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71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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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말이 없던 릴라크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괜한 말로 심사를 어지럽혔사옵니다. 용서하옵소서.”
“어쨌든, 수고 많았다. 릴라크 라자루스 예리노프 경. 첫 전투부터 가치를 증명해 줘서 흐뭇하군.”
카렐은 또 다른 기병이 다가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 온 건 옆구리에 부상을 입은 아샤드 레즐린 경이었다.
“아니, 어찌된 건가?”
“별 것 아니옵니다.”
아샤드 경은 말에서 느릿느릿 내려서는 어깨에 지고 온 큼직한 천을 펼쳐보였다. 카렐은 도끼 문장이 화려하게 새겨진 천에 싸여진 내용물을 흡족하게 쳐다보았지만 정작 전리품을 가져온 아샤드 경의 표정은 승리의 감격은 고사하고 무겁다 못해 침통할 지경이었다.
“수고했다. 그런데, 혹시 할 말 있는가?”
“차후에 조용히 말씀드리고 싶사옵니다.”
카렐은 눈물자국이 남아있는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직감했지만 전세가 기울고 있는 이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로 급한 일이 아니라면 굳이 챙길 상황은 아니었다.
“들고 따라와라. 아샤드 경은 몸이 그러니 남아있고.”
카렐은 방금 전장에서 돌아온 부장에게 눈짓을 보내고는 천천히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아직까지도 근위대와 남부 보병대가 피 말리는 힘싸움을 벌이고 있는 전선이었다. 아샤드는 남아있으라는 황제의 명에도 끝내 뒤를 따라가며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저긴 아직 위험합니다. 탈진하셨을 텐데 말을 타심이…….”
“시알피는 중태인 것 같고, 보통 말은 날 싣고는 제대로 못 움직여.”
카렐이 처음으로 웃음을 보이며 느리고 무거운 걸음을 한 발짝씩 떼었다. 근위대가 중앙돌파를 시도하면서, 남부 보병대의 중앙만 점점 뒤로 밀려 이젠 U자에 가깝게 되어 있었고, 카렐은 적이 밀려난 그 중간에 천천히 접어들었다.
“적 황제다!”
카렐을 발견한 적진에서 하나 둘 고함이 들려왔다. 온몸에 비와 진흙을 뒤집어쓴 더러운 몰골의 황제는 불쑥 솟은 큰 키만 빼면 보통의 가디언과 구별도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다만 어깨에 걸친 큼직한 은빛 늑대 털―숱한 사람들의 피를 머금어 검붉게 변해버린―과 흙이 덕지덕지 묻은 이마의 서클렛 정도가 그의 특별한 신분을 나타낼 뿐이었다.
“젠장, 미친놈 아냐!”
‘등급 없는 가디언’이 지금 어떤 형편인지 아직 잘 모르는 남부보병들은 그가 행여 자신들에게 돌격해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조금씩 더 물러서기 시작했다.
“설마 싸, 싸우러 오는 건 아니겠지?”
단 두 명만을 거느리고 다가오는 황제의 모습에 남부보병들 사이에 팽팽한 공포와 긴장이 번졌지만 정작 카렐의 표정은 오늘 하루 중 어느 때보다 여유로웠다.
“꼭 무대에 선 것 같군.”
말발굽 모양으로 움푹 팬 중앙, 근위대 군기 옆에 선 황제는 좌우를 다시 둘러보았다. 적군은 뱀처럼 길게 늘어나 있었고, 좌우로도 온통 적뿐이었다.
“나팔 한 번 불어 봐라.”
“어떤 나팔 말씀이십니까?”
“아무 거나 시끄러운 거.”
“예?”
황제의 뚱딴지같은 명령에 잠시 난감해하던 나팔수는 마지못해 나팔을 입에 가져갔다. 그리고는 비가 쏟아지는 오밤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아침 기상나팔을 힘껏 불기 시작했다. 팽팽하던 전장에 엉뚱한 기상나팔소리가 울리자 장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후방을 향했다.
“들어올려.”
카렐이 함께 온 2명에게 공중을 가리켰다. 요란한 기상 나팔소리가 깔리는 가운데, 그 둘은 각자 가져온 것들을 창끝에 꽂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번쩍 치켜들었다.
“익!”
사방에서 벌어지던 치열한 싸움이 일순간 잦아들었다. 공중에 솟은 2개의 창끝에 걸린 건 아직 피가 뚝뚝 흐르는 카산드라의 잘린 머리, 그리고 금빛으로 번쩍거리는 남부최고제후 제롬의 피 묻은 투구였다. 수많은 장병들이 서로 죽고 죽이며 혈전을 벌이던 살벌한 전장에 어색할 만큼의 고요함, 그리고 누군가의 절망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안 돼.”
몇몇 남부 장병들이 놀라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렐은 자루 안에 마지막 남은 하나를 손에 쥐고 하늘 높이 쳐들었다.
“이거면 충분한가?”
이번엔 조금 전의 두 개처럼 소름끼치는 전리품은 아니었다. 숱한 보석과 금으로 치장된 그 주먹만한 물건은 멀리서도 눈에 확 들어올 만큼 번쩍거리고 있었다. 남부 장병들에게는 잘린 머리보다 더 충격을 주는 물건이었고, 근위대에게는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주는 무엇이었다.
“이런.”
선두에 있던 한 남부 무장의 입에서 짧은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맙소사……옥새(玉璽)야.”
“눈앞에 있는 건 짐의 신민 아니면 반역도 둘 중 하나니.”
카렐이 눈앞의 근위대 전원에게 통신을 연결하고 낮은 목소리로 알렸다.
“근위대의 교시대로만 하면 된다.”
황제의 명령은 간단했고, 그가 뜻하는 바는 분명했다. 곳곳에서 근위대 가디언들이 적군을 향해 ‘상께 무릎을 꿇어라’며 위협하는 고함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한 손에 수우의 옥새를 움켜쥔 카렐은 눈을 가늘게 치켜뜨고 적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는 싸울 상태도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반역도에게 포로 따위는 없다.”
카렐이 가디언들에게 앞을 가리켰다. 근위대 가디언들이 황제를 따라 전진하며 남부보병들을 다시 압박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물론이고 최고 지휘관들까지도 몰살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남부 보병들에겐 저항할 의지도, 그럴 이유도 사라진 후였다.
기세가 완전히 꺾인 남부 장병들은 쓰러져 있는 동료들을 허겁지겁 추슬러서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기 시작했지만 이미 크바르나들이 빼앗은 말에 올라 등 뒤를 겨누고 있으니 어차피 갈 곳도 얼마 되지 않았다.
“젠장! 어디까지 물러나는 거야!”
싸움 한 번 못 벌인 채로 맥없이 양떼몰이당하는 광경에 순간 당황한 일선 지휘관들이 창백해진 얼굴로 언성을 높였다. 앞뒤가 모두 조여들면서 궁지에 몰린 남부보병들은 싸워야 할지, 말아야 할지 눈치만 보고 있었다.
“망할! 우리 앞으로 오잖아!”
카렐을 바로 앞에 맞이한 남부 병사들이 혼비백산하며 동료들의 어깨 뒤로 앞 다투어 물려나려 했다.
옥새를 쥔 채로 남부보병들의 코앞까지 나온 카렐이 오른손에 든 칼을 들어 앞을 똑바로 겨누었다.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한 개는 더 큰 장신에 피를 뒤집어쓴 ‘등급 없는 가디언’이 핏발 선 눈을 부릅뜨고 칼을 겨누고 있는 것만으로도 간이 작은 사람은 놀라 주저앉을 판이었다.
“물러나! 물러나!”
“젠장! 어디로 가라고!”
저 괴물이 자신들에게 돌격할 것으로 생각한 남부 보병들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뒤의 동료를 계속 등과 엉덩이로 밀어냈다. 그때, 카렐의 칼끝이 머리에 깃발을 꽂은 지휘관을 똑바로 향했다.
“익!”
공포에 질려 떨고 있는 그 무장에게 날아든 건 황제의 칼날이 아니고 짜증섞인 호통이었다.
“감히 누구 안전에서 무기를 쳐들고 있는 거냐.”
겁에 질린 채 서 있던 남부 무장은 자신을 겨눈 황제의 칼끝, 그리고 왼손에 쥔 옥새를 잠시 응시했다. 조금 전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게…….”
“너도 반역자냐?”
“그게…….”
같은 말만 중얼거리며 양 옆의 상황을 힐끔힐끔 쳐다보던 그 지휘관은 결국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검, 그리고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고 자리에 조심조심 꿇어앉았다.
“요, 용서하소서.”
무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더 깊숙이 숙였다.
“따라해, 빨리.”
지휘관의 모습을 본 그 휘하의 장병들도 지휘관을 따라 무기를 풀어놓으며 자리에 하나 둘씩 꿇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타크마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떡할까요?”
“병사들은 무장해제해서 고향에 보내라. 장교들은 따로 조사한 후 돌려보내고,”
“들었나!”
타크마가 휘하 근위대에 손짓을 보냈다. 지시를 받은 근위대들은 꿇어앉은 남부 병사들의 무기를 거두며 계속 나아가기 시작했다.
“가디언과 기병이 감시하고! 보병들은 무기를 거둬!”
“젠장, 도리가 없잖아.”
그 광경을 본 남부 보병들도 가까운 곳부터 하나 둘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군데군데 고집을 부리며 저항을 하려는 자들도 없지 않았지만 동조자도 나오지 않고, 가디언들과 기병들이 도끼눈을 뜨고 모여드는 기세에 바로 꼬리를 내리며 다시 꿇어앉을 수밖에 없었다.
“괜히 사고 치지 마라.”
타크마가 한 말은 이 한 마디가 전부였다. 근위대 가디언들이 앞장서고, 뒤에서는 말에 탄 크바르나와 낙타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근위대 병사들은 아무 말 없이 무기를 챙기며 남부보병들 사이를 걸었다. 죽이거나, 협박하는 일도 없이 소름끼칠 만큼 조용한 가운데 무기를 챙겨드는 쇳소리만 간간히 주변을 울릴 뿐이었다.
연합군 사령부를 지키던 5천의 보병대는 변변한 싸움도 없이, 처절한 저항도 못 해 본 채 천천히 자멸해가고 있었다.
황제가 있는 동맹군 좌군에서 까마득하게 떨어져 있는 동맹군 우군에서는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고, 설사 안다 해도 신경 쓸 상황도 아니었다.
좌군의 싸움이 한참 무르익을 무렵, 그곳에서는 히르직스가 이끄는 2만 5천의 남부기병과, 부마 예르마크 경이 이끄는 같은 남부기병 1만 5천과 서부 장갑보병 1만5천이 막 접전을 제대로 시작한 참이었다.
하지만 휘하 병력이 진격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우군 사령관 예르마크 경은 저격으로 즉사한 딸 루이제 대군의 시신 앞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앉아 전장을 맥없이 구경만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아프지 않으십니까?”
의무관이 조금 전 히르직스에게 입은 허벅지 부상을 봉합하며 조심스레 물었지만 그는 아픔도 전혀 느끼지 못한 듯 멍한 얼굴로 고개만 젓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있는 좌군 쪽에서 온 한 무리의 기병들이 다가오는 기척에도 여전히 넋 나간 얼굴이었다.
“예르마크 세닉 경.”
기병들 사이에서 중갑옷 차림의 한 여자 무장이 불쑥 나와 투구를 벗어보였다. 흰 얼굴, 새파란 눈에 금발의 학자풍 얼굴 위로 거의 한 뼘의 큰 흉터가 어색한 대각선을 그리고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예르마크 경은 황제가 ‘지원군 명목으로’ 보내 온 상장군 제네르를 힐끔 올려보았다. 그는 말 위에서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고 있는 제네르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최대한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의도로 왔는지 압니다. 하크로딘 상장군.”
“…….”
“경이 이제 상급자군요.”
“상께서 제게 우군을 지휘하라 하셨습니다.”
“내 절대 흔들리지 않을 테니 제발 선봉에서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시오.”
“앞뒤가 안 맞는 말이라는 건 아시죠?”
제네르는 무자비할 만큼 곧바로 정곡을 찔렀다.
“몸도 성치 않으십니다. 전투는 제가 지휘할 테니 후방에서 참모진을 이끌어 주십시오.”
“응급처치는 거의 끝났으니 몇 시간은 말을 탈 수 있소.”
“볼트를 쏜 사람은 아무도 모르는데, 누구에게 원수를 갚게요?”
“히르직스 그자와 싸우다 이리 되었으니 책임질 건 그자밖에 더 있소.”
“비합리적입니다. 여기 계십시오.”
제네르가 딱 잘라 거절하며 투구를 다시 꾹 눌러썼다. 사실 그 역시도 지난 제롬과의 대결에서 머리를 다쳐 몸이 아주 성한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앞장서 달려나가 직접 싸우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네르의 매몰찬 거절에 예르마크 경이 발끈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대도 히르직스 그자와 싸우다가 얼굴이 그 지경이 되지 않았소! 싸움으로는 그대도 상대가 안 되니 내가 없애 주겠다니까!”
예르마크가 제네르의 왼쪽 얼굴을 가로질러 깊이 난 큰 도끼자국을 가리키며 씩씩거렸지만 제네르는 상처를 더듬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무장으로서 싸운 흔적일 뿐이니 그자에게 사사로운 감정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군령이니 이곳에 머무십시오. 제가 해결합니다.”
흥분한 예르마크 경에게 단호하게 경고를 준 제네르는 그래도 전장에 나가겠다며 계속 억지를 부리는 그의 거친 목소리를 들은 척 만 척 전방으로 말을 돌렸다.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는데.”
히르직스와의 첫 대결을 떠올린 제네르는 도끼 자국이 남은 얼굴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그도 1대1 대결로는 자신이 그 괴물과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동맹군 내에 어차피 그를 상대할 무장이 없으니 차라리 ‘눈치껏 잘 피할’ 자신을 내보낸 황제의 뜻도 분명했다.
“그래, 이번은 잘 피해야지.”
제네르는 전장을 향해 경쾌하게 나아가는 정든 얼룩무늬 말의 목덜미를 두드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그 괴물과 직접 싸울 생각은 없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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