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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733화 (728/1,132)

< -- 733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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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수로 건너편에서 바에자의 고함소리가 들려왔지만 사에나는 아랑곳없이 계속 다리에 힘을 주었다. 건너편에서 랜턴을 켠 순간, 멀리 보이는 진주 색깔의 갑주 차림을 한 웬 여자와 사에나의 눈동자가 아주 짧게나마 똑바로 마주쳤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마주한 두 젊은 마구스의 눈이 난생 처음, 서로의 얼굴과 시선을 똑똑히 확인했다.

“네년이냐!”

사에나는 그곳에 대고 순전히 본능에 따라 바로 방아쇠를 당겼고 동시에 상대방에서도 꽤 정확한 한 발이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아악!”

두 사람의 짧은 비명소리가 동시에 공기를 울렸다.

사에나는 왼쪽 가슴에서 피가 솟는 것도 아랑곳없이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거의 2층 건물 높이인 이 깊은 수로 아래로 아무 보호 장비도 없이 몸을 날렸다. 같은 순간, 수로 반대편의 바에자는 목 옆을 쥐고 힘없이 고개가 뒤로 꺾이면서 두 사람의 모습이 극명하게 갈렸다.

바에자를 지키던 2명의 코런덤들이 사에나를 쫓으려 몸을 일으켰지만 수로 건너편의 크바르나들이 재빨리 위협사격을 하며 그들을 막았다.

“으웁!”

공중을 날아 수로 바닥에 착지한 사에나도 곧바로 다리에서 힘이 풀리며 중심을 잃고 미끌미끌한 돌바닥에 볼썽사납게 나동그라졌다.

“이씨.”

넘어진 사에나는 고통을 느낄 여유도 없이 허겁지겁 수로 구석으로 기어들어갔다.

“굴, 굴?”

잠시 방향감각을 잃었던 사에나는 코나가 갇혀 있을 굴로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들어갔다. 수로 위에서 누군가의 신음소리와 비명에 가까운 고함이 들려왔지만 자신이 쏜 상대가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달리다가 쏘아서인지, 급소에 정확히 맞추지 못한 것만은 분명했지만 적에게도 경호원이 따로 있는 이상, 확인 사살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학, 학.”

굴 안에 들어선 사에나가 왼쪽 겨드랑이 조금 앞쪽, 옆 가슴을 쥐며 씩씩거렸다. 이마에서도 피가 흘렀지만 가슴처럼 치명상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박혀 있던 짧은 볼트 중간을 꺾어 내던지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지금껏 웬만한 상처는 그냥 넘기던 그였지만 이번은 사정이 달랐다. 이미 그보다 조금 뒤의 등 겨드랑이에 한 번 볼트를 맞았던 터라 이번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그는 왼팔을 완전히 쓸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젠장.”

사에나는 빈 석궁을 보며 씩씩거렸다. 재장전을 해야 했지만 한 팔로는 어려웠다. 그는 석궁을 발로 밟고 가까스로 한 발을 채웠지만 이것을 쓰고 나면 바로 장전하는 건 어려웠다.

다행히 얼마 들어가지 않아 그는 앞에서 아른거리는 불빛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2명의 교단 엔지니어들이 제법 큰 조명을 옆에 켜 놓은 채로 끊어진 파이프, 펌프와 힘겨운 씨름을 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적들을 발견한 사에나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바로 석궁을 들고 가까운 적을 향해 그 한 발을 쏘았다.

“악!”

완전히 경계를 풀고 있던 엔지니어는 뒷덜미에 한 발을 맞고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지만 나머지 한 명이 문제였다. 동료가 볼트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에 놀란 엔지니어가 혼비백산하며 도망쳤지만 사에나에게는 빈 석궁과 허리춤의 칼뿐이었다.

“네년 누구냐!”

그새 기회를 얻은 엔지니어는 거의 키만한 길이의 긴 쇠막대를 집어들고 사에나에게 반격을 가해왔다. 사에나는 재빨리 석궁을 포기하고 대신 짧은 칼을 뽑아들었지만 그 엔지니어도 중상을 입고 휘청거리는 적도 상대하지 못할 초짜는 아니었다.

“이익!”

그는 사에나의 둔한 첫 공격을 쇠막대로 힘껏 밀어내며 그대로 몸을 날려 상대를 들이받았다. 그자의 육중한 몸에 가슴을 받힌 사에나는 욱 소리를 지르며 돌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그 엔지니어는 쇠막대로 사에나의 칼을 쥔 손과 목을 꾹 내리누르며 무섭게 이를 드러냈다.

“이년 도대체…….”

바닥에 깔린 사에나가 한 손으로 막대를 밀어내려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이, 이이익.”

버둥대는 소맷자락 사이로 은빛 마구스 팔찌가 드러난 순간, 살기로 번득이던 엔지니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엉?”

상대가 놀라 머뭇거리는 것을 눈치 챈 사에나는 다리를 옆으로 빼내 무릎으로 이자의 옆구리를 힘껏 후려쳤다.

“웁!”

얼떨결에 옆구리를 얻어맞은 엔지니어의 팔이 꺾이며 옆으로 조금 밀려났다. 그새 사에나가 악을 쓰며 손을 빼내 이자의 옆구리를 힘껏 찔렀다.

“에, 에아…….”

‘마구스’의 칼에 찔린 엔지니어는 멍한 얼굴로 사에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는 공포, 자신의 임무, 그리고 ‘신성한 피’에 대한 갈등이 뒤엉켜 떨리고 있었지만 정작 사에나에게는 그런 갈등 따위는 없었다. 그는 흐릿한 눈빛으로 손을 내밀어오는 엔지니어의 이마를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힘껏 찍어버렸다.

“이게 내 축복이다.”

사에나가 씩씩거리며 쓰러진 엔지니어에게서 얼른 물러났지만 그 역시도 힘이 빠지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미 피를 많이 흘린 상태에서 힘을 써서인지 온몸이 축 처지는 느낌이었지만 이대로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죽은 엔지니어가 떨어뜨린 쇠막대에 기대 몸을 일으킨 그는 옆에 떨어져 있던 큰 랜턴을 집어들었다.

“코나, 코나? 어딨나. 코나.”

사에나는 랜턴으로 앞을 밝히며 2구의 시체 사이를 비틀비틀 걸어 굴 더 깊이로 들어갔다. 안쪽 깊은 곳에는 좁고 가파른 구멍이 지하 어딘가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뒤에서 들이치는 거센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 버티며 안쪽을 비추었다.

“이 한심한 헤네티 같으니! 지금 어딨냐고!”

사에나가 막대에 기대 물살을 이겨내며 안쪽에 대고 악을 썼다. 그때, 작업자들이 쓰는 안전모의 반사판 빛이 굴 안쪽 구석에서 희미하게 보였다.

“코나?”

사에나는 물살을 헤치며 그곳에 다가갔다. 코나는 파이프에서 떨어져 나온 큰 브라켓에 팔과 몸통이 깔려 쓰러진 채 계속 몰려드는 물과 씨름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냐고 물었었잖나!”

사에나는 물을 잔뜩 먹고 반쯤 의식을 잃어가는 코나의 고개를 억지로 물 밖으로 힘껏 잡아당기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도움을 받아 물 밖으로 억지로 고개를 뺀 코나는 입과 코에 잔뜩 들어간 물을 가까스로 뱉어내고는 사에나의 얼굴을 멍한 표정으로 올려보았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피로 사에나의 얼굴 한쪽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왜 왔느냐.’ 또는 ‘괜찮냐’ 따위의 뻔한 말은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를 마주보며 말을 잊고 있던 짧은 순간, 둘의 소리 없는 대화는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젠장, 니 상처나 간수하라니까.”

고개를 돌린 코나가 오른쪽 팔로 다시 브라켓을 밀어내려 했지만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모조리 빠지고 부서져 있는 그의 오른손 손톱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는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쓸데없는 짓 말아. 힘으로는 못 밀어내니까.”

사에나가 버둥대는 그의 손을 밀어내고는 짚고 있던 쇠막대를 브라켓 밑에 끼워 넣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는 어렵지 않게 들었겠지만 이미 반쯤 탈진해버린 몸으로는 이런 간단한 지렛대를 움직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에나가 있는 힘을 다해 체중을 싣고서야 브라켓은 바닥을 긁는 듣기싫은 마찰음을 내며 비로소 코나를 풀어주었다.

“혼자 할 수 있었…….”

퉁명스레 일어나려던 코나는 팔이 꺾이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코나의 왼쪽 팔꿈치가 옆으로 완전히 돌아가 있는 모양을 보아 이미 뼈가 부러진 것이 분명했다.

“큰소리 칠 때가 따로 있지.”

사에나가 쇠막대를 다시 짚고 코나를 부축해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를 일으켜 주려던 사에나 역시도 가슴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자신의 핀잔이 무색할 정도로 맥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하, 하윽.”

사에나가 가슴을 쥐며 헐떡거리자 코나는 그의 옆 가슴에 박혀 있는 볼트 끝자락을 그제야 발견했다.

“멍청한 마구스 같으니. 네 상처부터 보랬지.”

부러진 팔을 빼면 그나마 몸이 성한 코나가 고통을 악을 쓰고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헐떡거리는 사에나를 질질 끌고 물 밖으로 잡아당겼다.

“이 몸뚱이로 무슨 짓을 한 거냐.”

일단 물살에서 빠져나온 코나는 사에나를 벽에 기대 앉혀주었다. 그는 사에나가 자켓 안쪽에 하고 있던 머플러―바로 자신이 만들어 주었던―을 풀어 이와 오른손으로 어렵게 상처를 매 주었다.

“피가 너무 많이 나.”

“아, 알아.”

사에나가 냉담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목소리가 따닥거리며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아 긴장이 풀리며 상태가 갑자기 안 좋아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코나는 아무 말 없이 넓은 등을 불쑥 들이댔다.

“빨리 나가자.”

“니 몸으로?”

“몇 발짝 걸어 나갈 만큼은 돼.”

코나는 한 팔로 사에나를 억지로 등에 업었다. 키가 큰 사에나가 자그만 코나에게 어설프게 업혀있다 보니 발끝이 질질 끌렸지만 그는 아랑곳없이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사실 둘 다, 언제 쓰러져 입에 거품을 물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꼴이었다.

같은 시간, 사에나의 첫 대결에서 한 발씩을 주고받은 바에자는 목 옆에 볼트가 박힌 채 자재더미 옆에 맥없이 쓰러져 있었다. 놀란 코런덤 헤네티들이 바에자를 황급히 안전한 곳으로 끌어당겼다.

“젠장. 너무 오래 전장을 떠나 있었나.”

첫 대결에서 보기 좋게 당한 바에자가 천장을 올려보며 이를 갈았다. 사에나가 쏜 강력한 볼트는 그의 목젖 부근의 장갑에 깊숙한 홈을 남기고 아래로 미끄러져 쇄골 바로 위에 얕게 박혀 있었다. 일단 급소는 피했지만 고개도 가누지 못할 정도였고 피도 제법 많이 났다.

“맙소사, 움직이지 마십시오.”

함께 온 주치의가 급히 그의 고개를 받치고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오늘 같이 재수 없는 날이 또 오기 전에 빨리 후계자를 낳아야겠어.”

자존심 때문인지, 바에자가 이 와중에도 농담을 중얼거렸다.

“순혈을 맺을 아들이나 남자 형제도 없지 않으십니까.”

주치의가 고통스러워하는 그를 달래주려 애써 웃음을 지었다.

“글쎄, 결과가 혹시 좋을지도 모르니 나도 씨내리나 구해서 피를 섞어볼까. 아윽.”

바에자는 촉을 뽑아내는 아픔에 잠시 얼굴을 찡그렸지만 거칠게 숨을 씩씩댄 것을 빼고는 크게 비명을 지르지도,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황궁이 무너지면 할 일이 더 많은데, 젠장.”

“이 상태로 전투 지휘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중대장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그 사이, 옆에서 바쁘게 계산을 한 엔지니어가 바에자에게 새로 알려왔다.

“놈들이 파이프를 끊은 건 별로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파이프를 끊어서 유입되는 수량으로는 황궁의 붕괴를 약간 늦출 수는 있어도 막는 것 자체는 불가능합니다.”

“궁만 무너지면 도시가 통제 불능 상태가 될 텐데, 그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나.”

바에자가 얼른 시계를 확인했다. 울피가 길안내를 하고 있다면 곧 네피와 동맹군 가디언들이 이곳에 들이닥칠 판이었다.

중대장이 쓰러진 바에자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적 가디언들이 오기 전에 먼저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 병력 중 100명을 데려가십시오. 저와 나머지 전사들은 이곳에서 최대한 시간을 끌겠습니다. 무덤에서 살아 빠져나온 동지들 60명 정도가 황궁 밖에 재집결해 있다는 연락입니다.”

바에자가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젖혔다. 오랜만에 나온 싸움터에서 결과도 보지 못한 채 부상만 안고 물러나온다는 건 무장 출신인 그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치욕이었다.

중대장이 부하들에게 손짓을 보냈다.

“2개 소대가 바에자 님을 바깥으로 모셔라. 하오마 신전 쪽에서 적들이 오고 있으니 반대편으로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라.”

헤네티 한 명이 중상을 입은 바에자를 급히 들쳐 업었다. 헤네티의 등에 업힌 바에자는 사뭇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기랄. 이런 걸 원했던 건 아닌데.”

헤네티의 등에 업혀 카타콤베로 돌아가며 그는 싸움터로 남겨진 에아 신전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황궁의 붕괴 직전, ‘살아있는’ 코런덤들을 이끌고 이곳을 빠져나가길 원했던 그의 계획은 일단 헤네티들의 절반을 희생시키고 무너질 시간을 버는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그가 카타콤베에 접어든 순간, 또다시 바닥이 우르르 울렸다. 이번에는 조금 전, 인공호수 바닥이 무너질 때와는 완전히 다른, 꽤나 큰 진동이 오래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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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쪽 이야기도 이제 한 편밖에 남지 않았군요.

그나저나, 이 시각 카렐은 뭐 하고 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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