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714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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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길드 마스터인 케스난의 보고서를 앞에 두고 앉은 카렐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케스난이 황금갈고리를 만지작거리며 다리를 이리저리 꼬고 있었고, 오른쪽에는 통신으로 연결된 보안비서관 사에나가 앉아있었다.
그리고 아직은 낯선 새 심복 코나 시디크가 사에나의 뒤에 평소처럼 고개를 반쯤 숙인 채 서 있었다. 그는 이전처럼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반쯤 뜬 눈 뒤로 자신의 눈동자를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카렐은 그의 손끝이 드문드문 사에나의 어깨를 짚는 것을 보았지만 일단은 못 본 척했다.
어쨌든 누군가의 손길을 지독히도 싫어할 듯 보이는 사에나가 이 ‘악당’의 손길에는 전혀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카렐에게는 꽤나 뜻밖이었다.
연합군과 벌일 야전에 관한 사항이라면 그에게는 믿고 논의할 만한 무장들이 많이 있었지만, 이들, 그리고 지금 적진에 들어가 있는 베흔과 새 법무대신 예정자인 아리아노는 교단을 상대하는 ‘또 다른 전선’에서 황제를 위해 싸울 전사들이었다.
아직 카렐은 그들에 관해 모르는 것이 많고 모든 것이 많이 부족했지만 수나 마구스, 니사나 아샤드 경처럼 이미 교단에 연계되어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엔지 자신들의 실체를 밝히기를 극도로 꺼리고 있었다.
아샤드 경은 ‘오르마즈 경께서 폐하를 지키시라고 명을 주셨다’고 말했지만 사실 카렐에게 가장 궁금한 건 교단의 크바르나 여단장인 그가 왜 제국의 개국공신인 오르마즈의 명을 받아 움직였는지 그 이유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아샤드의 대답은 간단했다.
- 그것을 알아내어 엇나간 역사를 바로잡으시는 것이 신께서 폐하께 내리신 ’심판‘입니다. -
명색이 황제인 자신에게 그 따위 말을 하는 것에 카렐도 버럭 화가 솟구쳤지만 그 고집쟁이 헤네티는 쇠심줄이라도 삶아먹었는지 그 이상은 밝히지 않았다. 그리고 카렐 스스로도 어렴풋이나마 짚이는 것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그것이 입 밖으로 내기에는 너무 허무맹랑해서 탈이었지만.
어쨌든 지금의 카렐에게는 과거의 교단과 연계 없이 ‘지금의 황제 카렐’에게만 충성할 새로운 사람들이 필요했고, 이들이 그 시작점이었다.
“요는 지난번 행방불명된 15척의 우리 스페이스 수송선 중에 중형급 8대가 황제령에 돌아왔다 이거 아닌가.”
황제의 물음에 케스난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예, 콜사인과 도장을 바꾸고, 외장을 바꾸기 위해 전면수리를 한 후에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 같습니다. 해적들이 자주 쓰는 방식이지요. 대형 7대는 덩치가 덩치라 아직 손을 못 댄 것 같습니다.”
케스난은 또 다리를 반대로 꼬고 앉으며 누군가 쩍쩍 흘겨 쓴 낙서 비슷한 암호문을 뒤적거리며 대답했다. 얼마 전, 카렐이 자신의 수송선 15척을 잃고 난 후 그에게 그 행방을 추적하라 명하고 들어온 첫 번째 제대로 된 보고였다.
“후훗, 해적이라, 람다 그놈한테 딱 어울리는 비유로군.”
“말씀하신대로, 제 아랫놈들 중에 사교도 몇 놈 골라 ‘믿음을 좀 키워서’ 배에 실었지요. 그놈들이 자리를 잡는대로 앞으로도 몇 놈들을 계속 심을 참입니다. 이 정도면 맘에 드십니까?”
케스난이 보지도 못하는 황제에게 눈웃음을 쳤지만 이번 보고 내용과 간드러진 목소리만으로도 황제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의 교태스런 모습에 매사 분별이 확실한 사에나가 줄곧 뚱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수고했네, 케스난, 역시 그대의 임기응변은 최고야.”
“그 중 7척은 북부 바하칼리에서 출발해 사오시안트 별궁 인근 해안까지 간 것으로 보입니다. 2척, 2척, 3척씩 나누어 각각 새벽에 들어갔다고 보고되었습니다. 새벽 무렵에 2번 도시 인근 바다가 그나마 잔잔하다고 하는군요.”
“내 근거지라고 알고 있는 북부에서 적 본거지인 사오시안트로 갔다? 안 어울려도 한참 안 어울리는 조합이군.”
카렐이 살이 빠져 움푹하게 팬 뺨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뭘 싣고 간 것 같나?”
“첫 번째 선단은 ‘코런덤’ 소속 용병 1,500명을 싣고 간 게 확실합니다. 아샤드 경의 보고대로, 그 헤네티들이 이번 전투에 연합군 쪽에 가담해 싸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다음은?”
“두 번째 선단은 코런덤의 장비와 보급품을 싣고 간 것 같습니다만……세 번째 선단이 의문입니다. 정체불명의 상자를 잔뜩 가져간 것 같은데 내용물이 뭔지는 아무 정보도 없습니다.”
“세 번째 선단이면 오늘 새벽에 들어간 것 아닌가?”
“웬만한 선원이라면 식량이든 무기든 기계류든 싣는 꼴만 봐도 대강은 감을 잡기 마련인데 이번 것은 그냥 상자였다고 합니다. 상자 겉에는 압축건조식량이라고 써 있었다는데…….”
“농지도 없는 북부에서 식량을 내보낸다고? 그것도 수송선 두 척 분량이나? 우리도 식량은 황제령 자체 조달하던지 남부에서 반입하고 있는데?”
“그러니 이상하지요.”
케스난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카렐은 ‘베흔에게 오늘 새벽 2번 도시에 들어간 반입물품의 정체를 알아내도록 알려라.’고 급히 쪽지를 써서 옆에 있는 사에나에게 넘겼다.
“그런데 총 8척이 복귀했다더니, 나머지 1척은?”
“그게 제일 문젭니다.”
케스난이 굳은 표정을 지었다.
“제일 먼저 수리가 끝난 1척인데, 제가 미처 사람을 싣지 못했습니다. 이런저런 정보를 취합한 결과 타르서스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타르서스? 그럼 우리 쪽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 아냐?”
카렐이 얼굴을 찡그렸다. 유달리 암시장이 발달한 타르서스에서 유통구조가 몇 번에 걸쳐 ‘세탁’되고 난 물품이 동맹군의 군수품을 가장해 들어오는 것이 충분히 가능했다.
“새끼들이 무슨 사고를 치려고 하는 거지.”
카렐이 얼굴을 찡그렸다. 지난번 군수부장이던 밀리타가 북부에서 반입된 불량 말 사료와 군량을 뒤늦게나마 차단하기는 했지만 그 후유증은 심각했다. 말의 절반을 잃은 기병대는 치명타를 입었고, 불량 식량을 지급받은 많은 장병들이 아직까지도 알 수 없는 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실 이번 사오시안트 공략에서도 덕분에 동맹군은 반토막난 전력으로 싸워야 할 암담한 상황이었다. 카렐이 연합군과의 전면대결을 피하고 코런덤을 역이용하는 방법을 택해야 했던 것도 그들의 움직임을 파악했거나 딱히 대단한 정보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사실 그것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택한 궁여지책에 불과했다.
“또 불량물품일까.”
카렐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샤드 경이 ‘아스탈의 헤네티 수백이 명이 황도에도 잠입을 시도할지 모릅니다.’라고 알려주기는 했지만 사실 멀쩡한 전사 수백이 아케메니아 항의 철통같은 보안을 뚫고 밀항을 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상, 생각할 수 있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항구의 단속을 최대한 강화하라고 지시하는 수밖에 없군.”
마땅한 대응책이 떠오르지 않은 카렐은 일단 가장 원론적인 방법을 생각해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행방불명된 15척의 수송선은 새로 건조된 최첨단 스페이스 수송선들이었어. 이번에 나타난 게 5000급인데 중형이라고 해도 그 정도면 소규모 불법 수리소에서 손을 댈 물건은 아냐. 그 정도면 상당한 규모의 조선소가 아니면 들어갈 도크도 마련 못할걸?”
“물론입니다.”
케스난이 기다렸다는 듯 단호하게 대답했다.
“뒷조사를 시켜봤더니 아주 흥미로운 게 나오더군요.”
케스난이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들어보였지만 역시 눈먼 황제에게는 별 소용이 없었다.
“쿠트라스 조선조합에서 아주 옛날에 군용 프리깃을 만들 때 썼던 도크에서 이번 개조작업을 한 것 같습니다. 꽤 오랫동안 폐쇄되었던 곳 같습니다만?”
“쿠트라스 조선조합?……군용 프리깃? 구린내가 풀풀 나는데?”
카렐이 팔짱을 끼고 턱을 똑똑 두드렸다. ‘고작’ 수송선 불법개조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어마어마하게 큰 사건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고 있었다.
“짐작하시는 대로.”
케스난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돌아가신 세나우스 3세 선제께서 타셨던 프리깃이 거기서 건조되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세네피스 황후께서 계셨고, 북부가 한참 잘 나가던 때였죠.”
“반반의 확률이야. 그때는 제국 프리깃의 절반이 거기서 만들어졌으니. 섣불리 넘겨짚긴…….”
카렐이 입술에 힘을 꽉 두며 계속 턱을 두드렸다. 지난해 초, 선제인 세나우스 3세 오넬론의 갑작스런 죽음은 공식적으로는 프리깃 조종사의 실수와 기계결함, 안전장치의 결함이 마치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맞아떨어지면서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다.
물론 그 뒤로도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되었고, 베흔과 근위대가 총동원되어 경위를 조사했지만 황제의 전용 프리깃은 건조되고 150년이나 멀쩡히, 그것도 중간중간 근위대, 서부에서 실시한 여러 번의 대대적인 수리와 개조를 거쳐가며 운용된 믿을만한 기계였다.
그런 프리깃에 ‘무려 150년 전, 건조 당시부터’ 어떤 음모가 있었다는 건 누가 보기에도 억지스러운 발상이었다. 게다가 당시까지만 해도 그곳은 제국 프리깃과 셔틀의 절반 이상을 공급했던 제국 최대의 조선소였다.
하지만 눈이 보이지 않아 보고서를 직접 볼 수 없는 황제에게 케스난의 설명은 훨씬 직접적이었다.
“이번에 도둑질해 간 수송선을 개조한 기술자들이 당시에 황제의 프리깃을 건조했던 바로 그 팀이라면요?”
카렐이 턱을 두드리던 손놀림을 딱 멈추었다. 그의 온몸에 순간 냉기가 확 퍼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교단, 아니 람다 그자가 150년이나 오넬론 황제의 목줄을 쥐고 언제 당기는 게 제일 적당할지 계산을 하고 있었다?”
카렐이 케스난의 형상을 향해 눈동자를 살짝 움직였다. 그를 대신해 이번에 대답을 한 건 사에나였다.
“추정을 해 보면 대강의 시나리오는 맞아떨어집니다.”
카렐이 그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다.
“만약 제국을 무너뜨리고 싶었다면 첫 번째 기회는 291년, 북부의 몰락과 오르마즈 경의 죽음 직후였지만 무슨 이유엔지 그 기회는 놓쳤습니다. 어쩌면 젊은 정치가 페로 경이 혜성처럼 등장하면서 제국을 안정시켰던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는?”
“페로 경이 안정적으로 제국을 이끌면서 한동안은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후계 문제 덕분에 두 번째 기회를 얻었을 겁니다. 황제는 행방불명중인 수우를 대신해 페로 경을 막 후계자로 선임해 발표할 참이었고, 근위대장 베흔은 그 사실에 내부적으로 반발하고 있었고 말입니다.”
명문가 출신으로 정세에 유달리 밝은 사람답게, 그의 거침없는 말이 이어졌다.
“람다 입장에서는 지도자 기질을 갖춘 페로 경이 황제 후계자로 공식 선임되기 전에 일을 터뜨려야 했을 겁니다. 그래서 페로 경이 후계자로 결정되기 직전, 416년 신년 행사에 맞춰 선황을 시해했고, 예상대로 총리와 근위대장 사이에 내분이 벌어졌지요.”
“그럭저럭 말이 되는 시나리오군.”
“물론 따로 근거는 없습니다. 그저 제국을 내전에 몰아넣기를 원했다면 가장 적당한 타이밍이었다는 것뿐입니다.”
사에나가 자신의 추리에 별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바로 인정했다.
카렐이 답답한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문제는 아직 그쪽에 나만의 정보망이 너무 부족하다는 거야.”
황제의 불평도 무리는 아니었다. 케스난은 이제야 교단 내에 사람을 심기 시작했으니 세력이 뿌리내리려면 아직 한참 먼 판국이었고, 사에나는 잘 마구스의 유일한 혈통이라는 이득 덕택에 일단 마구스 팔찌를 받기는 했지만 교단 내에는 아무런 세력도 없었다.
그때, 창고 밖에서 낮은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사오시안트로 갈 황제의 선단이 출발할 것이라는 예고였다. 이젠 ‘교단을 상대하는 황제’가 아닌, 연합군과 싸울 ‘동맹군 최고통수권자 세나우스 4세 황제’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카렐이 케스난과 사에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케스난 자네는 교단으로 넘어간 수송선 동향을 계속 살펴서 내게 알리고, 사에나 자넨 마잔다란으로 들어간 정체불명의 보급품이 어디로 갔는지, 혹시 우리 쪽으로 흘러들지 않는지 확인해서 내게 알리게.”
카렐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베흔도 사오시안트 내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니, 이제 사실상 마지막 결전이 벌어질 사오시안트로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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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니 이번 편은 총 복습(?) 같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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