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13 회: [3부] 파트2. 작은 여신의 무지개빛 눈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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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나를 놔둔 채 막 몸을 일으켜 도망치려던 카렐은 조금 전 바닥에 쏟아진 책상 물건들 중에서 [타리프의 노트]를 발견하고는 얼른 집어 품에 감추었다. 그때, 노트가 있던 밑에서 웬 이상한 빛이 보였다.
“음?”
어둠 속에서 내뿜는 청색 광채가 카렐에게는 어딘지 익숙했다. 그는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빛을 내고 있는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병 하나를 덥석 집어 일단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씨발, 그, 그놈 죽었어? 그놈 어딨어? 학, 학.”
바깥 사정을 못 보는 나딘이 캐비넷 위로 팔을 내밀고 휘둘러대며 무언가 걸린 것 같이 걸걸해진 소리로 짜증을 냈다. 가슴이 깔려 숨이 절반 막혀있다 보니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어려웠다.
“그놈들 어딨냐고!”
병사 둘과 공무원 따위는 손쉬운 사냥감이리라는 그의 섣부른 예상과는 정반대로, 4명의 용역들은 이미 까무러져 쓰러져 있었고, 이 무기의 위력을 아는 이곳의 작업자들은 대부분 밖으로 도망을 쳤고, 몇 안 되는 사람들만 겁에 질려 사방에 흩어진 채 땅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벌벌 떨고 있었다.
“뭐야? 아직 살았어?”
무기에 나타난 붉은 점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본 나딘이 또다시 자신의 무기를 난사했지만 앞도 못 보는 상태에서 그 빠른 적을 잡는 건 분명 무모한 선택이었다. 카렐과 자이납, 루스탐은 나딘의 과한 욕심을 놀리듯 이미 철문 너머로 달아나고 있었다.
“학, 학.”
여전히 구석에 쓰러져 있던 이디나는 이마를 더듬으며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천천히 뒤로 젖혔다. 그 와중에도 나딘은 여전히 소리를 질러대며 사방에 무기를 난사하고 있었다.
“멍청한 놈, 지랄하고 있군.”
그는 자신을 ‘소심하고 겁 많은 여자’로만 아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절대 말하지 않는 욕을 입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는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적’인 자신을 구해 주었던 그 덩치 큰 병사의 눈빛을 잠시 떠올리며 문가를 돌아보았지만 이미 그 일행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이디나는 여전히 캐비넷 밑에서 버둥대고 있는 나딘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불이 모두 꺼져 잘 보이지는 않는 와중에 캐비넷과 책상을 밀어내려 버둥거리는 실루엣만은 희미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바닥에 엎드려 피해 있던 누군가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다 도망간 것 같습니다.”
“뭐?”
여전히 끓는 나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보다 목소리가 훨씬 작아진 것을 보아 가슴 위의 캐비넷 때문에 힘이 빠진 모양이었다.
“제, 젠장, 여길 본 놈들을 내, 내보낸 거냐.”
“별반 본 것도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내보내?”
나딘이 계속 으르렁거렸다. 그의 난동이 끝나자 비로소 안도한 작업자들이 랜턴을 하나 어렵게 찾아내서 이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부장님, 여기 계십니까?”
그들이 불빛에 의존해 어둠 속에서 제일 먼저 찾은 건 그때까지도 가구 밑에 깔려 버둥대고 있던 나딘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사람들 몇이 그를 깔아뭉개고 있는 캐비넷과 책상을 힘껏 치워냈다. 하지만 다리와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자리에서 어기적거리다 말고 도로 주저앉고 말았다.
“부축해 드릴까요?”
“필요 없어, 군인들 더 올지도 모르니 빨리 여기나 치워!”
그는 무거운 캐비넷에서 풀려나기가 무섭게 작업자들에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군인들 돌아오기 전에 다 치우라고! 빨리! 아무 데나 가져가서 안 보이게 하라고! 빨리 움직여!”
“이디나 과장님을 찾아야 하는데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물건부터 치우라고!”
나딘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작업자들에게 중요한 물품들을 가리키며 씩씩거렸다. 명령을 받은 연구원들, 작업자들이 이곳에 남은 많지 않은 서류들과 중요한 기자재들을 하나씩 들고 밖으로 사라졌고 이 넓고 어두운 공간 안에는 나딘과 이디나, 이 어색한 오누이 둘만 남아있었다.
“제기랄, 아버지한테 뭐라 말씀드리지.”
나딘이 벽을 짚고 억지로 일어나며 입에 고인 피를 퉤 뱉어냈다.
“이디나 어딨냐? 빨리 대답해!”
나딘이 짜증을 냈다. 부러진 발목과 다리 때문에 서 있기도 버거웠지만 군인들이 곧 들이닥칠 판국에 머뭇거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뭐 하냐! 대답하라고!”
씩씩대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딘은 자신의 책상이 있던 곳의 난장판 뒤에서 들려오는 낮은 신음 소리를 들었다.
“거기서 뭐 해?”
쇠막대를 짚고 어렵게 중심을 잡은 나딘은 소리가 난 곳으로 비틀비틀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오발에 맞아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이디나를 발견했지만 별다른 사과도, 괜찮냐는 물음 한 마디도 던지지 않았다.
“멍청하게, 피하지도 않고.”
나딘은 피칠갑이 되어 떨고 있는 이디나의 얼굴에 랜턴을 똑바로 비추었다. 카렐의 머리띠로 가리고는 있었지만 이디나의 이마 한쪽은 완전히 쪼개져 뼈가 드러나 있었다. 상처 크기로 보아서는 죽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쓰러진 이디나 주변 바닥은 이미 피로 젖어 있었다.
“비실거리면서 병신 짓은 아버지 앞에서나 해. 당장 일어나서 따라와.”
그는 큰 부상을 입고 쓰러진 여동생을 매정하게 외면하며 어둠 속으로 혼자 출입문으로 비틀비틀 걸었다.
“못 움직이면 의사 불러올 때까지 가만히 있던가.”
나딘도 입으로는 이리 말했지만 의사를 부를 맘은 없었다. 혈육이며 미래의 경쟁자―별 쓸모도 없고, 그렇다고 2세를 만들 배우자로 쓸 만큼의 매력도 없는―를 조용히 제거해 버릴 수 있는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바닥에 누워 꼼짝도 않던 이디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의 옆에 떨어져 있던 비상용 유선 할룩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나딘이 이것으로 구급대를 부를 수 있다는 것도 몰라서 그냥 가 버린 것은 아닐 터였다.
‘훗.’
지금까지 마치 죽어가는 사람처럼 흐릿하게 열려 있던 그의 눈에서 반짝이는 안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천천히 고개를 치켜든 이디나는 어둠 속에서 문으로 향하는 오빠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갑자기 음산한 눈웃음을 지었다.
다리가 불편한 나딘은 막대를 짚은 채 혼자 비틀비틀 문으로 걸었다. 별 생각 없이 [문 열림] 버튼을 눌렀던 그는 모터 헛도는 소리에 위를 올려보았다. 이 단단한 철문은 문은 원래 전동장치로 잠기고 열리도록 되어있지만 조금 전 카렐이 억지로 밀고 들어오면서 어디선가 고장이 난 모양이었다.
“젠장. 열어놓고나 갈 것이지.”
나딘은 먼저 나가버린 연구원과 작업자들을 탓하며 이 무거운 철문을 힘껏 당겨 열었다.
“우읍!”
문을 열려 힘을 준 순간, 무언가에 뒤축을 채인 나딘은 바로 중심을 잃고 짧게 비명을 질렀다. 가뜩이나 불편한 다리로 어렵게 서 있던 그는 철문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치고는 벌렁 엎어지고 말았다.
“뭐야, 이거?”
얼떨떨해진 그는 무엇 때문에 넘어졌는지도 알지 못했다. 반쯤 열린 철문 사이에 쓰러졌던 그는 오른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며 왼손은 떨어뜨린 랜턴을 다시 집으려 바닥을 더듬었다. 하지만 무언가 육중한 것이 막 몸을 일으키려는 그의 뒷덜미를 꽉 내리눌렀다. 오른팔의 힘이 확 풀려버린 나딘은 철문 사이, 땅바닥에 볼썽사납게 코를 처박고 말았다.
“뭐, 뭐냐고…….”
그는 누운 채로 몸을 돌려 위를 쳐다보려 했지만 그 순간 철문이 꽉 닫히며 맹수의 이빨처럼 그의 목과 가슴을 꽉 물어버렸다. 숨통을 짓누르는 엄청난 압박감에 나딘이 입을 쩍 벌리며 눈을 크게 부릅떴다.
“우, 우우우욱.”
목을 부러뜨릴 것 같은 고통에 나딘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버둥거렸다. 그를 넘어뜨린 어둠 속 검은 그림자가 철문에 등을 비스듬히 기댄 채 빈정거렸다.
“멍청하다고 했소? 오라버니?”
문틈에 단단히 끼어버린 나딘에게는 평소 그리도 무시하던 여동생의 음산한 목소리, 등을 밟아 누르는 체중만 느껴질 뿐이었다.
“이, 이디…….”
나딘은 허리춤의 무기를 더듬거리며 빼들려 했지만 이디나가 손등을 발로 지그시 밟으면서 더 이상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너, 어떻게…….”
그는 죽을 만큼 중상을 입은 여동생이 어떻게 자신을 따라와 이렇게 세게 발길질까지 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어떻게 자신의 움직임을 귀신같이 볼 수 있는지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보이는 게 다는 아니랍니다, 내 오라버니, 나딘 빈 다하카르.”
이디나가 다리에 힘을 주어 문을 체중으로 힘껏 밀었다.
“내게도 다하카르의 피가 흐른다는 걸 모르시나요.”
“아, 아아악.”
나딘의 붉게 핏발 선 눈동자, 버둥거리던 손가락 마디에 힘이 꽉 들어갔다.
“카, 캬아악.”
나딘은 도움을 구하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문틈에 끼인 목구멍에서는 변변히 소리도 낼 수가 없었다. 엄청난 압박에 눌리면서 숨이 막히고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고통에 그의 온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숨이 막힌 나딘이 손등을 밟은 이디나의 발을 치워내려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도 않았다.
“신의 곁에서 다시 뵙죠.”
나딘의 목에서 우드득 하며 소름끼치는 뼈 부러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이디나의 발을 치워내려던 그의 마지막 발악도 꺼지는 촛불처럼 조금씩 희미해졌다.
무표정하게 문에서 돌아선 이디나는 처음 쓰러졌던 자리―자신의 핏자국이 바닥에 흥건하게 묻어 있는―에 조금 전처럼 편안히 드러누웠다. 그리고는 옆에 떨어져 있던 유선 할룩스로 쿠마르의 코드를 눌렀다. 잠시 후, 지상의 주기장에 있던 쿠마르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디나 님?”
치안군들과 입씨름을 하느라 정신이 없던 쿠마르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이디나의 모습에 기겁을 하며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방금 나딘 님께서 내려가시고 무슨 이상한 소리가 났는데…….”
“빨리, 빨리 누구 좀 보내 줘. 학, 학. 군인들 돌아오기 전에 나하고 나딘 오라버니 좀 꺼내달라고. 오라버니한테도 무언가 일이 생긴 것 같아.”
이디나가 당장 숨이 끊어질 사람처럼 죽는 소리를 하며 최대한 고통스런 신음을 냈다.
“알겠습니다! 바로 보내드릴 테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십시오!”
대신관의 딸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에 놀라고 당황한 쿠마르가 어디론가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쿠마르의 반응을 확인한 이디나는 힘없이 바닥에 몸을 펴고 누우며 고개를 젖혔다.
그때, 이디나는 자신의 피 냄새 사이로 풍겨오는 무언가 세련된 향기를 느꼈다.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어색한 향취는 얼굴을 감싼 머리띠에서 오고 있었다.
‘고작 치안군 주제에.’
이디나는 이런 건방진 생각으로 그 병사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 했다. 자신을 안았던 그 짧은 순간, 그 병사에게서 나던 향수 내음은 그가 알기에 ‘고작 치안군 병사 주제에’ 쓰기는 너무 고급스러운 것 같았다.
“기껏 병사 주제에 감히…….”
이디나가 혼자 중얼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머리띠를 다시 만지작거렸다. 희한하게도 자신의 피비린내보다 향수 냄새, 혹은 그 병사의 체취가 더 강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갱도 밖에서 누군가 몰려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끼며 이디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섞여 있는 것을 보아 조금 전 나딘이 내보냈던 작업자들과 연구원들이 연락을 받고 허둥지둥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신께서 날 선택하신 게지.”
이디나는 피투성이 바닥에 누운 채로 혼자 히죽거리며 웃었다.
“맙소사! 문이 오작동한 거야?”
“제기랄! 축이 부러졌어!”
문가에 도착한 사람들이 목이 끼어 죽어 있는 나딘의 시체를 발견하고는 너도나도 웅성대기 시작했다. 어두운 공간 안에 랜턴 불빛이 이리저리 오가는 것을 보았지만 이디나는 아무 것도 모른 척 원래 자리에 그대로 누워 눈을 감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디나 과장님?”
랜턴을 들고 실내를 뒤지던 사람들은 나딘의 책상이 있던 자리에 쓰러져 낮게 신음하고 있던 이디나를 그제야 발견했다.
“나딘, 나딘 부장은?”
이디나가 짐짓 걱정스런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연구원들은 정확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자신들이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는 그들은 나딘을 계속 찾으며 연기를 하는 그에게 ‘별 일 없다’며 빤한 거짓을 말할 뿐이었다.
연구원의 등에 업힌 채 좌우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누군가의 가운으로 얼굴을 가린 채 문가에 쓰러져 있는 오빠의 시체를 보았다. 대신관 아스탈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장남 나딘 빈 다하카르의 30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삶의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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