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맥The Iron Vein-819화 (814/1,132)

< -- 819 회: 파트 3. FimbulWinter - 세 번째 겨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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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을 애써 가다듬은 네피가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근데 여기가 원래 지진이 잦은 곳이었나?”

“저기 화산이 있잖아요. 사화산이기는 해도 어쨌든 지각활동이 활발하다는 뜻이니 이 정도 미진(微震)이 이상할 건 없죠.”

윌더가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하지만 네피의 머릿속에 문제의 화산에 행궁이 있다는 것이 바로 떠올랐다.

“호드르 산인지 호들갑 산인지 저거 갑자기 뻥 하고 터지는 건 아니지?”

“아휴, 걱정 잡아매요. 수만 년은 활동이 없던 사화산이라니까요.”

윌더가 이상하리만큼 벌벌 떠는 네피의 걱정을 넌지시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내심 무안해진 네피도 더 이상 공포를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윌더의 말대로, 짧은 지진이 있고 30분이 가까워지도록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네피도 놀랐던 가슴을 가다듬었고, 지진으로 놀라 잠시 시끌시끌해졌던 광장도 다시 조금 전 같은 ‘좀비마을’ 분위기로 되돌아갔다.

그새 긴장도 풀리고, 다시금 무료함에 꾸벅꾸벅 졸고 있던 네피는 무장한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는 소리에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나른한 낮잠을 깨운 건 본가에서 함께 온 사복 차림의 이그나토 가 근위사관이었다.

주변을 얼른 확인한 그 근위사관이 네피의 귀에 대고 작게 말했다.

“저어, 행궁과 연락이 되지 않습니다.”

“엥? 무슨 말이야?”

네피가 얼른 눈가에서 잠을 쫓아내고 화산을 휙 돌아보았다.

“20분쯤 전에 차로 출발하셨다고 하는데 그 시간이면 이미 오셨어야 합니다. 할룩스로 연락을 해 보았는데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네피가 얼른 시계를 보았다. 이번에 올 일행에는 손녀 마리안은 물론이고 아내 마자리크도 함께 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눈이 휘둥그레진 네피에게 사관이 짧게 웃음을 보였다.

“크게 염려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화산지대라 지자기(地磁氣)가 불안정해서 가끔 통신장애가 있다고 합니다. 호위부대가 함께 오는 중이니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긴.”

네피가 일단은 표정을 가다듬으며 여전히 어수선한 광장을 빙 둘러보았다. 주 행사가 곧 시작될 예정인지, 진행을 맡은 청년들이 광장에 바쁘게 줄을 치고 사람들을 내보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뚱보 시장도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마에서 연신 땀을 뻘뻘 흘려가며 이 사람 저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작업 지시를 내리는 것 같았다.

“늦게 오는 편이, 아니 분위기도 영 거시기한 게 안 오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별반 볼 것도 없는데 괜히 얼굴도장이나 찍으려는 거 아냐.”

네피가 심드렁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그가 시내 곳곳에 풀어놓았던 사복 차림의 제후군 근위병들이 하나둘 속속 모여들어 결과를 전했다.

“별로 이상한 건 없습니다. 질서가 제대로 안 지켜지고는 있지만 딱히 수상쩍은 사람은 안 보입니다.”

“가문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황실에 대한 적대감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가문? 가문이 무슨 잘못이라고?”

네피는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혼란스러웠다. 그도 이곳 주민들이 이그나토 가에 불만이 많다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돈이 없다보니 그들이 안심하고 정착할 만큼의 충분한 지원을 해 주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지만 [개척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어려움]에 관해 몇 번이나 받았던 사전 교육, 이곳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그들이 쓴 서약서 따위는 이미 수십 년이 지나 잊혀진 내용들일 터였다.

곤경에 처한 이곳 이주민들에게 치안을 유지해 주고, 기반시설을 지어주고, 직업까지도 주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건 호드르 산 정상의 구름 속에 존재하는 ‘황실’이었다.

“그래, 뭐 이번에 올 손님은 황실 사람들이니까.”

네피가 쓴웃음을 삼키며 병사들에게 다시 각자의 위치로 가라고 손짓을 보냈다.

그 사이 광장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깨끗이 비워졌다. 여전히 싱글벙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뚱보 시장이 사람들이 훤해진 광장의 중앙에 나서며 손뼉을 짝짝 쳤다.

“자, 자!!! 첫 수확입니다! 방금 수확해 가져온 감자와 옥수수입니다!”

시장의 손짓을 받은 청년들이 인근 밭에서 갓 베어낸 옥수수와 흙도 채 마르지 않은 감자를 산처럼 엮은 수레를 끌고 광장에 모습을 나타냈다. 2년 넘게 굶주린 사람들 눈앞에 어마어마한 식량 더미가 나타나면서 지금까지 골목골목을 꽉 채우고 생기 없이 어슬렁대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제후이신 이그나토 가문에서 이번에 개척민들을 위해 무료로 제공해 주신 종자와 씨감자 덕분입니다!”

시장이 난데없이 네피와 윌더 경을 가리켰다. 생각지도 않게 쇼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윌더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지만 사방에서 쏟아지는 환호성에 얼떨결에 일어나 일단 인사를 올리고 자리에 도로 앉았다.

“이 모두가 제후가에서 여러분께 새 종자를 무료로 제공해 준 덕분입니다! 여러분들께선 절대 은혜를 잊지 마십시오!”

시장은 ‘제후가의 은혜’를 지겨울 만큼 반복하며 다시금 윌더를 가리켰다. 윌더가 난처한 표정으로 네피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박수 받은 게 기뻐야 하는데 어째 동물원 원숭이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왜일까요?”

그 사이, 수레가 차례대로 감자와 옥수수를 쏟아놓으면서 광장에 높은 산이 만들어졌다. 산처럼 쌓인 식량에 흥분한 사람들이 앞 사람들을 밀어내고 허우적대며 몰려들면서 힘없는 아이들, 노약자들이 넘어지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리기 시작했지만 이 와중에 남의 사정까지 챙겨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이거 어째 난장판이 되어가는 거 아냐?”

혼란을 보다 못한 네피가 오늘의 식순이 적힌 쪽지를 뒤적거렸다.

황실의 큰 손님이 늦어지고 있는 동안에도, 광장에서는 계속해서 갓 캐온 감자와 옥수수가 쌓여갔다.

“도시 인근 지주분들께서 첫 수확한 감자와 옥수수를 이번 축제를 위해 기부해 주셨습니다! 물론 저도 뜻을 같이 하며 함께 기부를 했고요. 이번에 모이신 주민 모두에게 돌아가기 충분한 양이니 첫 수확을 축하하는 뜻에서라도 꼭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그 사이, 방송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도시 곳곳에서 모두 쏟아져 나와 앞 다투어 광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평상시라도 공짜라는 말은 이성을 앗아가기 일쑤였지만 무려 2년이나 굶주릴 대로 굶주린 사람들의 앞에 공짜 음식을 던져놓았으니 앞 사람들을 거칠게 밀치고 지나가는 정도의 공격성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광장 주변을 순식간에 꽉 채우고 그 주변의 길까지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채웠다.

“질서! 질서를 지켜 주세요!”

갑작스런 혼란에 시장이 놀란 얼굴로 사람들에게 손을 저었다. 옥수수를 가져온 청년들이 급히 각목과 밧줄을 들어 중간에 벽을 쌓지 않았더라면 갓 가져온 옥수수와 감자 더미가 수많은 사람들이 짓밟혀죽는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을 판이었다.

“양은 충분하니 질서를 지키세요! 다 가져가실 수 있습니다!”

옥수수더미 앞에 선 시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군중을 서둘러 달랬다. 하지만 무려 2년 동안 부실한 배급식량만으로 어렵게 견디어 온 사람들 눈에 식량 더미는 사막의 달콤한 오아시스처럼 보였다. 그들은 앞을 막는 청년들의 어깨 너머로 거칠게 손을 뻗으며 저마다 무어라 소리를 질러댔다. 지금까지 지루하기는 해도 그럭저럭 즐겁게 벌어지던 축제장은 무료로 나눠주기로 한 식량이 갑작스레 역효과를 내면서 점점 더 큰 소란 속에 파묻혀갔다.

“기다리세요! 일단 식전행사부터 끝내고 사람들이 다 모이면 그때 가서 인원수에 따라 배분해 드리겠습니다! 다 가져가실 수 있으니 진정하세요! 제발 질서를…….”

시장이 소리를 지르며 주변을 안정시키려 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훨씬 격했다. 광장의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뒤에 도착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식량을 받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초조함이 번지기 시작했다. 2년을 굶주린 빈민들 앞에서 안면도 없는 남을 먼저 생각해 줄 만큼의 여유는 사치였다.

“이거 뭐 하자는 수작이야.”

무언가 불안정한 기미를 제일 먼저 읽어낸 건 ‘지진’ 이후 잔뜩 예민해진 네피였다.

“빌어먹을, 굶주려서 반쯤 미친 사람들 앞에서 뭐 하는 짓이야! 관공서에서 나눠주고 끝내지 왜 사람들 다 불러모아놓고 저래?”

광장의 소란을 보다 못한 네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뒷줄의 사람들이 앞으로 마구 밀치고 나오면서 처음의 질서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보다 못한 윌더도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단상의 마이크를 쥐고 시장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눈앞에서 식량을 본 굶주린 주민들의 붕괴가 훨씬 더 빨랐다.

“이크!”

윌더의 비명 비슷한 탄식이 터져나오면서 시장이 고용한 진행요원 청년들의 바리케이드 한쪽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졌다. 수천, 아니 광장 바깥에서 대기하던 사람들까지 합하면 그보다 더 될 인파가 감자와 옥수수 더미를 향해 실성한 듯이 몰려들었다.

“누가 좀 말려!”

네피가 고함을 질렀지만 혼란의 와중에 들리지도 않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짓밟히고 쓰러지는 것이 보였지만 아무도 통제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뚱땡이 시장 벨이 확성기를 내던지고 뒤뚱뒤뚱 몸을 피하는 모습도 보였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힘없는 몇은 압사하거나 큰 부상을 입었을 판이었다.

“식량이다!”

제일 먼저 달려든 힘 세고 재빠른 사람들이 감자, 옥수수를 마구 주머니에 쑤셔 넣고, 쏟아지건 말건 아랑곳없이 무작정 가슴에 끌어안았다. 머리를 좀 쓴다는 자들은 옷을 벗어서는 들고 가기도 어려울 만큼 쟁여들고 급히 뒤로 돌아섰다. 그 와중에 밀려 넘어지고, 바닥에 쏟아진 감자와 옥수수가 바닥에 짓밟히면서 누군가의 귀한 식량이 될 수도 있었을 작물들이 죽처럼 으깨어져 바닥에 굴렀다.

“야, 이 미친놈들아! 뭐 하는 짓이야!”

몇몇 양식 있는 사람들이 이성을 잃고 폭도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지만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힘없는 사람들은 덩치 큰 이웃에게 밀려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광장 바닥은 옥수수알과 깨진 감자들로 엉망이 되었다. 인파에 휩쓸려 바닥에 나뒹굴었던 사람들은 바닥에 흩어진 것들이나마 안타까운 얼굴로 줍기 시작했다.

“어, 엉?”

짓밟혀 깨진 감자와 옥수수를 모으던 사람들이 갑자기 웅성대기 시작했다. 몇몇은 경악을 하며 어렵게 주운 식량을 도로 바닥에 쏟아놓았다.

“이게 뭐야?”

식량을 갖고 도망을 치던 사람들 중 몇도 주춤거리며 멈춰서는 바닥을 둘러보았다. 무언가 이상한 것을 직감한 사람들이 곡물을 약탈하는 것도 잊은 채 하나 둘 자리에 멈췄다.

“어떻게 된 거냐고.”

수많은 사람들이 뜯어말리고, 확성기로 숱하게 고함을 질러도 잠잠해지지 않던 이들의 순간적인 광기가 갑작스런 침묵 속에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무슨 감자가 이렇냐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노인 하나가 두 손 가득 부서진 감자를 쳐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감자는 겉만 멀쩡할 뿐 속은 시커멓게 변색되어 마치 스펀지처럼 물컹거렸다. 물크러진 감자를 꽉 움켜쥔 노인의 손가락 사이로 악취가 풍기는 물이 주르르 흘렀다.

“맙소사.”

누군가 서둘러 옥수수를 까고 알을 떼내어서는 이로 깨물어 보았다.

“이런, 이건 아냐.”

사람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서로 마주보았다. 옥수수 알맹이의 안쪽도 성긴 섬유만 이리저리 얽혀있을 뿐 텅 비어있었다. 충격을 받은 사람들이 앞 다투어 자신이 가져간 감자와 옥수수를 쪼개 보았지만 모두 똑같았다.

방금 전까지도 전쟁터나 다름없던 광장 주변에 갑자기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비켜! 비켜 봐! 뭐 어떻게 된 거야?”

주민 대표들, 이번 수확물을 기증한 대지주들, 단상에 있던 윌더까지 사람들을 헤치고 서둘러 광장 중간으로 달려왔다. 그들도 감자와 옥수수를 직접 까 보았지만 어디서 꺼낸 것도 다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까지도 괜찮았는데…….”

나름대로 크게 선행을 베풀고 흐뭇해하던 지주들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서로 마주보았다.

“이거 맞아? 우리 밭에서 나온 거 맞냐고! 아침에 수확할 때까지도 멀쩡했다고!”

충격을 받았기는 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식량 주변에 빼곡하던 빈민들도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가문을 대표해 와 있던 윌더도 속이 텅 비어있는 곡물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채 바들바들 떨고만 있었다.

잠시 넋을 놓았던 굶주린 빈민들의 입에서 마치 신음 같은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말도 안 돼……이제 어떻게 살라고…….”

지난 기근 속에서도 어렵게 그들을 지탱해 온 마지막 희망이 썩어 문드러진 곡물더미 앞에서 누군가에게는 절망감으로,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분노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이들을 희망에 들뜨게 했던 입만 살은 돼지 시장은 어디로 갔는지 그새 보이지도 않았다.

“2년을 굶었는데…….”

패닉에 빠진 빈민들이 끌어안고 있던 감자와 옥수수를 바닥에 쏟아놓으며 바닥에 주저앉기도 했고, 몇몇 사람들은 웅크려 울기까지 했다.

그때, 어딘가에서 성난 고함이 들려왔다.

“저 따위 옥수수를 기르라고 준 게 대체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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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편수가 너무 많아져서 이전처럼 여기에 이어쓸지, 아니면 3부만 새로 떼어내 별도 소설란을 낼지 고민중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쌓아 온 추천수와 조회수가 아까와서 그냥 이어쓰고 있었습니다. ^^;;)

지금은 편수가 너무 많아져서 처음 시작하시는 분들이 공포(?)에 떠시는 것 같네요.

어느 편이 나을지 생각을 좀 해 보고 다음편을 올리기 전에 공지를 올리겠습니다. 별도 공지가 없으면 지금처럼 이어쓰는 것이고요..... ^^ 사실 3부는 1부보다 짧은데 이제와 굳이 나눌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

혹시 더 좋은 생각 올려주시면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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