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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822화 (817/1,132)

< -- 822 회: 파트 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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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님, 저 앞에 보십시오.”

선두의 기병이 또 제네르의 좋은 시간을 망쳐버렸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들었던 제네르는 뿌옇게 흐린 대기 너머로 줄줄이 서 있는 웬 행렬을 보았다.

“저건 또 누구야? ……이크.”

제네르가 기겁을 했다. 앞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실루엣은 한참 앞장서서 떠났던 세네피스와 코리온 일행이었다.

‘젠장, 망했네.’

제네르는 ‘저 행렬이 왜 멈췄을까’를 걱정하는 대신 ‘저 얼굴들을 또 보겠네.’하는 지극히 사적인 실망감에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왜 이러지?”

선두의 기병이 눈의 스코프를 켰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로 벗어버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병사가 맨눈으로 전방을 주의 깊게 살피고는 다시 외쳤다.

“공격을 받은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다 밖에 나와 있습니다.”

“알았다.”

제네르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일단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어차피 만나게 되었으니 피할 방법은 없었다.

“아직도 말 안 듣는 거야?”

산악도로의 한중간에서 멈춰버린 차를 노려보며 마자리크가 운전기사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차가 멈춰선 산 중턱은 나무나 풀 같은 것도 거의 없는 돌밭 황무지였고 멋진 풍경 따위도 없었다. 덕분에 이들을 호위하고 온 50여명의 황실 경호부대 가디언, 병사들도 병력 수송차량에서 내려 주변에 빙 둘러선 채 주변 경계를 하고 있어야 했다.

“이래서는 대체 언제 출발하냐고.”

마자리크가 다시 짜증을 냈다. 운전기사도 도로 중간에서 떡하니 멈춰버린 차의 엔진룸을 열어놓은 채 여기저기를 계속 살피며 ‘이럴 리가 없는데’만 연발하고 있으니 큰 손님맞이가 온통 엉망이 되어버린 마자리크로서는 피가 말라가는 상황이었다.

“젠장할. 왜 하필 오늘만 이러는 거야.”

그는 묘한 어색함이 번지는 주변을 힐끔 둘러보았다. 세네피스는 차 안에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었고, 코리온은 차 밖에서 주페, 마리안에게 바닥의 돌과 흙을 보여주며 여기저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코리온이 황자들에게 토양에 대해서 가르쳐주고 싶어서였는지, 아니면 그냥 자리가 불편해서였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저 두 원수가 폐쇄된 공간에 나란히 앉아 출발만을 기다리는 진땀 빼는 순간이 연출되고 있지는 않은 것이 지금 마자리크에게는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 산 위쪽에서 흙먼지와 함께 말굽 소리가 들려오자 마자리크가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칼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작은 고개 너머에서 나타난 건 후발대로 출발했던 제네르와 그를 호위하는 십여 기의 기병들이었다.

“어라? 왜 여기서 이러고들 있답니까?”

제네르가 아타르에서 훌쩍 내려서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평소 그가 타던 이 얼룩무늬 말 뒤에는 크고 건장한 붉은 털의 말이 당장이라도 달리고 싶다는 듯 거칠게 발을 구르고 있었다.

“저 두 분 눈싸움이 무서워서 차가 겁에 질렸나 봅니다.”

마자리크가 뼈 있는 농담으로 제네르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눈치 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제네르가 혼자서 일행과 떨어져 오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마자리크의 간접적인 핀잔에 머쓱해진 제네르가 차의 엔진룸에 머리를 들이밀며 괜히 관심을 보이는 척 했다.

“그나저나, 왜 이리 사방에서 고장 투성이랍니까? 아까는 셔틀이 문제라면서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거 누가 사보타지 하는 것도 아닐 테고.”

‘사보타지’라는 말에 제네르의 표정이 순간 굳어버렸다.

“뭘 그리 놀라십니까, 주변에 호위병이 이리 많은데요.”

손님을 괜히 놀라게 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마자리크가 얼른 웃음을 지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그의 말대로, 주변에는 황태후와 황자 일행을 호위하는 정예 황실 호위부대가 50여명이나 도끼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바보가 아니라면 감히 접근할 엄두도 못 낼 터였다.

그때, 엔진룸에 몇 분째 머리를 처박고 있던 기사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만…… 지금 상태로는 뭐가 문제인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이걸 어쩌지.”

당황한 마자리크가 다시 차에 있는 세네피스의 눈치를 보았다.

“행궁에서 새 차를 부르던지, 아래 도시에서 부르던지…….”

별 생각 없이 할룩스를 들었던 마자리크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거의 동시에, 행렬의 앞뒤를 호위하고 있는 병력수송차 쪽에서 운전병의 고함이 들려왔다.

“이봐! 차가 말을 안 듣는데? 어떤 놈이 손댔어?”

그쪽을 힐끔 돌아보았던 마자리크는 완전히 꺼져있는 자신의 할룩스를 제네르에게 내보였다. 제네르의 것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제기랄.”

표정이 바싹 얼어붙은 제네르가 두말없이 차의 상석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순발력을 발휘해야 할 순간이었다.

“황태후 폐하, 이거 걸치고 내리십시오.”

제네르가 어깨에 두르고 있던 두툼한 망토를 내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의 갑작스런 태도에 세네피스도 적이 놀란 표정이었지만 눈치 없이 무슨 일이냐며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았다.

“왠지 오늘 기분이 나빴어.”

세네피스가 침착하게 차에서 내려서는 제네르가 덮어주는 망토를 어깨에 걸쳤다. 제네르의 눈짓을 받은 가디언들이 세네피스와 코리온, 두 황자의 곁에 번개같이 달라붙으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가까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고, 발 빠른 기병들은 스코프를 켜며 주변으로 일제히 흩어졌다.

“장군님 스코프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만.”

전투 준비를 갖추려던 기병들도 당혹스런 얼굴로 눈에 끼고 있던 스코프를 벗어들며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들이었다.

“무슨 일이야, 오빠?”

갑작스런 긴장감을 간파한 마리안이 놀란 얼굴로 오빠 주페의 옷소매를 붙들었다. 주페는 겁먹은 동생 앞에서 별 일 없다는 듯 애써 태연한 얼굴을 했다.

“왜? 무슨 일이냐니? 아무 일 없잖아.”

입으로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이 소년도 어느새 코리온의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이런.”

코리온도 자신의 몸에 지닌 정밀한 물건들 몇 개를 확인해 보더니 갑자기 이 소년을 팔에 번쩍 안아들었다.

“다, 당숙부, 전 충분히…….”

주페는 더 작고 어린 여동생 대신 ‘다 큰’ 자신을 안아드는 그의 모습에 당황했다. 그는 마리안을 가리키며 뭐라 말하려 했지만 코리온은 매몰차게 그의 말을 끊어버렸다.

“지금부터 말을 아끼고 제 곁에 있으십시오. 태자 저하.”

코리온은 나머지 한 손으로 마리안의 손을 잡고 서둘러 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들이 다 움직이지 않습니다. 통신도 끊어졌고 스코프도 이상합니다.”

차 곁으로 돌아온 코리온에게 제네르가 자신의 스코프를 벗어 보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갑자기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기계라는 기계는 아무 것도 작동을…….”

“전자기 펄스 같지 않은가.”

“예? 이 휑한 황무지에서요? 군용 할룩스도 먹통입니다만.”

복잡한 과학 이론 따위는 잘 모르는 제네르가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그가 말하는 전자기는 지금도 전장에서 차량이나 중장비를 고철덩이로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지만 그건 미리 대규모 장비를 동원해 ‘판을 짜 놓은 전장’에서나 해당되는 것이지 이런 황야에서 그런 경우는 없었다.

“전장의 전자기 설비가 이런 소형 개인장구까지 먹통을 만드는 법은 없습니다. 미리 대비해서 설계되었고…….”

제네르가 뾰로통한 얼굴로 대꾸했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나?”

“예?”

“누군가를 죽이는 데 기존 지식을 모두 동원했다면 우리 역시도 고향 행성 같은 자멸을 몇 번은 겪었을 것이네.”

코리온의 대답에 제네르는 군인으로서 살짝 자존심이 상하는 느낌이었다.

“고향 행성의 자멸이 그런 최소한의 불문율조차 없어서였다는 건 아시겠지요?”

“불문율이라…… 우리 세계에서 전쟁을 이기는 데는 필요할지 모르지.”

코리온의 눈이 갑자기 가늘어지며 오싹한 눈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저 사람들을 몰살시키고 싶다면 ‘교전’ 따위가 굳이 필요하겠나.”

제네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한때 스승이었고, 한때는 원수이기도 했던 이 남자의 칼날같은 눈빛은 여전히 그를 압도하고 있었다.

“우리와 점잖은 교전 따위는 애당초 하고 싶지 않은 누군가가 그 불문율을 깬다면 그땐 어쩔 텐가. 황실군 최고지휘관인 상장군으로서.”

이 남자는 얼굴이 붉어진 제네르를 놔둔 채 냉담하게 돌아섰다. 제네르의 기분이 적잖이 상했지만 그의 의도를 못 알아먹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이 벽창호보다 자신의 생각이 도리어 더 경직되어 있었다는 데 당황했을 뿐이었다.

“요즘 달라진 걸 아십니까.”

자리에 멈춘 코리온이 제네르에게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세상에 아무 것도 두려워 않던 분이 아니었던가요. 그런 학장님에게서 정체 모를 공포가 보이는 게 저 혼자만의 망상인가요?”

코리온을 더 몰아붙이려던 제네르는 그의 팔에 안겨 있는 어린 주페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것을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얼른 주제를 돌렸다.

“어쨌든……뭔가 이상하니 행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런데 기계가 다 이러면 어차피 프리깃도 고장 나지 않았을까요?”

“프리깃이라면 스페이스상의 전자기파를 최대한 차단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정상 작동할 가능성이 그나마 제일 높다고 봐야겠지?”

‘이 인간이 쓸모 있을 날이 다 있네.’

제네르는 평소 그렇게도 꼴 보기 싫던 이 ‘천재님’이 일행에 섞여 있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 보니 이 천재님이 셔틀 광(狂)인 데다가 꽤 옛날에 스페이스 프리깃 면허까지 땄다는 말도 들은 일이 있었다.

기병들 몇에게 말에서 내리라고 지시한 제네르가 세네피스에게 조심스레 머리를 조아렸다.

“황태후 폐하, 아무래도 행궁으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 기병의 말을 타고가십시오. 가디언과 병사들이 도보로 호위할 겁니다.”

제네르는 이들에게 산 위를 가리키며 정작 자신은 말머리를 도로 산 아랫방향으로 돌렸다. 그 모습에 세네피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자네는?”

잠시 머뭇거리던 제네르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상황을 파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러는지도 알아야 하고요.”

제네르가 구차하게 설명을 붙였지만 이미 그의 머리꼭대기에 앉아 속내를 꿰고 있는 세네피스는 애당초 괜스레 트집을 잡을 생각도 없었다. 제네르는 이번엔 이 일행에서 ‘유일한 무장’인 마자리크에게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이 길을 따라 우리 초소들이 여럿 있습니다. 제가 내려가면서 그곳 병사들에게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도시에 무슨 일이 있는지도 알아보고요. 유선 통신망으로 행궁에 계속 상황을 보고할 테니 마자리크 경께서 이 호위부대를 맡아 주십시오.”

“내가 호위하라고? 여긴 내 영지…….”

제네르의 진짜 속내를 조금 늦게 알아 챈 마자리크가 그제야 입을 다물며 잠자코 말에 올랐다. 통신까지 모조리 불통이 된 막막한 상황에서 그의 가족 걱정을 무조건 나무랄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알았네, 행궁에서 기다릴 테니 빨리 오게.”

“그런데 날씨가 왜 이러지.”

무심코 하늘을 올려보았던 세네피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조금 전까지도 뙤약볕이 내리쪼이던 오후의 하늘이 침침하게 변해 있었다.

“구름도 없고 일식도 아닌데 갑자기 하늘이 왜 이리 어두워졌죠?”

마자리크가 눈가를 찡그리며 하늘을 응시했지만 비구름도, 안개도 없는 하늘은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져 있었다.

“으음? 눈이…….”

함께 하늘을 올려보던 세네피스가 갑자기 눈을 비비고는 고개를 거칠게 저었다. 가뜩이나 긴장하고 있던 마자리크가 얼른 손수건을 내밀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냐, 아냐. 그냥 눈앞이 좀 이상해서.”

세네피스는 별 것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눈앞이 왜 계속 파랗게 보이지.”

고장나버린 차들을 도로에 그대로 놓아둔 채로, 코리온과 세네피스, 두 황자 일행은 마자리크의 호위를 받으며 온 길을 되돌아 분화구 부근 행궁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제네르는 5명의 중무장 기병들만 대동하고 산 아래 호드르 시 방향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제네르가 멀어지는 세네피스 일행의 뒤를 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혹시라도 제가 6시까지 못 가면 일단 먼저 떠나십시오.”

“알았네.”

마자리크도 그를 향해 휙 돌아서며 대답했다.

“통신이 안 되어서 하는 말인데 혹시라도 우리를 못 만나는 일이 생긴다면……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분화구 건너편에 있는 지진 측정소에서 만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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