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28 회: 파트 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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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후 일행을 쫓아 화산 정상 행궁까지 올라온 제네르는 이래저래 맘이 급했다. 네피와 마야의 부상은 그럭저럭 버틸만해 보였지만 마자리크의 장남 윌더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근위병의 가슴에 안긴 채 힘들게 말에 올라 있는 그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가끔씩 잠꼬대처럼 ‘어머니.’ 혹은 ‘죄송해요.’라는 말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렇다보니 행궁 아래의 6번 초소를 통과할 때도 그는 평소처럼 아무렇지 않게 경례를 올리는 장병들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말에 최대한 속도를 붙여야 했다.
“바람까지 안 도와주는군.”
가파르고 지겨운 비탈길을 지나 막 정상에 오른 제네르는 얼굴을 후려치는 거센 산바람에 얼른 스코프를 눈에 끼웠다. 그 기계도 다른 것들처럼 여전히 먹통이었지만 당장 눈이라도 보호하는 데는 쓸모가 있었다.
함께 가던 근위기병이 거의 깜깜해진 주변을 둘러보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옛날에 가 봤던 화산폭발 현장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때도 시간은 분명 한낮인데 눈앞은 한밤중이었습니다. 하늘에선 화산재가 눈처럼 쏟아지고…….”
“그래도 그땐 기계라도 돌아갔었겠지.”
그때, 어둠 너머 희미하게 행궁 출입문이 보였다. 제네르는 뒤따라오는 일행들을 휙 돌아보았다.
“다 온 것 같다. 윌더 경은?”
“아직 의식이 희미합니다.”
“빨리 따라와.”
제네르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에 속도를 붙였다. 자기 가족들을 모두 잃은 마당에 남의 아들 걱정을 해 줄 맘의 여유 따위는 없었지만 최소한 겉으로라도 최고지휘관의 모습을 유지해야 했다.
“우음?”
출입문에 다가가던 제네르가 움찔했다. 행궁 남쪽 주 출입문의 위병소를 지키고 있어야 할 위병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놀란 그가 뒤따르는 기병들에게 경계 태세를 손짓한 순간, 안쪽에서 발더 분견대 차림새를 한 병사들 몇이 짙은 재 사이에서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이봐, 자리 비우고 뭐 하는 거야.”
그들에게 버럭 화를 낸 건 제네르 일행을 따라온 분견대 소속 기병들이었다. 그런데 그 보병들은 제네르 일행에 섞여 있는 ‘동료’들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방향을 휙 돌려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깜깜한 암흑 사이로 눈 깜짝할 새 모습을 감춰버렸다.
“뭐야, 저놈들?”
마치 유령에 홀린 것처럼 당황했던 제네르는 일단 말에 속도를 붙여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뭔지 몰라도 잡아!”
제네르가 기병들에게 따르라며 손짓을 보냈지만 워낙 어둡고 재가 짙어서인지, 그자들의 발이 번개처럼 빠른 것인지 몰라도 도무지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안되겠다!”
제네르는 얼른 말을 세우고는 뒤따르는 기병들에게 모이라고 손짓을 했다.
“흩어지지 마라! 시야가 제한되어서 흩어지면 못 찾는다!”
앞 다투어 속도를 붙였던 기병들이 급히 추격을 포기하고 모여들자 제네르는 재빨리 머릿수부터 확인했다. 중무장한 정예 근위기병이 4명, 자말이 붙여 준 분견대 경기병이 10명, 3명의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이그나토 가 근위병 5명까지 모두 무사했고 다행히 없어진 병사는 없었다.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잖아!”
제네르가 당혹스런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앞이 안 보이는 것도 문제지만 말소리까지도 무언가가 빨아먹는 듯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다보니 잠시만 정신을 놓았다가는 일행을 잃어버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뭔가 이상해. 이런 건 처음이라고.”
다급해진 그는 먼 옛날 말 조련사 시절 기억을 되살려 즉석에서 궁여지책을 내놓았다.
“지금부터 휘파람으로 소통한다. 알았나? 내 휘파람 소리를 기억해 둬라. 높고 날카롭게 불면 전진, 짧게 끊어서 불면 정지, 낮고 길게 불면 퇴각이다. 리듬을 타고 울리면 집결하라는 뜻이다. 나팔수 신호와 비슷하니 잊지는 않겠지?”
“알겠습니다.”
제네르의 짧은 시범에 기병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프리깃으로 가자.”
그의 날카로운 휘파람과 함께 기병들이 짙은 재를 뚫고 ‘프리깃이 있던 자리’를 향해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제네르 옆을 달리던 기병이 검고 큰 실루엣을 가리켰다.
“저깁니다!”
좀 더 말을 달려 다가가던 그들은 무언가 크게 부서지거나 떨어지는 것 같은 굉음에 화들짝 놀랐다. 소리까지 흡수해 버리는 짙은 대기 속에서도 이렇게 요란하게 들린다면 원래는 귀청을 찢을 듯 어마어마하게 큰 소리였음이 분명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제네르는 프리깃에 거의 접근해서야 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프리깃 외벽 판넬이 통째로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뻥 뚫린 안쪽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제네르는 작동도 되지 않는 스코프를 벗어던지고는 유목민의 다져진 시각으로 그곳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이런, 맙소사. 싸우고 있잖아!”
제네르가 프리깃 벽에 뻥 뚫린 구멍을 가리켰다. 판넬이 떨어진 구멍 앞에서 몇 사람들이 내려오지 못하고 서성대는 모습이 보였다. 제네르가 반사적으로 말에 최대한 속도를 붙였다.
“근위기병들이 주변의 안전을 확보하고! 분견대 기병은 판넬 떨어진 곳 밑으로 가서 내려오는 사람들 밑에서 도와라! 부상자는 뒤로 빠지고!”
제네르는 뒤따라오고 있는 부상자들에게는 뒤로 물러나라고 손짓을 보냈다. 마야와 윌더를 보호하는 이그나토 가 근위병들이 재빨리 뒤로 거리를 두었지만 한 명의 부상자만은 예외였다. 부리부리한 눈을 부릅뜬 네피가 말리는 기병들을 뿌리치며 허리춤에서 도끼를 번쩍 빼들었다.
“그만 둬!”
제네르가 그의 말 앞을 막아섰다.
“팔도 성치 않은데 일단 빠져 있어!”
“가족 몰살당한 놈 정신머리보다는 나아!”
아내와 외손녀가 공격당하고 있다는 말에 이성을 잃은 네피는 오랜 친구의 만류까지 뿌리치며 말에 마구잡이로 속도를 붙였다. 제네르가 말에 더 속도를 붙여 그를 다시 막아서려 했지만 그는 제네르의 말을 우악스럽게 밀어내며 계속 자기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이봐!”
제네르는 흥분한 네피가 무슨 짓을 할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를 쫓아다니며 계속 말릴 여유는 없었다.
“이쪽! 이쪽!”
프리깃 아래, 방금 판넬이 떨어진 곳으로 달려간 분견대 기병들은 머리 위의 큰 구멍을 올려보았다. 일단 달려는 왔지만 그들로서도 난감했다. 몰아치는 강한 바람과 짙은 재 너머로 검은 무명포를 펄럭이며 구멍 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뒤쪽에서는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듯, 무기가 부딪치는 소음, 누군가의 찢어지는 비명과 장교, 사관들의 격한 고함이 캐빈 안을 뒤흔들고 있었다.
“누구 밧줄 있어?”
선임 사관이 병사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기병 한 명이 말에 싣고 있던 비상용 로프를 가져오자 사관이 길게 늘인 창끝에 걸어 일단 위로 뻗어올렸다.
“이거 타고 내려와요!”
구멍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대던 코리온과 주페는 갑자기 기적처럼 나타난 로프에 반색을 했지만 밑에서 그것을 올려 준 병사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순간 멈칫거렸다. 지금 등 뒤에서 일행을 공격하고 있는 괴한들도 이 기병들과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당숙부, 어쩌죠?”
주페가 코리온에게 황급히 물었지만 코리온 역시 내려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만 있었다.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눈을 읽는 그만의 특별한 능력도 무용지물이었다.
순간, 코리온의 귀를 울린 건 무척이나 익숙한 목소리였다.
“빨리 내려오지 않고 뭐 합니까!”
잔뜩 신경질이 섞인 이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가 코리온의 귀에 이토록 반갑게 들리기도 처음이었다. 주변을 둘러보고 온 제네르가 위에서 어물거리고 있는 이 천재님에게 버럭 화를 냈다.
“뒤에서 사람들 죽어가고 있는 것 안 보입니까!”
그가 머뭇대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제네르는 다짜고짜 화부터 버럭 냈다. 그제야 코리온도 얼른 로프를 벽의 손잡이에 묶고 주페를 잡아당겼다.
“먼저 내려가십시오.”
“하지만…….”
“먼저 내려가서 제가 내려보내는 부상자들을 도와주십시오!”
마지못해 내려가려던 주페는 해치 반대편에 고립되어 있는 세네피스 황태후와 마리안 일행 쪽을 먼저 돌아보았다.
“안 돼!”
무언가를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진 주페가 갑자기 코리온을 밀치며 마리안이 있는 쪽으로 가려 했다. 영문을 모르는 코리온이 그런 그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뭐 하는 겁니까! 빨리 내려가요!”
“먼저 가세요! 당숙부!”
일순간 격앙된 주페는 자신을 억지로 내려보내려는 코리온을 도리어 밖으로 확 밀어버렸다.
“태자!”
코리온이 그를 막으려 했지만 비록 어리기는 해도 X의 피를 받은 이 소년의 순간적인 괴력을 도저히 당해 낼 수가 없었다. 힘에 밀린 코리온이 구멍 밖으로 휙 밀려났다.
“이익!”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공중으로 확 밀려났던 코리온이 쿵 소리를 내며 프리깃 외벽에 매달리고 말았다. 자신이 바닥에 그대로 떨어지는 줄로 알았던 코리온은 어깨가 빠지는 것 같은 느낌에 짧은 비명을 냈다.
“빨리 밧줄 잡고 내려가시라고요! 안 잡으면 놓아버릴 거예요!”
고개를 치켜든 코리온은 프리깃 안의 주페가 손을 뻗어 자신의 손목을 붙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소년은 구멍 밖으로 몸을 반쯤 내민 채 한 손으로 코리온의 손목을 꽉 붙들고 있었다. 회색 재가 섞인 거센 바람에 코리온의 검은 무명포가 요란스레 펄럭거렸다.
“뭐 하는 겁니까! 태자!”
“빨리 밧줄 잡아요!”
코리온은 자신을 이런 궁지까지 몰아붙인 저 당돌한 소년에게 부아가 확 치밀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가 마지못해 밧줄을 붙든 순간, 주페는 그의 손목을 놓고 안쪽으로 모습을 확 감춰버렸다.
“태자! 태자!”
코리온이 로프에 매달린 채 악을 썼지만 안쪽으로 사라진 태자에게는 대답이 없었다. 그는 다시 로프를 타고 기어오르려 했지만 퇴각하려 몰려드는 부상자 때문에 도저히 다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문가에서 세네피스, 마리안과 함께 고립된 채 싸우던 마자리크는 점점 더 궁지에 몰려가고 있었다. 바깥과 연결된 해치 출입문은 10명이 넘는 적들이 겹겹이 막고 있었고, 다른 퇴로는 없었다. 그때, 객실 해치 제일 안쪽에 있던 코리온의 손에 판넬이 떨어지면서 바깥의 짙은 회색 재가 강풍을 타고 안으로 확 밀려들어왔다.
“지금입니다!”
코리온이 퇴로를 뚫는 것을 본 그는 세네피스를 구멍 쪽으로 확 밀었다. 회색 재가 밀려들면서 프리깃 안쪽의 시야가 갑자기 흐려진 이 순간을 놓칠 수는 없었다. 경호대 장병들도 급히 부상자를 추슬러 물러나기 시작했다.
“빨리요!”
그는 의붓손녀 마리안을 번쩍 안아 겨드랑이에 끼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씨! 저놈들이!”
마자리크 일행이 경호대의 보호를 받으며 움직이는 것을 본 이 침입자들도 필사적이었다. 그들을 이끄는 사관 차림새의 가디언이 부하들에게 찢어지듯 외쳤다.
“안쪽으로 못 가게 해!”
“누구 맘대로!”
퇴로를 다시 차단하려는 적들의 앞을 경호대 가디언이 몸을 날려 막아냈다. 그는 앞에서 뛰어드는 적 지휘관의 칼을 힘껏 받아내고 몸으로 밀어붙이며 뒤의 마자리크 일행과 다른 장병들이 빠져나갈 길을 지켜냈다.
“빨리! 빨리 빠져나가십시오!”
그 가디언은 다른 장병들이 뒤로 빠져나갈 때까지 필사적으로 힘을 주어 버티어냈지만 상대는 분명 그에게는 버거웠다.
“귀찮은 놈!”
그 사관이 있는 힘을 다해 밀어내며 휘두른 칼이 경호 가디언의 양손검을 단번에 조각을 내 버리고 공중을 크게 갈라냈다. 그의 어깨와 머리가 동시에 잘려나가며 사방을 온통 피로 물들였다.
“맙소사!”
마자리크가 급히 이 끔찍한 광경에서 소녀의 눈을 가렸지만 그 역시도 운이 좋지는 못했다. 마리안을 노린 것인지, 그를 노린 것인지는 몰라도, 어딘가에서 날아든 볼트가 목에 명중하면서 정신없이 뛰던 그 역시 힘에 밀려 옆으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악!”
짧은 비명과 함께 그의 팔에 들려 있던 마리안도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방금 전 입은 갑옷이 아니었다면 즉사하도고 남았을 위치였다.
“옹주 마마, 옹주 마마.”
잠시 방향감각을 잃었던 마자리크가 얼떨떨해진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런!”
얼떨결에 목숨을 건진 그의 앞에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던 끔찍한 모습이 펼쳐지고 있었다. 조금 전 경호 가디언을 쓰러뜨리고 쫓아온 적 지휘관이 막 일어나 도망치려던 어린 마리안의 뒷덜미를 우악스럽게 붙들고는 칼을 번쩍 치켜들고 있었다.
“이 새끼! 뭐 하는 짓이야! 아이한테!”
마자리크가 악을 쓰며 자신과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적을 향해 반사적으로 튀어나갔다. 동시에, 프리깃 안쪽에서 무서운 기세로 날아온 투척도끼 하나가 이 육중한 가디언 침입자의 얼굴을 향해 똑바로 날아갔다.
“으엇!”
손목의 건틀렛으로 도끼를 막으려던 그자는 예상보다 훨씬 강한 위력에 어깨가 휙 돌아가며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건틀렛을 맞고 튕긴 도끼날이 그자의 투구 한쪽을 후려치면서 정수리 쪽에 쩍 하고 금이 가고 말았다.
“가만히 있어! 마리안!”
도끼를 던진 건 방금 코리온을 떨쳐낸 주페였다. 재가 들이치고 혼란에 빠졌던 싸움터 사이를 빠른 발로 가로질러 뛰어온 이 십대 소년은 휘청거리고 있는 이 무서운 가디언을 온 힘을 다해 어깨로 들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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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라 다른 일로 이번 회 연재가 좀 늦었습니다.
독자님들도 즐거운 징검다리연휴 보내세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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