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42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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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적군이 어떻게 움직이나.”
보병들 사이에 파묻힌 카렐이 보병대 후방과 양 측면에서 낙타병단을 이끌고 대기하고 있는 하지즈 장군에게 물었다.
“3면에서 일제 돌격입니다, 폐하.”
하지즈 장군의 대답은 짧고 분명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황제의 반응도 아주 간단했다.
“다행이군.”
황제는 자신의 대답에 아무 설명도 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서부 제일의 명장으로 꼽힐 만큼 전장에서 닳은 하지즈 장군은 그의 뜻을 바로 읽어낼 수 있었다.
“당초 지구전을 벌이려고 나왔던 적을 일부러 조급하게 만드신 겁니까?”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한다지만, 막상 눈앞에서 상황이 마구 변하면 그게 그리 쉽게 되던가.”
하지즈 장군은 지금까지 상황을 머릿속에 복기해 보았다. 루이제의 일기투 신청, 전략상으로는 별 가치도 없어 보이는 근위대의 후방 기습, 적은 병력만으로 스스로 미끼로 나선 것까지, 지금까지의 시나리오 모두가 결국은 노련한 카산드라 경을 조급하게 만들려는 심리전이었다.
그 와중에 ‘동맹군을 원칙대로 공격해 차근차근 전멸시킨다’는 처음 생각을 카산드라 경이 깜박 잊어버린 것만으로도 일단 첫 수는 황제의 성공이었다.
“공격해 오는 적 기병대는 남부기병이 앞이냐? 동부기병이 앞이냐?”
“중장기병들이 앞에, 경기병이 뒤에 있습니다. 중장기병 중 약간의 동부기병이 있지만 대다수는 남부기병입니다.
“적당한 거리를 확인하면 지시한 대로 움직여라.”
“알겠습니다.”
평소 타던 백마 대신 큰 낙타에 오른 하지즈 장군은 낙타의 옆구리를 탁 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낙타병단! 전진!”
그가 이끄는 3천의 낙타병들은 창을 세우고 있는 보병부대 사이의 틈새를 통해, 혹은 양 측면을 돌아 돌진하기 시작했다. 전면에서는 2만의 남부 중장기병대가 서슬 퍼런 기세로 돌격해오고 있었지만 하지즈 장군은 황제가 이 진창에 기병 대신 일부러 낙타병을 내보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목표는 북쪽의 기병대다!”
부대 전체가 보병대 앞에 나선 것을 확인한 하지즈 장군이 창을 앞으로 겨누며 목이 찢어져라 외쳤다.
“전진! 전진이다!”
긴 다리와 넓적한 발바닥을 지닌 낙타들은 진창진 흙을 사방으로 튀기며 습지를 가로질러 돌진했다. 낙타는 물론이고 위에 탄 낙타병들의 다리까지도 온통 진흙을 뒤집어쓰며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기병 2만 대 낙타병 3천의, 누가 보기에도 말도 안 되는 돌격이었다.
“잊지 마라.”
평소보다 작고 짧은 창을 뽑아든 하지즈 장군은 돌격하는 각 부대 연대장들에게 마지막 한 마디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우린 지금 자살 공격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절대 잊지 마라. 정확히 움직여야 한다. 제대로 안 움직이면 다 죽는다는 걸 명심해라.”
카렐 황제를 향해 돌진하는 2만여 연합군 기병대를 지휘하는 건 동부 5제후 구디엔 카나 경이었다. 사실 처음 배치를 짤 때만 해도 우군과 좌군 양쪽 중 어디를 맡을지를 놓고 기병사령관 히르직스와 가벼운 신경전도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이 좌군을 맡은 것에 만족하다 못해 행복할 지경이었다.
“많은 걸 걸수록 얻는 것도 많은 법이라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은가봐.”
8천의 보병들 사이에 옹색하게 서 있는 카렐 황제를 확인하며 구디엔 카나 경의 입술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그의 휘하에는 1만 6천이나 되는 남부기병과 4천의 동부기병이 있었고, 1열로 길게 늘어져 있는 적 보병대의 대오는 들이받기만 하면 그대로 뻥 뚫려버릴 것 같이 보였다.
지금 그는 연합군에 남아 있는 마지막 동부제후였다. 샤자한 공이 황도에서 죽으면서 오토크 장군을 위시한 슈트란 가 일부 세력이 차남 다히르를 새 최고제후로 추대했지만 슈트란 가 전체가 그를 인정한 건 아니었다. 얼마 전 죽은 장남 아르군 계보의 사람들은 여전히 요동의 본토와 다수 보수파 지배층을 장악하고 있었고, 원정군 무장들의 지지를 받아 먼 황도에서 멋대로 최고제후임을 선언한 다히르를 아직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 기반이 취약한 다히르의 본토 내 지지 세력은 잔뜩 숨을 죽인 채 이번 전쟁의 향방만 지켜보고 있는 판국이었다. 다히르가 진짜 최고제후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그를 최고제후로 인정한 황제 카렐이 제위를 지켜내느냐에 달려 있었다.
사실 구디엔 경도 샤자한 공의 전사 소식에 다히르를 따라 동맹군 쪽으로 돌아설까 말까 내심 갈등도 했었다. 그도 황도에 남아있었다면 어쩌면 다히르를 따라 동맹군 쪽에 가담했을지 모르겠지만 이미 사오시안트로 파견되어 남부제후군과 한솥밥을 먹고 있던 상황에서 말을 갈아타는 것도 맘대로 할 수 있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반쯤은 압박에, 반쯤은 자의로 연합군에 남게 되었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아주 나쁜 선택도 아닌 것 같았다. 다히르를 반대하는 동부 보수파 출신의 1만이 넘는 기병이 그의 밑에 기꺼이 남았고, 듣자하니 카렐 황제 진영도 전투 외적인 문제로 붕괴되기 일보 직전이라는 건 분명했다.
다른 여느 제후들처럼, 그는 딱히 강경하지도, 그 반대도 아니었고 수우 황제를 지지하는 것도, 카렐 황제에게 별다른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자신의 이익에 따라 그때그때 움직이는 보통의 제후였고, 여기저기 치이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금 이 위치에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연합군이 승리한다면 그는 연합군에 끝까지 남은 유일한 동부제후 신분으로 나중에 정말 큰 영향력을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른 목표는 필요 없다. 황제만 죽이면 된다.”
구디엔 경이 부하들에게 마지막으로 일렀다. 슈트란 가 출신의 참모 중 한 명이 선봉에서 돌격하는 남부기병대를 턱으로 가리키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긴 합니다만 이대로는 우리가 공을 뺏길지도 모릅니다.”
“사령관인 카산드라 경이 중장기병을 앞세우라고 했으니 좋게만 말하면 칼받이라고 해도 되잖나. 우리는 경기병이니 어쩔 수 없지. 혹시 아나, 북부보병들이 생각 외로 선전을 할지.”
구디엔 경은 적군이 선전하기를 바라는 자신의 모습이 내심 기가 막힌다고 여기며 그 이상은 입을 열지 않기로 했다.
“류한 델루지 경이 보나마나 자기 공이라고 우길 겁니다.”
누군가가 또 입을 열었다. 본 싸움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무장들 대부분의 관심은 ‘적 황제를 잡은 공’이 누구에게 갈지에 쏠려 있었다. 그 무장이 남부기병대 선봉에서 의욕에 넘쳐 돌격하고 있는 한 덩치 큰 남자를 가리켰다.
“마누라 무서워 도망친 놈 주제에 말입니다.”
누군가의 참견에 구디엔 경이 풉 하고 웃었지만 사실 웃을 문제는 아니었다. 우군의 남부기병대를 지휘하는 저 남부 무장은 남부 최고제후 제롬의 사촌형이었고, 이젠 동맹군 쪽으로 가 버린 남부 5제후 마자리크 이그나토 경의 전 남편이었다.
“위에서 남부기병대를 선봉으로 보내라고 했으니 더 이상 공훈 어쩌고 왈가왈부하는 놈은 용서 않겠다.”
얼른 표정을 감춘 그는 너무 앞서가는 부하들의 욕심을 얼른 차단했다. 그도 무장인 만큼 전공에 욕심이 많은 건 당연했지만 전공에 미쳐 전투 전체를 흐트러뜨릴 만큼 생각 없는 무장은 아니었다.
“류한 놈이 황제를 잡든, 중간에 뒈지든 지 팔자지.”
“적진에서 낙타병들이 나옵니다!”
누군가 전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보병대 후방에 있던 3천 정도의 서부 낙타병단이 넓고 길게 포진한 채 무모하다 못해 멍청해 보이는 돌격을 해 오고 있었다.
“맙소사, 앞뒤 꽉 막힌 서부 놈들이라고 안 할까봐.”
구디엔 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선봉의 남부기병대에 바로 명령을 내렸다.
“신경 쓰지 마라. 박살내 버리고 계속 돌격해.”
“알겠습니다!”
의욕으로 가득한 류한 경의 힘찬 대답이 바로 돌아왔다.
“들었지? 돌격이다!”
류한 경은 지금쯤 황도에 있을 전 부인의 밉살머리스러운 얼굴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적개심으로 재무장했다.
사실 마자리크와의 부부생활이 아주 최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은 것과도 거리가 멀었다. 하위제후인 마자리크로서는 델루지 가 측의 속 보이는 정략결혼 요청을 감히 거부할 처지가 못 되었다. 애당초 원치 않는 결혼을 한 둘은 오랜 세월 쌓인 묵은 정만 남은 허울 좋은 액자 속 부부였을 뿐이었다.
류한 경도 델루지 가 특유의 무뚝뚝한 기질을 빼면 특별히 못된 곳 없는 남자였지만 애당초 가문에서 그에게 원한 건 종장을 능가하는 위세를 부리며 최고제후가의 힘을 알리는 악역이었지 부인의 힘이 되는 든든한 종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가 원했든, 아니었든, 어차피 마자리크와는 침실 밖에서는 정적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이었다.
얼마 전 주류성 전투에서 제롬이 마자리크에게 애당초 무리한 임무를 주었던 것도 종장인 그를 제거해 델루지 가의 피가 섞인 장남을 새 제후로 삼으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눈치 챈 마자리크가 선수를 쳐서 동맹군 쪽으로 돌아섰고, 복수가 두려워진 류한 경은 ‘방침을 철회하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발표하고는 델루지 가로 돌아가 버렸다.
마자리크 경은 그의 일방적인 이혼 통고에 비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남편이 공공연히 드나들던 기생집을 태워버리고 바람을 피웠던 여자들까지 모조리 참수해 그 머리를 선물로 보내주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이혼 후 나름대로 후회와 미련 속에서 칩거하던 류한 경이 돌연 연합군에 지원한 것도 마자리크가 보내 온 바로 그 ‘선물’ 때문이었다.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여자의 잘린 머리에는 ‘새 남자 품을 느껴보니 네가 왜 그렇게 다른 년한테 빠졌는지 충분히 이해하겠어.’라는 놀림 섞인 편지까지 동봉되어 있었다.
머리와 편지를 본 순간, 그의 후회도 이렇게 분노와 복수심으로 돌변해 그를 전장으로 내몰고 말았다.
“저 답답한 서부 놈들은 그냥 밟아버려!”
눈에 불을 켠 류한 경이 말에 박차를 가하며 돌격을 위해 더 속도를 냈다. ‘마지막 100보(60m) 정도에서 최고 속도를 낸다.’는 원칙대로, 지금까지 속보로 전진해 온 중장기병들이 낙타병을 타겟으로 몸을 잔뜩 낮추며 말에 일제히 최고속도를 붙였다. 신호를 받은 말들은 다리에 최대한 힘을 주며 바닥을 힘차게 디뎠다.
“으읍.”
잘 달리던 말이 어느 순간 갑자기 중심을 잃으며 휘청거리자 류한 경이 고삐를 쥐며 기겁을 했다. 그리고 비슷한 상황이 함께 달리던 기병대 선봉에서 동시에 벌어졌다. 말이 약하거나 기마술이 떨어지는 몇몇 기병들은 중심을 잃고 바닥에 동댕이쳐지기까지 했다. 많은 병사들이 스코프를 끼고는 있었지만 깜깜한 어둠 속이라 문제를 바로 깨닫기는 쉽지 않았다.
“뭐야!”
엄청나게 무른 바닥 때문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류한 경이 크게 당황했다. 낙타병들을 노리고 최대한 속도를 붙였던 군마의 말굽이 일순간 진흙탕에 처박히면서 중심을 잃는 일이 사방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속도 늦춰! 속도 늦추라고!”
류한 경이 휘청거리는 말을 추스르며 손을 저었다. 맞받아오는 낙타병들에 집중한 나머지 무른 땅에서 속도를 늦춰야 한다는 것을 깜박 잊고 최고 속도를 낸 탓이었다. 하지만 스코프로는 땅바닥이 얼마나 무른지까지는 볼 수가 없었다.
“젠장! 뛰지 말고 조심조심 걸어서 가라고!”
“앞에 오는 놈들은 어쩝니까!”
몇몇 기병들이 마주오는 낙타병들에 놀라 소리를 질렀지만 당황한 기병들의 비명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맹렬히 돌격하던 기병대 선봉이 갑자기 속도를 늦추었고, 같은 시간 뒤따라오던 후속 기병들까지 계속 밀려들면서 땅을 뒤덮고 돌격하던 기병들은 일순간 긴 긴 띠 모양으로 한 곳에 우르르 몰려 버렸다.
“걸렸다!”
하지즈 장군이 팔을 앞으로 향했다. 푹푹 빠지는 사막에 이미 적응한 낙타들은 말굽보다 몇 배는 큰 발바닥으로 무른 땅을 성큼성큼 디디며 기병들에게 계속 다가왔다. 하지만 평소보다 훨씬 짧은 창을 든 이 낙타병들은 압도적인 숫자의 기병들에게 바로 돌격하지는 않았다.
적당한 거리를 확인한 하지즈 장군이 큰 소리로 외쳤다.
“던져!”
하지즈 장군의 손짓을 받은 낙타병들은 진흙탕에서 주춤거리는 기병들을 겨누고 하늘을 향해 창을 힘껏 던졌다. 원래는 중무장한 밀집보병진을 깰 때 쓰는 방법이었지만 지금의 기병들은 짧은 순간이나마 보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짧지만 묵직한 창은 짧은 포물선을 그리며 밀집한 기병들의 머리 위로 꽂혔다.
“방패! 방패!”
기병들이 급히 머리 위를 가렸지만 하늘에서 떨어지는 묵직한 창의 위력은 기병들의 작은 방패만으로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수십의 기병들이 비명을 지으며 진흙탕에 곤두박질쳤고, 운 없는 몇몇 기병들은 급소에 명중당하며 즉사하고 말았다.
“물러난다!”
적을 휘저어놓은 하지즈 장군이 재빨리 낙타를 돌렸다. 남부기병들은 동료들이 쓰러지는 모습에 놀라기도, 혹은 분개하기도 하며 그들을 쫓아 말에 박차를 가하려 했지만 이 진흙탕에서 말에 속도를 내는 건 더 바보짓이었다. 재빨리 말을 제어한 류한 경이 ‘적당한 속도로’ 말을 움직이려 했지만 낙타병들은 보란 듯 엉덩이까지 들고 두드려 보이며 신나게 멀어지고 있었다.
“저 둔해 터진 낙타들도 못 따라 잡냐!”
성큼성큼 도망치는 낙타병들의 등짝을 보며 속이 터진 류한 경이 분통을 터뜨렸다.
“저놈들은 신경 쓰지 말고 보병만 공격해! 땅이 무르니 너무 속도 내지 마라!”
류한 경이 기병들에게 재공격을 명하며 말로는 이렇게 지시를 내렸지만 눈앞에 빤히 보이는 낙타병들 때문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공격! 공격!”
여차저차 다시 재출발을 한 기병들이 황제를 지키고 있는 보병들에게 다시 속보로 돌진하기 시작했지만 눈앞에서 도망치는 낙타병들 때문에 이미 집중력이 반쯤 흐트러져 있었다. 그 와중에 돌격진의 대오가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것도, 무른 땅을 딛고 전력돌진을 했던 말이 반쯤 탈진했다는 것도, 낙타병을 쫓느라 그런 말에게 가혹하게 채찍질을 하고 있다는 것도 당장은 문제가 아니었다.
낙타병들은 기병과의 사이를 잡힐 듯 말 듯 거리만 유지하며 속도를 냈다가 말았다 하며 가뜩이나 진흙탕을 힘들게 달리는 적의 진을 철저하게 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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