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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79화 (774/1,132)

< -- 779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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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척의 수송선에게 벌어질 운명을 전혀 모르는 건 사오시안트 해안에 남아있던 연합군 근위대도 마찬가지였다. 얼떨결에 퇴각 행렬에 뒤처진 3만의 연합군 근위대는 자신들을 놔둔 채 떠오르는 13척의 수송선을 보며 기겁을 했다.

“맙소사! 다 가잖아!”

수송선의 굉음에 놀란 근위대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들에게 배정된 2척의 수송선은 얼마나 늦는 것인지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그들에게는 기댈 희망조차 보이지 않았다.

“제기랄! 제후군 새끼들을 믿은 게 잘못이야!”

“쿠베 대장한테 연락해! 우리 수송선은 대체 언제 오냐고!”

새벽하늘로 사라져가는 수송선을 보며 지휘관급 가디언들이 절망감에 소리를 질렀다.

사실 지금까지 전투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시로와 제파가 이끄는 1군단과 11군단의 공격은 ‘위협하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무기를 맞대고 죽어라 힘싸움을 벌이고는 있었지만 딱히 유혈이 난무하는 격한 싸움까지 번진 것도 아니었다.

“맙소사! 적 기병들이 다 우리한테 오잖아! 이제 어떡하냐고!”

눈앞이 캄캄해진 근위대들이 악을 썼다. 수송선이 떠났다는 건 단순히 그냥 남았다는 뜻이 아니었다. 구디엔 경의 부대를 몰아붙이던 동맹군 기병대는 그들이 떠나기가 무섭게 즉시 방향을 돌려 근위대 후방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지평선을 까맣게 덮은 보병대도 천천히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동맹군 모두를 상대해야 했다.

“원진! 원진으로!”

이곳의 연합군 근위대를 지휘하는 근위대 8군단장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수송선이 언제 올지 모르니까 중간에 자리만 남기고 원형으로 사방을 막아!”

‘원진’이라는 말에 근위대 베테랑 장병들의 낯빛이 변했다. 압도적인 병력에 사방이 포위당한 최악의 순간에 마지막 저항을 위해 짜는 포진이라는 것을 그들도 다 알고 있었다.

“성 밖의 동맹군이 모두 몇이지?”

8군단장은 이미 빤히 알고 있는 내용을 아랫사람들에게 다시 물었다.

“10만이……넘습니다.”

“허.”

8군단장이 허탈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보았다. 2척의 수송선은 오는 기미도 없었고, 동북쪽 하늘 일부에서 적이 제일 먼저 설치한 간이 에너지장벽이 푸른 빛을 내뿜는 것이 보였다.

“지금 우리가 버려진 거냐?”

군단장의 침착한 물음에도, 이번은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참담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사방에는 온통 동맹군 뿐이었고, 그의 부대는 포위된 상태였다.

“쿠베 대장에게서는 연락 없고?”

“…….”

참모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다. 8군단장은 자신이 애당초 ‘선택’을 잘못 했었다는 것을 이제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황도에서 사오시안트로 향하는 페로의 리쿠르고스 셔틀 안은 마지막 협상을 앞둔 비장함이나 긴장감은 간 데 없이 수다스러운 두 명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이 몸뚱이로 뭣 하러 왔냐? 넌 병원에 콕 처박혀 있으라는 말도 못 들었냐?”

“허, 자고 일어나 보니 와 있던 그 이상한 병원이요?”

“이상하긴! 얼마나 비싼 병원인데!”

“비싸면 뭘 해요? 멋대로 이상한 병원에 옮겨놓은 것만도 납치 미수라는 거 몰라요?”

“후줄근한 야전병원에 있는 거 불쌍해서 시설 좋은 사립병원에 옮겨줬더니만 납치는 무슨 얼어 죽을 납치야?”

“엄마, 그래서 자기 집 옆 병원에 데려다놓고 틈만 나면 와서 추근덕댄 거예요? 허, 내가 그 속 모를 줄 알아요?”

“젠장, 내가 아무리 여자 밝혀도 멀쩡히 임신한 약혼자 놔두고 그럴 것 같냐!”

“하아, 여자 밝히는 건 인정하셨네?”

“조용히들 못 하나.”

웬 굵은 목소리가 짜증스레 셔틀 안을 울렸다. 셔틀 뒤쪽의 상석에 조용히 앉아 서류를 살피던 페로는 지금까지도 떠들어대고 있는 저 둘을 이미 몇 번째 째려보았지만 눈치가 없는 것인지, 못 본 척 하는 것인지, 그들의 입은 여전히 쉴 새가 없었다.

“거봐, 조용히 하래잖아. 서부 사투리라고 뭐가 그리 방정맞냐?”

딴에는 나름 친절이라고 베풀었던 우베는 자이납이 그 일로 계속 화만 내자 잔뜩 골이 난 얼굴로 그에게 휙 고개를 돌려버렸다.

“허이구, 타르서스 사투리는 뭐 듣기 좋은 줄 아나?”

“으휴, 젠장.”

둘의 수다를 듣다못한 페로가 의자를 뒤로 휙 돌려버렸다.

“대공 각하, 5분 후에 도착합니다.”

페로를 호위하고 온 킵이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페로가 황도를 출발한 건 ‘별궁을 손에 넣었다’는 릴라크의 보고를 막 접했을 때였다. 그때는 황제가 이끄는 야전의 전황이 아직 이쪽으로 기울지도 않은 때였고, 쿠베가 패전을 예감하고 협상 생각을 하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사오시안트 소식을 접한 페로는 ‘내가 나설 때가 되었군.’ 하며 말리는 측근들을 뿌리치고 무작정 길을 나섰던 터였다.

그리고 황제가 ‘쿠베 놈이 협상을 하자고 해,’라는 말을 전했을 때, 그는 이미 셔틀을 타고 바다 위를 날고 있었다. 상황이 그러니 ‘내가 마무리하지.’하고 무작정 고집을 피우는 그를 천하의 황제도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우베야 황제의 수석 비서관 자격으로 따라온 것이었지만, 페로의 옆 병실에 있던 자이납이 셔틀에 탄 것도 황당한 일이었다.

그는 페로가 어딘가 간다는 말에 무작정 따라와 뻔뻔스러울 만큼 당당하게 셔틀에 탔고, 이 아가씨가 누구의 허락도 없이 멋대로 따라나섰다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구석 자리에 뻔뻔스럽게 앉아있던 그에게 우베가 ‘너 왜 탔냐?’라고 묻지 않았더라면 사람들 모두가 그를 ‘페로 자이센 대공의 공식 사절단’ 일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 뻔했다.

“그리고 니가 뭐 지난번처럼 가디언 때려잡을 상태라면 내 말도 안 해. 지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주제에 와서 뭘 하겠다고?”

우베가 자이납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놀림을 퍼부었지만 그의 재빠른 손놀림에 덥석 멱살이 붙잡히고 말았다.

“엄마야, 이 둔탱이 환자 손도 못 피하는 댁은 뭐 하러 오셨대요?”

“내가 싸우러 온 거냐?”

“저도 마찬가지에요. 종전을 보고 싶어서 왔다고요.”

자이납이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었지만 우베도 지지 않았다.

“종전은 얼어 죽을. 총리 각하 온다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따라온 거지, 뭐.”

“어머, 정확하세요.”

자이납은 두툼한 책 한 권을 꼭 안은 채 의자를 핑그르 돌며 그의 말을 바로 긍정해 버렸다.

“그래, 그런데 고대어 고 자도 모르는 까막눈이 도대체 ‘소학(小學)’을 왜 끌어안고 온 거냐?”

“이거 제목이 소학이었어요?”

자이납이 그때까지 안고 있던 책을 들어보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엉뚱한 대답에 우베가 기가 막혀 혀를 차고 말았다.

“아니, 넌 그럼 이걸 뭘로 알고 가져온 거냐?”

“지난번에 학장님이 문병오시면서 가져오신 건데요? 그분이 쓰신 거예요?”

“환장하겠네. 그 벽창호 서생님 정말 센스 빵점일세. 까막눈한테 소학을 뭣 하러 줘?”

“알 게 뭐야. 으음, 표지에 그분 쓰시는 고상한 먹 냄새가 그대로 배어있으면 됐지. 아아, 그분이 내 병실까지 문병을 오실 줄이야.”

자이납은 코리온이 주고 간 그 책 표지에 코를 대고 몇 번을 킁킁거리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알아요? 그분이 제 옷을 벗기고 품에 안아주셨다는 거. 제 가슴까지 만지셨다고요.”

“하이고, 누가 들으면 침대 위에서 그랬는줄 알겠네. 가슴에 투창 맞아서 응급처치하느라 그런 거 아냐.”

“조만간 침대 위에서도 그러실 거라고요!”

자이납이 책을 끌어안고 다시 의자를 핑그르 들렸다.

“세상에, 퀴퀴한 남자 냄새 털끝만큼도 안 나는 남자는 처음이었다고요. 향수도 안 쓰신다던데 몸에서 꽃향기 풀향기 비슷한 게 난다고요, 정말이에요.”

“야, 지조 좀 있어 봐라. 꽃향기 서생님 쫓아다닐 거면 거기나 열나게 쫓던가, 퀴퀴한 사내 냄새 진동하는 총리 각하는 뭣 하러 따라왔냐?”

우베는 페로가 한쪽에서 자신을 흘겨보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계속 자이납을 놀려댔다.

“하는 짓이 그러니 맨날 헛물이나 켜지.”

“호호, 걱정 말아요, 그런다고 약혼자 임신 중에 딴 여자 눈독들이는 불한당 같은 남자한테 내가 관심 둘 줄 알아요?”

“잠깐,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별 생각 없이 떠들던 우베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애당초 시작은 그가 좋은 병원 옮겨줬다며 생색을 내려는 것이었는데 결국은 자이납이 몰래 병원을 도망쳐 다시 황실 병원에 돌아온 이유만 실컷 설명들은 셈이었다.

“대공 각하, 사오시안트 성에 거의 다가갑니다. 준비를……각하?”

킵이 하던 말을 멈추었다. 망원경을 든 페로가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건 불길을 내뿜으며 훨훨 타고 있는 사오시안트 시내나 성이 아니고 그 북쪽의 해안 황무지였다.

“전장 위를 한 바퀴 돌아보자.”

페로의 지시에 셔틀이 일부러 큰 원을 그리며 전장 상공을 빙 돌았다. 전투가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드넓은 전장에는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꾸물꾸물 움직이는 수만의 대군도 보였지만 점점이 흩어진 수많은 시체 무더기도 한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피로 물든 밤이었군.”

페로가 애타는 표정으로 전장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런데 황상은…….”

페로는 황제의 모습을 찾는 듯 망원경으로 좌군을 계속 살폈지만 화려한 호위부대나 수행원조차 없이 병사들과 어울려 싸웠던지라 황제의 모습은 따로 구분이 되지를 않았다.

“각하, 공중 에너지 장벽에 열렸습니다. 시가지에 진입합니다.”

전장 위를 한 번 선회한 셔틀은 사오시안트 성벽과 시내 위를 낮게 가로질러 남쪽으로 향했다. 시 남쪽은 항구에서 시작된 화재가 온통 번져 검은 연기로 뒤덮인 덕분에 위에서 볼 때보다 도리어 앞이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회담장이 항구의 야적장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제일 먼저 불이 났던 곳 부근이지만 지금은 진화가 되었다고 합니다.”

“속셈이 빤히 보이네.”

다시 총리로 돌아간 페로가 망원경을 도로 집어넣고 서류들 사이에 끼워져 있던 사오시안트 항구와 주변 지도를 꺼냈다.

“날 납치해 달아나서 나중에 협상 카드로 써먹으려는 거겠지.”

페로가 남 일처럼 중얼거리며 지도를 죽 살폈다.

“우리쪽 병력은?”

“릴라크 경이 항구 밖에 기병 2백기를 매복해 놓았습니다. 화재로 항구의 담과 구조물들이 다 망가져서 아무 곳으로나 진입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의 ‘특수병력’ 20명이 야적장 크레인에 매복해 있기로 했습니다.”

페로는 만일을 대비해 옷 속에 감춘 ‘방검복’과 소매 속의 단검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난번 샤자한 공과의 싸움에서 배를 찔렸던 덕분에 아직 걷는 것이 불편했지만 호승심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그가 종전의 주역이라는 간판을 놓칠 리가 없었다.

“쿠베 놈은 반드시 생각을 먼저 하고 행동하는 신중한 성격이 강점이자 약점이다. 양쪽 모두 딴생각을 품고 있으니 먼저 주도권을 잡는 놈이 이긴다. 신경전 따위 무시하고 자리에 들자마자 무조건 선공이다.”

“알겠습니다.”

“외부에서 기병대 돌격이 신호다. 놈들이 당황할 때 쿠베는 킵 네가 상대해라. 가디언 10명은 기병들이 진입할 때까지 내 주변을 지키고, 우베 마르코스 비서관은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라.”

“넵.”

우베는 총리가 자신의 안전까지 챙겨주자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페로가 가디언들을 손으로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번 타르서스 별궁에서 학장이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는 걸 명심해라. 그때도 괜히 장황하게 떠들다가 몰살시킬 기회를 놓쳤다. 다시 말하지만, 선공이 최고다. 내 가디언부대의 이름을 더럽히지 말고 깨끗하게 마무리해야 한다.”

“네에이.”

페로가 굳이 ‘코리온의 실수’를 들먹거리는 속내를 눈치 챈 우베가 풉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저 총리는 무슨 심산인지 입만 열었다 하면―특히 황제가 있을 때― 그 벽창호 서생을 비꼬는 말을 툭툭 꺼내곤 했다. 그리고 이번의 전격 작전도 ‘입만 산 놈’이라고 폄하하던 학장을 다분히 의식한 것이 분명했다.

“착륙합니다.”

조종사의 목소리가 셔틀 안을 울렸다. 창을 통해 흘끔 내다본 바깥의 항구 야적장에는 ‘약속대로’ 딱 10명의 호위 가디언과 한두 명의 수행원만을 거느린 쿠베가 컨테이너들 사이에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다. 이 역사적인 ‘종전 협상’ 자리에는 새벽 부슬비를 막기 위해 쳐진 허름한 방수 천막과 낡은 테이블, 몇 개의 의자가 전부였다.

“잠깐, 저는요?”

자이납이 칼을 차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넌 따라 나와야 짐만 된다.”

페로가 쫓아 나오려는 자이납에게 손을 저었다.

“맙소사, 전 행운의 화신이라고요. 지금껏 제가 지켜서 죽은 사람이 하나라도 있었냐고요? 그냥 부적이라고 치고 데려가시라고요. 저도 어느 정도는 싸운다고요.”

자이납이 정색을 하며 페로의 옷자락에 무작정 매달렸다.

“부적?”

페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이 아가씨는 행운의 화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귀신같이 살아 나오거나 누군가를 구출해 내곤 했었다.

“하긴 그건 맞아. 니 운빨 하나는 죽여주지.”

우베가 갑자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미신 따위에는 별 관심 없는 페로였지만 이 결정적인 싸움을 앞두고 자이납의 말에 어딘지 귀가 쏠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허락은 하겠는데.”

페로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멋대로 싸돌지 말고 내 곁에서 움직이지 마라. 알았나?”

“그럼요, 그럼요, 제가 각하를 놔두고 어딜 가나요.”

자이납이 코리온에게서 받은 ‘소학’을 옆구리에 쑤셔넣고는 페로의 뒤에 얼른 따라붙었으며 휘파람을 불었다.

“가자.”

크게 심호흡을 한 페로는 바닷바람의 습한 기운을 느끼며 셔틀에서 내려섰다. 황제가 밝혀놓은 희미한 새벽의 여명이 그의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기대대로, 모든 것이 번개처럼 해결이 될지, 이번에 멋지게 성공을 해서 ‘실수’를 저질렀던 라이벌 코리온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 줄지―그리고 자이납이 이번에도 억세게 좋은 운을 끌고 와 줄지― 이제 몇 분 내에 판가름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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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사정으로 오늘은 연재가 조금 늦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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