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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맥The Iron Vein-684화 (680/1,132)

< -- 684 회: 파트 10. 오팔에 핏빛이 드리울 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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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일사천리군.”

샤자한 공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카렐이 죽었다는 소식에 지난밤 탄현성에서 서둘러 출발했지만 워낙에 둔해터진 남부보병들이 주력이다 보니 전진 속도는 생각보다 훨씬 느렸다. 사실 샤자한 공과 보벤은 탄현성에 있던 15만의 대군을 모조리 동원해 몰아붙이려 했었지만, 처음 황도에 진주했을 때처럼 남부보병대에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교통수단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시간이 관건이라는 보벤의 강력한 설득에 결국 샤자한 공은 민간의 것들을 비롯해 차량이라는 차량은 모조리 징발해 선발대 병력만 꾸역꾸역 실어온 차였다.

그는 보급품이니 중장비니 하는 것도 모조리 후방에 놔둔 채로 일단 ‘몸뚱이’만이라도 실어다가 ‘황제가 사라진’ 황도를 빨리 봉쇄하는 것이 목표였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일단은 동부기병 1만 2천과 선발대 남부보병 3만 정도만 동행한 상태였고, 나머지 남부보병 10만과 남부기병 1만은 카산드라 호지 경의 지휘 하에 후발대로 따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게 서두르다보니 자칫 기습 공격이라도 당한다면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는 판이었다. 하지만 황제를 잃은 적은 이미 저항의지를 상실했는지,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는지, 얼마 되지 않는 정찰기병을 빼면 어제도 한나절 내내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덕분에 당초 팽팽했던 샤자한 공의 긴장감도 점점 풀어져서, 다시 하루가 지나고 카렐 황제가 죽은지 이틀째에 접어드는 지금은 황도로 가는 유람으로 보일 정도로 그의 표정과 걸음이 가벼웠다.

“꼭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군.”

1만 2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황도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말을 멈춰 세운 샤자한 공이 깊숙이 심호흡을 하고는 싱글벙글 웃음을 지었다. 언덕 아래로는 한 달쯤 전 혈전을 벌였던 샤마시 평원과 황성의 웅장한 성벽이 다시 보였다.

“황도는 나하고는 아무 연고도 없는 곳인데, 여기가 특별한 곳처럼 느껴지는 건 왜일까.”

“곧 이곳을 손에 쥐고 흔들게 되실 테니 할아버지께는 특별한 곳이 되는 게 당연하죠.”

손자 보벤의 빤히 보이는 아부에 샤자한 공이 눈가를 살짝 찡그렸지만 워낙에 들뜬 기분 덕택인지 아주 기분이 나쁘지만도 않았다.

“저 둔해 터진 놈들.”

샤자한 공이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황도에 가까워지고, 적의 반격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차량에서 내려선 3만의 남부보병들은 각자의 무장을 짊어진 채 헐떡거리며 동부기병들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보병들을 건사하느라 바쁜 마누엘 경을 힐끔 돌아보았던 샤자한 공이 작은 목소리로 보벤에게 물었다.

“총리에게선 연락이 왔나?”

“거사 준비는 끝났으니 남부보병들은 지난번처럼 성벽 동쪽 평원에 따로 보내놓고 기병들을 북쪽 산악과 분지에 대기시켜 놓으면 바로 북문을 열고 우릴 맞아주겠다고 하셨습니다.”

샤자한 공이 망원경을 들고 성벽 위를 살폈다. 예상대로, 성벽 위에는 북부보병들이 대부분이었고, 항상 2선을 지키던 서부 사역병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 북부 놈들은 총리를 따르기로 했고?”

“어차피 서부 아니면 총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판국이니 서부보다는 총리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겠죠.”

“하긴, 그렇긴 하지.”

샤자한 공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몰아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북부 놈들은 적당히 써먹고 나면 쫓아내라고 말씀드려야겠어. 돈버러지 북부 놈들하고는 한 자리에 앉기도 싫거든. 세네피스 그년도 적당히 대우해주는 척 하다가 내치든지 조용히 없애든지.”

북부에 대한 열등감이 또다시 발동한 할아버지를 보며, 보벤이 쓴웃음을 지었다.

“전진! 보병대는 황성의 동쪽 샤마시 평원에 포진해 공성전을 준비한다! 우리 기병대는 황성의 북쪽 산자락에 대기한다!”

샤자한 공이 깃발을 번쩍 치켜들자 명령을 받은 1만 2천의 동부기병들이 마치 파도처럼 샤마시 평원의 언덕을 온통 은빛과 검은 빛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비록 1차 공격에 비해 숫자는 작았지만 규모가 축소되었기는 성을 지키는 수비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차피 페로가 곧 ‘알아서 성문을 열어 줄 테니’ 숫자 따위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봉쇄만 하는 겁니까?”

참모의 물음에 샤자한 공이 별 쓸데없는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럼 기병으로 공성전을 벌이랴?”

1만 2천의 대규모 동부기병은 황도의 북쪽 산악에 차례로 자리를 잡았다. 그 정도면 성벽에서 날아오는 발리스타의 유효사거리 밖이었고, 지대도 높아 전술적으로 상당히 유리했다.1만이 넘는 기병이 엷은 대오로 산자락을 따라 길게 정렬하고 나니 그 거리만도 거의 20스타디아(3km)에 달했다.

“여기에 정지해서 기다린다. 총리께서 안에서 먼저 연락을 주실 테니.”

바로 옆에 있는 손자가 어떤 흉계를 꾸미고 있는지는 꿈에도 모르는 샤자한 공이 나름 침착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마누엘 경이 이끄는 느려터진 남부보병대도 명령받은 대로 조금씩 움직여 지난번 공성전을 펼쳤던 황도 동쪽 성벽 아래로 이동해 포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 역시 다급하게 움직이느라 공성장비니 별다른 보급품도 못 챙긴 상태였고, 그저 카산드라 호지 경이 이끄는 11만의 본대가 올 때까지 황도를 봉쇄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렇게 한 시간 가까이가 지나고, 연합군이 포진을 끝내면서 황도 주변도 다시 정적에 빠져들었다. 지난 첫 번째 진주 때와는 달리 공격하는 쪽에서도, 방어하는 쪽에서도 별다르게 바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 와중에 해는 서쪽으로 점점 저물어갔다.

“우리가 싸우러 온 것 맞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샤자한 공의 참모 한 명이 툭 농담을 던지자 조용하던 연합군 지휘부에도 잠시 웃음이 감돌았다. 하지만 보벤과 그를 따르는 파벌의 몇몇 장교들은 이 조용함이 말 그대로 ‘폭풍 전야’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남부보병대와 너무 떨어져 있는 것 아닙니까?”

영문을 모르는 샤자한 공의 참모 중 한 명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걱정스레 물었다. 그의 말대로, 황성 자체가 워낙에 크다보니 성의 동쪽에 자리잡은 남부보병대와, 북쪽 산악에 위치한 동부기병대와의 거리는 육안으로는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어느 한쪽이 공격을 받는다면 나머지 한쪽이 재빨리 돕기가 영…….”

“공격? 황제도 죽어 없어진 놈들이 공격은 무슨.”

행여 할아버지가 눈치를 챌까 보벤이 재빨리 끼어들며 참모에게 면박을 주었다.

“봐봐, 우리가 이미 이렇게 거리를 바싹 조였으니 놈들이 성에서 나와 선제공격을 할 수도 없어. 우리가 이미 산악 고지대를 차지했으니 우리 후방을 칠 수도 없고, 남부의 후방은 허허벌판이라 숨을 곳도 없고. 적은 이미 죽을 둥 말 둥인데 왜 그리 어렵게 생각해?”

보벤의 면박에 참모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다른 생각에 잠긴 샤자한 공은 이 둘의 논쟁 따위에는 별 관심도 없어보였다. 샤자한 공, 그리고 이 할아버지를 ‘팔아먹을’ 생각에 잔뜩 들뜬 보벤은 황성의 북문 위 누각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저기!”

잠시 후, 보벤이 손으로 황성의 북문 위 누각을 가리켰다. 그곳에서는 온통 피를 뒤집어 쓴 갑옷 차림의 페로가 피투성이가 된 칼을 어깨에 건 채 건들거리며 모습을 나타냈다.

“저 양반다운 모습이군.”

샤자한 공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페로는 한쪽 발을 성벽 난간에 척 올리며 밖에 대고 침을 한 번 퉤 뱉었다. 그리고는 성문 쪽에 갑자기 손짓을 보냈다. 그의 손짓에 맞춰, 황성의 북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뭐, 뭐죠?”

말단 기병들은 물론이고 아직 내막을 모르고 있던 샤자한 공의 참모들까지 적 진영의 이 이상한 움직임에 일제히 동요하기 시작했다. 샤자한 공은 갑자기 동요하는 부하들에게 진정하라며 손짓을 보냈다. 때맞춰 그의 할룩스가 울리며 페로의 모습이 가까이에 나타났다.

“내 일은 다 끝났으니 들어오시오. 성문 활짝 열어 줄 테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페로의 얼굴과 갑옷은 선명한 살점과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공과 기병 2백 정도만 북문으로 들어오시오. 나라고 무조건 홀랑 다 까고 속살 내보이고 싶지는 않으니. 내 거사만 끝나면 동부기병들은 어차피 거기서 남부보병대를 공격해 주기로 하지 않았소?”

페로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짐짓 불안해하는 척 했다.

샤자한 공의 참모들은 그제야 ‘페로와의 사전 밀약’이 있었다는 것을 눈치 채고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번 그들의 공격 목표는 황도가 아닌, 성벽 동쪽에 주둔한 마누엘의 3만 남부보병대라는 뜻이었다. 그제야 자신들이 남부보병대와 ‘상당한 거리’를 두고 황도 북쪽에 주둔한 이유를 눈치 챈 참모들이 불안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수고하셨습니다.”

샤자한 공이 페로에게 능청맞게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하지만 신중한 그답게, 페로가 시키는 대로 냉큼 움직여 주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황족 서생은 죽이셨습니까?”

“아직. 학장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

페로가 칼에 엉긴 핏덩이를 발바닥에 툭툭 털며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샤자한의 요구가 충족된 건 아니었다.

“쓸모보다는 미래의 위험이 더 큽니다. 당장 제거하시고 그자의 목을 보여주시면 기꺼이 성 안에 들어가 총리 각하의 수하로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성벽 위에는 서부 병사들도 있어. 날보고 그네들 앞에서 학장의 목을 베라고? 수비군 전체를 난장판을 만들려고?”

샤자한의 무리한 요구에 페로가 버럭 화를 냈다.

“총리각하의 요구대로 움직인다면 남부보병대도 저를 적으로 돌릴 테니 연합군도 난장판이 될 겁니다. 어차피 양쪽이 다 난장판이 되어야 공평한 선택 아닙니까.”

샤자한 공의 엉큼한 웃음을 보며, 페로는 저 종조부에게 남은 마지막 정나미까지 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코리온을 죽이라는 건 서부와는 확실히 적으로 선을 그으라는 압박이었다.

물론 이 상황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페로 역시 저 능구렁이를 위한 만찬을 이미 준비해 두었던 터였다.

“그 서생 놈하고 심복들을 끌어내서 성문 바로 밖에서 지금 쳐 죽여라. 모두 다 볼 수 있게.”

페로가 성 안쪽에 손짓을 보내고는 다시 샤자한 공에게 돌아섰다.

“북문 앞으로 와서 직접 보시구려. 내 의지를 똑똑히 보여줄 테니.”

“200놈만 따라와라. 보벤 네가 부대를 맡고 있어.”

샤자한 공은 주변을 지키는 몇 안 되는 기병들에게 뒤따르라고 손짓을 보내고는 본대와 떨어져 황성 북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 풀려가자, 본대에 보벤은 내심 쾌재를 부르며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평야와 접하고 있는 다른 거대한 성벽들과는 달리, 황성의 북쪽 성벽은 험준한 능선을 따라 야트막하게 세워져 있었고, 북문은 그 산줄기 한중간의 봉우리 사이에 조금은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지난번 전투를 위해 수비군들이 성벽 일대의 나무니 풀들을 모조리 태워버리면서, 북벽 일대는 지금은 군데군데 잿더미나 잡초들만 남은 누런 민둥산이 되어 있었다.

“여기쯤이 좋겠군. 잘 보이고.”

2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북문이 있는 능선 아래로 다가간 샤자한 공은 성문 위 누각에 있는 페로의 모습이 거의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의 거리에 일단 멈추어 섰다. 성문까지는 민둥산을 타고 오르는 가파른 오르막길만이 남아있었다.

샤자한 공은 고개를 쳐들고 북문이 있는 고개 위를 올려보았다. 해가 완전히 저물면서 짙은 어스름이 주변을 조금씩 덮었다.

잠시 후, 북문 앞에 펼쳐진 광경은 샤자한 공이 지금껏 그리도 기다렸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관복을 차려입은 몇 명과 함께 긴 머리에 검은 무명포 차림새의 한 남자가 가디언들의 손에 질질 끌려나오고 있었다.

샤자한 공은 스코프를 작동시켰지만 긴 머리칼에 큰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만으로도 그가 누군지 육안으로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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