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47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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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오시안트의 북쪽 성벽을 지키던 수비군들은 성 밖의 해안에서 본격적인 교전이 개시되기만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동맹군의 주의가 그쪽으로 쏠릴 테고, 그때는 수비군 중 일부만 내보내 동맹군의 등 뒤를 쳐도 충분히 전세를 뒤집을 수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보안국에서 급보입니다.”
장교 한 명이 급히 전문을 전했다. 그곳에는 ‘적 우군 부사령관 루이제 대군이 죽었습니다.’라는 쿠마르의 메모가 적혀있었다.
“정말? 확인된 거냐?”
“예. 부마 예르마크 경도 다리의 과다출혈로 중상이랍니다.”
“허, 웬 행운이야?”
마누엘이 적에게 생포당했다는 소식에 한때 아찔했던 쿠베는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예르마크 경과 루이제가 지휘하는 동맹군 우군은 1만5천의 남부기병대와 1만5천의 서부보병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카렐이 직접 이끄는 좌군, 한동안은 지겨운 보병전이 예상되는 카나르 플라칼 경의 중군에 비한다면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부대였다.
“서부 장갑보병 때문에 걱정했는데 다행이야.”
쿠베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예르마크 경의 우군에 편제된 5천의 서부 장갑보병대는 10년 이상 경력의 베테랑 보병들 중 따로 선발해 편성하는 만큼 근위대나 몇몇 소규모 특수부대를 빼면 제국 정규보병대 중 최강으로 손꼽히는 강군이었다.
“그런데 제자리에서 꼼짝도 않고 있군. 박차고 나갈 기회를 기다리는 건지, 아니면 후방의 우릴 의식해서 남겨놓은 건지?”
쿠베가 얼굴을 찡그렸다. 5천의 장갑보병대는 중군과 우군 사이의 틈새 뒤쪽에 도사린 채 묵묵히 전장의 상황을 살피고만 있었다.
“그나저나, 루이제 그년을 누가 죽였는데?”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보안국장님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신 걸 보아 따로 말씀드리려는 게 아닐까요.”
장교가 목소리를 죽이며 조심스레 말했다.
“잘난 황족이라 눈치를 보는 건가.”
재빨리 상황을 파악한 쿠베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을 열까요?”
참모의 물음에 쿠베가 하라며 손짓을 했다.
“카렐 놈을 쳐. 다른 곳은 필요 없다.”
성문을 열 것을 지시한 쿠베는 망원경을 눈에 댄 채 서쪽 해안가, 동맹군 좌군의 북부보병대를 가리켰다. 그곳은 말에서 내린 남부기병대가 북부보병대와 치열한 백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저놈들 잘 버티네.”
쿠베가 입을 씰룩거렸다. 북부보병대는 그들의 정석대로 고슴도치처럼 창을 앞으로 빽빽하게 세우고는 어깨를 맞대고 단단히 대오를 이루고 있었다. 중장갑을 차려입고 잘 훈련된 남부 기병들은 그 창의 숲 사이를 파고들어가 칼과 메이스를 휘두르며 돌덩이 같은 대오를 무너뜨리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지만 잘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아무래도 평민 보병들이라 개개의 전투력은 좀 떨어지지만 워낙 대오가 견고해서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기병하고 낙타병의 싸움은 워낙 병종 자체가 상극인데다가 지형이 좋지 않습니다. 적이 당장 무너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뭐 우리한테 나쁠 건 없지.”
쿠베가 키득거리며 수문장에게 성문을 열라고 지시했다. 성문 안쪽에는 남부기병과 남부보병 5천, 그리고 근위대 2군단 5천 정도가 성문이 열리기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남부 놈들이 앞에서 생고생하는 새 우리가 뒤에서 전공만 챙기면 되니까.”
“해안에 적 기병대가 상륙하는 것 같습니다.”
참모가 해안가로 접근하는 상륙 보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리고 많지는 않습니다만 황제가 있는 좌군에서 예르마크 경의 우군으로 병력이 움직이는 게 보입니다. 가디언 근위기병대 같은데 자기네 황제를 저대로 위험 속에 놔두고 이동하는 걸까요?”
“좌군 쪽은 가뜩이나 열세인데 설마 그럴까. 새로 상륙하는 기병들이 대신 지키려는 계산이겠지. 이젠 놈들의 움직임이 대강 읽히는군.”
쿠베는 상륙하는 슈로 기사단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비록 보안국장으로 음지에서의 일을 주로 해 왔지만 한편으로는 참모로서의 능력도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던 그였다. 실전의 발빠른 ‘대응’은 몰라도 ‘예측’에서만은 크게 어긋난 일이 없었다.
“남부 놈들을 먼저 내보내서 예르마크 놈 후방을 치라고 해. 방금 루이제 년이 죽었다니까 뒤에서 두들겨 줘야지.”
“방금 적 황제 후방을 치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상륙하는 슈로 기사단 놈들하고 정면 대결하는 미련한 짓을 할 필요는 없지.”
“미끼……입니까?”
“카렐 놈 자존심에 지 고모부인 예르마크 경이 위험에 처한 걸 그냥 놔두지는 않을걸. 기사단을 예르마크 경 쪽으로 유인한 다음에 우리 근위대가 나가서 카렐 놈 후방을 치면 되지.”
쿠베의 나름대로 쓸 만한 꼼수에 근위대 장교들이 그제야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장교 한 명이 주변의 남부 장교들을 의식하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도 예르마크 놈 후방엔 서부 장갑보병대가 예비대로 버티고 있습니다. 기사단이 안 움직이고 계속 위치만 지킬지도 모릅니다.”
“아무렴 어떤가. 그럼 다른 데를 치면 돼. 이봐, 우린 병력이 많고, 등을 보이고 있는 먹잇감은 널렸으니 아무 거나 골라잡으면 돼.”
쿠베가 여유만만하게 동맹군 중군과 우군, 좌군을 차례대로 가리켰다. 그는 자신에게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다는 데 내심 흡족해하며 저들 중 어디를 치면 제일 손해가 적을까 따져보는 중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 제롬 공과 약속하신 거는 어쩌고요?”
“황제 놈을 죽이지는 않는다고 했지 공격 안 한다고 말하지 않았어.”
쿠베가 냉큼 대답하며 히죽거렸다.
그때, 성문의 크레인이 움직이는 육중한 소음이 발밑을 울렸다. 사오시안트 성 북쪽의 10개 가까운 성문 중 제일 먼저 열린 중앙의 큰 문으로 남부보병들이 먼저 나가기 시작했다.
동맹군 후방을 치기 위해 나가야 하는 병력은 보병은 물론이고 기병, 밀집보병대를 치기 위한 발리스타와 사역병들까지 온통 뒤섞여 있었다. 그들은 나름대로 대오를 이루어 나가고 있었지만 1만이나 되는 많은 병력이 한 번에 나가려다보니 앞뒤로 혼란이 벌어지는 건 피할 수가 없었다.
“보병들 먼저 나가서 자리부터 잡아! 장비는 나중에!”
수문장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몇 안 되는 기병을 선두로 긴 종대를 이룬 남부 중장보병들이 평상시 퍼레이드라도 하듯 보무도 당당하게 발소리를 맞춰 열린 성문으로 행진했다.
“전진! 성문 밖에 중대별로 도열해서 다음 명령을 기다려라!”
성문이 활짝 열린 것을 확인한 남부보병대 연대장이 손을 앞으로 향했다. 성문 너머에는 짙은 어둠 너머, ―아직은 아주 멀리에― 이들의 동료들이 대규모 회전을 벌이고 있는 잔혹한 전장이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바로 코앞에서 자신들에게 벌어질 일은 아직 알지 못했다.
“적이 옵니다!”
“적? 무슨 적?”
수비대 가디언의 고함에 쿠베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굳이 물어서 확인할 필요도 없이, 해안가에 상륙하자마자 정비작업도 없이 바로 몰려오고 있는 기병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뭐야? 저놈들 미쳤나?”
쿠베가 깜짝 놀라 눈을 씻고 다시 확인했다. 배에서 내린 슈로 기사단 기병들은 카렐의 후방을 지키리라는 그의 예상을 뒤엎은 것도 모자라 아예 땅을 디디기가 무섭게 성문 앞으로 선제 돌격을 해 오고 있었다.
“200기쯤 되어 보입니다. 숫자는 얼마 안 됩니다. 저 정도는…….”
“지금 숫자가 문제냐!”
돌격해오는 상대 기병 지휘관의 속셈을 뒤늦게 눈치 챈 쿠베가 버럭 화를 냈다.
“접근 못 하게 해! 빨리 기병들 내보내서 최대한 접근을 저지하라고! 놈들이 성문에 바싹 붙지 못하게 해!”
쿠베가 성 안쪽에 대고 손을 저었지만 이미 성문 바로 안쪽은 막 나가려 버글대는 보병들로 발 디딜 곳도 없는 지경이었다.
“예?”
쿠베의 명령을 받은 보병들은 영문도 모른 채 전진을 멈추고 후미의 기병들에게 길을 열어주려 했지만 더 큰 패착이었다. 가뜩이나 정신이 없던 성문 안쪽의 병력들은 앞뒤 순서까지 바꾸려다보니 더 엉망진창이 되었다.
“발리스타 발사! 투창이든 석궁이든 뭐든지 좀 쏴!”
쿠베가 수비병들에게 고함을 질렀지만 애당초 이런 발사무기는 보병이라면 몰라도 사방에 산개해서 빠른 속도로 돌진해오는 기병들에게는 그다지 효율적인 무기가 아니었다.
릴라크가 뒤처지는 부대에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빌어먹을! 말굽에 땀나게 달리지 못해!”
앞장서 돌진하는 릴라크의 앞으로 성벽에서 날아온 발리스타가 내리꽂히면서 파편과 흙더미가 얼굴과 말에 튀어 엉망이 되었지만 일단 불이 붙은 그의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성문 앞을 선점해! 기병이 빠르니 기병이지 달래 기병이냐!”
성벽에서 계속 쏘는 발리스타의 쿵쿵거리는 발사음에 경험이 짧은 초보 기병들이 놀라 움찔거렸지만 성치도 않은 몸으로 앞장서 달리는 대장을 계속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적을 어떻게 막으시려고요!”
발리가 말 그대로 생각도 없이 돌진하는 듯 보이는 릴라크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 하지만 릴라크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적을 적으로 막으면 되지!”
“예에?”
“우리가 좁은 성문 앞을 먼저 차지하면 어떻게 되겠냐!”
릴라크는 어깨의 철제 프레임에 고정된 창을 똑바로 겨누며 눈을 매섭게 부릅떴다. 겉으로는 항상 유쾌해 보이던 이 신임 단장이 이렇게까지 무언가에 무섭도록 집중한 모습을 보이는 건 발리에게도 처음이었다.
“적 포격이 장난이 아닙니다!”
발리가 얼굴에 튀기는 발리스타 파편에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덩치는 산만한 새끼가 이 정도에 엄살이야!”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고함에 발리가 놀라 수신기를 붙들었다. ‘제네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거칠고 투박한 호통에 발리가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릴라크의 예상대로, 정신없이 쏟아지던 발리스타 사격도 정작 성문에 근접한 순간 뚝 끊겼다. 이 상태에서 자칫 우군 머리 위를 덮칠 수도 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사격!”
릴라크가 함께 달리는 경기병들에게 손을 치켜들었다. 명령을 받은 경기병들의 일제사격이 머리 위로 날아올랐고, 성문 밖에 제일 먼저 나왔던 남부보병들은 난데없는 기병들의 돌격에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다.
“기병이다! 기병! 집결해! 대오! 대오!”
보병들은 뼛속까지 밴 습관대로 허겁지겁 성문 앞으로 돌아가 동료들과 밀집하기 시작했고, 쓸데없이 너무 앞서 나와 있던 운 없는 보병과 사역병들은 등에 투창을 맞고 바닥을 맥없이 굴렀다. 개중에 날아드는 투창을 막아보려 방패를 들고 자리를 지켰던 보병들도 있었지만 어찌 보면 더 운이 없었다.
“죽어!”
투창에 뒤이어 장창을 든 중장기병들이 거대한 창날을 번득이며 흩어져 있던 보병들을 무섭게 휩쓸었다. 릴라크는 막 돌아서려는 보병대 분대장의 턱을 창으로 사정없이 후려치고는 계속 앞으로 돌진했다.
“이 따위 졸개들한테 신경 쓰지 마라! 목표는 밀집한 놈들이다! 놈들을 성문 앞으로 몰아! 성문 앞의 위치를 선점해라!”
릴라크가 기병들을 다시 재촉했다. 그의 명령을 받은 2백의 기병들은 바싹 집결하며 물러서는 남부보병들을 마치 양떼몰이를 하듯 성문 앞으로 밀어붙였다. 그 밖에는 미처 합류하지 못한 느린 병사들이 기병들에게 무참히 도륙당하고 있었다.
“밀집해! 밀집하라고! 창을 세워!”
운 좋게 동료와 어깨를 맞대고 밀집할 수 있게 된 병사들이 일단 안도의 숨을 내쉬었지만 바로 그것이 릴라크가 노리던 것이었다.
“놈들이 전진 못 하게 해!”
릴라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소란스런 전장을 울렸다. 기병들의 번개 같은 돌격으로 성문 앞 공간을 미처 장악하지 못한 채 성문 앞으로 물러난 남부보병들은 뒤에서 계속 나와 주어야 할 동료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적군이 성문 밖으로 못 나오도록 차단해! 발리 넌 뒤에 오는 중대 병력 데리고 다른 성문으로 나오지 않는지 확인해!”
릴라크는 뒤에서 계속 몰려드는 기병들에게 외쳤다. 기병들은 단단히 집결한 남부보병들의 앞을 차단하고는 긴 돌격창으로 보병들을 계속 위협하며 밀어붙였다. 그들의 뒤에는 전장으로 나가야 할 1만이나 되는 병력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성문 안쪽에서 손톱만 물어뜯으며 성 밖의 전투를 무기력하게 구경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겠지만, 어쨌든 고작 2백의 기병대에 1만의 군대가 차단당한 황당한 순간이었고, 쿠베의 그 ‘많고 많은 옵션들’이 순식간에 모조리 막혀버린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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