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41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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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쪽 해상에서 선단이 접근하는 것 같다는 보고를 접한 카산드라 경은 적의 추가병력이라는 것을 바로 직감했지만 그리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워낙에 병력의 차이가 나는데다가 충분히 많은 예비병력이 있으니 별 문제는 없다고 여기던 차였다.
그때까지도 일기투를 벌이고 있던 마누엘에게 ‘빨리 물러나라’고 일단 지시를 내린 그는 전군에 ‘공격준비’를 명했다.
“저 선단이 남쪽까지 내려가서 지네 본대 옆에 상륙해서 완전히 합류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야.”
선단과의 거리를 보고받은 카산드라 경은 별것 아니라는 얼굴로 지도에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이런 느긋함을 다른 참모의 보고가 깨 버렸다.
“적이 남쪽으로 더 안 내려가고 우리 후방쪽 해안으로 바로 다가옵니다.”
“엥?”
카산드라 경은 스코프를 낀 주름진 눈을 가늘게 뜨고 아직 어두운 해안선 쪽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부장의 말대로, 남쪽으로 내려가던 선단이 갑자기 방향을 틀어 서북쪽 해안에 접근해오고 있었다.
“저놈들이 미쳤나?”
그는 선단이 남쪽으로 더 내려가 황제가 소수의 병력으로 위험천만하게 버티고 있는 적 좌군에 상륙하리라고 예상했지만 적은 그보다 한참 위의, 지금 포진하고 있는 연합군 후방으로 바로 접근하고 있었다.
카산드라 경은 남서쪽에 있는 카렐 황제 쪽을 망원경으로 다시 확인했다.
“지네 황제 곁엔 고작 보병 몇천하고 서부낙타병뿐인데, 황제를 지키러 가는 게 아니고 우리 뒤를 친다고?”
카산드라 경은 기가 막혀 고개를 저었다. 재빨리 방향을 틀은 선단은 작은 바지선과 보트를 내리며 서둘러 상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속셈이지?”
“저 선단에 탄 게 어느 부대인지가 문제일 것 같습니다만……으읍.”
망원경의 배율을 잔뜩 높여 선단 쪽을 뚫어지게 살피던 부장이 어깨를 움찔했다. 물에 띄워진 바지선과 보트들에 올라 있는 장병들의 갑옷이 어딘지 눈에 익었다.
“맙소사.”
부장이 고개를 저었다. 배에는 무광 처리된 최신형 은빛 갑옷, 긴 깃털이 꽂힌 특이한 투구 차림의 병사들이 올라 있었고, 날개를 펼친 새 문장이 새겨진 금빛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 근위대 1군단입니다.”
“무어?”
‘근위대 1군단’이라는 말에 카산드라 경의 어깨가 들썩했다. 그들은 근위대 정규군 최강의 군단이었지만 황도 공성전에서 연합군이 먼저 퇴각해버리면서 고립되는 불운을 겪은 부대였다. 당시 먼저 퇴각한 연합군은 저들이 끝까지 저항하며 시간을 끌어 주리라고 믿었지만 결국 기대를 저버리고 새 황제 카렐에게 집단 투항해 연합군측을 기겁하게 만들기도 했었다.
자신들을 배신한 연합군에 내심 이를 갈고 있을 저들이 이제 칼을 돌려 연합군의 등 뒤를 찌른다면 연합군 주력부대에 큰 혼란사태가 벌어지는 건 뻔한 일이었다.
“군단기 위에 달린 작은 배너가……가디언 제파의 깃발 같습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이상한 군단기도 보입니다. 최소한 2개 군단 병력은 되는 것 같습니다.”
“망할, 그럼 누가 당해?”
많은 숫자를 믿고 나름대로 안심하고 있던 카산드라로서는 근위대 2개 군단이라는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휘관이 근위대 가디언들 중 ‘지휘능력’만으로는 최고로 손꼽히는 제파라면 청천벽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부대로 막아야 할지…….”
참모의 조심스런 물음에 카산드라 경이 얼굴을 찡그렸다. 남부연합군에 ‘적당히 쓸 만한’ 부대는 많다 못해 남아날 정도였지만 가디언과의 혼성부대인 황실근위대와 맞서 싸우라는 말은 어지간한 부대에는 ‘가서 죽어라’라는 말과 마찬가지였다.
“웬만한 부대로는 역부족이야.”
재빨리 이런저런 계산을 끝낸 카산드라 경은 하는 수 없이 좌군과 우군을 가리켰다. 이번 공격부대에는 쿠베를 따르는 근위대 군단 2개가 각각 우군과 좌군에 1개씩 배치되어 있었다.
“근위대끼리 싸우라고 해. 좌군에 있는 근위대도 당장 이동시키고.”
“그러면 우리 양익이 크게 약해집니다. 근위대는 양익에서 핵심병력입니다.”
사령관의 지시에 발끈한 건 참모진으로 와 있던 근위대 파견장교였다.
“왜? 너희가 주연급에서 물러나서?”
카산드라 경이 항명하는 참모에게 바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근위대 2개 군단 모두를 후방 뒤치다꺼리로 보낸다는 뜻인데다가 ‘같은 근위대끼리’ 싸워야 한다는 것도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너희가 잘 싸우니까 보내는 거 아니냐?”
화를 낼까 했던 카산드라 경은 일단 근위대를 달래보기로 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전우였던 부대입니다. 제대로 맞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남부 참모 중 한 명도 약간 걱정을 드러냈지만 카산드라 경에게는 어차피 다른 속내도 함께 있었다.
“그럼 근위대를 누가 당하나? 대안이 없으면 괜히 끼어들지 마라.”
그는 참모진에서 계속 반발하기 전에 재빨리 명령을 마무리했다.
“뒤가 시끄러워지기 전에 전군 공격 개시한다. 우군은 남부기병들을 선봉으로 당장 저 가짜황제한테 돌격시켜. 그놈만 잡으면 어차피 싸움 끝이야.”
카산드라 경의 손짓에 나팔수가 재빨리 ‘전군 돌격’의 나팔을 울렸다. 근위대의 난데없는 출현에 내심 당황한 카산드라 경은 세세하게 이것저것 따지는 것 따위는 일단 건너뛰기로 했다.
“근위대는 뒤로 보내고 남부기병들이 전진해서 적 황제를 빨리 잡는다. 최대한 서둘러!”
카렐은 보병 8천과 낙타병 3천 정도만을 거느리고 남쪽 해안가에 보란 듯 서 있었고, 규모로만 보면 동맹군 진영에서 가장 취약한 부대였다. 2만이나 되는 기병이 돌격한다면 충분히 휩쓸어버릴 수 있을 듯 보였다.
그는 옆에 선 남부 참모에게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기왕이면 우리 남부 부대가 잡는 게 낫지.”
3진이 탄 선단의 접근을 확인하고 모래언덕에서 내려온 카렐은 한 손에 황실 깃발을 든 채로 좌군 선봉에 선 8천의 북부보병대 사이를 걸었다.
“가능하겠습니까? 좌군이 너무 약합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인 일 없던 호위대장 카토가 처음으로 불안감을 드러냈다. 좌군의 숫자가 워낙 적다보니 이들 후방에는 변변한 대규모 예비대도 없었고 대오도 채 10열도 되지 못할 정도로 얇았다. 이들 보병대와 낙타병 부대가 뚫린다면 아무런 저지선도 없으니 사실상 왼쪽 날개의 붕괴나 마찬가지였다.
“너까지 그런 질문을 하기냐?”
황제의 차가운 물음에 카토가 무안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는 재빨리 말에 속도를 붙여 나아가며 보병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제국의 4번째 황제, 카렐 대제시다!”
황제를 향해 길을 열어 준 3군단의 북부보병들이 황제를 향해 일제히 창을 세워들고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보병대 앞에 나선 카렐은 지금껏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망토의 후드를 확 벗어 넘겼다.
“황제의 얼굴을 지금 실컷 봐 둬라!”
해안가의 차가운 바람에 그의 적갈색 머리칼이 검은 황실 깃발과 함께 거세게 흩날렸다. 말을 타고 나아가는 황제의 얼굴을 보며 병사들이 함성과 함께 창을 번쩍 치켜들었다.
“앞으로 짐을 전장에서는 다시 볼 수 없을 터이니!”
그는 손끝에 입을 맞추고는 이마 위에 늘어진 파란색 사파이어 서클렛에 가져갔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읽은 일 있던 한 마디가 그의 입에서 작게 새어나왔다.
“하가 마나 파투브.”
보병대 선봉까지 나온 카렐은 가슴을 펴고 적진을 바라보았다. 그의 부실한 시각으로도 지평선을 까맣게 채운 적군의 위용만은 선명하게 보였다.
“별 것 아니야.”
카렐이 옆에 선 하지즈 장군에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조금 전의 제네르처럼, 하지즈 장군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방향을 결정한 이상 11만대 17만의 병력 차이, 적의 본거지인 성을 등지고 있다는 치명적인 약점 따위는 더 이상 의식하지 않기로 했다.
“아군이 차지한 곳은 해안의 삼각주 습지입니다. 적군과의 사이에 강이 있지만 겨울이라 물이 거의 말라서 이젠 개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저지선으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때로는 강보다 푹푹 빠지는 습지가 나을 때도 있다.”
황제의 대답에 하지즈 장군이 움찔했다. 지금 카렐이 마주하고 있는 적 우군은 남부기병 주축의 2만여 기병과 그 배후의 근위대 1만5천이었다. 고작 보병 8천과 낙타병3천을 거느린 황제에 비하면 숫자상으로도, 전력상으로도 압도적이었다.
“먼저 공격합니까?”
“내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황실 깃발을 겨드랑이에 낀 카렐이 어금니를 살짝 드러내며 기이하게 웃었다.
“황제인 내가 여기 있는데 저네들이 알아서 오지 않겠나.”
“싸움터를 일부러 고르신 겁니까?”
“내가 왜 보병만 데리고 나왔겠는가?”
“기병들은 어떻게 막는다손 쳐도 근위대가…….”
말을 이으려던 하지즈 장군은 북쪽 해안을 망원경으로 쳐다보며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가디언 제파와 타크마가 이끄는 근위대 1, 11군단이 적 후방 해안가에 상륙하면서 적군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렐이 다시 웃음을 지었다.
“등 뒤에서 근위대가 상륙하고 있고, 눈앞에는 적 황제가 부실한 병력만 데리고 한 번 잡아보라고 어슬렁대고 있는데 카산드라 경이 어떤 결정을 내릴까?”
카렐은 손에 쥔 황실 깃발을 더 높이 치켜들며 적과 아군에게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알렸다.
잠시 후, 반대편의 적군 쪽에서 높고 날카로운 톤의 돌격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적이 옵니다!”
호위대장 카토가 소리쳤다. 2만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기병대가 마치 살아있는 연체동물처럼 꾸물꾸물 움직이며 고작 8천의 북부보병들, 아니 정확히는 보병들 앞에 보란 듯 서 있는 황제를 향해 돌격해 오기 시작했다. 2배가 넘는 그 어마어마한 위용에 대담한 북부보병들도 놀라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잔뜩 겁을 먹은 몇몇 병사들은 당장이라도 물러나려는 듯 슬금슬금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겁쟁이들 같으니!”
웅성대는 보병들을 뒤로 하고 홀로 전방에 성큼 나아간 황제는 물이 빠져 질척거리는 강바닥에서 제자리를 한 바퀴 빙 돌았다. 그는 물을 잔뜩 머금어 말굽이 푹푹 빠질 정도로 무른 그 땅에 황실 깃발을 힘껏 내리꽂았다.
“바로 여기다!”
바닥에 깊숙이 박힌 크고 검은 깃발이 황제의 긴 적갈색 머리칼과 함께 거센 바닷바람에 요란하게 펄럭였다.
“내 이곳에 서 있을 것이니 너희가 나를 지켜내 보아라!”
황제의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를 쩌렁 울렸다. 황제는 거칠게 입김을 내뿜으며 흥분해 있는 시알피를 적진 쪽으로 돌리며 적군을 향해 탁해진 시선을 똑바로 겨누었다. 땅을 뒤덮고 돌진해오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기병들이 그의 흐린 눈에는 마치 거대한 먹구름처럼 보였다.
“폐, 폐하?”
당황한 카토가 다가오려 했지만 카렐은 호위병들에게 오지 말라며 손짓했다. 황제는 바닥에 깃발을 꽂은 채로 눈을 무섭게 부릅뜨고 벌판 중앙에 혼자 우뚝 서 있었다.
“이걸 어떡하라는 거야?”
당혹스러운 얼굴의 보병들이 각자의 지휘관, 가디언 사관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도 겁먹고 물러날지 말지를 갈등하던 병사들의 발끝은 이제 앞으로 나아갈지 말지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모두 전진하지 않고 뭐 하나!”
소대장을 맡은 하급 가디언 중 한 명이 칼을 앞으로 겨누며 성큼 앞으로 먼저 나섰다. 그리고 그를 따라 긴 장창을 짊어진 50여명의 보병들이 황제의 옆에 서서 창을 세우고 앞을 겨누었다.
“전진! 전진!”
몇 안 되는 그 병사들을 따라 중대, 연대, 그리고 군단 전체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뱀처럼 길고 가는 보병들의 대오 전체가 황제의 위치를 따라 다시 대오를 정렬했다.
“이걸 원하셨던 겁니까, 폐하.”
전방에 나선 3군단장은 보병들 사이에 파묻힌 채 깃발 옆에 꿈쩍도 않고 서 있는 황제를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저 고집쟁이 황제는 정말로 저 위치에서 전혀 움직일 맘이 없어보였다. 눈도 제대로 못 보는 황제가 이전처럼 싸울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보병대가 여기서 조금이라도 밀린다면 보병대의 전멸 정도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근위대가 함께 오는 게 아니니……맞설만하다. 첫 돌격만 막으면 낙타병들이 도와줄 거다.”
억지로나마 용기를 낸 군단장이 참모들과 장교단에게 말했다. 그는 손을 앞으로 향하며 병사들에게 단호하게 명령했다.
“거창!”
하늘을 향하고 있던 보병들의 긴 창날이 천천히 앞으로 기울었다.
“지금 자리에서 놈들에게 한 발짝도 내주지 마라!”
기병들을 향해 긴 대오를 이룬 보병들은 바닥에 창을 비스듬히 세우고 발끝으로 단단히 고정시켰다. 그리고 심장을 뒤흔들며 맹렬히 다가오는 압도적인 숫자의 적 기병대에 똑바로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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