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89 회: [3부] 파트1. 인동초 향기 -- >
[예고한대로, 3부 정규 연재를 시작합니다.]
파트1은 '인동초 향기'입니다.
인동초는 향기가 짙은 봄꽃으로 북풍한설에도 시들지 않고 버티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헌신적인 사랑, 혹은 부성애를 뜻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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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달이 비치는 심야의 황무지 한복판을 두 개의 그림자가 허겁지겁 가로질러 달려갔다. 주변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둘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며 거친 바위 위를 필사적으로 내달리고 있었다.
살벌한 황무지라는 면에는 이곳 바하칼리도 다른 대부분의 북부 지역들과 마찬가지지만, 춥고 황량한 눈벌판 대신 야생동식물도 거의 살 수 없는 뜨거운 바위사막이라는 것이 유일한 차이였다. 덕분에 바하칼리에서 내열 보호복 없이 이렇게 머물 수 있는 시간은 세 개의 달이 앞을 비춰주는 이런 밤 시간 뿐이었다.
“몇 시야?”
앞서 달려가던 키 큰 사내가 뒤따라 달려오는 여자에게 헐떡이며 물었다.
“4시 20분.”
“빌어먹을, 좀 있으면 해가 뜰 텐데.”
애타는 얼굴로 하늘을 올려보던 남자는 다리가 엉키며 자리에 벌렁 넘어지고 말았다.
“씨이!”
남자는 무거운 장화를 벗어 내동댕이치며 버럭 화를 냈다.
“빌어먹을! 이 따위 신발을 신고 달리려니 죽을 지경이네!”
탈진해버린 남자가 돌바닥 위에 벌렁 드러누우며 목까지 차오른 숨을 힘겹게 가다듬었다. 뒤를 따라온 여자가 바닥에 뒹굴던 장화를 도로 집어 남자 옆에 휙 던졌다.
“발목 부러지는 것보다는 나아. 그냥 신어.”
“알아? 그 새끼들이 도망 못 가게 하려고 일부러 이 지랄같이 무거운 장화밖에 안 주는 거라고!”
“싫으면 옷이라도 벗어서 발 싸매고 가던가. 빨리 일어나, 시간 없어.”
마찬가지로 지치고 민감해진 여자가 투덜대는 남자를 걷어차며 버럭 화를 냈다.
“해 뜨기 전까지 마을에 도착 못 하면 이 빌어먹을 곳에서 미이라가 되어버린다고!”
“제기랄! 다리에 힘이 남아있어야 뛰지!”
남자가 반쯤 울먹이기까지 하며 바닥에 몇 번 헛구역질을 했지만 잔뜩 긴장한 여자도 그의 넋두리를 들어 줄 여유가 없어보였다.
“그럼 팔로 기어서라도 따라와!”
남자를 재촉하며 한편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여자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이크!”
놀란 얼굴로 뒤로 막 돌아서려던 여자는 무언가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옆으로 붕 날아가 바닥에 사정없이 꽂혔다. 비명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박살나버린 두개골과 살점이 바싹 마른 바위 위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으아아악!”
파랗게 질린 남자는 신발까지 벗어놓은 채 조금 전까지도 힘이 없다던 다리로 허겁지겁 일어나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패닉이 되어버린 남자는 맨발바닥이 돌에 긁혀 엉망이 되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바위 위를 허우적거리며 필사적으로 달렸다.
“제발! 제발 좀 따라오지 말라고!”
동료의 시체를 놓아둔 채 악을 쓰며 정신없이 달리던 남자는 갑자기 뒤가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등 뒤가 궁금해진 그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웁!”
다리에 일격을 당한 남자는 그대로 힘을 잃고 돌 위로 나동그라졌다. 이마가 깨지고 손과 무릎이 까져 피가 줄줄 흘렀지만 공포에 질린 남자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고 돌바닥 위를 필사적으로 기어갔다. 무릎 아래가 절반 잘려나가 살점에 매달린 채 너덜거리고 있었지만 공포에 사로잡힌 그는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우리가 뭘 부족하게 해 줬나?”
등 뒤에서 들려온 싸늘한 목소리에 바닥을 기던 남자의 손끝이 딱 멈추었다.
“헉, 헉.”
그는 자신이 바닥에 그려놓은 긴 핏자국 위로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잔뜩 고개를 숙인 그의 눈에 윤이 나는 말끔한 군화발 두 개가 정확히 11자를 그리며 멈춰서는 것이 보였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자비를…….”
남자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재차 머리를 조아렸지만 싸늘한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너희에게 요구된 건 하루 8시간의 작업이 전부다. 휴일도 있고, 결혼도 시켜줬어. 여가시간도 충분하고 술집에 클럽까지 필요한 건 컴플렉스에 모두 있다. 원치 않는 자들에게 억지로 개종을 요구한 것도 아니야. 기근으로 굶어 죽어가는 놈들이 보면 과분할 정도로 여유롭게 살고 있는데 뭐가 더 필요하지?”
“그, 그게…….”
바닥을 짚은 남자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말해 봐라. 뭐가 더 필요하냐고. 돈? 여자?”
남자는 뒷덜미에 무언가 차가운 금속이 와 닿는 느낌에 전율하며 재차 바닥에 이마를 댔다.
“서, 서부에 있는 딸들이 궁금해서……엄마 없이 아빠만 보고 컸는데……혹시 이번에 안 좋은 일이라도……제발.”
남자의 간절한 애원에 돌아온 건 냉소적인 대꾸 한 마디였다.
“왜? 이번 기근에 굶어 죽었을까봐? 그럼 여기서 새로 얻은 처자식은 어쩌고?”
“……제발, 제발 아이들은 용서해 주십시오. 다 제 잘못이니……,”
“감격스러워 눈물이 나겠군. 마누라 살려달라는 말을 안 하는 건 우리가 맺어 준 결혼이 맘에 안 들었다는 뜻이겠지?”
이번에도 여지없이 비웃음 섞인 대꾸가 돌아왔다.
“어떻게 여기까지 빠져나왔는지 실토하면 네 자식들은 살려주마.”
순간 바싹 얼어붙은 남자가 바닥을 짚은 채 파르르 떨었다. 뒷목에 닿은 금속의 느낌이 그를 재차 세게 내리눌렀다.
“그건……컴플렉스 경계 담을 넘어서 나왔습니다.”
“훗, 담? 50척(15m)이나 되는 합성수지 담을 넘었다고? 허어, 근위대 시절에 받은 훈련이 그리 대단했던가? 돌아가면 다시 시범 보여주겠지?”
“…….”
남자는 차마 ‘하겠다’는 대답을 못한 채 떨고만 있었다.
“어떤 놈을 구워삶았는지 실토해. 아니면 네 어린 새끼 둘을 담 위에서 바닥에 동댕이쳐 피떡 만드는 꼴을 저승에서 볼 테니.”
목에 와 닿은 무기가 장전되는 것을 느낀 남자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급해, 난 네가 도망친 그곳에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거든?”
“무, 물 납품하는 업자가 차에 태워줘서…….”
“고맙다.”
순간 철크덕 하는 짧은 소음과 함께 남자의 목 절반이 몸통에서 그대로 찢겨나갔다. 남자는 비명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이 심야의 황무지 중간에 시체가 되어 축 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딸을 보겠다는 그의 마지막 꿈도 한 줌 먼지처럼 증발해 버리고 말았다.
“더러워.”
그에게 ‘무기’를 쏜 ‘용역’은 군화 코에 묻은 피와 살점을 짜증스레 툭툭 털어냈다. 북부의 컴플렉스에서 경비 노릇을 하는 사설 무장조직인 속칭 ‘용역’들은 허름한 무장에 싸구려 무기로 무장한 것이 보통이지만 이자가 지닌 무기는 제국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낯선 것이었다.
그는 남자의 목을 쏜 팔뚝만한 길이의 긴 ‘발사 무기’를 오른쪽 허리춤에 꽂았다.
“입 열었나?”
뒤에서 따라온 또 한 명의 용역이 조금 전 죽은 여자의 시체를 짐짝처럼 질질 끌고 모습을 나타냈다.
“예상한 대로. 물차 모는 그 새끼.”
용역이 죽은 남자의 뒷머리를 꾹 밟으며 말했다.
“바깥소식하고 여론 통제하는 게 급선무겠어. 이런 생각 하는 놈들 조만간 또 나올지도 모르니까.”
“이 시체는 어쩌지? 갖고 돌아갔다가 이놈 동료들 눈에 띄어 좋을 건 없지. 태울 수도 없고.”
“버려두는 것도 현명하진 못해. 여긴 시체도 안 썩는다고. 주변에 군소 컴플렉스들도 많은데 운 없이 누구 눈에라도 띄면…….”
용역이 시체를 발끝으로 뒤집으며 짜증을 냈다.
“좀 이따가 타르서스로 가는 화물셔틀 있을걸. 스페이스로 나가거든 내다버리라고 하지 뭐. 그편이 깨끗할 거야.”
동료 용역이 여자의 시체를 남자의 것 옆에 휙 동댕이치며 말했다.
“이 새끼들 유전자 검사라도 했다가는 일 난다고.”
남자를 죽인 용역이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으며 시체에서 한 발 물러섰다.
“하긴, 데이터베이스에 딱 걸릴 텐데.”
음산한 황무지에 선 두 사람은 각자가 붙잡은 시체를 전리품처럼 한 발로 밟고 서서 기분 좋게 물 한 모금씩을 나누었다.
이들의 머리 위로는 크고 작은 3개의 달이 여전히 떠서 이 작은 사냥의 결과를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기원 450년, 초겨울의 황도 아케메니아는 오래 전, 한때 이곳이 유령도시가 되었던 제위전쟁 무렵 그 겨울처럼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카렐 대제가 즉위하고 30년이 넘는 태평성대를 지내오면서 오늘처럼 황도가 차가운 적막에 잠겨 보기도 처음이었다.
황실 묘지 꼭대기, 황족 묘역에 모인 많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오늘은 사뭇 냉랭하고 걱정이 서린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황상께선?”
작은 관을 앞에 두고 서 있던 황족대표 레곤 대공주가 궁에서 헐레벌떡 달려온 내관 제복의 키 큰 청년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었던 청년이 대공주에게 고개를 숙이며 개미만한 소리로 답했다.
“그게……사정이 있어 못 나오실 것 같습니다.”
“사정? 무슨 사정이 이 일보다 중요한데?”
“그게…….”
청년이 말꼬리를 흐렸다. 웬만한 가디언 못지않게 당당한 체구의 이 에키트 족 출신 내관은 어지간해서는 남 눈치를 보는 일이 없는 콧대높고 꼿꼿한 사내였지만 오늘은 평소답지 않게 핏기까지 싹 사라져 있는 얼굴이었다. 그런 청년의 표정을 읽어내지 못한 대공주가 아니었다.
“솔직히 대답해 봐, 루스탐. 상께서 지금 뭐 하고 계시나?”
“……충격을 많이 받으신 것 같습니다.”
“얼렁뚱땅 넘어가려 하지 마. 아직 정도 많이 안 든 어린 갓난아기야. ……이번이 처음도 아니시고. 황태후나 비빈들도 한 명도 안 나온 게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처음이 아니시니 충격이 더 크시죠.”
재빨리 말을 낚아채는 이 약삭빠른 내관에게 대공주가 살짝 눈을 흘겼다. 하지만 결국은 꺼질 듯 큰 한숨을 내쉬며 다시 관을 향해 돌아섰다.
“다른 내명부 비빈들이야 황상과 함께 있을 테고, 네페티 황비도?”
“기진하셔서 의무실에 누워 계십니다.”
대공주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구덩이도 다 파 놨는데…… 하관은 나중으로 미뤄야 하나.”
어른 것의 절반 크기도 안 되는 자그만 관 위에는 ‘제국 대군(大君) SX-3-7 오렌 플레렌 리쿠’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나도 참, 어쩌다 종친회장 같은 건 맡아서 이런 꼴을 다 봐야 하나.”
주변을 둘러선 30여명의 황족 내빈들을 빙 둘러본 대공주가 자리에 쭈그려 앉아 관 위를 쓰다듬었다.
“작명할 때부터 운이 없었던 게야. 그래서 자식 못 가진 조상 이름은 붙이는 게 아니라고 했더니만. 에휴, 이 불쌍한 핏덩이 같으니, 내 속이 이런데 열 달 뱃속에서 키운 황비 속은 또 어떨꼬.”
루스탐이 헛기침을 하며 언덕 조금 위에 있는 다른 봉분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 곳에도 마찬가지로 ‘자식 못 가진’ 조상 이름을 물려받았던 ‘제국 태자 SX-3-4 크낙스 자이센 리쿠 공주’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떼도 다 죽은 민숭민숭한 그 봉분에는 풀 대신 작은 누각이 을씨년스런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대공주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상주도 없이 우리끼리 하관을 할 수는 없지. 관은 다시 보관소로 옮겨야겠다. 상께서 준비 되시면 다시 통지하고 하관의식을 거행할 테니까 일단은 해산들 해.”
대공주가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돌아가라며 팔을 저어보였다. 허탈해진 사람들이 하나 둘 흩어지고, 행사를 위해 모인 시종과 내관들이 자리를 바삐 치우기 시작했다.
“마마, 제발 진정하십시오.”
관을 옮기려던 황실 시종들은 그 귀퉁이를 끌어안고 계속 울고 있는 한 소녀를 보며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고작해야 예닐곱 살 남짓 되어 보이는 말 그대로 어린 꼬마였지만 황족을 뜻하는 금빛 머플러와 용무늬 비단포 앞에서는 그들도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마리안, 이제 그만 놓아줘.”
곁에 있던 한 소년이 관을 끌어안고 있던 소녀를 살며시 끌어당겨 떼어냈다. 까만 머리칼에 짙은 눈동자의 이 소년 역시 이제 갓 꼬마 티를 벗은 어린아이였지만 똑같은 옷을 입고 관 앞에 나란히 선 네 명 중 그나마 제일 어른스런 모습이었다. 소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서도 계속 울기만 했다.
“크낙스 언니도 하늘나라 갔는데, 오렌까지 갑자기 갔잖아. 그 전날도 날 보고 웃었는데, 불쌍해서 어떡해.”
“너 어려서 아팠을 때도 내가 이렇게 울었던 거 알지? 그때 나한테 계속 미안하다고 그랬잖아? 오렌도 네가 계속 울면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러니까 오렌 앞에서 울면 안 돼. 알았지?”
소년이 침착하게 말하며 눈물로 범벅이 된 이 작은 누이의 등을 다정하게 토닥거려 주었다.
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형제의 장례식에만 벌써 두 번째 서게 된 4명의 어린 남매들을 쳐다보며 안됐다는 얼굴로 쯧쯧거렸다. 대공주가 그들을 가리키며 자리에 있는 루스탐에게 슬쩍 지시를 내렸다.
“날도 고약한데 황자들은 빨리 처소로 데려가. 분위기도 뒤숭숭한데 감기라도 걸렸다가는 괜히 상의 진노를 살 수도 있으니. 마리안 옹주가 첫 동생을 잃어서 많이 상심한 것 같으니 각별히 신경 써 주고.”
“알겠습니다. 대공주 저하.”
루스탐의 눈짓을 받은 시종들은 슬픔을 나누고 있는 남매들을 데리고 급히 황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종들에게 뒷일을 맡긴 루스탐은 다시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황궁 본궁으로 되돌아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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