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28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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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피와 갈라져 황실 묘지로 달려간 마자리크 경의 곁에는 부득불 고집을 부려 나온 황빈 솔이 함께 있었다. 마자리크는 근위병들이 끌고 온 자신의 군마에 뛰어오르며 솔을 걱정스레 돌아보았다.
“나오신 건 눈감아 드리겠지만 웬만하면 후미에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저놈들을 이미 겪어봤으니까요. 경험 있는 제가 함께 있는 게 낫죠.”
계급장 없는 군복으로 갈아입은 솔은 마자리크의 염려 섞인 말에 웃음을 지으며 말에 뛰어올라 앞장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자리크가 그런 솔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제가 아랫사람입니다. 하대하십시오.”
“곧 아니게 될 텐데요, 뭐.”
솔이 긴장감을 애써 감추며 웃음을 지었다.
“상께서 웬만한 하급가디언 수준은 된다고 하셨으니 염려 마시라고요. 군사학 공부도 많이 했고 크지는 않아도 실전에도 몇 번은 나가봤어요.”
마자리크도 내심 걱정스러웠지만 4명의 비빈들 중 어찌 보면 가장 ‘배경이 없는’ 솔이 황제에게 무언가 보이고 싶다는 욕심을 품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었다.
황궁 묘지 입구에 다가간 솔은 시미터를 뽑아 확인했다. 얼마 전 전사한 외숙부 사르키스가 선물로 주었던 이 소중한 칼에는 황제의 아버지인 주페의 서명도 선명히 남아있었다.
“빨리 따라와라.”
입구에 뛰어든 마자리크가 뒤따르는 보병 전사들을 재촉했다. 신뢰할 수 없게 된 북부보병 대신 그가 데려나온 병력은 황궁에 함께 머무르던 자신의 근위기병 50명, 20여 명의 가디언들과 200여명의 에키트 족 전사들이었다. 평소 큰 도끼에 방패로 거친 몸싸움을 즐기는 에키트 전사들이었지만 이번엔 여러 개의 투척도끼와 거의 키만한 자루가 달린 전투용 해머, 심지어는 삽까지도 지니고 있었다.
“사오시안트에서 이놈들이 자살공격을 하고 있다 하니 이미 깨어났거나 아니면 곧 깨어날 거다.”
마자리크가 걱정스런 얼굴로 묘지를 살폈다. 자정이 가까워져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문도 닫힌 황실 묘지는 침묵과 어둠에 휩싸여 있었다. 아마도 위장포를 쓰고 있을 테니 이 어둠 속에서는 아직 분간할 수가 없었다.
“놈들이 또 자살공격을 할지 안 할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이놈들은 필요할 때 몸에 불을 붙일 수 있는 장치가 척추에 내장되어 있다고 하니 죽을 때는 가까이 다가서면 절대 안 된다. 아니면 해머로 뒤통수를 부숴야 불을 못 붙인다. 알겠나?”
그때, 전사 중 한 명이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해진 황실 묘지 관리인을 질질 끌고 나타났다
“관리인 데려왔습니다! 불도 모두 켜라고 지시했습니다!”
말에 오른 마자리크가 관리인의 턱에 칼집을 들이대며 위압적으로 물었다.
“최근에 들어온 시체들을 어디 묻었나? 타르서스와 펜지켄트에서 들어온 전사자 시체 말이다. 몇 구나 묻었지?”
“예? 그건 8번 섹터에 묻었습니다. 506구 중에 255구만 묻었고 나머지는 서쪽 별관 지하의 공시소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8번 섹터가 어디…….”
마자리크 경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관리인에게 다시 물으려 했지만 8번 섹터가 어딘지는 굳이 대답이 필요가 없었다. 불이 꺼져 있던 황실묘지 전체에 환한 조명이 번쩍 하고 들어왔다.
“저기다!”
마자리크가 가리킨 묘지 서북쪽에서는 무덤들에 마치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나 있었고, 일부는 이제 막 무너지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구덩이 주변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이 그의 스코프에 대번 들어왔다. 아직 떼가 채 자라지 않은 민숭민숭한 봉분 덕분에 새로 묻은 묘를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모두 따라와!”
마자리크는 급히 말을 몰아 정체불명의 실루엣 쪽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그를 지키는 50여 중무장 남부 근위기병들이 그의 주변을 재빨리 에워쌌다.
“왜 저러지?”
돌진하는 마자리크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광경은 움푹 팬 구덩이 옆에서 콜록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자들의 모습이었다. 몇몇은 무기를 들고 도망치려 하는 모습이었지만 상당수는 움직임이 별로 좋지 못했다.
“지금이 기회다! 돌격!”
마자리크는 느린 보병들을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근위기병과 가디언들에게 바로 돌격을 명했다. 저들이 땅을 파고 나오느라 탈진해서 저렇든,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든간에 지금이야말로 저들을 때려잡을 절호의 기회였다.
“이 좀비 새끼들!”
마자리크는 관 속에서 땅을 파고 기어나와 막 일어서려던 헤네티의 머리를 향해 창을 힘껏 던졌다. 육중한 기병용 창이 머리를 박살내고 관통하면서 그 헤네티는 갓 태어난 새 몸을 채 써 볼 기회도 없이 바닥에 피와 골을 쏟으며 나동그라졌다.
사오시안트에서 서부보병대를 몰살시키고 불꽃 속에서 죽어갔던 이 헤네티들은 잔뜩 기대를 품고 나온 황도의 지상에서 또다시 저승사자와 맞닥뜨린 셈이었다.
“이크!”
전방에서 공격을 가해오는 다른 헤네티의 모습에 마자리크가 기겁을 하며 말을 돌렸다.
“석궁을 조심해! 우리가 쓰는 것과는 다르다!”
죽기 전, 사오시안트에서의 이들은 온몸에 인화물질과 칼, 석궁만 지닌 두른 가벼운 몸이었지만 지금 받은 그들의 몸은 낯선 형태의 청동빛 중갑주에 짧은 석궁과 창, 4척 가까운 긴 검, 역삼각형의 방패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보통의 시민이라면 제대로 움직일 엄두도 못 낼 중무장이었고, 갓 일어나 호흡도 어렵고 몸도 무거운 상태에서는 짐덩이였다. 하지만 일어난지 시간이 지나 일찍 컨디션을 찾은 몇몇 놈들의 움직임은 가디언을 연상케 할 정도로 날랬다.
“기병들은 비실거리는 놈들만 우선 잡아! 성한 놈들은 가디언이 잡고!”
마자리크는 뒤따라 달려오고 있는 에키트 보병들을 재촉하며 크게 팔을 저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무언가 짧은 충격이 그의 방패를 때리고 비켜나 허벅지를 찔렀다.
“아익!”
놀란 마자리크가 급히 말을 돌려 뒤로 물러났다. 항구에서 급하게 달려오느라 투구나 갑옷도 입지 못한 채 방패 하나로 가리고 있던 게 화근이었다. 궁지에 몰린 헤네티들이 막 기어나오려는 동료들을 보호하려 사방에서 필사적으로 석궁을 쏘아댔다.
“젠장!”
마자리크는 몇 발짝 물러났을 뿐, 싸움터에서 절대 물러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행여 자신의 부상을 부하들이 볼까 재빨리 칼로 석궁 꼬리를 잘라내 버리고는 방패로 상처를 얼른 가렸다.
연합군 시절 공성전에서 보병들과 함께 공성장비를 밀며 앞장섰을 때처럼, 부하들 앞에서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고집스런 자존심이 그의 강점이자 한편으로는 위험한 약점이었다.
“저년이 대장이다!”
조금 전 마자리크를 쏜 헤네티가 다시 쫓아와 그를 겨누었다. 하지만 그런 헤네티의 옆을 웬 말 한 마리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너도 불타고 싶냐?”
솔이 말을 타고 달려오며 무섭게 휘두른 시미터가 공중에 U자를 그리면서 헤네티의 목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솟구쳤다. 순간 헤네티의 시체에서 불꽃이 확 치솟았지만 말을 타고 질주한 솔은 이미 시체에서 한참 멀어져 있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의 이런 모습에 마자리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제 가디언이 다 되셨군요.”
마자리크가 아픈 기색을 감추며 솔에게 손가락을 번쩍 들어보였다.
“나도 이제 내 핏줄 값을 할 거라고요!”
솔이 칼과 손에 묻은 피를 확 털어내며 악을 썼다. 한 손이 말고삐를, 한 손에 피가 뚝뚝 흐르는 칼을 쥔 솔은 이제 더 이상 ‘겁 많고 무능하고 그저 예쁘기만 한 아가씨’가 아니었다. 기세가 오른 그는 막 도착한 에키트 족들에게 무덤을 가리키며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아직 안 나온 무덤을 파헤쳐! 살아서 나오기 전에 다 없애버려!”
가디언과 기병들이 먼저 나온 헤네티들을 사냥하는 사이, 해머, 도끼를 든 에키트 야만족들이 묘에 달려들어 삽을 꽂았다.
“산 놈은 머리부터 부수고 관이 아직 열리지 않았으면 열지 말고 무조건 창으로 찍어!”
마자리크가 부하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땅 밑에서 나오려 발버둥치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우악스런 에키트 족들이 인정사정없이 내려찍는 도끼와 해머였다. 창이 꽂히고 해머가 후려치는 곳에서 비명소리가 메아리를 치며 제국에서 가장 ‘신성한’ 황실 묘지의 한구석을 산 사람의 피로 물들였다.
200명이 넘는 매장된 헤네티들 중 거의 절반이 땅 밖으로 이 새 몸을 내밀어보지 못한 채 먼 훗날, 또 다른 환생을 기다려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황도의 땅에 묻혀 있던 헤네티들은 이렇게 최악의 운명을 맞이하고 있었다.
마자리크와 솔이 황실 묘지에서 헤네티들을 사냥하고 있는 동안, 가디언들을 이끌고 황궁 서쪽 별관의 시체 공시소에 찾아간 네피는 허탈감에 어깨를 떨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이곳의 관들은 이미 활짝 열려 있었다.
“대장군님! 관리인은 이미 죽었고 경비병들도 당한 것 같습니다.”
“젠장, 바깥에서 열었어.”
네피가 부서진 관 중 하나를 확인하며 입가를 씰룩거렸다. 관은 안에서 열릴 수 있게 장치가 되어 있었지만 바깥에서 누군가 억지로 비틀어 연 흔적이 있었다. 부하 가디언이 다른 관도 재빨리 확인했다.
“이것도 그런데요?”
“묘지 쪽은 이제 막 사냥을 시작했다던데……여긴 황궁에 먼저 와 있던 한패거리들이 깨기 전에 미리 꺼내어 간 모양이다. 젠장!”
부아가 난 네피는 비어있는 관을 발로 힘껏 걷어차 부숴버렸다.
“당장 공사장으로 돌아간다! 지하로 내려가야겠다.”
10시 하오마 신전은 지난 황도 수성전 당시 폭우를 타고 흘러든 빗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다. 이후 황제의 명으로 긴급 차수 공사를 하고 펌프로 물도 급히 빼내어 카타콤베까지 물이 드는 것만은 어떻게 막았지만 원래는 반들반들한 대리석이었던 신전의 바닥은 말라붙은 진흙이 뒤덮여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신전 한쪽에서는 코런덤 헤네티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 분주히 무장을 챙기고 있었고, 먼저 준비를 끝낸 헤네티들은 나무판으로 바닥의 흙을 한쪽으로 치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들 모두 동맹군에 숨어들어 있던 광신도들이 공시소를 습격해 운 좋게 빼내 온 자들이었다.
“하여간 못 말리겠군. 이 판국에 청소라니.”
신전 중간에서 갑옷을 입고 있던 한 여자가 이 모습에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저 소란 덕분에 그의 주변에 온통 누런 흙먼지가 날리고 있었다.
여자의 몸에 진주빛 단단한 중갑주를 입혀주고 있던 시종이 웃으며 대답했다.
“신의 소중한 거처가 훼손되었습니다. 차하르 빈 하오마 마구스께서는 돌아가셨지만 곧 돌아오실 그분의 새 육신을 위해 남은 자들이 소중히 받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교리적인’ 답변에 이 여자가 눈살을 찡그렸다. 그의 기분이 상했음을 깨달은 시종이 당황한 얼굴로 얼른 자리에 꿇어앉았다.
“소, 소인 감히 비천한 것이 현신 앞에서 멋대로 입을 놀린 것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바에자 님.”
“됐다, 네가 틀린 말 한 건 아니니.”
바에자 빈트 에시마 마구스는 표정을 돌변하며 킬킬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흙먼지가 앉은 짧은 단발머리칼을 툭툭 털어내고는 시종이 내민 투구를 깊숙이 눌러썼다.
49세라는 젊은 나이에 마구스에 오른 만큼, 그는 여러 면에서 이전 세대 마구스들과는 달랐다. 그는 교단의 엘리트코스인 의학이나 자연과학 대신 심리학을 공부했고, 다른 후계자들이 의사나 학자로서 경력을 쌓고 있을 때 군 지휘관으로 민병대와 이단들을 잔혹하게 사냥하면서 악명을 떨치기까지 했다.
그가 마구스가 된 이후, 악명 높은 코메트 사단장 ‘진줏빛 마녀’가 갑자기 자취를 감추자 민병대 사람들은 그가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는 마구스 후계자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무지의 소치였다.
그는 제멋대로인 것을 빼면 유머와 카리스마를 함께 갖춘 감각적인 지휘관이었고, 최고의 명사수에 웬만한 헤네티도 당해내기 어려울 만큼 고수급의 무공을 뽐내는, 말 그대로 타고난 무장이었다.
바에자가 1군단 사역병대에 있던 광신도들을 동원해 공시소를 습격한 것도 항구에서 사에나를 죽이는 데 실패했다는 보고에 동물적으로 결정한 임기응변이었다.
‘분노, 힘’을 주관하는 에시마 교단의 마구스답게, 그는 무례해 보일만큼 거침없고 뻔뻔한 성격으로 후계자 시절부터 여기저기서 매번 ‘행실 지적’을 받아왔고 그런 면은 마구스로 잔뼈가 굵은 지금까지도 여전했다.
아스탈이 ‘그대 머릿속엔 뱀이 100마리는 들어 있는 것 같아’라고 비아냥거리곤 했지만 이 별난 마구스는 대신관의 이런 핀잔에도 ‘칭찬이시죠?’라고 태연히 대답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계를 확인한 바에자는 초조한 표정으로 헤네티들을 돌아보았다.
“무덤에 있는 녀석들이 왜 이리 안 오지?”
그는 장전된 석궁을 등에 둘러메고 어두운 카타콤베를 돌아보았다.
따져보면 지금껏 그가 직접 나섰던 전투 중 크게 실패한 건 바로 이곳 카타콤베에서 경연을 막 통과한 대신관 후계자 오르마즈를 놓쳤던 그 한 번이 유일했다. 당시 오르마즈의 사격에 부상까지 입고 크게 자존심이 상했던 그로서는 이곳의 의미가 남달랐다.
“우리라도 먼저 에아 신전으로 가야겠다. 모두 집결해.”
바에자의 손짓에 250여명의 중무장한 헤네티들이 신전 중앙에 하나둘 도열했다. 그들 모두는 이 카타콤베의 구조를 안방처럼 꿰고 있었고 사격과 접근전 모두 능한 최고의 전사들이었다.
“반쪼가리 에아 마구스님하고 미치광이 트라카 후계자께서 두 팔 벌려 환영해 주실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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