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50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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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문소에서부터 함께 온 근위대 차량의 감시를 받으며 별궁 앞에 도착한 아리아노는 먼저 왔다는 코런덤 헤네티들이 도대체 어디 있는지를 열심히 살폈지만 도무지 보이지를 않았다. 300명이나 되는 ‘은색 갑옷 차림의 무장군인’들이 들어왔다면 어디서든 보여야 했지만 하늘로 사라졌는지 한 명도 눈에 띄지를 않았다.
“이미 안에까지 들어갔나 보오.”
망토로 온몸을 감춘 베흔이 뻐근한 등을 움츠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별궁 문을 앞에 두고 아리아노도 조금 긴장했는지 새삼 침을 꿀꺽 삼켰다.
“놈들 목적이 뭘까요?”
“글쎄.”
사실 베흔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있었지만 옆에 있는 ‘임산부’를 생각해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남편 수우가 이곳에서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아직 모르는 구르베스는 아직 제대로 부르지도 않은 배를 이미 몇 번째 만지작거리며 잔뜩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베흔은 앞에 있는 아리아노 쪽에 슬쩍 손을 내밀어 근위대식 수화를 전했다.
- 양쪽 황제를 모두 없애려는 거겠지. -
그의 손짓을 읽은 아리아노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앞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빌어먹을 과부 신세.”
아리아노의 즉각적인 반응에 당황한 베흔이 얼른 구르베스의 눈치를 보았지만 다행히 그는 아직 아리아노의 말 속에 숨은 두 가지 의미 중 하나만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사이, 일행이 탄 차는 사오시안트 별궁 앞에 접어들었다.
성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치열한 전투만큼이나 별궁 입구 안쪽의 로비도 정신이 없었다. 방문객을 맞아주는 넓은 로비 안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관리, 군인들, 다급한 상황을 전하는 고함소리로 귀를 막아야 할 지경이었다.
베흔 일행도 일단 법무대신인 아리아노의 얼굴을 앞세우고 이곳까지는 들어올 수 있었지만 더 이상은 힘들었다.
“내 이런 신세로 돌아올 줄이야.”
아리아노의 개인 가디언으로 위장한 베흔이 망토로 얼굴을 가리며 작은 소리로 자신의 현실을 저주했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수많은 부하들의 옹위를 받으며 위풍당당하게 드나들던 이곳은 더 이상 그의 손아귀에 있지 않았다.
“여기까지.”
아리아노가 앞장서는 근위대 사관의 눈치를 보며 베흔에게도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눈짓했다.
“이제부터는 혼자 가야 해.”
아리아노가 베흔에게 계단 쪽을 슬쩍 손짓했다. 멀리서 아리아노를 ‘기다리고 있는’ 사복 차림의 보안국 사람들이 보였다. 딱히 중무장을 한 건 아니지만 가슴에 달고 있는 붉은 명찰만으로도 항상 공직자들을 섬뜩하도록 만드는 자들이었다.
일행을 놔둔 채 혼자 나아가려는 아리아노의 어깨를 베흔이 갑자기 덥석 잡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나대는 성깔 오늘만은 좀 죽이고 있으시오. 나대서 좋을 것 없는 날이니.”
작별인사치고는 꽤나 거칠고 멋대가리 없었지만 아리아노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나대기는 자기가 더하면서.”
아리아노가 얼굴을 찡그려 보였지만 베흔은 본척만척 휙 돌아서서는 사람들 사이로 멀어져갔다.
베흔과 일행을 모두 보내고 혼자 남은 아리아노는 다가오는 보안국 요원들을 무시하며 멍하니 천장을 올려보았다. 남편의 죽음을 알고 처음으로 혼자 남겨진 순간이었다.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지만 이제 ‘그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남편을 죽인 원수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빌어먹을 내 팔자 같으니.”
마음을 달래보려 했지만 아리아노는 자꾸 시큰거리는 눈시울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행여 알아볼까 하는 생각에 그는 차마 고개도 숙이지 못한 채로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빨리 오십시오.”
어느새 곁에 다가온 보안국 요원의 재촉에 아리아노가 마지못해 걸음을 떼었지만 걸음걸음이 추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그도 자진해 인질 비슷한 노릇을 자처하긴 했지만 기댈 것도 없이 미련하게 나선 건 아니었다. 그의 뒤로는 검문소에서부터 함께 온 덩치 큰 법무부 수사관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22층.”
엘리베이터에 함께 오른 아리아노와 3명의 휘하 수사관들, 그리고 보안국 요원들 사이에 잠시 냉랭한 기운이 번졌다.
사실 이 두 조직은 꽤나 서먹한 관계였다. 법무부 수사관들이 ‘공식적으로’ 부조리를 처단하는 역할이라면 보안국 요원들은 음지에서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고, 많은 영역에서 사사건건 ‘원칙과 실리’를 놓고 충돌을 벌이곤 했다. 그렇다보니 지금처럼 그저 함께 있는 정도로도 어색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들의 눈치도 볼 겸 뒤를 힐끔 돌아보았던 아리아노는 보안국 요원이 허리에 달고 있는 무장(武裝)에 문득 시선을 주었다.
‘으음?’
아리아노의 몸이 순간 굳었다. 요원이 지닌 석궁은 옷깃 안에 살짝 감추어져 있었지만 허벅지에 차고 있는 볼트 통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통 위로 비죽 머리를 내밀고 있는 특이한 형태의 짧은 볼트가 아리아노의 날카로운 눈썰미에 딱 걸렸다.
‘젠장.’
아리아노가 천천히 고개를 앞으로 돌리며 이를 갈았다. 바로 몇 분 전, 항구에서 목 옆에 볼트에 맞았던 베흔 휘하 가디언을 떠올렸다. 그의 목 옆에 박혀 있던 볼트가 바로 저런 모양이었다.
그가 필사적으로 찾던 원수는 바로 등 뒤에 있었다.
그때, 갑자기 덜컹 하는 큰 충격이 엘리베이터를 엄습했다. 그리고 조명까지도 꺼져버리며 작은 엘리베이터 카 안이 순간 암흑에 휩싸였다.
아리아노와 헤어진 베흔의 곁에는 그가 부하들을 시켜 지난 몇 달간 눈에 불을 켜고 찾던 여자가 함께 있었다. 구르베스와 함께 있는 자신의 처지를 새삼 곱씹어본 베흔은 이젠 세상이 완전히 변한 것 같다는 격세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계단에 들어선 베흔이 구르베스를 힐끔 돌아보며 물었다.
“38층까지 걸어갈 수 있겠소? 엘리베이터는 감시가 심하니 이쪽이 나을 거요.”
한때 ‘황비’로 떠받들었던 사람이었지만 베흔의 말투는 존대는 고사하고 그다지 공손하지도 않았다. 정확히는 존대를 하고픈 맘도 없었지만.
“아직 몸이 무거운 정도는 아닙니다. 36층 처소까지는 전에도 가끔 걸어 올랐었으니.”
구르베스는 베흔의 무례한 말투에도 별 반응 없이 자기 할 말만 짧게 끝냈다.
“38층이든 138층이든 난 남편만 되찾으면 됩니다.”
구르베스가 망토 속의 칼을 꼭 쥐며 먼저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올랐다.
계단 역시 별궁의 다른 구역들처럼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호젓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베흔과 구르베스, 4명의 가디언들과 20여명의 크바르나 일행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피해가거나 치어가며 급히 올랐다. 원래 24층까지는 민간인도 자주 드나드는 행정구역이다보니 딱히 단속 같은 건 없었고, 구르베스에게도, 베흔에게도 아주 익숙한 공간이었다.
‘신경 쓰이게.’
베흔은 앞장서는 구르베스를 올려보며 슬쩍 낯을 찡그렸다. 사실 저 여자가 갑작스레 나타나리라는 건 그도 예상 못했고, 황제도 사전에 아무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을 보아 미처 알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면 저 여자의 출현은 도움보다는 걸림돌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이를 황제로 성심껏 받들지 않은 것을 이제와 따지지는 않을 테니 너무 신경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 그저 그이와 평범한 삶으로 돌아가면 충분합니다.”
앞서가던 구르베스가 베흔의 곱지 않은 시선을 의식했는지 한 마디 꺼냈지만 지금 수우가 처해 있는 ‘꼴’을 잘 아는 베흔으로서는 ‘그저 받들지 않은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베흔에게서 아무 대답이 없자 앞서가던 구르베스가 비로소 무언가를 눈치 챘는지 뒤를 문득 돌아보았다.
“그이가……살아는 있습니까?”
“계속 가시오. 곧 만날 수 있을 테니.”
베흔이 퉁명스레 대꾸하며 그의 등을 거칠게 밀었다. 어딘지 알쏭달쏭한 그의 표현에 구르베스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 잔혹한 사내가 이 자리에서 솔직히 대답을 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들어왔지만 더 위층의 보안구역은 어떻게 들어갈 참입니까?”
구르베스의 물음에 베흔이 냉큼 대답했다.
“거기선 내 정체를 드러내야죠. 보안국이라면 몰라도 중앙본부엔 내가 직접 뽑은 똘똘한 측근들이 많으니 코앞에서 날 확인한다면 충분히 말이 통하겠지.”
베흔이 팔찌를 보이며 겉으로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자신이 ‘죽은 것’으로 알고 있는 중앙본부의 수하들이 이렇게 난데없이 나타난 자신의 모습에 기대처럼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지 그도 기대 반 걱정 반이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뛰어올라 6층을 막 넘어갈 무렵, 갑자기 계단실의 조명이 확 꺼져버렸다.
“엉?”
깜짝 놀란 베흔이 발을 헛디뎌 비틀거리는 구르베스를 얼른 붙잡았다.
“정전? 왜 다시 안 들어오지?”
베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동력이 끊겼다고 해도 보조동력이 바로 들어오는 것이 정상이었지만 컴컴해진 계단실은 다시 환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계단 구석의 작은 비상등만 궁색하게 켜져 있을 뿐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베흔은 구르베스를 뒤에 놔둔 채 허겁지겁 계단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가디언의 적외선 시야 덕분에 그에게는 이런 어둠은 별 문제가 아니었지만 보통의 민간인들이나 스코프를 가지지 않은 정규군 장병들은 사방에서 놀라 아우성을 치고 있었다.
“빌어먹을! 놈들이 선수를 쳤어!”
25층 계단에 선 베흔이 소리를 질렀다. 근위대 중앙본부가 시작되는 25층 계단은 평소 여러 명의 근위대 장병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지만 지금은 10구 가까운 시체들만 뒹굴고 있었다. 베흔이 죽은 병사들의 몸을 만졌지만 온기까지 여전했다. 적은 방금 전, 동력 차단과 동시에 이곳을 휩쓴 것이 분명했다.
“어떡하죠?”
베흔을 쫓아 달려온 동맹군 가디언이 다급히 물었다.
“황제 처소가 있는 38층으로 바로 간다.”
베흔이 한 손에 칼을 빼들고 가디언들과 함께 계단실을 뛰어올라가기 시작했다. 구르베스를 따르는 크바르나들이 조금씩 뒤처졌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어둠 속에서 계단을 몇 칸씩 성큼성큼 달려 올랐다. 하지만 각 층의 초소들은 이미 모조리 피바다였다.
“각 층에서 동시에 터뜨린 모양입니다!”
가디언 한 명이 소리를 지른 순간, 바로 위, 26층 계단에서 싸움이 벌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난 곳으로 재빨리 달려 올라간 베흔은 5명의 ‘보안국 요원’들에 둘러싸여 악전고투하고 있는 2명의 근위대 가디언을 발견했다.
“이놈들!”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도 애매모호했지만 베흔은 일단 그 보안국 요원들에게 큰 소리를 지르며 칼을 쳐들고 달려들었다. 베흔에게 바로 대항하려던 그들은 베흔 뒤로 몰려오는 4명의 또 다른 가디언들에 당황했는지 급히 26층 안으로 사라졌다.
“가, 감사합니다. 소속이…….”
온몸에 잔부상을 입은 채 마지막까지 버티던 그 근위대 가디언이 감사를 표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망토를 확 벗으며 다가온 ‘전 근위대장’의 모습에 그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경악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베흔이 가디언 한 명의 멱살을 확 잡으며 물었다.
“말다툼할 시간 없다. 난 베흔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베, 베흔 대장?”
“시간 없으니까 빨리 대답해!”
베흔의 쩌렁 하는 고함에 가디언의 머리칼이 흩날릴 지경이었다. 그 기세에 완전히 압도당해버린 가디언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보안국 감찰대라고 몇 명씩 와서 서류를 뒤지는 것 같더니……불이 꺼지자마자 갑자기 덮쳤습니다. 우리 초소 말고 다른 초소에서도 모두 같은 일이 벌어진 모양입니다.”
“보안국?”
베흔은 조금 전, 아리아노를 데려간 ‘보안국 요원들’을 떠올리며 순간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리아노 곁에는 그의 수하들이 여럿 있으니 쉽게 당하지는 않으리라 여겼지만 한편으로 신경이 쓰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베흔에게 여전히 멱살이 잡혀 있던 가디언이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베흔 대장 맞습니까? 정말 맞으십니까?”
“그럼 내가 귀신으로 보이냐? 이 새끼들아! 확인하고 싶으면 따라와!”
베흔이 그 가디언을 바닥에 팽개치며 다시 계단을 뛰어올랐다. 얼떨결에 일행이 된 그 가디언들도 베흔을 따라 급히 계단을 올랐다.
38층에 도착한 베흔이 고개를 저었다.
“맙소사.”
황제 처소가 있는 38층은 가장 많은 병력이 지키는 곳이었지만 덕분에 가장 집중적인 공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계단실부터 안쪽까지 거의 30구 가까운 시체들이 널려있었고 가디언들의 목 잘린 시체도 군데군데 보였다.
“이놈의 불은 언제 켜지는 거야!”
베흔이 악을 썼다. 보조동력은 여전히 먹통인지 실내는 아직까지도 암흑에 싸여 있었고, 정확히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비명소리가 38층 안쪽에서 울려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볼 수 있는 가디언들, 혹은 운 좋게 무장을 하고 있었을 경비병들이라면 모르지만 평소 스코프나 랜턴을 지니지 않는 중앙부서 군인들, 민간인들은 이런 암흑 속에서도 대낮처럼 볼 수 있는 헤네티들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당했을 것이 분명했다.
베흔은 널브러진 시체들을 짓밟으며 38층에 접어들었지만 예상대로 경비병, 시종들은 시체가 된 모습 뿐이었다. 군데군데 중상을 입은 채 버려진 자들이 살려달라며 손을 젓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베흔은 한때 화려한 조명과 장식물들로 장식되어 있었을 어두워진 복도를 가로질러 모서리의 ‘황제 침소’로 향했다.
“젠장.”
부서져 너덜거리는 문 앞에 선 베흔은 순간 자리에 굳어버렸다. 침대 위에도, 바닥에 널브러진 숱한 시체들 사이에서도 ‘수우 황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뒤따라온 가디언이 빤한 소리로 이 짧은 침묵을 깼다.
“놈들이 납치해서 도망친 모양입니다. ……죽여서 시체를 가져갔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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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 The Iron Vein [출판본] - 제1부 : 세상의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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