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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85화 (681/1,132)

< -- 685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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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옥구슬같은 목소리만 들어도 누군지 바로 알겠군.”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샤자한 공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했다. 아니나다를까, 성벽에 있던 수비병들이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수비군의 북부보병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채 성벽 위로 삼삼오오 고개를 내밀었다.

다룬을 따라 나온 가디언들은 성벽 위의 소란에는 아랑곳없이 십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끌어내 강제로 흙바닥에 꿇어앉혔다. 찢기거나 더러워지기는 했지만 입고 있는 관복을 보아 카렐의 황실내각에 있던 서부 출신 관료들이었고, 개중에는 코리온의 심복인 하심과 법무대신 두겐 같아 보이는 모습도 보였다.

이미 얻어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엉망이 된 그들은 무어라 악을 쓰고 있었지만 입에 채워진 재갈 때문에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다룬의 손짓에 가디언들이 칼을 뽑아들고 그들의 목을 차례대로 치기 시작했다. 끔찍한 비명과 잘린 목에서 솟구치는 핏방울이 북문 앞 고개의 마른 흙바닥을 순식간에 검붉게 적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룬이 직접 코리온을 끌어내 이미 시체가 널브러진 흙바닥 위에 사정없이 동댕이쳤다.

“네 이 무엄한…….”

코리온은 수하들의 시체 위에서도 계속 악을 쓰려 했지만 다룬이 그를 그렇게 놔두지는 않았다. 그는 코리온의 머리채를 붙들어 샤자한 공을 향해 고개를 억지로 치켜 올리게 하고는 뒤에서 칼을 치켜들었다.

억지로 고개가 올려진 코리온은 번득이는 눈을 부릅뜨며 언덕 아래에서 이 광경을 사뭇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는 샤자한 공 들으라는 듯 카랑카랑하게 고리를 질렀다.

“저런 쥐새끼 같은 소인배 앞에서 어찌 이런 추한 모습으로 죽을 수 있더냐!”

코리온이 고개를 저으며 뒤의 다룬을 쏘아보았다.

“이 손 놓아라! 내 주페 태자께서 먼저 가신 모습 그대로 꼿꼿이 앉아 죽을 것이니!”

코리온의 느닷없는 요구에 당황한 다룬이 누각 위의 페로를 힐끔 돌아보았다. 페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다시 침을 뱉었다.

“저 빌어먹을 서생 놈은 어떻게 뒈질 때까지도 체면 타령이냐? 기가 막혀 못 봐 주겠네. 집어치고 아예 머리통을 박살내 버려.”

정적의 마지막 요구까지도 무참하게 무시해 버리는 페로의 모습에 샤자한 공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메이스 줘 봐.”

뒤에 선 다른 가디언의 허리춤에서 메이스를 집어든 다룬은 무어라 더 말하려는 코리온의 뒤통수를 온 힘을 다해 후려쳤다.

“으읍!”

가디언의 무서운 일격에 얻어맞은 그의 길고 검은 머리칼이 휙 돌며 공중에 흩날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피와 뇌수, 뼛조각이 터져나와 사방에 진득한 살점을 흩날렸다.

“별것도 아닌 놈이 입만 살아서.”

다룬이 다시 메이스를 들었지만 어차피 필요 없는 짓이었다. 머리가 부서진 코리온의 ‘시체’는 채 그가 두 번째 공격을 가하기도 전에 흙바닥 위에 맥없이 축 늘어졌다.

“니미럴, 너무 쉽게 죽이니 의미가 없잖아. 누가 그렇게 한 번에 보내랬냐?”

페로가 코리온을 한 번에 죽여 버린 다룬에게 육두문자를 써 가며 버럭 짜증을 냈다. 하지만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다시 살려서 또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페로는 그제야 샤자한 공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제 되었소?”

코리온의 죽음까지 확인한 샤자한 공에게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는 함께 온 2백의 기병들을 거느리고 페로가 손짓하고 있는 황궁의 북문을 향해 고개를 오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다룬과 가디언들은 죽은 시체와 잘린 머리를 거두어 북문 위에 걸기 시작했고 머리가 부서진 코리온의 시체는 밧줄로 동여매 성벽에 걸겠다며 다룬이 등에 짊어지고 누각 위로 올라갔다.

북쪽 누각 위에 오만하게 서 있던 페로는 ‘큰 손님’을 맞아주기 위해 성문 앞으로 급히 내려왔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가벼운 콧노래와 함께 이런 혼잣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여간, 카렐 그것이 뭐 배우는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빠르다니까.”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을 혼자 흥얼거리던 페로는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채 죽은 척 다룬의 등에 업혀 누각에 오르던 코리온의 곱지 않은 시선과 딱 마주쳤다.

페로는 코리온의 ‘시체’를 확인하는 척 얼굴을 가까이 가져가 능청맞게 둘러댔다.

“뭐, ‘근위대장 시체 사건’에서 바로 힌트를 얻은 상께 감탄하는 것이었소.”

페로가 얼른 둘러댔지만 코리온의 기분이 썩 좋지만은 않은 것이 그의 무례한 말버릇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래 약속보다 거칠게 군 것이 그저 ‘현실감’ 때문만은 아닌 것 같소만?”

“설마요.”

난처해진 페로가 능청맞게 웃음을 지으며 재빨리 다룬에게 말을 돌렸다.

“누각 위에 자이나브 카메네이 중랑이 있으니 둘이서 무슨 일이 있어도 꼼짝도 하지 말고 학장만 지키고 있어라. 알겠나?”

명령을 내린 페로는 도망치듯 재빨리 코리온의 옆을 빠져나와 성 아래로 내려왔다. 북문 바로 안쪽에는 30여명의 가디언들과 백마 한 마리가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말에 오른 그는 샤자한 공이 모습을 나타낼 때까지 잠시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 후, 기병들의 말굽 소리가 조금씩 가까이 다가왔다.

“오랜만이요, 종조부.”

북문 바로 바깥에 모습을 나타낸 샤자한 공에게 페로가 재빨리 상투적인 인사말을 던졌다. 말 자체는 나름대로 호의적이었지만 사실 어투는 그렇게 다정하지 못했다. 물론 페로의 성깔로 이런 어색한 상황에서 대번 웃으며 맞아준다는 것이 더 비현실적이겠지만.

잔뜩 경계서린 눈빛으로 안쪽을 살피던 샤자한 공은 페로가 타고 있는 유달리 흰 백마에 문득 시선을 주었다. 페로가 말 목 옆을 툭툭 치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참, 그러고 보니 코리온 저놈이 이걸 갖고 있더군.”

말을 눈으로 확인한 샤자한 공의 낯빛이 확 변했다.

“조황비전…….”

제국 3대 명마 중의 하나인 이 아름다운 말은 한때 슈트란 가 제일의 보물로 샤자한의 아버지 암바카이 공이 타다가 2차 혼란기 후 근위대에 빼앗겼던 터였다. 그 뒤로 황제와 베흔이 타던 것을 지난해에는 코리온이 다시 빼앗아 지금까지 타 오고 있었다.

가격조차 매기기 어려운 이 보물은 샤자한 공에게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이었고, 패전 이후 동부의 몰락과 궤를 함께했던, 나름 소중한 의미가 있는 존재였다.

물론 페로가 그런 특별한 의미를 모르고 이 말을 원 주인에게 내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내 새 황제로서 복종을 다짐받는 선물로 슈트란 가에 되돌려주려 가지고 나왔소.”

말을 돌려준다는 말에 샤자한 공의 굳었던 얼굴이 살짝 풀리는 것이 보였다. 물론 그가 말 한 마리 정도에 중요한 결정을 좌지우지할 가벼운 사람은 절대 아니었지만 이 팽팽한 긴장의 순간에 뜻밖의 선물로 경계심을 한 꺼풀 더 벗겨낸 건 사실이었다.

잠시 경계를 푼 샤자한 공은 기병들을 거느리고 성문 안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북문 안쪽으로는 황도의 다른 성문들처럼 양쪽으로 높은 성벽이, 그리고 더 안쪽에는 두 번째 성문이 가로막은 형태의, 마치 우물 안 같은 형태의 작은 옹성이 만들어져 있었다. 페로는 가지고 있던 무기를 가디언들에게 넘기고는 샤자한 공을 향해 말을 몰았다.

“내게 잘 와주었소.”

비무장이 된 페로가 문가에 선 샤자한 공에게 두 팔을 벌려 보이며 빨리 들어올 것을 재촉했다. 하지만 샤자한 공은 여전히 문가에서 말에 오른 채 주변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페로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새 황제가 기다리는데 계속 그렇게 있기요?”

눈앞의 페로가 황제를 대하는 예법을 요구했지만 샤자한 공은 여전히 말에서 내리지 않은 채로 짐짓 못 들은 척 딴청만 피고 있었다. 물론 그 특유의 의심 많은 성격도 한몫 했지만 한편으로는 새 황제와의 기세싸움에서 처음부터 숙이고 들어가지는 않겠다는, 나름의 고집이었다.

“샤자한 공, 새 황제를 대하는 예법을 챙기시오!”

페로 옆에 있던 이부대신 볼토 트라우제가 성난 얼굴로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아직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샤자한 공의 오만방자한 대답에 페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지만 속으로는 아직 상대가 의심을 완전히 풀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리고 자신과 기세싸움을 벌이려는 이 늙은이의 속내를 이미 읽어내고 있었다. 이자는 어쩌면 자신을 떠보기 위해 이런 얼토당토않은 무례를 의도적으로 범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유야 어쨌든, 샤자한 공이 쉽사리 성 안으로 들어서지 않자 내심 다급해진 페로로서는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다. 이제 그는 무기 하나 지니지 않은 채로 스스로 미끼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내 예법을 지키라고 틀림없이 말했소.”

아랫사람들에게 자리를 지키라고 손짓한 페로가 목소리를 잔뜩 깔며 샤자한 공에게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페로가 아랫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다가오자, 샤자한 공도 그제야 비로소 옹성 안에 조심조심 발을 들여놓았다.

둘의 신경전 속에서 1초, 2초 시간이 지나는 새, 하나둘씩 샤자한 공을 따라온 슈트란 가 기병들 대부분이 샤자한 공을 따라 성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페로와의 신경전에 정신이 팔린 샤자한 공은 생각 없이 따라 들어오는 부하들을 통제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샤자한 공과 마주친 페로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지금까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태도로 지역을 말아먹었다면.”

적당한 시간이 왔다고 생각한 페로가 대뜸 눈을 부라리며 샤자한 공에게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말에 오른 두 사람의 허벅지가 어느새 거의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이젠 정신을 좀 차릴 때도 되지 않았소?”

페로가 코끝이 닿을 듯 들이대며 눈을 부라렸다.

“그러니 빌어먹을 손자새끼가 할애비를 팔아먹을 생각을 다 하지.”

순간, 샤자한 공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우유부단한 그였지만 최소한 머리회전 하나만은 누구보다 빠른 사람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보벤의 손에 남겨두고 온 1만 2천의 기병 생각이 확 스쳤다.

“문 닫아!”

페로가 손을 확 치켜든 것을 신호로, 북문 위에서 우르르 소리를 내며 거대한 철창문이 내려와 바닥을 꽝 후려쳤다. 그리고 샤자한 공을 따라온 기병들은 꼼짝없이 옹성 안에 갇힌 꼴이 되고 말았다.

“이놈! 모두 이놈을 공격해!”

속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샤자한 공이 안장 옆에 달려있던 칼을 재빨리 뽑아들려 했다. 하지만 페로 역시 그가 저항하도록 놔두지는 않았다. 뒤에 떨어져 있던 페로의 가디언들 역시 악 소리를 지르며 주인을 지키러 달려들었고, 샤자한의 동부 기병들 또한 주군을 지키기 위해 일제히 페로에게 몰려들었다.

“주인님! 주인님!”

가디언들이 동부기병들을 헤치고 페로에게 다가가려 했지만 주군과 함께 우리에 갇혀버린 동부기병들도 맹수처럼 필사적이었다. 그들은 2,3명씩 짝을 지어 페로 가디언들을 차단하고 샤자한 공과 페로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아섰다. 옹성 위에 매복해 있던 헌병과 투창병들도 일제히 몸을 내밀었지만 페로가 적들 사이에 뒤엉켜 함께 있다 보니 함부로 사격을 할 수가 없었다.

북문 안 조그만 옹성 안쪽은 150명의 기병들과 30여명의 페로 가디언들이 뒤엉키면서 일순간 난장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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