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51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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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흰 ‘황제’가 어디로 갔는지 빨리 찾아.”
함께 온 가디언들에게 어두운 복도 쪽을 손짓해 보인 베흔은 부상을 입은 가디언만을 거느리고 안에 성큼 들어섰다. 침실의 가구들은 모조리 박살이 나 있었고 벽과 케노피, 커튼은 피로 범벅이었다. 바로 조금 전 벌어진 참사인지, 바닥의 피는 아직 채 굳지도 않은 채 생생했다.
“훗, 차라리 뒈지고 시체만 남아있다면 좋았을 텐데.”
구르베스 일행이 아직 따라오지 않은 것을 힐끗 확인한 베흔이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바로 본심을 드러냈다.
“추격해야겠다.”
허탈해진 베흔이 큰 칼을 일단 칼집에 도로 끼워 넣었다. 뒤따라온 가디언이 방 안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곳에 성벽을 무력화시킬 장치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그렇기야 하지.”
부하의 말을 들은 베흔은 황제 침실 안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서는 큰 침대 매트리스를 확 걷어내고 그 아래를 받치던 철제 프레임도 힘으로 뜯어내 내던졌다. 겉보기엔 그냥 유달리 큰 고정 침대로 보이던 그곳 밑에는 어른의 한 아름 크기 정도 됨직한 우물 같은 것이 비죽이 올라 있었다.
“이것도 목적 중 하나이긴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돼.”
“예?”
부하의 물음을 한 귀로 흘리며, 베흔은 그 ‘우물’의 뚜껑을 열고 안에 손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그의 긴 팔로 가까스로 닿을 정도 깊이에 어렵게 만져지는 쇠 손잡이를 단단히 붙잡았다. 수백 년의 세월 동안 누구의 손길도 타지 않은 금속의 느낌이 섬뜩할 만큼 차가웠다.
“성벽을 통째로 증발시켜도 지금 전황에서 ‘승리’는 어려우니까.”
짧은 한 마디와 함께, 베흔이 팔에 힘을 꽉 주어 손잡이를 힘껏 잡아당겼다. 녹이 슨 굵은 쇠사슬이 어딘가에 긁히는지 듣기 싫은 마찰음이 방 안을 울렸다.
“그게 끝입니까?”
“응.”
베흔은 붉은 녹이 잔뜩 묻은 손을 툭툭 털었다. 얼른 창으로 달려가 커튼을 들쳐본 가디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화재의 연기로 매캐해진 사오시안트 시 야경 뒤로 성벽이 희미하게 보였지만 조금 전과 달라진 건 전혀 없었다.
“아무 일 없는데요?”
무언가 드라마틱한 장관을 기대했는지, 가디언이 허탈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거렸다.
“동력이 끊겨서 그런 것 아닐까요?”
방 안에 흩어진 수우의 유류품들을 주섬주섬 챙기던 베흔은 멋대로 넘겨짚는 부하에게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이 멍청아, 비상 장치를 누가 중앙 동력과 연결시키나?”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다른 놈 손으로 넘어갔으니 이제 신경 쓰지 말고 없어진 새끼…… 수우 황제나 찾아.”
평소 쓰던 말버릇이 튀어나올 뻔했던 베흔은 침실 문 앞에 막 도착한 구르베스 일행의 모습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구르베스는 한때 수우와 단란한 시기를 보냈던 그립던 공간이 이젠 끔찍한 학살장으로 변해버린 데 놀랐는지 잠시 자리에 굳어있었다.
“북쪽 복도입니다! 대장!”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 사이로 어두운 복도 쪽에서 조금 전 보낸 근위대 가디언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적이 비상 엘리베이터 쪽으로 도망칩니다!”
“뭐?”
베흔과 구르베스는 빈 침실을 버려두고 급히 밖으로 달려 나갔다. 북쪽 복도에서 여러 명의 다급한 발소리, 쫓고 쫓기며 질러대는 요란스런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베흔은 깜깜한 복도에 널브러진 시체와 장애물들을 뛰어넘으며 악을 쓰고 달려갔다.
“놈들 잡아!”
그의 눈앞에 10명이 넘는 그림자와 그들을 쫓는 가디언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후미의 한 명은 등에 사람 크기의 큰 자루 하나를 짊어지고 있었다.
“가고 있으니까 붙들어 놓으라고!”
베흔이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그 검은 그림자들은 추격자들을 놀리듯 모퉁이를 휙 돌아 사라져버렸다. 그들을 쫓아 모퉁이를 막 돌아선 베흔의 앞에는 앞서 그들을 쫓던 2명의 근위대 가디언들이 헐떡거리며 엘리베이터 판넬 앞에 서 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몇 발짝만 앞섰으면 잡을 수 있었는데! 이제 어쩌죠?”
“어쩌긴 뭘 어째!”
베흔이 옆에 죽어 쓰러져 있는 병사의 칼을 집어 들고는 엘리베이터 문으로 갑자기 내달렸다.
“으익!”
가디언들이 기겁을 하고 옆으로 비켜서며 재빨리 귀를 막았다. 베흔이 내지른 칼이 귀를 찢는 마찰음을 내며 엘리베이터의 양쪽 문 사이 틈새에 푹 꽂혔다.
“열려! 열리라고!”
베흔은 칼이 부러지건 말건 온 힘을 다해 옆으로 밀었다. 잠시 버티던 문은 결국 그의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언뜻 무식해 보이는 이 황당한 시도에 놀랐던 가디언들도 결국 틈새에 손을 끼워 넣고 함께 벌리기 시작했다.
“하나, 둘! 당겨!”
6명이나 되는 가디언들의 괴력이 가해지자 엘리베이터의 단단한 문도 결국 고리가 끊어지며 확 열리고 말았다. 속도를 내기 위해 진공상태에 가깝게 되어 있는 이 특별한 고속 엘리베이터 코어로 실내 공기가 확 빨려 들어가며 중심을 잃은 가디언들 몇이 바닥에 벌렁 나자빠졌다.
“조심하라니까! 멍청아!”
베흔이 빨려 들어갈 뻔했던 근위대 가디언의 손을 얼른 붙잡았다. 문이 강제로 열리고 진공의 엘리베이터 코어 내로 바깥공기가 빨려들면서 ‘이상기압’을 알리는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적이 어딨나!”
베흔의 물음에 가디언 한 명이 재빨리 안쪽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도망치는 적들이 탄 엘리베이터는 지하를 향해 막 속도를 붙이려다가 강제로 문이 열리면서 비상경보가 울려 급제동이 걸리고 있었다.
“23층쯤 되는 것 같습니다!”
“감히 날 불량품이라고 했것다?”
베흔이 등에 멘 긴 칼을 추슬르며 갑자기 기이하게 웃었다.
“내가 여기서 추격할 테니 23층에서 차단하고 있으시오.”
베흔은 뒤따라온 구르베스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가디언들에게 뒤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내고는 이 어두컴컴한 엘리베이터 코어 안으로 서슴없이 몸을 날렸다.
병력들 중 가장 많은 40여명의 ‘코런덤’들을 이끌고 황제 처소가 있는 38층을 급습한 건 이곳에 가장 익숙하고, ‘보안국장’이라는 간판을 활용할 수 있는 쿠마르였다.
항구의 화재와 외부의 전투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이 성 바깥, 그리고 별궁 외부에 쏠려 있다보니 정작 별궁의 핵심지역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덕분에 아스탈의 계획대로 미리 침투한 엔지니어들이 별궁의 중앙 동력을 모두 차단한 순간, 각 층에서 일시에 공격을 개시했고, 지금까지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사실 그의 당초 계획은 억류 상태의 수우를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죽이지 마라’는 아스탈의 급한 지시로 일단은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아스탈이 상황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 건 아니었지만 ‘성 밖에 있는 놈을 먼저 죽인 후에 죽여’라는 것을 보아 카렐의 죽음이 확인된 후에 수우를 없애려는 속셈인 모양이었다.
우스꽝스럽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는 세 세력이 모두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연합군과 동맹군은 서로의 황제를 죽이고 단독 황제가 되는 것이 목적일 테고, 아스탈의 목적은 전황을 세심히 관찰해가며 ‘양쪽이 이번 싸움에서 모두 몰락하도록’ 두 황제 모두를 죽이는 것이었다.
쿠마르도 자신이 데려온 이 델루지 가 청년을 계속 살려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저 너무 일찍 죽였다가 자칫 동맹군에 좋은 일만 시켜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목숨을 보류해 둔 것일 뿐이었다. 어차피 수우의 목숨은 손아귀에 들어와 있으니, 카렐만 죽이면 일은 다 끝나는 셈이었다.
물론 아스탈은 ‘최악의 상황’―혹시라도 카렐이 끝까지 안 죽고 버티는 경우―에는 이 값어치 없는 황제를 아예 살려줄까 하는 생각까지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제기랄, 간 떨어지는 줄 알았네.”
가디언들에 쫓겨 엘리베이터에 오른 쿠마르가 놀랐던 가슴을 쓸어내렸다. 사실 쫓아오는 2명의 가디언 정도는 겁낼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 뒤에서 더 많은 병력이 오는 것 같았다는 게 문제였다. 어쨌든, ‘황제’인 수우를 납치한 이상 최대한 조심을 하는 게 최선이었다.
“어떤 분대가 놓친 건지는 모르지만 38층에 남은 놈들한테 저놈들 빨리 처리하라고 해. 빌어먹을.”
허겁지겁 엘리베이터 문을 닫은 쿠마르가 함께 온 장교에게 버럭 신경질을 냈다.
“지하로 내려갑니다.”
“빨리, 빨리.”
쿠마르가 코런덤들을 짜증스레 재촉했다. 지하의 차를 이용해 최대한 빨리 궁을 빠져나가야 했다.
“아직 괜찮지?”
쿠마르가 후미의 코런덤이 지고 온 자루를 가리켰다.
“물론입니다.”
그가 어깨에 지고 있는 큰 자루를 흔들어 보였다. 안에서 여전히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아 황제 대우도 변변히 못 받은 이 불운한 청년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쿠마르가 자루를 더듬어 얼굴 부분을 찾아냈다.
“걱정 마십시오, 위험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거니까요.”
쿠마르가 자루를 두드리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했지만 수우가 믿으리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때, 갑자기 엘리베이터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뭐야?”
엘리베이터가 출발하면서 일단 안도했던 보안국장 쿠마르는 갑자기 비상경보가 울리며 엘리베이터가 정지하자 기겁을 하고 놀랐다.
“고장이야?”
그는 판넬을 신경질적으로 두들겼지만 강제로 문이 열리고 안전장치가 발동되면서 급정지한 엘리베이터가 바로 다시 움직일 리가 없었다. 바로 뒤이어 무언가 쿵 하는 육중한 충격이 다시 엘리베이터 카를 흔들었다.
“위에 무언가 떨어졌습니다!”
코런덤들이 일제히 석궁을 위로 겨누었다. 위에서 무언가 무서운 기세로 두들기는 것을 보아 어떤 미친놈―힘을 보아 아마도 가디언인 것 같은―이 엘리베이터 위에 뛰어내린 것이 분명했다. 그때, 또다시 찢어지는 소음이 울리며 천장을 뚫고 웬 긴 칼날이 확 내리꽂혔다.
“으익!”
난데없는 칼날벼락에 놀란 쿠마르와 코런덤들이 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빠져나가십시오! 빨리요!”
분대장이 엘리베이터 문의 안전장치를 풀고 강제로 열었다. 엘리베이터는 두 층 사이에 애매하게 걸쳐져 있었지만 아래쪽으로 사람 한두 명 빠져나가는 정도는 가능해 보였다.
“젠장! 나가다가 움직이면 어쩌라고!”
겁에 질린 쿠마르가 소리를 질렀지만 분대장은 그런 그를 억지로 문 밖으로 밀어냈다.
“빨리요!”
그 와중에 또다시 천장을 두들기는 굉음과 함께 천장 한쪽이 움푹 주저앉으며 조명과 천장 유리 장식품이 깨져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어떤 놈이야!”
파랗게 질린 쿠마르는 수우가 들어있는 자루와 함께 분대장의 손에 밀려 반 강제로 바닥에 동댕이쳐졌다. 그리고 병사들도 엘리베이터에서 하나 둘 기어 나왔다.
“계단! 계단!”
겁에 질린 쿠마르는 엘리베이터 옆의 계단으로 뛰어들려 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분대장이 얼른 붙들었다.
“누가 내려옵니다! 다른 데가 낫겠습니다!”
“엉?”
쿠마르가 위를 올려보았다. 38층에서부터 뒤를 쫓아온 구르베스의 크바르나들이 가파른 비상계단을 원숭이처럼 훌쩍훌쩍 뛰어넘으며 무서운 속도로 내려오고 있었다.
“젠장! 반대편! 반대편 계단으로 가!”
쿠마르가 사무실이 있는 더 안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몰라도 크고 작은 책상들과 사무집기로 꽉 찬 것을 보아 일반 행정부서 중 어딘가가 분명했다. 동력이 끊기고 불도 꺼지면서 놀란 공무원들이 여기저기서 웅성대고 있었지만 다급한 그에게는 지금 내려선 층이 ‘어느 부’가 쓰는 곳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빨리 따라와!”
그는 영문도 모른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자신들을 쳐다보는 ‘공무원들’ 사이를 가로질러 반대편 계단으로 뛰기 시작했다.
“으읍!”
그 때, 몇 번이나 두들겨 맞은 엘리베이터 천장이 결국 큰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던 운 없는 코런덤 머리 위를 웬 시커멓고 육중한 그림자가 확 덮쳤다.
“너희 대장 놈은 어디 갔냐!”
그 그림자가 굵은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지만 대답을 듣고 싶은 맘은 별로 없는 듯 보였다. 막 나가려던 코런덤의 뒷덜미를 확 낚아챈 베흔은 상대가 채 몸에 불을 붙일 여유도 주지 않고 칼자루로 목뼈를 산산이 으깨어 버렸다.
“22층 안쪽으로 도망칩니다!”
근위대 가디언이 좁은 틈새로 바닥에 뛰어내리며 외쳤다. ‘22층’이라는 말에 베흔의 귀가 순간 번쩍 뜨였다.
“여기가 22층이라고?”
베흔이 얼른 되물었다. 22층은 다름아닌 아리아노가 근무하는, 그리고 그의 부하들이 있는 ‘법무부’ 구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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