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42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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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장님께서 하실 말씀이 있으신가보다.”
코리온을 부축해 밖으로 데려나온 제네르가 뚱한 표정으로 병사들에게 말하고는 주도권을 학장에게 넘겨주었다.
“자네 석궁 좀 주게.”
코리온은 자말에게 난데없이 손을 뻗었다.
“예?”
잠시 머뭇거리던 자말은 등에 둘러메고 있던 석궁을 끌러 그에게 내주었다.
“이 장난감은 뭐 하려고 그러십니까.”
황실군의 다른 대부분 군인들처럼, 그 역시도 이 작은 석궁을 ‘어린애 장난감보다 조금 나은 천덕꾸러기’ 취급하고 있었다.
“쓸 줄은 아시는지요? 위력은 별 볼일 없지만 자칫 오발사고라도 나면…….”
제네르의 반쯤 조롱 섞인 물음이 무색할 정도로, 코리온은 아주 능숙하게―고도로 훈련된 병기 전문요원 못지않게― 석궁의 볼트 카트리지와 스프링이 달린 방아쇠 뭉치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이 설계도와 프로토타입을 붙들고 씨름했네만 오발사고는 없었네, 걱정해 줘서 고맙군, 하크로딘 상장군.”
움찔한 제네르는 그의 역공에 할 말을 잃었다. 그는 시선을 제네르에게로 향한 채 보지도 않고 손끝만으로 부품들을 다루고 있었다. 이 인기 없는 석궁이 이 서생님의 작품이라는 세간의 소문이 정말 맞는 모양이었다.
“내 자식 같은 발명품이 위력 약한 장난감이라 놀림 받고 있다는 걸 모르지는 않네.”
그는 석궁의 금속 활대를 뜯어내서는 원래의 휨과 반대방향으로 바닥에 사정없이 후려쳤다. 석궁 주인인 자말이 기겁을 했지만 결국 활대는 그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조각조각이 나고 말았다. 휨 방향으로는 엄청나게 강한 금속이었지만 반대 방향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맥없이 부러져 십여 개의 조그만 금속판으로 나눠져 버렸다.
“아, 아니 이걸 왜…….”
자말은 차마 화도 내지 못한 채 얼굴만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민간인 위협용 외에 다른 용도로도 사용 가능하다는 걸 안 알려줬을 뿐이다.”
코리온은 10개로 나눠진 활대를 주워서는 옷자락으로 꼼꼼히 닦았다. 그리고는 부러진 조각들을 석궁의 볼트를 유도하는 관 양옆, 미리 파여져 있던 홈―쓸모없는 것으로 꼽히는 대표적인 부분이었던―에 하나하나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볼트에서 꼬리 부분을 떼어 내버리고는 손가락 마디만한 머리 부분만 볼트 카트리지에 끼워 석궁을 다시 조립해 놓았다.
“황상의 요구조건은 간단했지. X들이 피하기 어려울 만큼 빠른 탄속(彈速), 보병이 무게 부담 없이 200발 이상 지닐 수 있는 것, 황제가 독점할 수 있는 소모성 원료를 핵심 재료로 북부 군산업체 손을 일체 거치지 않고 제작 가능할 것.”
“아니, 대체 이게 뭐길래요.”
보다 못한 제네르가 한 마디 꺼내고 말았다. 원래 석궁의 모양에 익숙한 그와 병사들에게 중간 틀과 손잡이만 달랑 남은 석궁은 한마디로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이 꼴이 뭡니까, 볼트를 뭘로 가속하게요? 쏘자마자 바닥에 툭 떨어질 겁니다.”
제네르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코리온은 무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내 처음 생각은 전자기를 이용한 강력한 발사체였지만 황상께선 위력은 떨어져도 단순하고 신뢰성 있는 게 낫다고 하셨었지. 잠시 의견차가 있었지만 역시 경험 있는 분 생각이 옳았군.”
코리온은 ‘틀만 남은’ 석궁을 번쩍 쳐들어서는 건물 앞에 있던 나무 상자에 대고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짧은 펑 소리와 함께 상자 한쪽이 조각조각나며 공중으로 흩어져 올랐다.
“금속판은 소모품 전지고 특정 파장의 초단파를 내네. 볼트 머리에 코팅된 액체금속은 대사막의 황실 직영 광산에서만 나는 방사성 물질이이고, 약간의 가공을 거치면 초단파에 짧은 순간 강력한 자성을 띠게 할 수 있지. 자성을 띤 탄두는 코일을 지나면서 음속 이상으로 가속되고.”
생각보다 훨씬 큰 위력에 놀란 제네르가 발밑에 떨어진 나무조각을 집어 들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새로운……무기인가요? 인력을 사용하지 않는 무기는 옛부터…….”
“7년 전, 황상의 몸에 난 큰 상처를 혹시 보았는가.”
제네르가 입을 꾹 다물었다. 누군가 이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를 개발해서 이미 사용하고 있다는 암시가 분명했다. 먼 옛날, 군대까지도 거부했던 골수 평화주의자 조상들의 터부는 결국 느리지만 시간이 지나며 하나 둘 무너져가고 있었다.
“그게 누구죠?”
“건국의 도리를 지키는 데 필요하다면, 내 이보다 더한 것도 만들 것이네.”
코리온은 대답을 피한 채, 자신이 재조립한 석궁을 자말의 손에 다시 돌려주었다.
“원래는 조준경이나 추가 코일 같은 추가 부품이 몇 더 있지만 그건 진짜 전시에나 지급될 테고, 일단 이 정도로도 단순 살상용으로는 충분할 걸세.”
새 석궁을 받아든 자말에게 제네르가 작은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곧 싸움이 있을 것 같으니 떠날 준비를 해라.”
“예? 여기서 구조대를 기다리는 게 아니고요?”
자말이 까만 눈을 크게 뜨고 양모의 진지한 표정을 올려보았다.
“그래, 중요한 싸움이 될 거다. 빨리 준비해라.”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자말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병사들에게 큰 소리로 명령했다.
“모두 들었나? 빨리 각자의 석궁을 이대로 손보도록 해! 빨리! 빨리!”
제네르가 다시금 돌아본 코리온은 무언가 씁쓸한 표정이었다. 그는 문가의 상자에 앉은 채 몇 번이고 한숨만 내쉬고 있었다. 황제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런 무기를 만들었겠지만, 그 역시도 이렇게 변해가는 싸움의 양상이 내심 탐탁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코리온의 모습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지식인으로서의 어떤 동지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전투 준비를 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제네르는 암흑 속에 마치 비석처럼 우뚝 서 있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춥지 않으십니까? 안에라도 좀 들어가 계셔야…….”
“됐네.”
세네피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바로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주변을 제대로 살필 수 있는 게 나밖에 더 있나.”
제네르는 세네피스의 입술이 아직까지도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죽은 사람의 옷을 빼고는 마땅히 입을 새 옷도 없어서 망토 안쪽으로는 여전히 맨살이 들여다보였다. 지금 같은 비상상황만 아니라면 남자 병사들의 가슴을 온통 헤집어놓고도 남을 모습이었다.
“그래, 나만 이렇게 볼 수 있어.”
세네피스는 아무도 시키거나 부탁하지 않은 주변 감시에만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몰두하면서 방금 전 있은 기억을 애써 잊으려는 게 분명했다.
“추우시면 제 망토라도 더…….”
“됐다, 내 전장에서 별 쓸모없는 서생인데 어찌 중한 싸움을 벌일 전사의 보호물까지 빼앗겠는가.”
제네르는 세네피스의 더러워진 얼굴에 남아있는 눈물자국을 보았다. 거의 알몸으로 돌아온 이 황태후에게 그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그때, 세네피스가 마치 그의 맘을 읽은 것처럼 선수를 쳤다.
“그들이 내 몸을 더럽히진 못했다. 됐는가?”
“예? 아, 아니……. 소, 소장 그런 뜻이 아니옵고…….”
속마음을 들켜버린 제네르가 화들짝 놀라며 헛기침을 했다.
“황상께선 지금 어디 계시냐. 상장군은 알지 않나. 황상이 있어야 해.”
세네피스가 ‘황상’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며 묻는 모습에 제네르는 내심 이 여인이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도 황태후의 뇌리에는 온통 황제라는 존재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이런 황태후의 모습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었다. 빼어난 미모와 학식, 기품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상사병에 허우적거리게 만드는 장본인이지만 정작 본인은 수십 년째, 아니 지하 감옥에 갇혀 있던 때까지 합치면 150년 가까이를 그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채 금욕을 고집하고 있었다.
황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랜 세월 독수공방하는 황태후를 보다 못해 몇 번이나 ‘비공식적인 남자’라도 엮어주려 했지만 매번 안하느니만도 못한 결과만 빚곤 했다.
이렇게 육체적인 욕구와는 담을 쌓은 세네피스가 잠시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북부 지인들과의 만남에서 ‘북부식으로’ 미소년이나 미청년들을 데리고 가볍게 노닥거릴 때 정도가 전부였다.
속사정 모르는 유학자들은 이런 황태후를 가리켜 ‘황태후와 대제학다운 지조’라며 칭송하기 바빴지만 정작 주변 사람들의 눈은 그리 곱지 않았다. 세네피스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하 감옥을 연상하게 하는 내용을 접할 때마다 병적인 불안증을 보였고, 걸핏하면 불면증과 이유 없는 몸살로 앓아누워 황제의 걱정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보다 못한 황제가 하룻밤 짬을 내어 함께 보내주기라도 하면 다음날 거짓말처럼 생기에 찬 모습으로 나타나 사람들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곤 했다.
그렇다보니 주변 사람들은 세네피스의 금욕인지, 섹스혐오증인지를 ‘지조’라는 듣기 좋은 말보다는 ‘자식 하나에 몰두한 과부의 히스테리’정도로 폄하하곤 했다. 아니면 지하 감옥에 갇히기 직전 당했으리라 예상되는 끔찍한 경험―물론 황실에서는 그 일에 관해 일체의 언급을 금하고 있지만― 때문일 것이라 넘겨짚는 사람도 많았다.
“황태후 폐하와 황자분들이 위험에 처한 것을 아신다면 분명 몸소 나서실 겁니다. 아니, 이미 움직이고 계실 게 분명합니다.”
제네르는 의기소침한 세네피스에게 힘을 주려 일부러 황제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세네피스가 주변을 휙 둘러보고는 제네르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자네도 아나? 북부에 옛 사교 지도자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걸.”
제네르는 별 것도 아닌 내용을 무슨 대단한 것인 양 잔뜩 긴장하며 속삭이는 모습에 하마터면 ‘이 양반이 어떻게 되셨나?’싶은 본심을 표정 밖으로 드러낼 뻔했다.
“……폐하, 사교는 마구스들만 사라졌지 여전히 제도권 내에 존속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네들은 양반이죠. 지하에는 마구스를 자처하는 사이비 종교집단도 세기 어려울 만큼 많습니다. 그런 것들은 어차피…….”
“그런 흔해빠진 사이비 집단이 아니라니까! 밀리타의 아버지 행세했던 그 남자였단 말이다! 수하들이 그자를 ‘대신관님’이라 하는 걸 분명 들었다고!”
“대, 대신관이요? 황실에 거액을 바쳤던 그 남자가 사교 대신관이요?”
“황상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게야……국론 분열을 걱정해서 얘기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래, 역시 신중한 황상답지. ……음?”
대화 와중에도 여전히 주변 상황에 눈을 떼지 않고 있던 세네피스가 느닷없이 눈가에 잔뜩 힘을 주었다.
“……자네 망원경 있는가?”
제네르는 이전에 쓰던 보통 망원경―이 어둠 속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을 두말없이 내주었다. 망원경을 눈에 댄 세네피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군인이 아니라서 사람 숫자는 잘 어림 못하네만……족히 수천은 되는 것 같네, 상장군.”
“우리 지원군이 아니고요?”
“아니, 그냥 민간인 차림새인 걸 봐서 폭도들 같네.”
당황한 제네르는 맘을 가다듬을 겸 자리를 잠시 서성거렸다.
“거리는…….”
“망원경의 계측기가 작동을 안 해서 잘 모르겠네만……초원 중간에 있는 뿔 모양 바위 부근을 지나고 있는 것 같아.”
“바위요?”
제네르는 품에서 꼬깃꼬깃해진 지도를 얼른 꺼내어 펜으로 표시를 하고는 대충 거리를 어림했다.
“33 스타디아(4.95km) 정도입니다.”
잠시 머뭇거리던 제네르는 듣고 싶지는 않지만 꼭 알아야 할 것을 마지못해 물었다.
“다,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겠죠?”
“아니. 여기로 와. 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세네피스의 지금 목소리는 전투라고는 전혀 모르는 서생의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차가웠다.
“……45분에서 50분 정도 걸리겠군요.”
제네르가 입을 가리며 뒤로 휙 돌아섰다. 지금 그에게 두려운 건 적의 공격 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어쩌면 방금 코리온과 한 약속대로 정말 자말의 목을 베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공포감까지도 그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 역시 세네피스와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어떻게 알았을까요.”
찬바람이 몰아치는 비탈에 나란히 선 세네피스와 제네르는 가슴 속 공포를 억지로 감추며 적들이 다가오고 있는 곳을 응시했다.
“이제 어찌할 텐가?”
세네피스가 제네르를 돌아보았다. 잠시 망설이던 제네르가 대답했다.
“일단은 피하고는 싶지만……안 될지도 모르지요.”
제네르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작은 단검을 끌러 세네피스에게 불쑥 내밀었다. 칼을 받아든 세네피스가 씁쓸한 표정으로 물었다.
“적을 찌르라는 건 아니겠지?”
“그냥……‘필요한 때’ 쓰시라는 겁니다.”
제네르는 단호한 표정으로 휙 돌아섰다. 그리고는 손뼉을 짝짝 치며 ‘경계’를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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