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37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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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베를 일단 안심시켜놓은 쿠마르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치안군 놈들이 무슨 다른 흑심이 있는 게 아닐까요? 우리 수비군을 흔들어 놓는다던지……경호하는 치안군들 수십이 있다는 바로 앞에서 니콜라프 경이 죽은 것도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암살범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것도 수상하고요.”
쿠마르의 그럴싸한 의심에 쿠베의 표정도 점점 굳어갔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애써 태연하려 애썼다.
“알았어, 아까 말한 가디언들이 항구에서 정말로 치안군들을 공격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니까 별궁에 있던 가디언들 좀 내보내서 도와주도록 해. 혹시 알아? 1천까지는 아니어도 에키트 족 같은 정예부대 몇이 가디언들하고 함께 들어왔을지도 모르지.”
“알겠습니다. 후방은 제가 책임지고 안전하게 유지할 테니 걱정 마시고 대장께선 성 밖의 적 황제 무찌르는 데만 전념해주시면 됩니다.”
쿠베와의 연락을 끊은 쿠마르는 픽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멍청이 같으니.”
그는 항구 건너편에 차를 감춰둔 채 철조망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차였다. 그곳에선 ‘관에서 깨어난’ 1천의 코런덤 헤네티들이 진화작업을 벌이던 치안군들과 소방대를 무자비하고 잡아 죽이고 있었다. 피난을 가겠다며 항구 주변에 와글와글 모여 있던 민간인들도 항구에서 벌어지는 무자비한 살인극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사오시안트의 후방은 안전은 고사하고 조금씩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때, 망토를 쓴 누군가가 그의 차 문을 똑똑 두드렸다. 별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던 그는 기겁을 하며 얼른 문을 열어 주었다.
“네 수하 보안국 놈들은?”
차에 들어온 아스탈은 망토에 뽀얗게 앉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며 바로 본론부터 물었다.
“시내에 들어온 적 가디언들이 없는지 알아보라고 했으니 지금쯤 시내만 신나게 뒤지고 있을 겁니다. 여긴 치안군 담당구역입니다.”
자신만만하게 말한 쿠마르는 아스탈에게 뜨거운 코코아를 내밀었다. 피곤한 얼굴로 코코아를 마시는 대신관을 말없이 지켜보던 쿠마르는 그의 표정이 조금 전보다 더 굳어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지휘하시다가 왜 갑자기……무슨 일 있습니까?”
“아케메니아에서 일이 잘 안 풀린 모양이다. 바에자 마구스에게서 연락이 왔다.”
표정이 약간 창백해졌던 쿠마르가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이제 어떡해야 할지 하명해 주십시오.”
“난 300명만 데리고 사오시안트 별궁으로 가겠다. 사카가 이끄는 코런덤 본대는 항구를 장악하고 대기하겠다. 넌 별궁을 지키는 근위대를 속여서 최대한 밖으로 내보내. 그리고 우리 병력을 용병이라 속이고 별궁에 들여보내면 된다.”
“어렵지 않습니다.”
쿠마르가 냉큼 대답했지만 잠시 후 아주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사카의 부대는 왜 계속 항구에 있는 겁니까?”
평소라면 ‘왜’냐는 질문에 버럭 화를 냈을 아스탈이었지만 지금은 달콤한 코코아에 기분이 풀렸는지 별 생각 없이 대답했다.
“아케메니아를 무너뜨리지 못했으니 적 황제 놈을 때려잡는 게 우선이다. 연합군 놈들도 그놈을 죽이려고 눈이 벌개져 있을 테니 필요하다면 우리가 도와줘야지.”
“카렐 그놈을 두 번째로 치는 겁니까?”
쿠마르는 다시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었다. 연합군과 동맹군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넘나들며 양쪽 모두를 소진시키는 것이 목표인 이상, 이 정도 소규모 병력과 돈이면 충분하지 대규모 병력 따위는 애당초 필요도 없었다.
“사카가 지금 카렐 그년 죽이고 싶어 독이 잔뜩 올라 있을 테니 딱이겠군요. 전신이 그년 손에 말뚝이 박혀 죽었다면서요?”
쿠마르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시킨 일이나 해.”
아스탈이 빈 잔을 툭 내려놓으며 비로소 짜증을 냈다. 아스탈이 직접 이끄는 ‘특무대’ 헤네티 300여명이 따로 집결해 사오시안트 별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별궁에서 보자.”
아스탈이 다시 망토를 휙 두르며 차를 나섰다.
아스탈이 나간 후, 쿠마르는 할룩스를 빼들고 보안국을 불러냈다.
“이봐, 쿠베 대장 명령이야. 별궁 외곽을 지키는 가디언들을 시가지로 보내도록 해. 아무래도 후방을 어지럽히려는 적들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쿠마르의 명령에 사오시안트 별궁의 경비를 책임지고 있는 가디언이 정색을 하며 되물었다.
“그러면 별궁의 경비 상태가 흐트러질 겁니다. 지금도 무단으로 난입하려는 민간인들 통제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알아. 곧 용병들 300명 보내줄 테니까 민간인들 단속하는 일 정도는 그놈들한테 맡기면 돼.”
“……알겠습니다.”
가디언은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지만 근위대장 쿠베의 명령이라면 다른 도리가 없었다. 명령을 내려놓은 쿠마르는 콧노래를 부르며 차를 돌렸다.
“별궁은 쑥대밭으로 만들고, 적 황제놈은 죽이고……병 주고 약 주고……양쪽 다 박살내니 얼마나 재미있나.”
카렐 황제가 있는 모래언덕은 코런덤들의 1차 돌격을 일단은 이겨냈지만 그 위는 여전히 불에 타고 있는 코런덤의 시체와 피로 범벅이 된 동맹군의 시체, 부상병들로 아수라장이었다. 그 끔찍한 광경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란할 법 했지만 황제는 그 처참한 전장의 중앙에 말을 타고 선 채 무심한 얼굴로 사오시안트의 성벽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는 앞을 거의 못 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기대했던 전장의 냄새가 아냐.”
옆에 다가온 제네르에게 카렐이 차갑게 중얼거렸다.
“피비린내에 탄내가 섞인 게 영 별로야. 차라리 신선한 살과 피 냄새가 낫지.”
눈을 가늘게 뜨고 숨을 깊이 들이키는 황제의 모습에서 제네르는 묘한 섬칫함을 느꼈다. 사실 그를 비롯한 다른 병사들은 악취에 코를 막고 있는 중이었다.
“역시 타고나신 모양입니다. 저만 해도 죽을 지경인데요.”
“피가 어디 가겠나.”
황제의 대답이 황족으로서의 혈통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르마즈의 카파키 혈통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우리 본대가 거의 도착한 모양이군.”
카렐이 귀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며 다시 물었다.
“예. 카나르 플라칼 경이 이끄는 남부보병대 5만과 예르마크 경의 남부기병 1만 5천, 하지즈 장군이 이끄는 서부보병 1만 5천과 낙타병 3천입니다. 배편으로 방금 합류한 북부보병 3군단까지 총 9만이 넘는 대군입니다.”
제네르가 뒤를 가리켰다.
“그 뒤를 쫓아오는 연합군은 2배는 더 많겠지.”
카렐이 망토 속에서 살짝 이를 드러내며 기이하게 웃었다. 제네르는 이 상황에서 웃고 있는 황제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제네르가 표정을 가다듬고는 얼른 자료들을 확인했다.
“뒤쫓아오는 적 본대는 30분에서 1시간 후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새로 온 병력은 뒤쫓아 오는 적 주력군과 맞서는 포진으로 배치해라. 적을 이기거나 무찌를 욕심은 절대 내지 말고 자리만 지키면 성공이다. 그리고 북부보병 3군단은 혹시 모르니 내 바로 옆에 두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카렐이 지금까지처럼 손짓으로 각 부대의 위치를 가리켰다.
“북부보병을 곁에 두셔도 되겠습니까?”
제네르가 확인차 다시 물었다. ‘가장 못 믿을’ 북부보병대는 내사 결과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이런저런 부대들을 모두 떼어내고 일단 7천 정도의 야전군만 대강 추려내 데려온 상태였다.
“설마 황제가 눈앞에 보이는데 딴생각을 하겠는가.”
황제의 살짝 일그러진 입매에서 제네르는 이번 원정 내내 그를 괴롭혀 온 고심을 읽어낼 수 있었다.
“직속병력이 마지막 결전에서 제 역할도 못 하고 제후군에 모든 공을 넘겨준다면 앞으로 내 위치가 어찌되겠나.”
“……존명하겠습니다.”
제네르가 한숨을 꾹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황제의 군대는 보급품 파동으로 치명타를 입었고, 열세인 군대로 벌이는 이 공성전은 황제에게도 거의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 황제가 펜지켄트를 떠날 때 받은 마지막 문서는 격려편지 혹은 전황 보고서가 아니고 은행에서 보낸 ‘황실 부동산 압류통지서’였다. 가장 큰 돈줄이었던 북부 사업가들이 아스탈의 사주로 돌연 배신했고, 그간 군자금과 황실 운영자금의 절반 이상을 충당하던 채권에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일시에 지급요청을 쏟아내 황실 재무부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출정 직전, 황제를 급히 찾은 내각 대신들은 일단 남부와 서부 제후들에게 돈을 빌려서라도 급한 채무를 해결하자고 제안했지만 황제의 대답은 ‘잘 됐군. 앞으로 영영 못 받을 거라고 해.’ 라는 단호한 한 마디뿐이었다.
황제의 극단적인 지급불능 디폴트 선언에 충격을 받은 회의석상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지만 회의를 주재하던 코리온이 ‘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 훌륭하신 응징입니다.’라는 한 마디로 일거에 대신들의 입을 봉해버렸다.
어쨌든 이렇게 등 뒤에 칼을 지고 나온 황제에게는 이번에 단숨에 끝장을 보는 것 외에는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북부를 너무 믿었던 내 잘못이니 뭐라 할 수도 없지. 유학자인 그대가 도리를 받들고, 황제인 내가 권력을 갈구하는 것처럼 그네들은 돈을 신봉하는 자들이니. 수업료 치렀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수업료 치고는 너무 비쌌던 것이 문제지요.”
제네르가 황제를 따라 웃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카렐이 갑자기 입가에서 웃음을 싹 거둬내며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네들의 무기인 돈으로 내 심장을 찌르려 했으니, 난 내 무기인 권력으로 그네들의 목을 비틀면 되지 않나.”
그 사이, 증원군으로 도착한 부대들이 속속 자리를 잡았고, 황제의 바로 곁에 주둔할 북부보병대도 주변에 차례대로 포진해 뒤따라올 연합군 본대와의 싸움에 본격적으로 대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폐하를 지킬 겁니다. 따로 뽑은 충성스런 기병들입니다.”
본대로 도착한 슬레이프니르 부단장 갈라크 도비치 장군은 조금 전, 코런덤의 돌진에 죽거나 다친 기병들을 대신해 황제를 지킬 50여기의 기병들을 데려와 다가와 황제 주변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기병들을 배치하던 갈라크가 갑자기 황제와 제네르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눈이 먼 황제는 그 모습을 전혀 알지 못했지만 눈치 빠른 제네르의 시선만은 속일 수가 없었다.
“뭐 할 말 있나?”
제네르가 갈라크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묻는 제네르의 어깨를 똑똑 두드린 건 웬 기병 사관이었다. 감히 상장군의 몸에 손을 대는 어마어마한 무례에 제네르가 호통을 치려했지만 스코프 뒤로 보이는 기병의 눈매가 어딘지 눈에 익었다.
“맙소사.”
제네르가 얼른 입을 가리며 마찬가지로 황제의 눈치를 보았다. 그는 기병의 말고삐를 얼른 낚아채 한쪽으로 끌고 갔다.
“아, 아니 여기는 왜 오셨습니까? 상께서 아시면 난리가 납니다.”
“짐은 되지 않을게야.”
세네피스가 투구의 얼굴 부분을 살짝 들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제네르가 창백해진 얼굴로 다시 황제를 돌아보았다.
“보시다시피……황태후 폐하께서 계실만한 곳이 아닙니다.”
“이 정도에 겁먹고 놀라기엔 겪은 일이 너무 많아.”
세네피스가 태연하게 전장을 둘러보았다. 사방에 흩어진 시체와 끔찍한 광경들에 보통의 곱게 자란 귀족이라면 놀라 다리부터 굳었겠지만 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보통의 베테랑 기병처럼 무장을 갖추고 곧은 자세로 창을 쥐고 말에 올라 있었다.
“오르마즈 경과 하임달에서 최후를 함께하지 못한 게 영영 한이 되었어.”
“…….”
“상께는 알리지 말게나. 상께서 살면 나도 살고, 상께 불상사가 생기면 나도 같은 길을 갈 것이니 나를 지키려 애쓰지 말게.”
세네피스가 투구로 다시 얼굴을 가리며 제네르 옆을 무심하게 스쳐 지났다. 황제를 바라보던 세네피스의 마지막 시선에서 제네르는 소름끼치는 집착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황제와 ‘운명을 함께 하려’ 온 것이 분명했다. 경기병 차림새의 세네피스는 겨드랑이에 창을 끼고 황제 가까이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제네르는 황제에게 귀띔이라도 해 줄까 내심 고민하며 황제의 곁으로 일단 돌아갔다.
“적군입니다.”
가디언 한 명이 북쪽을 가리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원정군의 뒤를 바싹 쫓아온 연합군 주력부대가 멀리 북쪽 지평선 너머에서 희미한 실루엣을 드러내고 있었다.
“먹잇감들을 제대로 못 보는 게 정말 한스러워.”
황제는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가늘게 뜨고 북쪽을 보며 씨익 웃었다. 하지만 저 어마어마한 적을 맞이하는 제네르의 심경은 지난 황도에서의 전투와는 사뭇 달랐다. 수성전에서처럼 황제를 지켜줄 든든한 성벽도 없었고, 심지어 남쪽에는 사오시안트 수비군이라는 적을 두고 있으니 양쪽에 끼어 있는 끔찍한 상황이었다.
“뒤로 접근해오는 적 병력은 근위대 3만, 남부 3제후 카산드라 경의 남부보병 10만과 히르직스의 남부기병 3만입니다. 여기에 동부 최고제후 교체에 반대하는 동부기병도 1만이 넘게 섞여있으니 다 합치면 17만이 넘습니다.”
“2배밖에 안 되는군.”
제네르는 도무지 이해 안 되는 황제의 반응에 자기도 모르게 헛기침을 했다. 양쪽 합쳐 30만이 넘는 대군이 야전에서 맞붙는, 이번 제위 경쟁의 승부를 가를 최대 규모의 혈전이 그의 눈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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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은 끝났지만 제국의 총리투표는 아직 진행중입니다. ^^
*디폴트(default)는 빚을 진 채무자가 '못 값는다. 배째라.'고 선언하는 것을 뜻합니다. 채무 이행 자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일시적인 지불유예인 모라토리엄(moratorium)과는 다릅니다.
두 가지의 의미는 분명히 다르지만 실질적으로는 2가지가 모호한 형태로 실시됩니다. 독일이 1차대전의 전쟁배상금으로 경제붕괴상태에 있을 때, 새로 집권한 나치 정권이 대외 지불을 일방적으로 유예(실질적으로는 불능선언)하면서 경제재건을 성사시킨 예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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