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38 회: 파트4. 시간의 축복 혹은 저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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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나쁘게만 생각하지 말라고.”
이그나토 가 제후군 사령관 네피가 낙담한 제네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우리와 갑자기 연락이 끊겼으니 황실도 뒤집어졌을테고, 인근에 주둔하는 우리 제후군도 비상이 걸렸을 거야. 운 좋으면 이미 호드르 시내에 접근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여기 페스트 주둔군이 모두 합쳐 몇인데?”
“8백 정도?”
“훗, 퍽이나 많다. 호드르 시민이 몇인지 알기나 해?”
제네르가 혀를 차며 빈정거렸다.
“왜 그래, 우리도 황실 눈치 때문에 많이 못 둔 거라고.”
“저 폭도들 물리치고 이 시커먼 잿더미 속에서 여길 찾아낼 즈음엔 우린 다 죽고 해골만 남았을지도 모르지. 어쨌든 우리가 여기 있다는 걸 알려야 해. 결국은 내려보낸 병사들이 제값을 해야 한다고.”
“아참, 이게 있습니다.”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기병 사관이 계측장비들 옆에 있는 어른 허벅지만한 굵은 파이프를 가리켰다.
“어쩌면 이걸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뭔데?”
“여길 관리하는 공병대 엔지니어가 하는 말을 어깨너머로 들었습니다. 공중으로 뭘 쏘아보내서 대기 측정을 하는 장치라는 것 같습니다.”
“이게? 무슨 난로 굴뚝처럼 생긴 게?”
옆에서 듣고 있던 네피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물었다.
그때, 뒤쪽에서 생각지도 않았던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산에서 나오는 부유물하고 가스 농도를 재는 장치에요.”
“응?”
제네르와 네피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옆구리를 감싼 채 구석에 기대어 앉아 있던 마야가 고통스런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성층권 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떨어진다고 들었어요.”
“마야? 괜찮니? 말할 수 있어?”
동생의 침착한 말투에 지금까지 제네르의 걱정이 확 달아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마야는 언니의 시선을 외면한 채 힘없이 자기 말만 이었다.
“일단 지면에 떨어지면 바로 수습할 수 있도록 가까운 황실군 공병대에 현재 위치를 발신하게 되어 있어요. 아마 비엔에 있는 남부파견군 사령부에 알려질 거예요.”
“정말? 그럼 통신이 가능한 곳까지도 내보낼 수 있다는 거냐?”
“각도만 잘 잡으면 멀리도 보낼 수 있을 거예요.”
“다행이다. 파견군 놈들이 바보가 아니라면 문제가 생긴 곳에서 그런 신호를 받으면 바로 달려오겠지.”
제네르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엷게 웃음을 지었다. 이 똑똑한 동생은 한때 화학공장 엔지니어로 일했었고, 지금은 생물학자로 변신해 종마장에서 품종개량을 맡고 있는 재원이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발사가 되겠니? 지금 정밀장비들은 죄다…….”
“안에 들은 관측장비는 어차피 먹통이겠지만 발사체 자체는 압축공기가 폭발하면서 날아가는 단순한 기계에요. 멀리만 가면 되지 꼭 정확한 데 떨어질 필요도 없잖아요.”
“가만, 그럼 그 안에 있는 발사체에 우리가 원하는 메시지를 담을 수도 있고?”
잠시 생각하던 마야가 조금은 자신 없이 대답했다.
“조금 손보면 될 거에요.”
“난 글쟁이라 기계에 관한 건 잘 모르는데 네가 할 수 있니?”
별 생각 없이 물었던 제네르는 자신의 부탁이 퍽이나 어처구니없다고 여겼다. 배를 찔린 마야는 일어서서 기계를 만지는 건 고사하고 자리에 앉아 지금처럼 말을 하기도 힘들어 보였다.
“경호대에 기계나 정밀장비 다루는 훈련을 받은 사람이 있을 거야. 네 손발이 될 수 있을 테니 부탁한다.”
제네르는 무리인 줄 알면서도 계속 물었다. 그렇지만 뜻밖에 마야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해 볼게요.”
“고맙다.”
제네르는 항상 지니고 다니는 수첩을 찢어내 몇 마디를 황급히 적기 시작했다. 그는 [이 글을 보는 즉시 가까운 당국에 전달할 것]으로 시작해서 일행이 있는 위치, 현재 처한 사정과 인원을 장황하게 적어서 동생에게 내주었다. 평소 악필로 소문난 그였지만 이번만은 온 정성을 다 해서 또박또박 써내려갔다.
“이걸 발사체에 넣어서 쏘아다오.”
“알았어요.”
6명의 병사들이 늦기 전에 무사히 산을 떠나 소식을 전할 수 있을까 내심 반신반의했던 제네르는 생각지도 않았던 예비 수단이 생기면서 맘이 확 놓이는 것 같았다.
한시름 놓은 제네르는 다 타들어간 성냥 대신 다른 것을 하나 켜들고는 실내의 계측기계들을 비춰 보았다.
“응?”
별 생각 없이 이것저것 들여다보던 제네르는 멈춰 있는 지진계에 바싹 눈을 가져갔다.
“내가 지질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지만 말이야.”
제네르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무슨 지진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나?”
제네르는 기록 테이프를 따라 그려져 있는 지진파를 가리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행이 페스트에 도착하기 조금 전 있었던 제법 강한 지진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 뒤로도 이상한 파동이 20분 넘게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기록계는 지진이 이어지는 도중에 멈췄으니 어쩌면 여기 기록된 것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작동했는지도 모르지.”
네피가 기계를 발로 툭툭 차며 대답했다.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기계가 없잖아.”
“그런가.”
“평상시엔 하나도 안 궁했는데……지금 같은 때는 그 샌님 유학자님이 있다면 훨씬 낫지 않았나 싶네.”
“웬일이야, 그 인간을 다 찾고.”
제네르가 처음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사실 그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과학기술에 밝은 마야는 사지를 제대로 못 움직였고, 그를 빼면 문외한만 모인 상황에서 머리를 맞대고 깊이 생각한들 무언가 알 상황도 아니었다.
네피가 깜깜한 창밖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참, 황태후도 이상하던데? 우린 여기서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그 양반은 대낮처럼 잘 보는 것 같던걸.”
“그레이오팔이 뭔가 특별한 게 있나 보지.”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다면 당장 우리한테도 도움이 되겠지.”
“기왕 같은 색 눈동자라면 황상 쪽을 고르겠어.”
별 생각 없이 대꾸한 제네르는 그레이오팔과 천재님, 둘 사이에 무언가 특별한 공통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근거없는 생각을 문득 했다.
“뭣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그 두 피곤한 서생이 전장에서 필요한 때가 다 있을 줄이야.”
제네르의 잔뜩 비꼬는 한 마디에 네피가 창밖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놈의 검은 재가 웬수지.”
그때, 문 밖에서 [누가 옵니다.]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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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리프 카파키의 일지 - 8
상사의 유품을 정리하는 건 내겐 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서류상 교단 헤네티였으니 죽음과 동시에 파견이 해제되었고, 신상 정리는 물론이고 유가족에게 사망을 알리는 불편한 임무조차도 우리 성직자들의 몫이었다.
같은 가장이고 남편으로서, 그가 쓰다 만 편지는 내겐 가장 다루기 괴로운 물건이었다. 편지는 유가족들에게 돌려줄 많지 않은 유품들과 함께 어질러진 상자 구석에 대충 꽂혀 있었고, 그 첫머리엔 아내의 이름으로 보이는 여자 이름이 쓰여 있었지만 그 아랫줄을 본 순간, 난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부인이 꽤 똑똑한 사람인 모양입니다. -
헌병의 말에 난 아무렇지 않은 척 편지를 상자 안에 도로 넣어 버렸다. 다행히 그 헌병이 고위 신관, 혹은 학자들만이 구사하는 [바람어(語)]를 읽을 것 같지는 않았다.
-명예로운 헤네티의 아내 아닌가. -
맙소사, 그 편지는 내게 쓴 것이었다. 첫머리의 아내 이름은 잘 해야 공용어밖에 모르는 코메트 동료들의 의심을 피하려는 눈속임일 뿐이었다. 상사는 아케메니안 궁 근무 시절에 배웠던 바람어로 죽기 전 내게 무언가 말하려 했던 것이 분명했다.
사람들이 사라진 후, 비로소 편지를 꼼꼼히 읽어보았다. 상사의 파킨슨 병 때문에 글씨는 엉망이었고, 두서도 없이 급하게 써서 나중엔 읽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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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명의 전우들이 타 죽었던 지난 참사에 관해 누군가는 진실을 알아야 할 것 같아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그때 우리에게 투항했다가 길안내를 했던 원주민 3명에 관해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처음엔 순수한 의도로 투항했다고 말했지만 몸에 난 매질 자국이 어딘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심문을 해 본 결과, 원주민 무리에서 공동 식량을 빼돌리다가 발각되어 [잔딕]이라는 처벌을 받았다고 실토했습니다.
얼핏 들은 바로는 특정 시간이 지난 후. 끔찍한 악몽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일으키는 이상한 막대를 뇌 속에 꽂아 넣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들의 문명이 자멸하기 직전, 극단의 혼란 속에서 태어난 괴물이 지금껏 남아있던 것 같습니다.
그 세 명은 3년간 죄를 짓지 않으면 그 막대를 제거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음에도 앙심을 품고 무리를 도망쳐 나와 우리에게 투항한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사제들이 보물로 받드는 오팔 비슷한 돌까지 훔쳐 나왔던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그 돌은 며칠 후에 모녀로 보이는 두 사제들(?)이 마을에 숨어들어와 도로 훔쳐갔습니다.)
비록 제가 이편에 서 있지만, 그 세 투항자들은 참으로 뻔뻔하고 가증스러운 자들이었습니다.
당시 코메트 부대장은 그들에게 원주민 무리를 찾아낼 수 있게 도와주면 수술로 그 막대를 없애 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단호하게 불가능하다고 답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카히나의 사제들’이 그 제거하는 법을 알고 있으니 그들을 잡아달라 요구했습니다. 사제들을 잡거나, 그들이 숨겨둔 옛 자료를 빼앗아서 자신들 머리에 박힌 막대를 안전하게 제거해 주면 옛 동료들이 은거한 동굴의 위치와, 그들이 가진 [보물]이 있는 곳도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카히나의 사제들’은 옅은 회색 바탕에 괴이한 빛깔을 뿜는 눈동자를 가진 돌연변이 가문(혹은 부족?) 같습니다. 그들은 폐쇄적인 족내혼만을 하며, 어른이 되면 거의 늙지도 않는데다가 천 리 밖까지도 볼 수 있는 마법의 시야를 가졌고, 사람을 공포에 빠뜨리는 저주의 주문까지 외울 수 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어디까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또한 이 사제 무리에는 괴력을 지녔거나, 천재적인 머리를 지니는 등 특출한 능력을 지닌 돌연변이 소년 소녀들까지 섞여 있어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마지못해 이들을 따른다고 합니다. (이 말은 별로 신뢰가 가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그들 증언대로라면 이 사제 무리는 지난번 화재가 있은 통로가 끝나는 곳, 산꼭대기에 있는 ‘검은 철성(鐵城?)’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몰라도, 그들은 그곳을 이용해 이 행성이 다시 부활할 수 있을 것이라 굳게 믿기 때문에 그곳을 절대 떠나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우린 그 투항자들을 앞세우고 철성 공격에 나섰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용과 같은 불꽃’이 행군하던 전우들을 덮쳤고, 발화점은 화염방사기병이었습니다. 미리 매복해 있던 누군가가 발사무기로 화염방사기병의 연료탱크 밸브를 노렸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화염방사기 자체의 폭발보다 훨씬 큰 연속폭발이 뒤이어진 것이었습니다.
서류에서는 사고로 처리되었지만 그건 절대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500명의 전우들은 분명 공격을 받아 [전사]한 것이었습니다.
구조단의 성직자님들이 코메트의 전우들을 싫어하시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그들의 떳떳치 못한 과거를 접어두고 보면 그저 불쌍한 희생자이고 전사자일 뿐입니다. (그렇다고 동료들의 배신으로 위기에 처했던 원주민들의 반격도 굳이 나무라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세 배신자들은 도덕적으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타죽은 건 신의 정의였는지도 모른다고 감히 추측해 봅니다.
코메트 수뇌부는 ‘철성’에 대한 재공격을 계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 ‘카히나의 사제들’이 [거의 늙지 않는다]는 사실에 자하크 대신관께서 큰 관심을 보이시는 것 같습니다. 테번 델루지 대장에게는 모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그들을 반드시 사로잡아 대신관님을 기쁘게 해 드리라는 명이 전해진 듯 합니다.
(위대한 현신께선 그들에게서 단순히 신기한 구경거리 그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시는 것 같습니다. 테번 델루지 대장은 ‘세상이 바뀔지 모르겠다.’고도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들 무리에는 이 깜깜한 재 속에서도 앞을 훤히 볼 수 있는 사제들, 무서운 전투력, 혹은 천재적인 지능을 지닌 돌연변이들이 한 패를 이루고 있습니다. 저들이 지난번에는 동료들을 불로 태워 죽였지만 이번엔 대체 무슨 꼼수로 우리를 곤경에 처하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새 사령관 테번 델루지 대장은 철없는 다혈질 청년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용의주도한 남자입니다. 그는 그런 불리함을 감수하느니 어떤 식으로든 검은 재 문제를 해결하고 나서 공격을 시작할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공병대, 프리깃 조종사들과 이 재를 일시적으로라도 없앨 방안에 관해 상의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방법을 찾은 것 같았습니다.
(이 뒤는 읽기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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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 388년, 에시마의 달, 19일.
구조단 총단장
트라카의 선택을 받은 자, 마스모간 타리프 카파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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