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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82화 (777/1,132)

< -- 782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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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크!”

페로를 쫓아 달려오던 킵은 자신을 맞아주는 뜻밖의 얼굴에 기겁을 하며 하마터면 칼을 겨눌 뻔했다. 2명의 근위대 가디언, 3명의 크바르나 헤네티들을 거느리고 있던 베흔은 어찌할 바 모르는 그에게 등 뒤의 페로를 가리켜 보였다.

“각하? 이게…….”

킵이 당혹스런 얼굴로 물었다.

“세 놈은 내 옆을 지키고 나머지는 그쪽에서 같이 싸워.”

페로는 여전히 베흔에게는 등을 보인 채 무뚝뚝하게 지시했다.

“그놈 몸이 성치 않은 것 같으니 킵 네가 제일 앞에 서라.”

“그, 그놈이라뇨?

킵이 손끝으로 베흔을 슬쩍 가리키며 되물었지만 대답은 들으나마나였다. 킵도, 그를 따라온 가디언들도 이 상황 자체가 어색했지만 따지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들었지? 시키는대로 해!”

킵이 각자의 위치를 가리켰다. 쿠베가 20명 가까운 가디언들을, 그리고 쿠마르가 석궁을 든 저격수들을 데리고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허어, 역시 오길 잘했네. 이렇게 바로 마주칠 줄이야.”

쿠베의 얼굴을 확인한 베흔이 손에 침을 퉤 뱉었다.

“엇!”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서 있는 이 건장한 남자의 모습에 쿠베가 기겁을 하고 자리에서 멈칫거렸다. 하지만 그가 두려워하는 건 등을 크게 다쳐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형편의 이 이빨 빠진 사자가 아니었다. 그가 정말 두려워하는 건 함께 온 근위대 가디언들의 혼란에 빠진 표정이었다.

“쿠마르, 넌 컨테이너를 돌아서 반대편에서 페로 놈을 쳐. 저격수들을 컨테이너 위로 보내고.”

쿠베는 컨테이너의 반대편을 지키고 있는 페로를 가리켰다. 한쪽은 낭떠러지로, 한쪽은 몇 층의 컨테이너로 가려져 있으니 그가 공격할 수 있는 길은 정면의 베흔이냐, 그 반대편을 지키는 페로 둘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명령을 받은 쿠마르는 5명의 가디언들과 헤네티 2명을 데리고 반대편으로 빙 돌아 달려갔다.

“이 가짜 놈아!”

일단 페로와 베흔 일행을 좁은 곳에 몰아놓은 쿠베는 항상 하던 뻔한 고함을 지르며 베흔에게 칼을 겨누었다.

“그래, 말 잘 했다. 주인도 몰라보는 이 개새끼야, 이 가짜 놈 칼맛이나 봐라.”

베흔이 이를 드러내고 쿠베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려는 것을 킵이 얼른 막아섰다. 등에 큰 부상을 입은 그는 지휘라면 모를까 지금 가디언을 상대로 앞장서 싸울 형편은 아니었다.

“저놈 가짜니까 빨리 공격하라고!”

쿠베가 머뭇거리는 부하들 보란 듯 킵과 베흔에게 먼저 돌진했다. 그리고 눈앞의 ‘가짜 베흔’의 모습에 혼란스러워하던 근위대 가디언들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일단 공격을 시작했다.

“제발, 제발 눈 좀 떠 봐요.”

가디언들이 앞뒤에서 싸움을 벌이는 사이, 중간에 있던 자이납은 죽어가는 우베를 붙들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나 병원 멋대로 옮긴 거 화 안 낸다니까!”

자이납이 피가 계속 솟는 그의 목을 누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약혼녀 뱃속에 애가 있는데 전쟁 다 끝난 막판에 죽는 못난이가 어딨냐고!”

아이라는 말에 우베가 눈을 억지로 치켜뜨고는 솟구치는 덩어리피를 꿀꺽 삼켰다.

“역시……난……장사꾼이나 할 팔자였나 봐.”

우베가 자이납의 손을 꽉 움켜쥐며 억지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돈이나 왕창 벌어서 처자식 물려주고 가야지! 싸질러놓고 가면 끝이냐! 이 화상아!”

“비켜라.”

소리만 지르는 자이납을 밀어내며 페로가 침착하게 우베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는 목에 걸고 있던 붉은 머플러를 풀어 우베의 목을 꽉 눌러주었다.

“엉?”

그때, 자이납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등 뒤는 컨테이너로 막혀 있지만 그 뒤에서 무언가 쿵쾅거리는 느낌이 오고 있었다.

“설마?”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든 자이납은 우베를 페로에게 맡기고 컨테이너에 달라붙었지만 비로 젖은 2층의 컨테이너는 몸도 성치 않은 그가 그냥 뛰어오르기는 너무 높은데다가 딱히 잡을 곳이 없었다.

“뭐, 뭐 없나?”

자이납은 주변을 얼른 두리번거렸지만 사다리나 이 높은 곳을 기어 올라갈 만한 별다른 장비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자이납이 무작정 페로를 붙들고 소리를 질렀다.

“나 좀 도와주세요!”

“뭘?”

페로가 채 묻기도 전에 이 제멋대로 아가씨는 이미 몇 발짝을 떨어졌다가 페로를 향해 마구 달려오고 있었다.

“뭐, 뭐냐?”

눈을 부릅뜨고 자신에게 달려오는 이 아가씨에 놀란 페로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손 좀 대라고요!”

페로는 얼떨결에 두 손을 깍지끼고 그의 앞에 대 주었다. 기합 소리를 내며 펄쩍 뛰어오른 자이납이 그의 손과 어깨를 차례대로 박차고 공중으로 힘껏 뛰어올랐다. 하지만 사람 키의 3배는 될 2층의 컨테이너는 그의 성치 않은 몸으로 단번에 오르기는 역부족이었다.

“아쿠!”

가까스로 컨테이너 꼭대기 모서리에 손가락으로 매달린 자이납이 미끄러운 옆면을 발로 짚으려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이이이이익!”

팔에 힘을 주어 컨테이너 위로 머리를 올렸던 자이납의 입이 쩍 벌어졌다.

“으엑!”

자이납이 비명을 지르며 재빨리 머리를 다시 낮추었다. 순간 그의 정수리 위로 볼트 한 발이 쌔액 소리를 내며 스쳤다. 자이납보다 아주 조금 앞서 올라온 헤네티 저격수가 반대편에서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위에! 위에 적이 올라왔어요!”

자이납이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채로 소리를 질렀다. 이대로 컨테이너 위를 내주고 밑으로 내려간다면 밑에서 한참 싸우고 있는 페로와 베흔, 킵과 가디언들, 쓰러진 우베까지도 모두 이자의 사정권 안에 들고 말 터였다.

“뭐라고?”

밑에서 그 말을 들은 페로가 위를 올려보았다. 컨테이너 위를 내준다면 그것에 기대어 어렵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일행에게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가디언들은 양옆으로 쳐오는 근위대 가디언들과 싸우는 것에 몰두해 다른 것에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때, 첫발에서 자이납을 놓친 저격수가 자이납이 매달린 곳으로 달려와 다시 석궁을 겨누었다.

“이마에 구멍이 나야 떨어질 거냐.”

자신을 겨누려는 석궁을 보며 자이납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밑에 있는 페로가 악을 쓰고 집어던진 단검이 빗속을 빙빙 돌며 날아와 저격수의 얼굴을 덮쳤다.

“이크!”

그다지 정확한 칼 던지기는 아니었지만 놀란 저격수가 주춤거리며 물러나려는 순간, 자이납이 오른손을 뻗어 그자의 발목을 덥석 붙잡을 시간을 벌기는 충분했다.

“잡았다!”

좋아하던 자이납은 왼손이 빗물에 쫙 미끄러지자 기겁을 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그와 엮인 저격수도 앞으로 벌렁 쓰러지며 컨테이너 밑으로 죽 당겨 내려갔지만 한쪽 팔로 모서리에 재빨리 매달렸다.

“넌 떨어져!”

저격수의 발목을 붙들고 있던 자이납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어렵게 매달린 저격수의 허리와 어깨를 후다닥 디디고 컨테이너 위로 재빨리 기어올랐다. 저격수가 손에 쥔 석궁을 휘둘러 이 다람쥐 같은 아가씨를 막아보려 했지만 그는 도리어 손목을 확 낚아채 석궁을 빼앗아버렸다.

“떨어지라니까! 이 좀비야!”

자이납은 빼앗은 석궁을 쏘려 했지만 교단 헤네티가 쓰던 이 낯선 저격수용 석궁은 그에게는 아주 낯선 모양이었고, 도대체 어떻게 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급한 대로 칼을 뽑아 저격수의 얼굴을 힘껏 내리쳤다.

“아악!”

무기까지 빼앗긴 헤네티 저격수는 얼굴을 깊숙이 베인 채 손을 놓고 밑으로 뛰어내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 바닥에 떨어진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따로 있었다.

“네놈이 좀비냐?”

얼굴에 부상을 입은 저격수가 바닥에 떨어진 순간, 밑에서 기다리던 덩치 큰 사내가 기다렸다는 듯 칼을 붕 소리가 나도록 힘껏 휘둘렀다.

“조심하세요! 죽으면 몸에 불을 붙일지 몰라요!”

자이납이 큰 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무지막지한 칼질로 저격수의 가슴을 두 동강낸 페로가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아니나다를까 불꽃이 확 솟구치며 페로의 얼굴을 화끈하게 만들었다.

“마르코스 비서관?”

이 저격수와의 싸움에 잠시 신경을 팔았던 페로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져 있던 우베를 이 위험한 불꽃에서 급히 떼어놓았다.

“음?”

우베를 끌어내던 페로는 그의 몸이 힘없이 흐느적거리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마르코스 비서관!”

페로가 다시 우베를 흔들었다. 하지만 목에 볼트를 맞은 채 몇 분을 기적적으로 버티던 이 자그만 사내는 그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페로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그의 옷깃을 힘없이 움켜쥐고만 있었다.

“괜찮아요? 아직 괜찮은 거죠?”

컨테이너 위의 자이납이 머리를 내밀고 다시 물었지만 페로는 우베의 창백한 얼굴 위에 몸을 기울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눈치 빠른 자이납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바로 깨달았다.

“맙소사.”

자이납이 멍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껏 별의별 행운으로 그 많은 사람들을 구해냈지만 우베만은 아니었다. 전사단 시절부터 항상 말동무가 되어주었던, 누구보다 그에게 잘 대해주었던 살가운 친구였지만 정작 그는 살려낼 수가 없었다.

그때, 그는 반대편에서 또 올라오고 있는 또 다른 2명의 기척을 느꼈다.

“야! 이 빌어먹을 좀비들아!”

분노가 폭발한 자이납은 막 올라서던 그들에게 칼을 빼들고 돌진했다. 먼저 올라선 헤네티가 막무가내로 돌진해오는 그에게 석궁을 겨누었지만 반쯤 눈이 돌아간 이 여자는 겁을 먹기는 고사하고 한 손에 칼을, 한 손에 석궁을 들고 될 대로 되라며 달려오고 있었다.

“뭐 이런 년이!”

자이납은 킵이 그랬던 것처럼 헤네티가 쏜 볼트를 칼로 멋지게 쳐내보려 했지만 그에게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볼트를 쳐내려던 그의 칼이 뒤로 홱 밀려나며 뒤로 날아가 떨어졌다.

“익!”

칼을 놓친 자이납이 기겁을 했지만 이미 출발한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는 막 두 번째 사격을 날리려던 헤네티의 머리를 조금 전 빼앗은 석궁 손잡이로 있는 힘껏 후려쳤다. 쓸 줄을 모르니 어차피 이 수밖에 없었다.

“죽어! 죽으라고!”

머리가 함몰되며 자리에 주저앉는 것을 본 자이납은 멀쩡한 석궁에서 우그러지는 소리가 날 정도로 다시 적을 후려쳤다.

“타죽든 어떻게 죽든 좀 뒈져!”

그는 악을 쓰며 석궁을 부서질 정도로 있는 힘껏 휘둘러 이미 거의 죽어가던 헤네티의 머리를 박살을 내 버렸다. 순간 솟구친 불길에 놀란 자이납은 비명과 함께 뒤로 벌렁 쓰러지고 말았다.

“아차,”

질척거리는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진 후에야, 자이납은 또 한 명의 적이 있다는 것을 머리에 비로소 떠올렸다. 그는 뒤로 휙 돌아섰지만 이미 상대가 위에 거의 기어올라 그를 겨누려 하고 있었다. 바로 조금 전, 우베가 ‘적 보안국장’이라고 말했던 자그만 체구의―헤네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약하고 작아 보이는― 사내, 쿠마르 우펠루였다. 그리고 무기를 다루는 것도 서툴러 보였다.

“저놈이!”

자이납은 다시 무기를 찾았지만 그의 손에 남은 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석궁의 조각뿐이었다. 이대로는 싸움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저 ‘좀비 우두머리’ 손에 목숨을 잃을 판이었다.

“젠장!”

자이납이 빈손으로 스프링처럼 달려 나갔다. 쿠마르가 막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그가 빼든 건 허리춤에 꽂고 있던 ‘소학’이었다. 두툼한 가죽으로 양장된 그 큼직한 책이 글도 모르는 자이납에게 정말 쓸모 있는 순간은 어차피 지금뿐이었다.

“뭐야!”

쿠마르가 날린 볼트가 빗속을 날카롭게 가로질러 날아와 마주 오는 자이납의 가슴을 똑바로 향했다. 그리고는 단단히 양장된 두툼한 책의 모서리를 둔탁한 소리를 내며 뚫었다.

“웁!”

책을 관통한 볼트에 가슴을 찔린 자이납은 그 충격에 잠시 주춤거렸을 뿐 멈추지는 않았다. 두 번째 사격이 다시 날아들었지만 책을 관통하느라 힘을 잃은 볼트는 그에게 치명상을 입히지는 못했다.

“잘 걸렸다! 이놈아!”

계속 돌진한 자이납이 주춤주춤 물러나려는 쿠마르의 머리를 주먹으로 사정없이 후려쳤다. 뺨과 눈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쿠마르가 컨테이너 뒤로 밀려나 다시 바닥으로 뚝 떨어질 뻔했지만 미쳐버린 자이납은 이자를 그렇게 놓아줄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가긴 어딜 도망가!”

자이납은 뒤로 밀려나 떨어지려는 쿠마르의 덜미를 덥석 움켜잡아 다시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비명을 지르는 이 남자의 가슴을 깔고 앉은 채 얼굴을 주먹으로 인정사정없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네놈들이 누굴 죽였는지 알아? 아냐고!”

자이납은 상대에게 무어라 한 마디 꺼낼 순간조차 주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주먹을 쉴 새 없이 내리쳤다. 쿠마르의 코와 눈이 짓뭉개지고 얼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범벅이 되었지만 반쯤 정신이 나간 그의 주먹질은 이자의 숨이 완전히 끊어진 뒤로도 한참동안 계속 이어졌다.

“이, 씨, 나쁜 새끼, 더러운 좀비 새끼.”

눈앞이 흐려진 자이납은 빗물, 눈물, 피로 범벅이 된 얼굴을 피투성이 손으로 더듬더듬 훔쳐냈다. 광기가 억누르고 있던 울음이 이제야 조금씩 새어나오고 있었다.

“저승에도 못 가는 빌어먹을 병신새끼…….”

맞아죽은 시체에 대고 계속 악담을 퍼붓던 자이납은 결국 바닥에 이마를 대고 큰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컨테이너 아래, 피로 젖은 땅에는 숨이 끊어진 황제 비서실장 우베 마르코스가 황제 기병대의 나팔소리, 자이납의 울음소리가 퍼지는 가운데 평화롭게 누워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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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한 게 아니었는데......

하필 공교롭게도 이런 시국에 컨테이너가 등장하는 편이 나왔습니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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