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90 회: [3부] 파트1. 인동초 향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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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에 허둥지둥 들어선 루스탐은 문이 닫히기 직전, 누군가의 큰 손이 문 사이를 휙 밀고 들어오자 기겁을 했다.
“잠깐.”
“흐음, 대, 대공 각하. 이건 황상 침소인 150층으로 가는 것이온데 외부인은…….”
“타려는 게 아냐.”
페로의 짜증스런 반응에 당황한 루스탐이 헛기침을 하며 얼른 주변을 둘러보았다. 엘리베이터 문을 붙들고 억지로 멈춰 세운 페로는 이 평민 청년의 옷깃을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청년의 옷깃에는 황제를 바로 곁에서 모시는 측근 내관 ‘상선’을 뜻하는 깃털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네 어쩌다 상선 내관으로 돌아왔느냐?”
페로의 짜증 섞인 물음에 루스탐이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상께서 부름을 주셔서 사흘 전에 돌아왔습니다.”
루스탐도 이 거물이 자신을 이렇게 매번 불쾌하다는 시선으로 보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이 남자는 뒤로 손을 써 황제 주변 시종과 내관들을 모조리 ‘작고 못생긴’ 남녀들로 갈아치웠지만―황제도 이런 그의 심술을 ‘알면서도 눈 감아 주었고’― 이번에 온 이 젊은이는 대공인 그도 함부로 손대기 껄끄러운 ‘공신의 외아들’ 이었다.
“지금껏 에키트 보병대에 잘 있지 않았느냐? 보병대에는 언제 돌아갈 참이냐?”
페로는 안 돌아가면 때려죽이겠다는 눈빛으로 청년을 노려보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게 뻔뻔스러웠다.
“황실군 근무는 군사학교 졸업생의 의무입니다. 상께서 소인이 상선으로 있기를 원하시니 돌아가라 따로 하명하실 때까지는 내관으로 머물 참이옵니다.”
원하는 대답에서 대놓고 거꾸로 가 버리자 페로가 다시 눈을 흘겼다. 그가 이 청년을 싫어하는 딱히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황제와 체격이 맞을 정도로 크고’ 제법 잘생긴 남자라는 사실 하나였다.
페로는 이 정도에서 루스탐에 대한 심술을 일단 접기로 했다. 지금의 그에게는 이 평민 내관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옥체는 어떠신가?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거냐?”
“예?”
“속일 생각 마라. 지금 오후시간이다. 150층 침소에 드실 때가 아니라고. 상께서 수심에 잠겨 못 나오신 것이라면 집무실에 계셔야 정상 아니냐? 그런데 왜 침소로 가는 거냐?”
이 남자의 눈썰미에 질려버린 루스탐은 페로 주변에 다른 누가 없는지를 재빨리 살피고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어젯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하셨습니다. 지난번 크낙스 공주께 있은 일로 이미 크게 상심하셨던 터라…… 그동안 과로가 많이 누적되었던 것 같습니다.”
“고작 과로 때문에 막내아들의 하관에도 못 나오셨다는 말을 믿으라고?”
루스탐의 속 보이는 대답에 페로가 버럭 화를 냈다. 루스탐이 얼른 머리를 조아리며 한 마디 짧게 덧붙였다.
“피곤을 못 이기시고 잠시 낮잠을 청하셨는데 그때 발작이…….”
‘발작’이라는 말에 페로의 낯빛에서 핏기가 싹 사라졌다. 그는 문을 짚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천천히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너머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 이 강건한 남자의 모습과 놀란 얼굴로 몰려드는 페로 가디언들의 고함이 메아리치며 들려왔다.
“후우.”
궁지에서 벗어난 루스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목적 층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부저음과 함께 문이 열렸지만 평소의 분주하던 150층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오늘은 복도를 돌아다니는 시녀와 시종들도 보이지 않았고 구석구석 선 가디언들만 사나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말이 아니군.”
루스탐은 그들 사이를 재빨리 가로질러 제일 안쪽의 황제 침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침소 문 앞을 지키는 가디언들 사이를 지나 침소에 성큼 발을 들여놓았다.
“쉿.”
문가에 있던 시종장이 발소리를 요란스레 내며 뛰어든 이 청년에게 재빨리 손짓을 보냈다.
“방금 잠드셨다.”
“황송하옵니다.”
루스탐은 문가에 멈춰 서서는 이곳에 모인 내명부 윗사람들에게 얼른 절을 올렸다.
“돌아왔느냐?”
황제의 침대를 둘러싸고 있던 아메스 황후, 솔과 베아트릭스 황빈, 그리고 귀인 에스더가 발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조심 그에게 다가왔다. 살짝 고개를 치켜든 루스탐은 ‘한 명이 빠진’ 이들 비빈들을 힐끔 올려보고는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하관은 일단 취소하고 해산했습니다. 준비가 갖춰지면 그때 대공주께서 사람들을 다시 소집하겠다고 했습니다.”
루스탐은 황제가 누워있는 침대 쪽을 잠시 돌아보았다. 세네피스 황태후만은 여전히 침대 옆에 남아 이불 밖으로 비죽이 나와 있는 황제의 큰 손에 얼굴을 기댄 채 한숨만 짓고 있었다.
‘저 양반 손자 장례에는 관심도 없나.’
루스탐이 내심 혀를 찼지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렌의 급사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람들이 모두 경악을 하며 어린 대군을 동정했지만 황태후의 첫 반응은 ‘상께서 상심하실 텐데 어쩌나.’였다. 애당초 손자들에게는 별 관심도 없는 황태후지만 가뜩이나 눈엣가시 같던 네페티의 아들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유는 몰라도 황태후께서 저렇게 계셔야 상께서도 덜 고통스러워하시니까.”
루스탐의 눈치를 읽어낸 베아트릭스가 얼른 상황을 설명했다. 세네피스는 황제의 손을 쓰다듬고 입을 맞춰가며 흐느끼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아메스 황후가 침착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황비는?”
“문병 온 친척들의 위로를 받고 계십니다.”
“상께서 저리 계신데 여기는 안 올라오고 고작 친척들이나 만나고 있다고?”
황후의 갑작스런 시비에 루스탐도 잠시 난감해졌다.
“내 들은 바로는 상에게까지 대놓고 앙탈을 부렸다며? 그렇다면 상께서 저리 되신 데 황비의 책임도 있는 것 아닌가?”
기회를 잡은 아메스가 자리에 없는 네페티를 계속 힐난했다. 괜스레 난처해진 루스탐을 도와준 건 황빈 베아트릭스였다.
“멀쩡히 젖까지 먹이고 토닥이며 재운 아기가 품 안에서 갑자기 그리되었으니 그 충격이 오죽하시겠습니까. 화를 내신 일도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니…… 가까운 친척들이라도 만나 슬픔을 나눠야지요.”
베아트릭스 덕분에 한숨 돌린 루스탐이 다시 황후의 눈치를 보았다.
“허, 그 핏덩이가 황상께는 자식이 아니던가?”
아메스가 계속 투덜거렸지만 다행히 이번만은 나름대로 동병상련을 느꼈는지 깊은 한숨 한 번으로 끝내고 말았다. 그리고는 처음 황후가 되었을 때에 비하면 한결 성숙해진 눈매에 살짝 힘을 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래, 어쨌든 갓난 자식을 잃었으니……이번은 넘어가야지 어쩌겠어.”
본관 북쪽으로 보이는 늦은 오후의 황실 묘지가 어딘지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그의 딸 크낙스 공주도 저곳에 누워있지만 근 며칠 동안 그는 죽은 딸 이야기는 한 마디도 꺼낸 일이 없었다.
“황자들도 형제를 연이어 잃어서 맘이 많이 불편할 텐데. ……시종장은 황자들이 다른 데 관심을 돌리고 잊을 수 있게 오락거리를 좀 마련해 주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루스탐이 재차 비빈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도 황자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내명부에 퍼진 걱정과 공포를 이미 알고 있었다. 아메스가 그들을 돌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지난 일 곱씹어 봐야 황실 분위기만 가라앉으니 가능한 빨리 하관을 하고 잊게 하는 게 나아. 유아 돌연사는 흔한 일이야. 그냥 안 좋은 일이 연이어 벌어졌을 뿐이니 괜히 확대해석할 필요 없다.”
루스탐이 황후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말했다.
“주페 태자께서 상심한 옹주에게 각별히 신경을 써 주시는 듯 보였습니다.”
“카이 장태자가 그랬다면 더 좋았을 것을.”
지금껏 황제 곁에서 말없이 있던 황태후가 난데없이 대화에 끼어들면서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자존심이 상한 아메스가 헛기침을 하며 간접적으로 심기 불편함을 드러냈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대놓고 노발대발 날뛰지는 못했다.
“그 자리에 있었다면 장태자도 당연히 그리했을 것입니다, 황태후 폐하.”
“저녁에 농업 대책회의가 예정되어 있는데 어찌할…… 읍.”
분위기도 돌릴 겸 황후에게 중요한 안건을 물으려 했던 루스탐은 내심 아차 싶었다. 그는 말을 멈추고 다시 황후와 황태후의 눈치를 재빨리 살폈다. 황제가 갑작스레 정무를 보기 어려워졌을 때 임시 대리인을 결정하는 건 내명부의 고유 권한이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아메스 황후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상께서 참석이 어려우시니 포고령대로 당연히 장태자가 배석해야지.”
“……총리실에서 주관하라고 전해.”
황태후가 황후의 말을 바로 뒤엎었다. 걱정이 현실로 드러나자 난처해진 루스탐이 괜스레 헛기침을 했다. ‘법대로’라면 당연히 황후의 말이 맞겠지만, 황태후의 말을 대놓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둘 사이에 또다시 눈싸움이 오가자 베아트릭스가 중간에서 재빨리 타협안을 내놓았다.
“장태자에게 참석 가능한지 알아보고 어렵다면 그때 가서 총리실에 알리는 게 좋겠습니다.”
“알아보긴 뭘 알아봐!”
참고 참던 아메스가 결국 폭발했다.
“제국엔 법도가 있고, 장태자는 장태자이거늘! 억지로라도 나가야지!”
아메스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지자 그때까지도 잠든 황제의 손을 꼭 붙들고 있던 세네피스 황태후가 기겁을 하며 이불 위를 손으로 짚었다.
“상께서 겨우 잠드셨는데 황후가 뭐 하는 망발인가.”
황태후의 노기 띤 호통에 발끈했던 황후도 얼굴을 붉히며 얼른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분은 참을 수가 없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 그대로 침소 밖으로 휙 하니 나가버렸다.
“저놈의 성질머리.”
황태후가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메스도 나이를 먹어가며 많이 차분해진 게 사실이지만 워낙 타고난 천성이다 보니 아직까지도 발끈하면 종종 이렇게 이성을 잃곤 했다. 결국 베아트릭스가 총대를 지고 나섰다.
“제가 가서 장태자에게 말해보죠. 모두 함께 가세.”
베아트릭스와 솔, 에스더까지 어색해진 자리를 총총히 비우면서 침소 안에는 누워 잠든 황제와 그를 돌봐주고 있는 황태후만 남게 되었다.
“그럼 소인도 물러나겠나이다.”
괜히 중간에서 난처해진 루스탐도 얼른 절을 올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소에서 재빨리 빠져나온 루스탐은 그제야 긴장을 풀고 한쪽의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리 성군이라고 죄다 좋기만 할 수는 있나요, 폐하.”
휴게실에 마련된 음료를 마시며 루스탐이 멀리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람 사는 세상이 다 그렇지만요.”
조금씩 어둑어둑해지는 황도 아케메니아 시가지에 화려한 불빛이 하나 둘 들어오고 있었다. 이곳도 지난 제위전쟁의 공성전으로 크게 파괴된 이후, 이제 강력한 새 황제의 지도 아래 이제 크고 깨끗한 건물들로 가득 찬 단정한 계획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자로 잰 듯 정비된 황도처럼, 황실의 강력한 손길은 이제 제국 구석구석까지 빈틈없이 미치고 있었다. 황제는 유능하고 정력적이었고, 개방적이면서 포용력 있는 지배자였다. 그런 자신감의 저변에는 강력한 군대와 유능한 인재들, 그리고 제국민들의 열렬한 지지가 받치고 있었다.
물론 그동안 질곡이 없던 건 아니었다.
즉위 1년 후, ‘홀수 번호가 붙은 황제는 무능하다’는 세간의 인식이 있다는 명목으로 황제가 ‘세나우스’라는 호칭을 전격적으로 폐지했을 때는 일부 유학자들이 단식투쟁까지 했을 정도로 시끌시끌하기도 했었다.
15년쯤 전에는 황후 아메스가 계속 임신에 실패하면서 ‘첫 태자가 안 태어나는 건지, 못 태어나는 건지’ 라는 세간의 걱정이 조금씩 고개를 들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시행착오 끝에 첫 태자를 가지면서 성대한 축제 분위기로 일단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30년간의 제위 기간 중 가장 큰 위기는 8년 전에 있었던 유행성 출혈열 사태였다.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죽도록 만드는 무서운 변종 바이러스가 1년이 넘게 제국 각지를 휩쓸면서 인구 10명 중 한 명 꼴인 6천만이 넘는 사람이 죽고 제국이 일대 혼란에 빠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황제가 직접 나서 백신과 치료약 개발 프로젝트를 주도해 어렵사리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프로젝트’가 대체 어떤 것이었는지, 전문가도 아닌 황제가 어떻게 ‘직접’ 백신과 치료약을 만들어냈는지는 아직 미스터리에 싸여 있었다. 다만 그가 2달이나 황궁을 비우고 잠적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약을 들고 나타났다는’,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심스러운 소문만 회자되는 정도였다. 여기에 몇몇 인물들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면서 황제가 혹시 ‘알려지지 않은 비밀조직’을 운영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도 돌고 있었다.
그런 몇몇 사건들을 빼면 제국은 나름대로 발전의 길을 밟아가고 있었다. 7년 전, 격감했던 인구도 조금씩 회복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 일 이후 일약 영웅으로 오른 황제에 대한 제국민들의 지지도 높았다.
이렇게 겉으로 보이는 황제는 지금까지의 누구보다 강력한 지배자였다. 아니, 최소한 최근까지는 안팎으로 모두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그 강력한 지배 뒤의 보이지 않는 그늘이 문제였다. 그 신화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인 황제는 정작 자신의 병은 떨치지 못하고 있었고, 어렵게 얻은 황자들에게까지 문제가 생겨 가뜩이나 힘든 황제를 더 궁지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고작 30년밖에 되지 않은 새 황제의 치세에 이제 진짜 위기가 닥치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을 슬슬 품고 있었다. 게다가 올해는 예상 못했던 자연 재해까지 터져 지난 악몽을 막 벗어나려는 제국의 앞에 다시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루스탐은 다시 음료를 한 모금 삼키며 황제가 누운 침실 쪽을 돌아보았다.
“이제 다 나아질 거라고요. 그럼요, 우리 아버지가 어떻게 살린 분인데. 그러셔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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