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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99화 (694/1,132)

< -- 699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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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에서 수나 마구스가 제단 코앞까지 다가온 암살수를 제압하는 와중에도 신전 중앙의 구름다리 위의 오르마즈는 여전히 다른 암살수들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천정 위의 저격수를 힘겹게 쓰러뜨리고 무기를 빼앗은 그는 야푸르가 있는 제단 쪽으로 피하려 했지만 극심한 탈수에 약한 독성분까지 조금씩 번지면서 다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하, 학.”

그는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방금 마신 물을 급히 게워냈지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구름다리 난간에 기대어 마구스들이 있는 제단 쪽을 향해 필사적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이 혼란통에 청중석의 신관들과 일반 청중들이 앞을 다투어 빠져나가고 있었지만 이곳 경비를 맡은 스루바라 교단 헤네티들은 우왕좌왕거리며 부산만 떨 뿐 쓰러진 오르마즈를 구하러 오지도, 사람들 사이에 뒤섞인 암살수들을 잡아내려 애쓰지도 않았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가장 분노한 건 당연히 대신관이었다.

“빌어먹을! 당장 저애를 구하지 않고 뭐 하나!”

격분한 야푸르가 구름다리 위에서 혼자 사투를 벌이고 있는 오르마즈를 손으로 가리키며 악을 썼지만 밑에서 몰려올라온 스루바라 교단의 헤네티들은 그런 그를 제단 안쪽 마구스들만 드나드는 작은 문으로 막무가내 밀어붙이며 대답했다.

“저희가 구할 테니 염려 마시고 피하십시오! 이미 한 분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비켜! 누가 구한다는 거냐! 이 새끼들이 죽고 싶나!”

대신관의 격노에도 자신의 마구스에게 미리 지시를 받은 스루바라의 헤네티들은 당장 세상이라도 뒤집힐 듯 요란을 떨며 사람들을 신전 안에서 마구 몰아냈다.

“저희가 구합니다! 대신관님의 안전이 우선이니 일단 피하십시오!”

제단 위의 야푸르가 헤네티들을 뿌리치며 오르마즈를 애타게 불렀지만 그도 경호를 맡은 수십의 헤네티들에게 억지로 떠밀려 다른 마구스들과 함께 신전 밖으로 사라져갔다.

“적 암살수를 가둬야 돼! 빨리 문을 닫아!”

누군가 알 수 없는 자의 외침에 기다렸다는 듯 사방의 신전 문이 쿵 하고 닫히는 소리가 내부를 울렸다. 비틀거리며 구름다리를 내려가던 오르마즈는 문이 닫히는 광경을 바라보며 홀로 내던져졌다는 절망감에 파르르 떨었다.

헤네티들이 외치는 ‘적 암살수’라는 말이 악역을 맡아 이곳에 들어온 민병대 암살팀이 아닌, 자신을 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스쳤다.

하마피타가 오르마즈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민병대 암살팀을 끌어들인 것이 분명했다.

“아르잔님! 아르잔님!”

홀로 버려졌다고 생각했던 오르마즈의 귀에 너무도 반가운 외침이 들려왔다. 파트라와 카야를 선두로 5명의 ‘동반자’들이 이곳에서 도망치는 대신 위험천만한 제단 아래를 급히 가로질러 구름다리로 달려오고 있었다.

덩치가 큰 파트라와 카야가 비틀거리는 오르마즈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고 그나마 안전한 다리 난간 구석으로 급히 잡아당겼다.

“조심해, 뒤쪽에!”

청중석 쪽의 민병대 X를 다시 돌아본 오르마즈가 니사를 확 밀어냈다. 공중에서 내리꽂힌 볼트가 막 넘어지는 니사의 목을 스치고 구름다리 난간에 박히며 파르르 끝을 떨었다.

“맙소사! 막아! 이분부터 지켜!”

놀란 드르바스파 교단 정치학자 혼이 오르마즈를 온몸으로 허겁지겁 가렸다. 그때,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에서 날아든 또 다른 볼트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혼의 뒷목에 정확히 꽂혔다.

“우, 웁.”

멍한 얼굴의 혼이 돌아본 곳에는 암살수가 아닌 스루바라 교단 헤네티가 석궁을 쥐고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교단 헤네티들이 이젠 소극적인 방관자를 넘어서서 공격자로까지 변해 있었다.

“도대체 누구 편이냐!”

오르마즈가 재빨리 당긴 저격수 석궁의 볼트가 그 헤네티의 얼굴에 바로 작열했다. 예상치도 못한 응사에 눈을 명중당한 헤네티가 악 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놀란 헤네티들과 민병대 암살수들이 기겁을 하며 재빨리 사방으로 흩어졌다.

“피해!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오르마즈의 칼날같이 정확한 응사에 놀란 적들이 일시 공격을 늦추었지만 민병대 암살수에 십여 명의 스루바라 헤네티들까지 합세해 일행을 적극적으로 공격한다면 이미 부상까지 입은 오르마즈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트라와 카야가 한때 군인이기는 했지만 무기가 없으니 별 의미가 없었다.

“혼? 혼?”

오르마즈는 뒷목에 볼트가 박힌 혼을 껴안고 흔들었지만 멍한 눈을 뜨고 있던 그는 말 한 마디 남기지 못한 채 힘없이 오르마즈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르잔 대신관’의 충성스런 동반자가 될 뻔했던 그 젊은 정치학도는 결국 그의 품에서 힘없이 눈을 감고 말았다.

“젠장!”

오르마즈가 당혹스런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울부짖었지만 구름다리 위에서 계속 지체할 수는 없었다.

“맙소사, 어디로 가지요?”

파랗게 질린 니사와 일행들이 겁에 질린 얼굴로 오르마즈를 돌아보았다. 구경꾼 대부분이 빠져나간 에아 신전 안에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아니 어쩌면 일부러 나가지 않았을 몇 명의 신관들과 헤네티, 그리고 군데군데 숨은 민병대 암살수들뿐이었다.

“민병대와 하마피타가 손을 잡은 것 같다.”

니사에게서 받아든 깨끗한 물로 일단 목을 축인 오르마즈가 아직 어질어질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이제 바깥에서 누가 적이고 누가 동료였는지는 의미가 없었다. 보는 눈이 없어지고, 문까지 잠긴 신전 안은 이제 ‘아르잔 오르마즈 빈트 다하카르’를 잡기 위한 사냥터일 뿐이었다.

“혹시 다른 출입문 없나?”

사방에서 볼트가 날아드는 소리에 잔뜩 움츠러든 오르마즈가 이곳 신전을 잘 아는 에아 교단 출신 카야에게 황급히 물었다.

“전에 여기 지하에 뭐가 있다고 들었는데!”

“거긴…….”

급히 시계를 확인한 카야는 마구스들이 있던 제단 부근의 작은 돌벽을 돌아보았다. 다행히 헤네티와 암살수들은 청중석 쪽에 몰려있었고, 마구스 제단이 있는 쪽에는 조금 전 오르마즈에게 눈을 맞아 쓰러진 1명 말고는 기둥 뒤에 숨은 1명밖에 보이지 않았다.

“저기가 카타콤베 문이냐?”

오르마즈의 물음에 군 지휘관 출신인 파트라가 냉큼 대답했다.

“지금 오후 5시니까……절 따라오십시오! 울피하고 니사가 이분을 모시고! 카야 네가 뒤를 지켜! 니사 넌 빨리 외부에 구조를…….”

“저기까지 간다고? 맙소사.”

우람한 체구의 카야가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조그만 울피를 억지로 잡아당겨 확 밀었다.

“빨리!”

오르마즈에게서 단검을 받아든 파트라가 앞장서 달려 나가자 일행은 오르마즈를 부축해 구름다리를 급히 내려갔다. 볼트에 관통당한 오르마즈의 발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며 바닥에 흔적을 선명하게 남겼다.

“이놈들이!”

기둥 뒤에 숨은 헤네티가 모습을 휙 나타내자 오르마즈가 기다렸다는 듯 한 발을 날렸다. 얼굴 옆을 스치는 정확한 일격에 놀란 헤네티가 기겁을 하며 다시 몸을 숨겼다. 그새 일행은 카타콤베 문을 향해 허겁지겁 걸음을 옮겼다.

“일단 가! 일단 카타콤베까지만 가면……읍!”

몸을 잔뜩 낮추고 할룩스를 꺼내들며 앞장서던 카야는 구름다리 아래에서 누군가가 불쑥 나타나자 기겁을 하며 멈칫거렸다.

“이놈들 4번 기둥 옆에서 카타콤베 쪽으로 간다! 막지 않고 뭐 해!”

적들에게 일행의 움직임을 알린 건 조금 전까지 경연을 주재했던 스루바라 2신관 크로이소스였다. 그의 손짓에 헤네티들이 일제히 구름다리를 넘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 빌어먹을 노인네가!”

일행의 뒤를 지키던 카야가 서슴없이 그 거구를 날려 그 중늙은이의 몸을 와락 덮치고 입을 막아버렸다.

“가! 내가 뒤에서 이놈을 방패삼아서 막을 테니…….”

크로이소스를 쓰러뜨린 카야는 버둥대는 이 늙고 마른 신관의 뒷덜미를 두 팔로 번쩍 들어 올리며 도망치는 동료들의 후미를 막아섰다. 그의 선제공격에 꼼짝없이 당한 크로이소스가 놀라 버둥거렸지만 크고 건장한 젊은이의 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네놈들 계속 쏘면 이놈의 목을 비틀어 버릴…….”

좁은 구름다리를 지키고 선 카야가 크로이소스의 몸을 방패로 뒷걸음치며 쩌렁쩌렁 고함을 질렀다. 오르마즈 일행을 쫓아 구름다리를 건너려던 헤네티들이 기겁을 하며 자리에 일단 멈춰 섰다.

“젠장! 쏘지 마! 쏘지 마!”

카야의 예상대로, 교단의 2신관이 붙들리자 스루바라 교단 헤네티들이 차마 사격을 못한 채 멈칫거렸다. 하지만 청중석에 있던 민병대 팀장이 쏜 볼트가 크로이소스의 얼굴을 스쳐 날아가서는 카야의 목덜미에 그대로 푹 박혔다.

“아읍!”

치명상을 입은 카야는 크로이소스를 팔에 든 채 자리에서 휘청거렸다. 민병대 암살수들에게 지금은 도리어 상황을 핑계로 고위 신관까지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청중석에 숨어있던 또 다른 민병대 암살수가 휘청거리는 카야에게 볼트를 날려 다리까지 명중시켰지만 악에 받친 이 거구의 사내는 목과 다리에서 피를 쏟으면서도 쉽사리 쓰러져주지 않았다. 그는 크로이소스를 치켜든 채로 비틀비틀 뒷걸음치며 오르마즈를 데리고 물러나는 동료들의 뒤를 필사적으로 막아섰다.

하지만 그의 이런 걸음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빨리, 빨리 도망가라고.”

숨이 막혀 온 카야가 도망치고 있는 동료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자신의 한계를 깨달은 이 젊은이는 고개를 거칠게 저으며 구름다리 아래 물가에서 뜨거운 불꽃을 내뿜고 있는 에아 신의 거대한 화로를 돌아보았다.

“이 더러운 노인네, 우리 신께 제물이나 돼라!”

악에 받친 카야는 팔에 치켜들고 있던 그 늙은 신관을 활활 불타고 있는 화로로 온 힘을 다해 휙 내던졌다.

“뭐, 뭐야! 으악!”

얼떨결에 내던져진 그 신관은 등 뒤에서 화끈함을 느낀 순간 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뚱이가 떨어진 순간, 화로 안에서 시뻘겋게 낼름거리던 에아 신의 불꽃이 그의 몸을 대번 집어삼켰다.

“우, 우아아아악!”

불꽃에 휩싸인 크로이소스의 끔찍한 비명과 생살이 타들어가는 지독한 노린내가 신전 안에 확 번져나갔다.

“물과 지혜의 신이시여, 이 미천한 육신을 부디 품어주소서.”

힘이 빠져 비틀거리는 카야의 미간에 또다시 긴 볼트 하나가 딱 소리를 내며 꽂혔다. 그의 크고 건장한 육신은 볼트의 힘에 밀리며 구름다리의 낮은 난간을 넘어 수로의 물속으로 맥없이 곤두박질쳤다.

“카야! 카야!”

발에서 피를 흘리는 오르마즈를 부축해 가던 파트라가 이어지는 동료의 죽음에 놀라 울부짖었다. 이제 오르마즈의 곁에 남은 건 니사와 하오마 교단에서 온 식물학자 울피, 티시트리야 교단의 물리학자 파트라까지 3명뿐이었다.

“빌어먹을, 밀리타 그년은 어디 갔어!”

니사가 뒤를 돌아보며 이를 갈았다. 경연 때까지만 해도 함께 있었지만 정작 ‘아르잔님을 지키러 가자’며 모두가 나섰을 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돌문 앞에 도착한 일행은 쏟아지는 사격을 피해 구석의 기둥 뒤에 급히 몸을 숨겼다. 파트라는 오르마즈에게서 건네받은 단검을 입에 물고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 조심스레 돌문에 다가가 잠긴 고리를 뜯기 시작했다.

그때, 니사의 할룩스에 조금 전 수나 마구스와 함께 나간 요아킴이 응급 병상에 누운 채 모습을 나타냈다. 니사가 다친 그에게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여기, 여기 아직 신전 안이야! 아르잔님이 다치셨고 카야하고 혼이 죽었어! 하마피타 놈들이 대신관님을 배신했다고! 일단 카타콤베로 도망칠 테니 네가 거기서 어떻게 좀 해 봐.”

니사의 애타는 목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진 요아킴이 의무요원의 손을 뿌리치고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어깨와 등이 온통 피에 젖은 상태였지만 최소한 내부에 고립된 오르마즈나 니사 일행보다는 나았다.

니사는 뒤에서 다가오는 헤네티들을 돌아보며 더 빠른 말투로 말했다.

“카타콤베 안쪽은 통신이 안 되는 거 알지?”

“물론. 랜턴은 있어? 어두워서 못 볼 텐데?”

“이 분께서 계시니 없어도 괜찮을 거야.”

니사가 아직 영문도 모른 채 뒤에 대고 엄호사격을 하고 있는 오르마즈를 얼른 돌아보았다. 기둥으로 다가오던 헤네티들은 오르마즈의 사격에 놀라 재빨리 엎드리거나 몸을 피했다.

니사가 급히 시계를 보며 말했다.

“1시 방향의 티시트리야 신전으로 갈 테니까 그쪽에 미리 좀 알려 줘. 알았지?”

“빨리! 열었으니까 빨리 와!”

그때, 돌문을 연 파트라가 일행에게 오라며 손짓을 했다. 통신을 끝낸 니사가 그때까지도 엄호사격을 하고 있던 오르마즈의 등을 툭툭 쳤다.

“빨리 따라오세요. 저기로 가면 돼요!”

앞장서 나가려던 니사는 기둥 뒤에서 유령처럼 불쑥 튀어나온 누군가에 목을 잡히며 으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으, 으읍.”

창백해진 니사는 눈앞에서 이글거리는 누군가의 붉은 눈동자에 온몸이 바싹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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