 달아납니다.”

“어차피 다 잡기는 틀린 거였어.”

아스탈은 멍하니 자포자기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전 같았다면 ‘다 잡은 놈들을 놓치다니!’라며 대놓고 길길이 날뛰고도 남을 터였지만 가장 아끼던 장남을 잃은 그는 세상 만사가 다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대놓고 울음을 터뜨릴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그가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그저 이렇게 철저한 무기력과 짜증 사이의 극단을 오가는 것뿐이었다.

“이디나는 목숨을 건졌다고 하니 힘내십시오.”

“북부 치안군들 소행이라고 했나?”

“그들과는 관계없는 것 같습니다. 나딘은 전동문에 끼는 사고로 질식사한 것 같고 이디나는 도리어 아군의 오발에…….”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그놈들이 들어와서 벌어진 일이잖아!”

방금 전까지 축 처져 있던 아스탈이 난데없이 불처럼 화를 내자 야투 박사가 움찔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때, 둘 사이에 놓여 있던 아스탈의 할룩스가 익숙한 목소리를 요란스레 울렸다.

“다들 발전소에서 나가라고! 모두 멀어져! 빨리!”

평소 냉소적이고 가볍기만 하던 바에자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만큼 결사적인 목소리로 외치는 건 퍽이나 이상하게 들렸다.

“저 친구가 왜 저러지?”

할룩스를 집어든 아스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옆의 야투 박사를 들어보았다. 바에자는 그저 나가라고 고함만 지르고 있을 뿐 왜 그러는지까지 차근차근 알려주고 있는 건 아니었다.

“뭐 어디 불이라도…….”

야투 박사가 갑자기 말꼬리를 흐리며 아스탈을 빤히 쳐다보았다.

“불?”

같은 순간, 아스탈의 눈도 주먹만하게 커졌다.

“으아앗!”

할룩스를 통해 들어온 바에자의 단말마 비명과 동시에, 발전소 건물 안에서 솟구친 어마어마한 빛의 덩어리가 세상을 일순간 삼켜버렸다. 경호 헤네티들에게 깔려 바닥에 나동그라진 아스탈이 억지로 고개를 들려 했지만 뒤이어 덮친 찢어지는 굉음과 후폭풍에 놀라 귀를 막아야 했다. 그리고 빛과 충격에 두 번이나 흔들린 대지를 마지막으로 뜨거운 열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불이냐? 불인 거야?”

한참만에 정신을 차린 아스탈이 얼떨떨해진 얼굴로 비로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금 전의 어마어마한 충격을 단순히 ‘불’이라고만 표현하기는 무언가 부족해도 크게 부족했다. 방금 전까지도 멀쩡하던 발전소 건물이 어느새 거대한 화염에 휩싸여 있었고 부근에 있던 병사들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에 들어간 자들은 물론이고 주변에 있던 장병, 폭도들까지 수백, 어쩌면 수천이 이 단 한 번의 폭발에 당한 것이 분명했다.

“이게 대체 뭐야.”

경호 헤네티들을 밀치고 일어난 아스탈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불꽃을 향해 달려가려는 그를 헤네티들이 급히 뜯어말렸다.

“제발! 여기 계십시오!”

“몇이나 당한 거야! 엉? 대체 몇이 당한 거냐고!”

“가지 마십시오! 아직은 위험합니다!”

“젠장 다 죽은 거 아니냐고!”

아스탈이 헤네티들을 뿌리치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걷잡을 수 없이 타고 있는 발전소를 배경으로 수많은 시체와 부상자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충격에 넋을 잃고 두리번거리고 있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3천의 병력 중 죽은 자들보다 성하게 서 있는 자들을 세는 편이 더 빠를 것 같았다.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지만 어마어마한 열기와 불꽃 때문에 불타는 건물 안에 들어가는 건 고사하고 주변에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잠깐, 바에자? 바에자는?”

“현신님! 현신님!”

멍해진 아스탈의 옆으로, 허벅지를 다친 루토가 현신의 이름을 부르며 사색이 다 되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다친 다리 때문에 몇 번이나 바닥에 넘어져가면서도 불타고 있는 발전소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서 계속 다가갔다.

“맙소사, 안 됩니다! 이렇게 가시다뇨!”

발전소 주변에서는 몇몇 살아남은 장병들이 폭발의 와중에 쓰러진 주변의 동료들을 챙겨 허겁지겁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 이미 불길에 휩싸여 있던 높은 굴뚝 중 하나가 끼익 소리를 내며 기울기 시작했다.

“피해!”

주변에서 그 모습을 본 장병들이 굴뚝 부근의 동료들에게 악을 썼다.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리는 불덩이를 본 장병들은 두 다리로든, 두 팔로든 도망을 치려 기를 쓰며 움직였지만 충격으로 쓰러졌거나 부상을 입어 움직임이 둔한 자들의 운명은 뻔했다. 거대한 불덩이처럼 내리꽂힌 굴뚝이 미처 달아나지 못한 불운한 부상자들, 방향을 잘못 잡은 자들을 무자비하게 깔아뭉갰다.

그렇지만 기둥 하나의 붕괴로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 있지 말고 멀리 떨어져!”

불타고 있는 건물을 지켜보며 무기력하게 발만 구르는 부하들에게 연대장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장병들은 불타고 있는 건물과 그 안에서 함께 타고 있을 동료들을 어쩔 수 없이 버려둔 채 무너지는 발전소 주변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도 의기양양하게 승리를 자축하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이렇게 참담한 모습으로나마 살아 도망치는 것이 행운이었다.

“건물이 무너진다!”

굉음을 느낀 장병들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모서리의 굴뚝이 무너지고 구조가 붕괴되면서 건물 구석이 조금씩 주저앉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5층 높이의 발전소 전체가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마치 땅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맙소사.”

불붙은 발전소의 잔해가 사방으로 튀었고, 쏟아지는 검은 빗물 속에서도 계속 붉은 혀를 낼름거리며 그 일대 모두를 불지옥으로 만들었다. 저 불 속에 단 한 명이라도 살아있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도 이 붕괴와 함께 참담하게 무너져 버렸다.

“말도 안 돼.”

여전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아스탈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몇 발짝 뒤에서는 야투 박사가 계속 할룩스를 두드리며 바에자를 찾고 있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고, 루토는 저 불 속에서 현신을 찾아야 한다고 울부짖으며 말리는 부하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화상을 입거나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그 아수라장에서 가까스로 살아서 도망쳐 나온 장병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수송선 주변에 하나 둘 모여들었다.

“바에자 마구스는 어찌되었냐! 현신이 어찌되었냐고!”

아스탈이 연대장을 불러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그의 호통에 잔뜩 주눅이 든 연대장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못 나오신 것 같습니다.”

아스탈이 힘없이 할룩스를 떨어뜨렸다. 비록 건방지고 심술쟁이에 듣기 싫은 말만 골라서 하는 짓궂은 여자였지만 마구스로서, 정치가로서, 무장으로서, 어느 한 군데 빠질 것이 없는 야무진 현신이었고 그의 가장 믿음직한 정치적인 동반자였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서 제일 큰 날벼락을 맞은 건 바에자를 따르는 에시마 교단 헤네티들이었다. 현신이 죽는 순간, 바로 다음 현신을 찾아 예를 보여야 했지만 지금 그들은 완전히 방향타를 잃은 상태였다.

“우리 신께선 어디로 가신 겁니까? 우리 신께는 새로이 깃들 육체가 없으시단 말입니다!”

갈팡질팡하는 그들의 앞에서 아스탈도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들에게 현신의 죽음은 문제가 아니었다. 현신이 새로 깃들 몸을 잃었다는 건 사실상 교단 전체의 붕괴를 뜻하는 것이었다. 헤네티들은 마치 모든 것을 잃은 듯 울부짖고 있었다.

“말도 안 됩니다! 새로 깃들 육체도 없이 그렇게 떠나셨을 리가 없단 말입니다!”

‘바보같이, 자식 하나 안 낳아 놓고…….’

눈앞이 캄캄해진 아스탈은 아직까지도 불타고 있는 발전소 잔해를 배경으로 지친 표정을 한 채 돌아오고 있는 장병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바에자의 시체도 저 무너져버린 발전소의 잔해 안에서 타고 있을 터였다.

“엉?”

아스탈은 힘없이 귀환하고 있는 병사들 후미에서 비틀비틀 다가오고 있는 한 형상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불꽃 때문에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보통 장병의 그것은 아니었다. 아스탈은 뒤에서 시끄럽게 울어대고 있는 에시마 교단 헤네티들에게 호통을 쳤다.

“닥치고 조용히 해!”

아스탈은 무언가를 뒤집어쓴 채 비틀비틀 다가오고 있는 그 실루엣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기랄, 재수가 없으려니까.”

잔뜩 분노가 서린 하이 톤의 여자 목소리가 아스탈에게 이토록 반갑기는, 아니 감격스럽기는 처음이었다. 불에 타 너덜너덜해진 망토 안에서 나타난 진줏빛 갑옷은 오직 한 사람만 입는 것이었다. 군데군데 탄 흔적이 있고 검댕이만 잔뜩 뒤집어썼을 뿐 갑옷도 그럭저럭 멀쩡했다.

“너희들 뭐 하냐? 누가 죽기라도 했냐?”

바에자는 아스탈 주변에서 엎드려 통곡을 하고 있던 자신의 헤네티들 종아리를 사정없이 걷어차며 버럭 신경질을 냈다. 현신에게 차인 그들은 당황하기는커녕 도리어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그의 앞에 몰려들어 일제히 절을 올렸다.

“돌아오셨군요!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역시 현신을 버리지 않으셨군요!”

“뭐? 저버려? 이 새끼들 무슨 소리야? 씨발, 재수 없게.”

그들을 확 밀어내고 아스탈에게 다가가려던 그는 멍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루토의 모습에 순간 움찔했다. 둘만 있었다면 어떤 애정 표현이라도 했겠지만 지금은 때가 적절치 못했다.

“다리도 성치 않은 놈이 왜 여기서 비는 맞고 있냐?

그는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루토의 시선을 슬쩍 무시하며 아스탈에게 다가갔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에자를 구석구석 살피던 아스탈은 머릿속이 갑자기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바에자가 특유의 재주를 부려 그에게만 소리 없이 말하고 있었다.

- 어머나, 같이 침대에도 누워 본 일 없는 제가 그리 반가우신가요? -

바에자의 얼토당토않은 농담에 아스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어쨌든 지금 당장은 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마구스가 살아 돌아왔다는 게 중요했다.

“할룩스는 대체 어디다 내버리고! 함께 있던 놈들은 다 어디 있는 거요!”

아스탈은 그에게 짜증부터 버럭 냈다. 대체 어떻게 살아 돌아온 건지는 몰라도 연락이 끊겼던 몇 분간은 그와 헤네티들에게 지옥 같았다.

“할룩스요?”

바에자는 평소 할룩스를 달고 있던 허리춤을 그제야 힐끗 보았다. 그곳엔 부서져버린 ‘마우저’만 꽂혀 있을 뿐 할룩스가 있을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건물에서 도망나오다가 떨어뜨렸나 보죠. 저도 정신이 없었다고요.”

바에자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목이 바싹 탄 그는 옆의 바위에 힘없이 털썩 주저앉아 입을 크게 벌리고는 루토가 가져온 물을 벌컥벌컥 쏟아 부었다. 아랫사람들 앞에서 무사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약간 과장된 연기를 하는 것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사에나인지 뭔지 그 썩을 년.”

그는 물배가 찰 만큼 한 통을 다 쏟아 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몇 백이 죽었든 몇 천이 죽었든 어쨌든 우리가 이겼잖아요. 여기도 차지했고요. 죽은 놈들도 다시 깨어날 몸이 있는데 왜 이리 하나같이 죽상들을 하고 있답니까?”

바에자가 손을 쳐들고 크게 손뼉을 쳐 보였다.

“일어나! 일어나지 못해! 승자의 꼬라지가 이게 뭐냐!”

방금 죽을 위기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씩씩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헤네티들과 장병들 모두 마지못해 그에 호응하며 무기를 쳐들었다.

“걱정 마라! 이번은 우리의 승리다! 이제 이 산, 남부 최고의 천혜요새인 호드르 산이 우리 손에 들어왔다!”

바에자가 난데없는 폭발 사고로 의기소침해진 장병들 사이를 누비며 날카로운 하이 톤의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교단이 존재하는 한, 너흰 절대 죽지 않고 절대 패배하지도 않는다! 오늘 운 없는 사고로 몸을 잃은 동료들은 내일이나 모레면 다시 볼 수 있다! 너희가 현신을 믿는 이유가 그 때문이 아니더냐! 이번에도 우리의 승리인데 맥없이 뭐 하는 짓이냐!”

‘새로운 방식의 죽음’에 익숙지 못했던 옛 근위대들은 그제야 자신의 승전, 그것도 황실을 물리치고 얻어낸 큰 승리라는 것을, 동료들의 죽음을 슬퍼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우리 승리다!”

바에자를 따라 일어선 무장들과 사관들이 앞장서 함성을 올렸다. 잠시 침울했던 장병들도 그제야 승리를 깨닫고는 일어나 함성을 올렸다. 어딘지 미심쩍은 눈길로 바에자를 쳐다보고 있는 야투 박사를 제외하면 이곳의 교단 일행 모두가 기뻐하고 있었다.

수많은 시체들이 불타고 있는 호드르 산 지열발전소의 잔해 주변은 뒤늦게야 자신들의 승리를 자각하고 기뻐하는 수천의 옛 근위대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민간 폭도들의 함성으로 일순간 뒤덮였다. 이들이 황제에게 거둬낸, 첫 승리, 그것도 어마어마한 것을 얻어낸 큰 승리였다. 비록 꽤 많은 것을 잃었을지언정, 어쨌든 그들의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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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4는 이번 회로 끝을 맺습니다.

다음 회부터는 초반의 웬수(?) 3인방 카렐과 베흔, 페로가 다시 중심으로 등장하는

[파트5. 오염된 자들] 이 이어집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너죽고 나살자 피튀기는 싸움이 벌어집니다. ^^

그리고 과거편은 타리프 일지와 고향행성의 쇼킹한(?) 엔딩이 나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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