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807 회: [3부] 파트2. 작은 여신의 무지개빛 눈물 -- >
.
.
.
“총무과장 이디나라고 합니다. 절 따라오시죠.”
이디나가 앞장서서 일행을 안내했다. 그리고 다른 조합원들처럼 약간 구겨진 조합원 조끼에 머리띠까지 제대로 갖춰 맨 코나 역시도 그 누구의 의심도 받지 않고 용역들 사이를 여유롭게 가로질러 문제의 [57번 광산 컴플렉스]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디나는 관리들과 조합 대표들을 큰 승합차에 태우고 컴플렉스 안으로 안내했다. 그리고 광산 실사를 할 실사팀 사람들도 2, 3명씩 팀을 이루어 이곳 직원들의 안내를 받아 컴플렉스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뭐 특별할 건 없는데…….’
코나는 눈에 끼고 있는 카메라를 통해 광산 컴플렉스들의 주변 광경을 차례차례 기록에 담았다. 밖에서 보았던 대로 광산의 규모는 웬만한 작은 도시 못지않았다. 이곳은 평평한 황무지에 수십 개의 크고 작은 터널을 수직으로 뚫어 만든 갱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컴플렉스 내, 그리고 주변에는 수십 개의 보석 혹은 금속을 캐내는 수십 개의 광산이 흩어져 있었다.
그들 중 컴플렉스 내에 있는 큰 갱들에는 거대한 엔진이 달린 리프트가 요란스런 소음을 내며 원석과 폐석을 지하에서 쉼 없이 끌어올려 주변에 쏟아 내놓는 중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수직 갱도에는 지하와 연결된 엘리베이터, 철제 계단이 광부와 종사자들을 계속 위아래로 실어 나르는 모습도 보였다.
이곳의 지상에서 보이는 건 기계장치와 출입하는 구멍 뿐이지만 지하 깊은 곳에는 거미줄처럼 얽힌 갱도들이 미로를 이루고 있을 터였다. 지상에는 각 갱도에서 나온 원석과 금속을 분류, 가공, 정제하는 공장까지 모두 갖춰져 이 한 곳에서 완성된 보석 혹은 금속괴를 만들어내는, 말 그대로 대규모 단지였다.
‘이 정도면 황실 금고가 안 부럽겠군.’
코나는 주변을 재차 둘러보았다. 전형적인 대형 광산의 모습이었지만 한 가지만은 독특했다. 조금 호젓한 곳에는 직원들의 공동주택이 보였고, 갖은 상점이나 편의시설들이 있는 복합건물도 보였다.
그때, 그의 재빠른 눈에 든 건 몇몇 집에서 내놓은 가구들, 살림살이였다. 어딘가 이사라도 가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집 앞에 큰 상자, 가구 같은 것들을 내놓은 집이 이상하리만큼 많았다.
‘이놈들 내빼려고 하나.’
코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머리에 담았던 도면을 떠올렸다. 도면에서는 주기장이 컴플렉스 중앙에 있었지만 일행이 탄 차는 그곳을 일부러 빙 돌아서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직원 숙소 쪽에서 큰 짐을 실은 차 한 대가 주기장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코나는 허리에 찬 할룩스로 [놈들이 주기장을 통해 무언가 빼돌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라는 메시지를 슬쩍 보냈다.
컴플렉스 사무동에 막 도착한 일행들이 여기저기 끼리끼리 모여 웅성거리는 가운데 잠시 몇 분이 흘러갔다.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다들 모인 건…….”
주변이 정리되고 난 후,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노에누스 가 당국에서 나온 관리였다.
“알다시피 당국에서는 조합이나 컴플렉스의 개별 거래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분쟁이 커질 경우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부득이하게 중재에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 일에 관해 우리 측에서 준비한 해명자료입니다. 참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디나가 관리들과 조합 대표들의 책상 위에 자료를 한 부씩 놓아주었다.
“조합의 요구조건을 우리 측에서도 십분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저희 수송선으로 이미 반입한 생필품 재고가 많이 있습니다. 그 물품들을 모두 소비할 기간 동안은 운송조합을 통한 물품 반입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이후에는 조합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요?”
별 생각 없이 자료를 펼쳐보았던 관리가 움찔하며 얼른 파일을 덮었다.
“흠흠.”
4명의 관리들이 당혹스런 표정으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물론, 열흘 이후에는 가능합니다.
이디나가 관리들과 조합 대표들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마찬가지로 자료를 들었던 코나는 파일에 끼워져 있는 1천 골드짜리 무기명 수표에 깜짝 놀란 척 무심결에 코와 귀를 만지작거렸다.
아마 관리의 파일 속에도 비슷한 수표―액수는 이보다 훨씬 크겠지만―이 들어있을 터였다.
“그 이후에는 이전처럼 물품 구매를 재개할 테니 조합원들을 설득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이번 일만 문제없이 해결되면 저희도 보일 수 있는 성의는 최대한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이디나가 ‘성의’라는 말에 최대한 힘을 주어 말했다. 그의 눈짓을 받은 노에누스 가 관리는 다시 파일을 슬쩍 열고 금액을 확인했다. 그리고는 조합 대표들을 돌아보며 기이한 웃음을 지었다.
“그 정도면 컴플렉스 측에서도 나름대로 꽤 성의를 보인 것 같지 않소?”
“아니 협상은 시작하기도 전에…….”
관리가 속보이게 컴플렉스 편을 들자 몇몇 조합 대표들이 얼굴을 찡그렸지만 이번엔 조합장이 얼른 그들을 저지하며 입을 열었다.
“날짜만 약속해 준다면 이 정도에서 우리도 물러나는 게 맞지.”
“그동안의 영업 손해는 어쩝니까? 그리고 이런 선례를 막기 위해서라도 일방적인 계약 해제에 대한 보상 정도는 받아야…….”
‘잘 싸운다, 저 돈버러지들.’
코나는 수표가 끼워진 파일을 무표정하게 챙겨 가방에 넣고는 대표들간의 내분을 아무 말 없이 구경만 하고 있었다. 잠시 시끌시끌했던 실내는 열린 창 너머에서 들려온 갑작스런 고함소리, 비명과 무언가 무너지는 굉음에 갑자기 적막에 빠져들었다.
“무슨 소리야?”
잠시 바싹 얼어붙었던 사람들은 자신에게는 일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자, 자, 괜찮습니다. 그냥 앉아계십시오.”
이 자리에서 제일 놀란 건 이 모임을 책임진 이디나였다.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고 일단 사람들을 안정시킨 그는 창가에 달려나가 몸을 내밀어 보았다. 그리고 평소 욕이라고는 거의 내뱉어 본 일 없는 그의 입에서 이 한 마디가 새어나왔다.
“그 멍청이 새끼가 무슨 짓을 한 거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조금 전까지 조용하던 컴플렉스 출입문 쪽에서 맹렬한 불꽃, 함성, 비명과 함께 시커먼 연기가 무럭무럭 솟구치고 있었다.
“거래처 있어서 안 산다니까요.”
시위인지, 모임인지에 바쁜 조합원들은 브로슈어를 들고 기웃기웃 돌아다니는 이 키 큰 ‘투아렉 상사 사장 겸 영업부장’에게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영업능력 빵점인 사장님의 브로슈어보다 그들에게 더 반가운 건 ‘직원’ 루스탐이 접대용으로 가져온 뜨거운 코코아였다. 살을 에는 찬바람 속에서 시위 같지도 않은 시위를 하며 덜덜 떨고 있던 거친 조합원들은 공짜라며 내놓는 뜨거운 코코아와 비스킷 더미 주변에 하나 둘 모여들어 시끄럽게 잡담을 떠들어댔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말을 걸려다 내내 퇴짜만 맞던 ‘사장님’ 카렐이 비로소 그들 틈새에 끼어들며 조심스레 질문을 시작했다.
“누구 여기 안에 들어가 본 일 있는 사람 있수?”
“글쎄, 전에 두어 번 왔었지만 딱히 별 것 없던데. 광산이 다 그렇지 뭐.”
“근데도 이 빌어먹을 광산은 그만두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누군가의 말에 동료 조합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아졌다. 운송조합원 대부분은 한때 광산에서 일했던 광부 출신들이었다. 이들도 오랜 기간 막장에서 거친 일을 감내해 가며 자기 차와 자금, 영업구역을 마련하고 자수성가한 자영업자들이다보니 웬만한 광산 사정은 광부들보다도 더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광산이 어디 있어? 1년이면 절반이 포기하고 나가는 게 광산인데?”
한 조합원이 코코아를 홀짝거리며 냉큼 되물었다.
“글쎄, 듣자하니 근무조건이 굉장히 좋은가봐. 봉급도 두둑하고 복지도 잘 되어있고. 어설프게 사업 못 하는 운송업자보다 여기 종업원이 되는 게 훨씬 나을 거라고 그러던데?”
“그래 봤자 돌가루 먹는 광산이지.”
“서부에서 사막 모래가루 처먹고 덤으로 무시까지 당하는 것보다야 낫지. 최소한 북부에서는 상전 노릇하는 유학자 샌님들은 별로 없잖아.”
유학자들을 비꼬는 말에 조합원들이 먹던 비스킷을 사방으로 튀기며 웃음을 터뜨렸다.
“듣자하니 여기 광부 초임이 1년에 3천 골드가 넘는다던데? 금액은 적은 것 같아도 일가족 생활비에 교육비니 복지까지 컴플렉스에서 몽땅 부담한다고 하니까 완전 쌩돈 아냐.”
“정말? 경기도 안 좋은데 나도 차 팔아버리고 도로 광부로 취직할까?”
조금 전의 그 초보 조합원이 새 코코아를 마시며 물었다. 그런 그를 쳐다보며 다른 조합원이 쯧쯧거렸다.
“꿈 깨, 여기 직원은 광부하고 용역들까지 모조리 본사에서 따로 뽑는다니까. 다른 컴플렉스처럼 광부조합에서 데려오는 게 아니라고. 여긴 광부‘님’들이야. 다른 데하고는 달라.”
카렐은 자신이 궁금해 하는 내용이 흘러나오자 잔뜩 귀를 기울이며 조심조심 물었다.
“저 젊은 용역들도 다른 데서 왔나요? 혹시 어디 출신들인지 알아요?”
“글쎄, 잘은 몰라도 수베르 어디라던가? 지난번에 용역 놈들 떠드는 거 들어보니 수베르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던걸. 나이들도 굉장히 어려 보이던데 이 먼 타향에서 솔직히 좀 안되긴 했지.”
“수베르?”
카렐의 눈이 갑자기 커졌다. 서부 수베르면 황실군의 사령부, 그리고 시라즈 여단이 있는, 제2황제령과도 가까운 곳이었다.
‘이런, 등잔 밑이 어두웠나?’
그 때, 카렐의 할룩스에 [놈들이 주기장을 통해 도망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둘러야겠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카렐은 옆에 서 있던 루스탐을 힐끔 돌아보았다.
“알겠습니다.”
눈짓을 받은 루스탐은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조합원들이 타고 온 차들이 주차된 쪽으로 슬쩍 모습을 감추었다.
“그래도 저렇게 기고만장한 꼴은 보기 싫어.”
조합원 하나가 여전히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는 정문 앞 용역들을 가리켰다. 북부 컴플렉스의 자치경찰 격인 소위 ‘용역’들은 대개 힘 좀 쓴다는 퇴역군인이나 건달들에게 옷만 입혀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곳의 젊은 용역들은 정규군 못지않게, 아니 정규군보다 한술 더 뜨는 무서운 살기와 조직력을 보이며 정문 앞에 자로 잰 듯 도열해 있었다.
“저놈들 꼬나보는 게 더럽게 기분 나빠.”
덩치 큰 조합원이 그들 보라는 듯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시위할 때 제일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아 조합 간부인 듯 보였다.
“눈빛이 그냥 보통 건달들은 아닌 것 같아. 뭐랄까……, 에이, 모르겠다. 어쨌든 뭐에 약간 미친놈들 같아 보여.”
카렐이 그들의 대화에 다시 슬며시 끼어들었다.
“서 있는 폼이 어째 군사훈련 제대로 받은 것 같지 않나요? 다리 벌린 폭이나 팔의 둔 자세도 그렇고…….”
“혹시 군대 나왔수?”
조금 전의 간부 조합원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카렐이 기다렸다는 듯 희색을 띠며 대답했다.
“지난 전쟁 때 북부보병 1군단이었수다. 댁은?”
“이런, 옛 전우였구먼, 나도 탄현성에서 근위대 전차 때려 부수는 데 일조했지. 허허 반갑수. 내 조합 1지부장 하투샤라고 하오. 전쟁 끝나고 황실군에 말뚝 박을까 하다가 마누라 등쌀에 옷 벗었지.”
“마라부트 투아렉이요. 난 10대대였는데 그쪽은? 나도 20년 전에 옷 벗고 사업 시작했어요. 그때 탄현성에서 대단하지 않았소?”
카렐은 옛 무용담으로 입이 근질근질해 보이는 이 사내를 슬쩍 자극했다. 조금 전까지도 장사치 취급하며 관심도 안 두던 그 간부는 같은 군단 전우였다는 말에 표정을 돌변하며 손을 불쑥 내밀었다.
“10대대? 에이, 거긴 전차 첫 돌격할 때 후열에 있었잖아. 1열에 있던 건 우리 17대대였어. 빌어먹을 전차 때려잡느라 대대 절반이 죽었다니까. 안 그러냐고.”
“하아, 17대대 대단했지요. 냇가에서 근위대 전차 사정없이 뒤집어엎는데 후열에서 보기도 어찌나 통쾌하던지.”
카렐은 조합 지부장을 계속 띄워주며 말을 유도했다. 신이 난 그는 입에서 침을 튀겨가며 반쯤 과장이 뒤섞인 옛 무용담을 떠들어댔다.
“뒤에서 전차들이 우르릉거리면서 쫓아오는데 신참 놈들은 도망치다 갑옷에 오줌을 지린 놈들까지 있었지 뭐야. 냇가까지 왔을 때는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으, 으악!”
어디선가 들려온 난데없는 비명에 그때까지도 열변을 토하던 지부장과 동료 조합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뭔데? 무슨 일이야?”
군데군데 모닥불을 쬐며 모여 있던 수많은 조합원들이 사방에서 하나 둘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난 곳은 이들이 타고 온 차들이 줄줄이 세워져있던 곳이었다.
“뭐야?”
몇몇 사람들이 놀라 입을 가렸다. 차 사이에서 비틀비틀 나타난 조합원은 손과 조끼자락이 온통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무슨 일이야!”
조금 전의 하투샤와 다른 조합원들 십여 명이 그 조합원에게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 조합원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내보이며 차 쪽을 가리켰다.
“주, 죽었어, 죽어 있었다고!”
“누가? 누가 죽어?”
하투샤가 그 조합원의 멱살을 붙들었다.
“정말이야, 죽어 있었어. 누가 그랬는지…….”
그 조합원이 가리킨 곳으로 달려갔던 하투샤는 누구에게 맞았는지 얼굴이 완전히 짓뭉개진 채 죽어 있는 누군가의 시체를 발견했다.
“이런, 맙소사. 이게 누구야?”
당황한 하투샤가 누구의 시체인지 확인하려 했지만 얼굴이 완전히 함몰되고 짓이겨져 신원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다만 몸에 걸치고 있는 푸른 조끼를 보아 조합원 중 하나로 짐작될 뿐이었다.
“누군지 알아?”
하투샤가 뒤따라온 동료에게 물었지만 그들도 경악을 하며 뒷걸음치기만 할 뿐 누군지는 알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저 꼴인데 누군지 어떻게 알아.”
충격을 받은 조합원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가리며 소리를 질렀다.
++++++++++++++++++++++++++++++++++++++++++
혈맥 The Iron Vein 팬카페 : http://cafe.daum.net/TheIronVein
The Iron Vein 개인지 구매사이트 : http://vein.zi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