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53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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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시안트 동쪽 성벽을 지키는 연합군 병력은 근위대 2군단의 2개 대대 병력이었다.
2천 남짓 되는 수비병들은 릴라크가 이끄는 5천의 기병들이 성벽 앞에 집결하는 모습에 잠시 긴장했지만 특별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전방에 포진한 건 기병들뿐이었고, 5백 정도 되어 보이는 가디언들을 빼면 성벽을 뚫기 위한 대규모 보병대도 보이지 않았다.
어쨌든 지금 상태로 보아 저대로 공성전을 벌이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도대체 뭐 하는 속셈이지?”
동쪽 성문 위 망루에 선 수비군 선임 대대장이 망원경으로 동맹군 진영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친놈들이지 뭐겠습니까.”
누군가의 대답에 몇몇 참모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지어질 당시에야 ‘돈만 까먹은 비경제적인 설계’라며 집중포화를 당했다지만 지금의 수비병 입장에서야 이렇게 육중하고 높은 벽 위에 눌러앉아 다른 부대가 선혈이 낭자한 전장에서 싸우는 광경을 남 일처럼 구경할 수 있다는 것도 지금까지는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사실 적이 바보가 아니라면 성공 가능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안 보이는 이런 곳을 치려 들지는 않을 터였다. 사오시안트 동쪽 성벽은 지형 자체가 가파른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데다가 웬만한 10층 건물에 맞먹는 어마어마한 높이였다.
이 성벽의 끝자락은 바다와 접하고 있었지만 모래밭 혹은 갯벌로 이루어진 서쪽 해안선―지금 양쪽 주력군이 피 말리는 교전중인―과는 달리 동쪽 해안선은 까마득한 수직 절벽이라 측면 공격도 불가능했다.
“자신감은 좋지만 긴장은 풀지 마라.”
가디언인 선임 대대장이 흐트러지는 분위기에 얼른 못을 박았다.
“‘등급 없는 가디언’이 싸움만 잘 하는 건 아니다. ……응?”
망원경을 계속 눈에 대고 있던 그가 갑자기 코를 킁킁거렸다.
“이봐, 무슨 냄새 안 나나?”
대대장의 말에 마찬가지로 이상한 냄새를 맡은 가디언이 급히 달려가 성벽 안쪽을 돌아보았다.
“아래에서 연기가 납니다! 지하실 비품창고의 환기창 같습니다!”
“불?”
대대장이 급히 제어 판넬을 확인했지만 당연히 울려야 할 화재경보에는 아무 표시가 없었다.
“빌어먹을, 엉터리 경보기 같으니. 소방대 들여보내서 빨리 끄라고 해. 원인이 뭔지 빨리 알아내. 혹시 배신자나 적 특수부대가 들어와 있을지도 모르니까.”
대대장이 장교 중 한 명에게 내려가라며 손짓했지만 속으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망원경에 다시 눈을 댔던 그는 냄새가 조금 전보다 훨씬 짙어진 것을 다시 느꼈다. 멀리 떨어진 지하실이라고 하기는 탄내가 너무 강했다.
“지하실에만 불난 거 맞나?”
그가 다시 판넬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아무 표시도 없었다. 그때, 성벽 아래쪽에서 병사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와 알렸다.
“2층 무기고에 불입니다!”
“지하실이라며?”
대대장은 이번엔 직접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두꺼운 성벽의 안쪽은 건물처럼 각종 용도의 방들로 만들어져 있었고, 그곳에서 불이 났다는 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성벽 자체에는 별 문제 없습니다. 설사 불길을 못 잡아도 성 자체는 기본적으로 내화구조니 그냥 안쪽만 타고 끝날 겁니다. 그러니…….”
침착하게 조언하던 사역부대 엔지니어가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었다. 연기가 나는 곳은 성문이 있는 망루 부근뿐만이 아니었다. 이 긴 동쪽 성벽 하부의 창이 있는 곳곳에서 모조리 크고 작은 연기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대대장은 지하실에서 콜록거리고 나오고 있는 병사에게 큰 소리로 물었다.
“이봐! 도대체 어디서 불이 난 거냐!”
“벽 안쪽에서 연기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벽 안? 벽 안에는 인공석하고 철골뿐인데 무슨 불이 나?”
“모르겠습니다! 그냥 벽이 타기 시작했습니다!”
대대장이 고개를 갸웃거린 순간, 성벽이 갑자기 우지끈 하며 크게 흔들렸다. 깜짝 놀란 대대장이 난간을 급히 붙들며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울림이 온 곳은 해안 절벽과 마주하고 있는 성벽 제일 끝자락의 수비탑이었다. 동쪽 성벽에서 가장 높은 그 탑의 중간이 난데없이 주저앉더니 옆으로 맥없이 붕괴되고 있었다.
“뭐냐! 저건 도대체!”
경악을 한 대대장이 자리에 굳어버렸다. 공격을 받거나, 타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그냥’ 주저앉은 것이었다. 탑 안에 있었을 병사들이 어찌되었을지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저긴 또 왜 무너져?”
대대장이 고함을 질렀다. 무너진 안쪽으로 성벽을 받치는 내부 뼈대라고 할 철골이 마치 젓가락처럼 휘어진 채 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철골이 왜 타냐고? 저게 무슨 나뭇가지도 아니고!”
대대장이 악을 썼지만 이 기이한 광경에 엔지니어도 이번은 제대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성벽을 견고하게 받쳐야 할 철골이 도리어 양초의 심지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힘없이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설마…….”
순간, 대대장이 멍한 얼굴로 자신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이런, 맙소사.”
동쪽 성벽 밖에서 집결한 5천의 기병과 5백의 가디언들은 선봉에 선 대장군 릴라크가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은 채 유달리 높고 위압적인 성벽만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모습에 하나같이 의아한 얼굴이었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성벽 위 근위대들도 ‘올 테면 와 봐라’는 식으로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공격은 하는 겁니까?”
“기다려.”
기사단 연대장의 물음에 릴라크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기계장치에 불편한 몸을 기댄 그는 이 추위 속에서도 몇십 분째 미동조차 않은 채 눈만 가늘게 뜨고 있었다. 평소 천방지축으로 날뛰던 이 단장이 갑자기 이상하리만큼 과묵해진 모습에 다른 참모들도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치만 살필 수밖에 없었다.
“성벽에 웬 연기가 보입니다.”
망원경으로 줄곧 성벽을 살피던 참모가 갑자기 손끝으로 성벽을 가리켰다.
“연기가 작은 것을 보아 큰 화재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냥 안에서 뭘 태우고 있던가…….”
참모들이 모두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는 표정들이었지만 릴라크의 입가에 묘한 긴장감이 번지고 있었다. 처음 한곳에서 시작된 그 정체불명의 연기는 조금씩 그 범위를 키워가고 있었다.
“돌격 준비.”
“예? 어디로 말입니까? 성벽에 말씀입니까?”
“잔말 말고 각 연대는 10열 종대로 돌격할 준비해! 1연대와 함께 내가 앞장선다!”
“아, 알겠습니다.”
단장의 명령을 받은 나팔수의 긴 나팔소리가 5천의 기병들에게 공격 준비를 알렸다. 이 대부대가 연대별로 10열 종대를 짠다는 건 무려 100줄의 어마어마하게 긴 꼬리 5개를 이루고 나간다는 뜻이었으니 성벽에 하는 돌격치고는 꽤나 기이한 모양이었다.
그때, 성벽 쪽에서 땅을 울리는 굉음이 들렸다. 이곳까지 전해지는 무서운 울림에 막 대오를 정비하던 기병들의 시선이 일제히 성벽으로 쏠렸다.
“저, 저게……도대체…….”
몇몇 장교들이 멍한 얼굴로 입을 가렸다. 거의 10층 높이에 달하던 동쪽 성벽 제일 끝, 해안 수비탑이 갑자기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미처 대비하는 못한 근위대 병사들이 무너지는 성벽 잔해와 함께 바닥에 꽂히는 끔찍한 광경이 망원경이나 스코프 너머로 그대로 보였다.
“다, 단장님! 저게 뭡니까!”
공격하는 쪽이었지만 믿어지지 않는 황당한 광경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동쪽 끝을 시작으로 서쪽을 향해 마치 도미노처럼 성벽이 조금씩 붕괴되면서 공포에 질린 수비병들이 서쪽으로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모습이 보였다.
“황상께서 베푸신 기적이다!”
릴라크가 깃발을 번쩍 치켜들었다. 이 농담 아닌 농담을 기병과 가디언들이 진짜로 믿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눈앞에서 ‘기적’이 벌어진 건 사실이었고, 황제가 이 기적을 ‘예견’하고 릴라크에게 이곳에서 대기할 것을 명한 것만은 분명했다.
기병들은 단장을 따라 창을 들며 이미 무너지고 있는 성벽을 위협적인 함성으로 또다시 울렸다. 그에 화답하듯 성문 망루 동쪽의 성벽까지 또다시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양쪽의 성벽이 모두 차례로 붕괴되면서 이젠 성문이 있는 망루만 어색할 만큼 폐허 속에 혼자 남아있었다.
“어딜 공격할까요!”
눈앞의 광경에 고무된 연대장들이 군침을 삼키며 단장의 명령을 재촉했다. 성벽 위의 수비병은 이미 그 폐허 밑에서 시체가 되었거나 도망쳤으니 동쪽 성벽은 완전히 무방비상태였다. ‘적 심장부에의 첫 번째 진주’라는 명예가 바로 그들 앞에 놓여있었다.
“어디냐고? 성문으로 당당하게 들어간다!”
릴라크는 기수에게서 황실 깃발이 함께 달린 큰 군기를 빼앗아 등에 비스듬히 메고는 바로 말에 박차를 가했다. 명령을 받은 릴라크의 백마가 앞발을 번쩍 치켜들어 큰 소리로 울부짖고는 앞발을 세차게 디디며 앞장서 돌진하기 시작했다. 깃발을 멘 릴라크를 따라 5천의 기병들이 긴 꼬리를 그리며 아직까지 옹색하게 남아 있는 성문 망루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디언들은 양 측면에서 성벽의 폐허를 넘는다! 가디언들이 진입해서 성문을 열면 기병들이 뒤따라 들어가!”
성문이 있는 망루는 이상하리만큼 온전했지만 불과 함께 붕괴된 거대한 성벽의 폐허가 그 양쪽으로 ‘옛 성벽’의 흔적을 따라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성벽이 무너진 건 사실이었지만 저 폐허 자체가 기병들에게는 돌파하기 불가능한 장벽이었다.
“그 꼬맹이 양반 생각보다 훨씬 꼼꼼하셨군.”
세나우스 2세를 떠올리며 릴라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성문의 망루만 안 무너진 건 결국 ‘길은 남겨두기 위한’ 것이 분명했다.
숨쉬기도 어려울 정도로 뿌옇게 찬 먼지 속에서 망루는 독립된 건물처럼 옹색하게 서 있었다. 망루 위에 얼마 안 되는 수비병들과 지휘부 가디언들이 남아있기는 했지만 어차피 저항은 불가능했다. 성벽은 무너졌고, 수비병들은 돌더미와 함께 갈가리 찢겼거나 운이 좋아 먼저 빠져나갔어도 무너지는 와중에 중상을 입어 싸울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게 뭐냐.”
너무도 어처구니없이 돌변해버린 상황에 수비군 대대장은 놀라다 못해 멍한 표정으로 아래를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물론이고 병사들 모두 뿌연 먼지 속에서 콜록거리고 있었고, 그가 있는 망루만 안 무너진 것은 도리어 기적에 가까웠다. 코앞으로 5천의 기병과 5백의 가디언들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로서는, 아니 그의 부대로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차라리……죽는 게 나았을걸.”
선임대대장이 양쪽으로 무너진 성벽을 번갈아 돌아보며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등에 깃발을 메고 기병대 선봉에서 달려온 릴라크가 망루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황상의 명이니 당장 성문을 열지 못할까!”
대대장은 입술을 꽉 깨물며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기병들을 따라오고 있는 동맹군 가디언들이 ‘폐허’를 넘어올 테고, 이젠 그들이 안에서 성문을 여는 것도 사실상 막을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한다! 1군단처럼 복종하는 근위대는 상께서 복귀를 받아주실 것이나 저항하는 자들에게 자비는 없다!”
릴라크의 날카로운 고함이 절망감에 의욕마저 꺾여버린 망루 위 지휘부를 무섭게 위협했다. 동맹군 가디언들은 이미 성벽을 하나 둘 기어오르고 있었다. 저들이 안쪽에서 신음하고 있는 부상자들을 학살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대다수는 중상을 입어 저항은 고사하고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숨이 끊어질 형편이었다.
“대대장님, 어, 어쩌죠?”
참모들이 벌벌 떨며 물었다. 직접 열어주고 부하들이라도 살릴지, 아니면 의미 없는 저항을 하고 모조리 죽을지의 선택이었다. 누구 손으로 여느냐의 문제일 뿐,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성문을……열어라.”
대대장이 눈가에 엉겨붙은 먼지 덩어리를 옷소매로 닦아내며 떨리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이 덩치 큰 베테랑 가디언의 눈이 붉고 축축하게 변해 있었고 이곳의 군인들 대부분이 마찬가지였다. 망루 위 누구도 반대의견을 내지 않았다.
명을 받은 병사는 묵묵히 안전장치를 풀고 레버를 당겼다. 그리고 성문 안쪽에 절망어린 얼굴로 모여 있던 근위대 병사들이 잠금장치가 풀린 성문을 안에서 당겨 열었다. 반쯤 고장난 성문이 수동으로 열리며 끼익 하는 고약한 소음이 주변을 뿌옇게 채운 먼지 속을 번져나갔다.
“9연대와 가디언 100명이 이곳에 남아 상황을 수습하고 나머지 부대는 나를 따른다!”
릴라크는 펄럭이는 깃발에 한 번 입을 맞추고는 다시 남쪽을 가리켰다. 사오시안트의 가파른 절벽 해안선을 따라 널찍한 해안도로가 사오시안트 별궁으로 바로 이어져 있었다.
“이제 적의 소굴로 들어간다!”
말을 몰고 절벽 옆 도로에 접어든 릴라크는 발밑으로 까마득히 먼 곳에서 철썩이고 있는 바닷물을 내려다보며 갑자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딸과 함께 절벽에서 떨어져 완전히 망가졌던 팔을 더듬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오랜만에 그 호래자식을 만나겠구나.”
그는 말에 힘껏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는 멀리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사오시안트 별궁을 향해 다시 전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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