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33 회: 파트 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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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실 일행이 도망가고 아스탈 일행이 그들을 쫓아간 이후, 주인이 없는 황실 행궁을 장악하는 짜증나는 뒷처리는 결국 바에자의 몫이었다.
“그 양반은 언제 돌아오시는 거냐.”
바에자가 옆에 큰 구멍이 휑하니 뚫린 황실 프리깃을 쳐다보며 짜증스레 물었다. 대신관을 향한 불경한 표현에 화를 낼 만도 했지만 제네르 일행을 모두 놓치고 먼지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쿠베는 헛기침만 하며 불편한 심기를 간접적으로 나타낼 수밖에 없었다.
“그분이 오시던지, 연락이라도 해 주셔야 제대로 추격해서 수색을 하던지 할 것 아냐.”
바에자는 새로 집결시킨 200여명의 헤네티들을 힐끔 돌아보았다. 이들 대부분은 지난 제위 전쟁 당시 카렐 황제에게 자살돌격을 했던 그 ‘코런덤’ 용병들이었다. 당시 전멸이라는 치욕을 당했던 그들은 새로운 몸으로 지난 원수를 갚기 위한 칼을 갈고 있었다.
“루토.”
그는 뒤에도 눈이 달린 듯, 소리 없이 다가오던 루토에게 사무적으로 물었다.
“‘벨’에게서는 연락 왔나?”
움직임을 바로 간파당한 루토가 헛기침을 하며 대답했다.
“산 밑의 ‘호드르 시’에서 주민들을 교육하고 있습니다. 사카 여단장이 곧 이끌고 올라올 겁니다.”
“‘교육’이라, 그 말 참 듣기 좋군.”
바에자는 마스크 밖에서도 표정을 훤히 읽을 수 있을 만큼 대놓고 빈정거렸다.
“그냥 협박이라고 하는 게 훨씬 이해하기 쉬울 것 같은데 말이야.”
“협박을 당했든, 자진해서 나섰든, 어쨌든 곧 이곳으로 올 겁니다. 손에 무기 하나씩은 들고 폭도로 변신해서 오겠죠. 군 경험이 있는 자들은 돌격대로 따로 편성하기로 했습니다.”
“이봐, ‘폭도’는 그네들이 쓸 어휘이고, 우리 입에선 ‘혁명군’이라고 해야 맞지.”
옆에서 듣고 있던 쿠베가 괜스레 루토에게 시비를 걸었다.
이 둘 다 한때 같은 근위대 보안국 소속이었다보니 이런 공작에는 누구보다 능숙했지만 이렇게 별 것 아닌 일로 서로의 자존심 대결을 벌이곤 했다. 사실 당시에도 쿠베가 국장, 루토는 2인자였고, 지금도 쿠베는 대신관의 사람이고 루토는 하위 마구스인 바에자의 측근이니 일단 서열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이 둘 사이의 사소한 자존심 대결까지 막아주는 건 아니었다.
둘의 감정대결이 또 벌어지기 전에 바에자가 얼른 끼어들었다.
“됐어, 됐어. 뭐라 부르든 하는 짓이 달라지는 건 아냐. 문제는 방금 도망간 놈들이 어딜 갔는지 알아야 폭도든 혁명군이든 뭐시기든 써먹을 거 아냐. 대신관님도 당최 안 돌아오시고. 이 빌어먹을 검댕이 때문에…….”
“보십시오,”
막 짜증을 내려는 있는 바에자에게 루토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지시받은 대로 길가에 몰래 떨궈놓고 갔더군요. 이제 간단히 해결되었죠?”
“‘그놈’이?”
치켜올라갔던 바에자의 눈꼬리가 바로 온순해졌다. 그가 건네받은 문제의 쪽지는 누군가 꾸깃꾸깃 뭉쳐 땅바닥에 내던진 듯 구겨지고 흙투성이였다.
“그런데 종이 꼴이 왜 이래?”
“손에 쥐어 꽉 구겨야 그 몇 분 후부터 신호를 냅니다. 가디언이나 헤네티만 볼 수 있는 파장의 빛이죠.”
루토가 뭉쳐져 있던 종이를 잘 펼쳐서 다시 내보였다.
“중간중간 상황을 전하라고 제가 몇 장 쥐어줬는데 이거 생각 외로 많이 주우러 다니게 되었습니다.”
루토의 손에는 이것 말고도 여러 장의 ‘구겨진 종이’가 쥐여 있었다. 종이는 희미한 야광을 뿜도록 처리가 되어 있어서 이 어둠 속에서도 어렵지 않게 읽고 찾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다.
“일행들 모르게 몰래 떨어뜨리는데도 제격이고요.”
“후훗, 쓸모가 많았군. 별 기대 안했었는데.”
루토가 넘겨준 쪽지에는 갓 글을 배운 어린아이마냥 비뚤비뚤 다급하게 흘겨 쓴 문장이 아주 짧게 적혀 있었다.
[5번 표적 제거실패 1초소이동]
[5번 6번 7번 표적 행궁이동]
[모든 표적 프리깃 편으로 즉시 탈출 예정]
바에자가 펼쳐든 마지막 쪽지에는 [최종목적지 지진관측소]라고 적혀있었다.
“지진관측소로 도망갔다고?”
바에자가 이곳 지도를 재빨리 펼쳐 보았다. 그리고 칼데라 초원 북쪽에 있는 ‘제7예비초소 - 지진관측소’를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었다.
“됐어, 위치를 알아냈으니 우린 귀한 황실 손님들이 ‘폭도들’한테 난자당하는 걸 한 발 뒤에서 구경만 하면 되겠군.”
바에자의 눈썹이 초승달처럼 휘어지며 가득 웃음을 지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쿠베도 이번엔 그의 ‘폭도’ 표현에 시비를 걸 수가 없었다. 하지만 대신 다른 건수로 바에자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혁명군’이 ‘그놈’까지 해치면 어쩝니까? 아직까지는 정체를 잘 감추고 있는데.”
“그건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형님.”
바에자가 또 짜증을 내기 전에, 루토가 주인을 대신해 재빨리 선수를 쳤다.
“폭도가 그네들을 난자하기 전에 ‘그놈’이 먼저 저들 수뇌부를 토막 내 놓을 테니까요. 아니면 최소한 무력화시켜 놓던가.”
루토가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다.
“내부의 적 하나가 외부의 적 백 명보다 무서운 법 아닙니까.”
희미한 햇빛이나마 들던 오후 시간이 지나고 저녁에 접어들면서 안 그래도 어둡던 주변은 발도 디디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어둠에 휩싸여갔다. 그리고 세네피스를 데리고 행궁으로 돌아가는 아스탈 일행의 걸음도 점점 느려졌다.
슈라가 조명탄을 켜 손에 쳐들고 앞장섰고, 나머지 일행들도 느릿느릿 그 뒤를 따라 오솔길을 걸었다.
십여 분을 더 나아가는 동안에도 아스탈의 흥분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때, 오솔길 옆으로 종마장 건초를 보관하는 헛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쉬었다 가자.”
방금 전까지도 일행을 미친 듯 재촉하던 아스탈이 난데없이 말을 멈추자 호위하는 기병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잠시 서로 눈치를 살폈다. 지금은 쉴 때도 아니었고 말이 지친 것도 아니었다.
눈치 빠른 슈라가 얼른 흩어지라며 눈짓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슈라는 헛간 문짝의 자물쇠를 도끼로 후려쳐 부숴버리고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불길함을 직감한 세네피스가 버둥거리며 말을 돌리려 했지만 기병들이 그를 억지로 끌어내려 헛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멀찍이 있겠나이다.”
빈 헛간 안에 아스탈과 단둘이 남겨진 세네피스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말이 맞다면, 눈앞의 이 남자 역시 이곳에서 암흑밖에 못 보고 있을 테니 분명 그가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유리한 시야를 써먹을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굴렸지만 아스탈도 그런 세네피스 앞에서 미련하게 자신을 위험에 노출할 사람이 아니었다.
“쓸데없는 짓 말아, 뮤.”
아스탈은 재가 들이치지 않게 문을 꼭 닫아버렸다. 그리고는 품에 갖고 있던 조명탄에 불을 붙여 구석에 던져놓고는 그에게 슬쩍 시선을 주었다. 조명탄의 강한 불빛이 벽에 두 사람의 선명한 그림자를 그려놓으며 조금씩 타들어갔다.
“이젠 공평하지? 걱정 마라, 상상하는 그런 몹쓸 짓 하려는 건 아니니까.”
구석에 몰린 세네피스는 맞서 싸워볼까 하는 위험천만한 생각도 했지만 이자는 분명 무장이었고 문 바깥에는 헤네티들이 있었다. 게다가 상대의 손에 끼워진 큰 기계손이 그의 공포를 더 부채질했다. 그래도 그는 겉으로는 절대 기세가 꺾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뮤가 대체 뭘 말하는지 몰라도 네놈이 감히…….”
“황제가 아무 것도 말 안 해 줬나보지? 하긴, 그놈도 모를 수도 있지. 내가 자기의 외숙부라는 걸 말이야. 아무렴 어떤가.”
아스탈은 세네피스를 건초더미 쪽으로 더 밀어붙였다.
“난 강간범이 아냐. 호화롭게 치장된 침실에서 네 포옹을 느끼면서 최고의 초야를 보내고 싶지 이런 지저분한 곳에서 네 옷을 벗기고 싶지는 안아. 지금은 그저…….”
“네놈 제정신이냐.”
세네피스는 이 정체 모를 남자에게 저항하려 했지만 이 괴물에게 힘으로 버틸 수는 없었다.
“으, 웁.”
세네피스는 아스탈의 힘에 밀려 주춤주춤 뒷걸음쳐야 했다. 구석까지 밀려나버린 세네피스는 검은 마스크 차림을 한 이 낯선 남자의 손과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는 모습을 무력하게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네놈 대체 왜…….”
창백해진 세네피스는 그자의 손을 쳐내려 했지만 의미 없는 저항일 뿐이었다.
“하긴. 내 이 꼴을 하고 있으니.”
자신이 마스크를 하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의식한 아스탈은 그 흉물을 확 벗고 본색을 내보였다.
“이젠 알겠지?”
“누구냐니까.”
세네피스가 다시 이를 드러냈다. 은빛 머리칼에 잘생긴 미남형의 얼굴, 회색빛 눈동자가 어딘지 익숙했지만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을 만나는 그의 복잡한 기억 속에서 수십, 수백 년 동안이나 남을 만큼 특색이 있는 얼굴은 아니었다.
“나, 날 몰라?”
아스탈은 그토록 사모했던 상대가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자 실망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입가를 씰룩거렸다.
“날 똑바로 보라고.”
아스탈은 그의 턱을 붙들고 억지로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게 했다.
“어릴 때 갇혔던 수용소 관할 교구장 얼굴은 잊을 수도 있지만……네가 끔찍하게 싫어했던 여자의 아비 행세하던 남자까지 다 잊었나?”
“뭐?”
기억이 되살아난 세네피스의 눈이 확 커졌다. 황제의 제위 초기, 지금은 행방불명된 밀리타와 함께 황궁을 찾아왔던 바로 그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물론 그나마도 분명한 기억은 아니었지만.
상대가 비로소 자신을 알아보는 듯 싶자 내심 흐뭇해진 아스탈이 세네피스의 뺨에 손끝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따뜻한 입김과 함께 그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간택자 세네피스, 오직 하나의 존재, 그리고 그의 분신만을 영원히 따를지니.”
마치 암호와도 같은 이 말에 세네피스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건초더미 때문에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방금 아스탈이 읊은 건 한때 그의 이마에 박혀 있었던 간택자 문장 뒷면에 새겨져 있던 문장이었다. 처음엔 그저 어느 간택자의 문장에나 관례적으로 들어간 것인 줄 알았지만 알고 보니 뒷면에 문장이 있는 사람은 그와 오르마즈, 단 둘뿐이었다.
“잡소리 마라.”
모든 것이 혼란스러워진 세네피스가 재차 저항을 하려 했지만 아스탈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세네피스의 손을 그 큰 기계손으로 덥석 잡아서는 다시 벽에 밀어붙였다.
“그 문장은 네 아버지, 아니 내 아버지가 네게 내린 운명이야. 그 ‘하나의 존재’가 바로 나고.”
세네피스는 마치 절정에 오르기 직전처럼 거칠게 뿜어내는 그의 숨결이 뺨과 귓가에 다가오는 느낌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넌 수용소에서 키워질 때부터 다음번 대신관을 낳을 몸으로 정해져 있었단 말이다. 그래서 네가 꼬마였을 때 내 부하들이 네 이마에 그걸 박았다고. 내가 보는 앞에서.”
‘이놈 정신병자 아냐?’
세네피스가 힐끗 돌아본 그의 눈동자는 반쯤 풀려 정말로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아 보였다. 불안함에 사로잡힌 세네피스가 다시 그의 손을 떨치려 했지만 단단한 기계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네게 [비나]를 씌워줄 수 있는 세상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이다.”
아스탈은 사람의 피가 흐르는 나머지 한 손을 품 속에 집어넣었다.
그의 품에 있던 무언가가 조명탄의 고휘도 빛을 받아 눈을 찌를 만큼 반짝거렸다.
“저건…….”
아스탈의 손에서 드러난 화려한 광채를 본 순간, 세네피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이 남자의 손에 들린 다이아몬드 서클렛은 카파키 가의 멸망 직전, 황후 처소에서 갑자기 사라져 그를 며칠이나 울게 만들었던, 한 맺힐 만큼 그리운 물건이었다.
“[비나]라니, 이건 오르 언니가 내게 선물한…….”
“닥쳐, 그 이름은.”
지금껏 세네피스를 다정하게 쳐다보던 이 남자의 깊고 푸른 눈빛에 일순간 사나운 붉은 빛이 번졌다. 세네피스의 팔을 움켜쥔 그의 기계손에 갑자기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피가 안 통하면서 손이 점점 저리기 시작했다.
서클렛을 든 아스탈은 눈앞에서 떨고 있는 이 가련한 사냥감의 머리 위에 조심스레 얹어주었다.
“내가 얼마나 이걸 씌워주고 싶었던지.”
아스탈이 눈을 크게 뜨며 세네피스의 새 모습을 응시했다. 얼굴 양쪽 관자놀이를 지나 뺨으로 늘어진 수십 개의 다이아몬드 사슬들은 세네피스의 얼굴 윤곽에 맞춘 듯 정확히 일치했다. 아스탈의 손길이 여러 개의 사슬을 스치면서 보석이 부딪치는 맑은 울림이 음악처럼 주변에 퍼졌다.
“여기에 사파이어만 남아있었다면 완벽했을 텐데…….”
아스탈은 그의 눈썹 사이를 다시 만지작거렸다.
“하긴, 어차피 내가 다시 박아 줄 테지만.”
아스탈은 세네피스의 드레스 자락 사이로 드러난 그의 긴 목에 코를 대고 이 여인의 향기를 가슴 깊숙이 들이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입술과 숨결을 그의 이마로 천천히 가져갔다.
“이, 이건.”
세네피스가 몸을 비틀며 그의 손에서 빠져나가려 했다. 먼 옛날, 오르마즈가 이 서클렛을 선물해 주며 지금처럼 똑같이 입을 맞춰 주었던 터였다.
“씨이! 비키지 못해!”
오르마즈 생각에 머리가 아찔해진 세네피스가 이 남자를 거칠게 밀어내며 사정없이 뺨을 후려갈겼다.
“우읍!”
지금까지 괴력을 발휘했던 이 남자가 이번엔 그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뒤로 주춤거리며 물러나고 말았다.
“이런…….”
한쪽 뺨이 맞아서 벌개진 아스탈은 세네피스가 자신을 이토록 강하게 거부하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헛간을 비추던 조명탄이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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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주기에 관해 고심하다가 그냥 이전편 조회수 기준으로 올리기로 했습니다. 조금 덜 찼지만 내일 아침에 올릴 형편이 아니라서......^^
뒷부분에 나오는 오르마즈/세네피스의 옛 훈훈한(?) 이야기는.....출판본 있으신 분께선 2부 3권 95쪽 참고하시면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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