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73 회: 파트 9.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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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기병들에 쫓겨 고개 위로 정신없이 도망치던 이트닌과 가디언은 당장이라도 뒷덜미를 잡을 듯 쫓아오던 그들이 갑자기 숲 쪽으로 다시 물러나자 어리둥절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많던 남부기병들이 고작 20여명의 헤네티들에 쫓겨 허겁지겁 숲 아래 저지대로 물러나고 있었다.
“맙소사, 옛날 헤네티들이 아냐. 그땐 X들보다 열세였는데 이젠 거의 맞먹겠어…….”
무수한 기병들의 시체를 보며 이트닌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민병대 시절, 숱하게 헤네티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의 능력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의 헤네티는 그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안 따라오십니까?”
가디언이 뒤만 쳐다보는 이트닌을 재촉했지만 그는 고개를 저으며 급히 걸음을 돌렸다.
“저 헤네티들이 이번엔 베흔 대장을 쫓을지도 몰라.”
뒤쫓던 기병들이 도망을 치자 이트닌도 급히 걸음을 돌려 다시 자작나무 숲으로 향했다. 가디언도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쫓아 자작나무 숲에 뛰어들었다.
이트닌의 예상대로, 기병들의 첫 공세를 물리친 헤네티들이 도망치는 기병들을 쫓아 숲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숲 안은 주인을 잃고 날뛰는 말들, 다친 기병들의 신음소리, 기병 사관들이 사방에서 어지럽게 외치는 고함소리로 엉망이었다.
“대장! 대장! 접니다! 이트닌입니다!”
이트닌이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숲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다급히 고함을 질렀다. 그는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베흔이 너무 잘 숨었는지, 아니면 어딘가에서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 옆의 덤불에서 웬 거구가 확 튀어나와 그의 어깨를 꽉 붙들었다.
“으읍!”
순간 놀란 이트닌이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는 그에게도 익숙한 것이었다. 그는 스캐너를 피하려 얼굴과 목에 진흙을 잔뜩 바른 채로 탈진해 비틀거리는 옛 전우를 이번엔 진심으로 꽉 껴안았다.
“저놈들, 저놈들은…….”
“압니다, 알고 있지만 일단은 도망가야 합니다.”
“저기! 저기 베흔 놈이다!”
이트닌이 뒤를 휙 돌아보았다. 말에 오른 한 녀석이 칼끝으로 이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말에 올라 있었지만 차림새를 보아 남부기병의 말을 빼앗아 탄 헤네티가 틀림없었다.
“제엔장!”
가디언이 둔해진 베흔을 등에 급히 업었다. 그리고 셋은 뒤쫓는 헤네티들을 피해 언덕 위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쫓아가!”
탈취한 말에 탄 3명의 헤네티들이 도망치는 이들을 쫓아오기 시작했고, 나머지 헤네티들도 급히 도보로 그 뒤를 쫓았다. 베흔을 업은 가디언이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붙였지만 이 상태로 말에 탄 자들을 따돌리기는 베흔의 거구가 너무 무거웠다. 게다가 갑주도 입지 않은 헤네티들을 태운 말은 중장기병을 태웠을 때보다 훨씬 날랬다.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냐!”
선두에서 돌진해 오는 말의 거친 숨소리가 닿을 듯 가까워지자 가디언도 이제 더 이상 도망만 칠 수는 없었다. 그는 업고 있던 베흔을 옆으로 확 내려놓으며 양손검을 번쩍 뽑아들었다.
“이놈들이!”
어린아이 키만한 양손검이 공중에 거대한 호를 그리며 말의 목을 그대로 후려쳤다. 가디언의 위력적인 일격 앞에서 목을 가린 마갑은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피가 터져나오는 둔탁한 소리가 울리며 목이 절반 잘려나간 말이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으음?”
말에서 나동그라질 헤네티의 모습을 상상했던 가디언이 순간 당황했다. 그가 칼을 휘두르던 순간, 말 등에서 뛰어내린 헤네티가 옆에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이익!”
얼떨결에 기습을 당한 가디언이 중심을 잃고 뒤로 벌렁 나동그라졌다. 코앞에서 번쩍하는 칼날을 가까스로 피한 그는 이 무서운 적의 관자놀이를 칼자루로 힘껏 후려쳤다. 빠악 하고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리며 헤네티가 몸을 파르르 떨기 시작했지만 그로서는 이 짧은 승리를 만끽할 시간여유조차 없었다. 막 일어나려는 가디언의 머리 위를 뒤이어 달려온 또 한 마리 거대한 말의 형상이 확 덮쳤다.
“또야?”
놀란 가디언이 팔로 머리를 가리며 옆으로 피하려 했지만 이번에 달려온 헤네티는 창까지 들고 있었다. 그때, 쓰러진 가디언의 얼굴 위를 무언가 금빛의 긴 톱날 같은 것이 쉬익 소리를 내며 솟구쳐 올랐다.
“빌어먹을 사교도 놈들!”
플람베르주의 우둘두둘한 날 사이에 낀 헤네티의 창이 뚝 소리를 내며 부러져 공중을 날았다. 베흔이 온 힘을 다해 휘두른 무시무시한 칼끝이 말의 어깨와 가슴, 그리고 그 위에 타고 있던 헤네티의 허리까지 갈가리 찢어내고 공중을 휙 돌았다.
“이크!”
가디언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는 말의 피와 내장에 기겁을 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 한쪽에서는 조금 전 머리가 부서진 헤네티가 뇌수를 쏟으면서도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며 석궁을 꺼내들려 하고 있었다.
“괴물들 아냐!”
기겁을 한 이트닌이 잽싸게 칼을 뽑아 달려들어서는 아직 꿈틀거리는 헤네티의 목 뒤에 힘껏 꽂았다.
“대장! 대장!”
헤네티를 확인 사살한 이트닌은 베흔에게로 급히 달려갔다. 오랜만에 정든 칼을 휘둘렀던 베흔도 칼의 원심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뒤로 벌렁 쓰러져 있었다.
“여길 지킬 테니 빨리 물러나십시오!”
가디언이 앞을 막는 새 베흔이 이트닌의 어깨를 붙들고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전 여기……으읍!”
가디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금 전 베흔의 칼에 허리와 팔이 반쯤 잘린 헤네티가 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와 그의 발목을 붙들려 하고 있었다. 기겁을 하며 물러나려던 가디언은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뒤로 다시 자빠질 뻔했다.
“뭐야, 이건!”
놀란 가디언이 그 괴물 같은 헤네티의 뒤통수를 칼로 힘껏 내리쳤다. 하지만 그 사이, 말을 타고 달려온 세 번째 헤네티가 옆을 돌아 베흔과 이트닌에게 돌진하는 것을 놓치고 말았다.
“젠장! 끝도 없어!”
베흔을 부축해 허겁지겁 물러나던 이트닌은 뒤쫓아오는 말굽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이익!”
이트닌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쩍 하는 것을 느꼈다. 기병용 창의 예리한 날 끝이 베흔의 뒷목을 향해 꽂혀오고 있었다. 위험을 직감한 베흔이 이트닌을 거칠게 밀어냈다.
“비켜! 이트닌!”
베흔이 바닥에 끌고 가던 칼을 치켜들어 적을 향해 똑바로 섰다. 하지만 이번 헤네티는 조금 전의 동료처럼 정면으로 덤벼오지는 않았다. 그 헤네티는 들고 있던 창을 베흔의 가슴을 향해 힘껏 던지고는 석궁을 재빨리 빼들었다.
“조심해요! 대장!”
이트닌이 악을 썼다. 베흔은 가슴으로 날아드는 창을 칼로 힘껏 쳐냈지만 그 사이, 헤네티가 이미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이놈!”
옆에서 들려온 외침에 석궁을 쏘려던 헤네티가 옆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이트닌이 급한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짧은 검을 헤네티를 향해 힘껏 집어던지고 있었다.
“넌 뭐야!”
놀란 헤네티는 반사적으로 석궁 끝을 그쪽을 향해 휙 돌렸다. 하지만 이트닌이 날린 칼은 막 볼트를 날린 석궁을 딱 소리를 내며 후려치고는 튕겨나가 헤네티의 가슴과 턱을 깊숙이 베고 날아갔다.
“우읍!”
뒤늦게 달려온 동맹군 가디언이 말 위에서 휘청거리는 그 헤네티의 뒤를 악 소리를 지르며 덮쳤다. 가디언이 힘으로 헤네티의 허리를 낚아채려 했지만 그자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비틀거리면서도 안장 위에서 그대로 버티고 있었다.
“씨발! 이런 괴물들이 다 있어!”
그 사이, 휘청거리며 다가온 베흔이 가디언에 붙들려 꼼짝도 못 하고 있던 헤네티의 몸통을 그대로 후려쳐 목숨을 끊었다.
“망할…….”
몸통이 절반 토막난 후에야 비로소 힘을 잃고 말에서 떨어진 헤네티에게 베흔이 침을 퉤 뱉었다. 그때, 고개 위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아군인가?”
동맹군 가디언이 눈에 낀 스코프를 확대해 보고는 비로소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카토 대장? 근위대까지?”
근위대가 온다는 말에 그제야 안도한 베흔이 말고삐를 쥐며 큰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동맹군 가디언이 다시 고개 아래를 가리켰다.
“아직 남았습니다! 빨리 물러나야 합니다!”
이들과 싸우는 새, 도보로 올라오는 나머지 헤네티들이 어둠 속에서도 눈에 보일 정도로 근접해 있었다. 가디언이 어디선가 날아든 볼트에 기겁을 하며 베흔에게 다급히 소리를 질렀다.
“이 말에 타십시오!”
빈 말에 막 기어오르려던 베흔은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위쪽에서 들려오는 낮은 신음소리가 있다는 것을 그제야 느꼈다.
“이트닌?”
뒤를 돌아보았던 베흔이 경악을 하며 칼을 짚고 비틀비틀 뒤로 다가갔다. 마지막 헤네티가 죽기 직전 날린 볼트 한 발이 이트닌의 목 옆을 그대로 관통해 꽂혀 있었다.
“이트닌! 이트닌!”
베흔이 쓰러져 있던 이 옛 전우를 꽉 껴안았다. 목의 혈관이 찢기면서 엄청난 피가 마른 바닥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조금씩 핏기를 잃어가는 그의 모습에 놀란 베흔이 창백해진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악을 썼다.
“맙소사,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라고! 말! 말 끌고 와!”
가디언이 끌고 온 말에 어렵게 기어오른 베흔은 뒤이어 올려 준 이트닌을 가슴에 꽉 안았다. 하지만 피를 많이 흘려 반쯤 의식을 잃어가는 그는 고개를 힘없이 떨군 채 가늘게 떨고만 있었다.
“빨리! 빨리 가!”
가디언이 뒤를 지키는 새 베흔이 급히 말을 몰고 언덕 위의 근위대 지원군 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가파른 언덕에서 무거운 베흔까지 2명이나 실은 말은 생각같이 빨리 움직여 주지는 못했다.
“제발, 아군이 코앞이야! 과다출혈이니까 조금만 참아.”
베흔이 자꾸 옆으로 기우는 이트닌을 받쳐주며 잔뜩 쉰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이트닌이 젖은 눈동자를 움직여 베흔을 향했다.
“과다출혈……우리……대장님도 이렇게……가셨죠?”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베흔은 무어라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이트닌이 애써 웃으면서 말하는 ‘우리 대장님’이 누군지는 말하나마나였다. 이트닌의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어느새 두 사람의 옷을 피로 흠뻑 적시고 있었다.
그때, 언덕 위에서 내려오던 카토가 자작나무 숲에서 막 나오는 베흔을 발견했다.
“저기! 저기다!”
베흔 일행을 발견한 카토와 근위대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오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거리가 좀 남아있었다. 뒷걸음치며 베흔의 뒤를 지키던 동맹군 가디언이 말의 엉덩이로 날아드는 볼트를 힘껏 쳐내며 베흔을 재촉했다.
“놈들이 따라붙습니다! 빨리 올라가십시오!”
말고삐를 쥔 베흔이 다시 기우는 이트닌의 몸을 꽉 안았다.
“고개 좀 들어. 숙이면 더 피가 많이…….”
이트닌이 눈을 어렵게 치켜뜨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제가 제일 명예롭게 죽는 건가요…….”
“살아남는 게 더 명예니까 닥쳐, 하산 상사.”
“그래서, 명예로우세요?”
“뭐, 뭐라고?”
베흔이 이를 드러냈지만 이트닌은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생각해봐요……우리 중에……사교 손에 전사하는 건 저 하나잖아요.”
순간 말문이 막힌 베흔은 품에 안긴 이 옛 전우의 얼굴을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소령님한테도……아무 것도 안 남았잖아요.”
이트닌이 끓는 소리로 말했지만 베흔은 여전히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어느새 옛날로 돌아간 이트닌이 몸을 떨며 조금 전보다 더 약해진 목소리를 냈다.
“대체……왜 그러셨나요?”
베흔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말에 신경질적으로 박차를 가했다. 생애 가장 뜨겁고 아름다웠던 황금기를 함께했던 세 명 중 마지막 사람마저 이제 그의 곁을 떠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먼저 간 두 명도 하필 자신의 손에 죽어갔던 터였다.
이트닌이 갑자기 몸을 거칠게 비틀었다.
“다 보고 싶은데…….”
힘겹게 내뱉는 이트닌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베흔은 그제야 이 옛 전우가 언제든 거머쥘 수 있었던 세상의 영광을 모두 거부한 채 이 외진 곳에서 과거 속에 파묻혀 살아왔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멍하니 벌린 이트닌의 입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이트닌?”
베흔이 이트닌의 기울어가는 몸을 다시 당겨 안았지만 축 처진 그의 고개는 말의 힘겨운 걸음을 따라 맥없이 흔들리고만 있었다. 이트닌의 가슴을 짚은 손끝에서는 그의 맥박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이트닌, 하산 상사……상사…….”
베흔의 숨이 멎었다. 숨결이 사라진 이트닌의 얼굴 위로 하임달의 황무지 위에 쓰러진 채 그를 허무하게 쳐다보던 오르마즈의 마지막 모습, 그리고 숨이 막혀 버둥거리던 와헷의 비참한 최후가 함께 겹쳐보였다.
“다……모두 다…….”
베흔이 피에 젖은 이트닌의 목덜미에 얼굴을 기댔다. 말은 여전히 힘겹게 언덕을 오르고 있었지만 그의 머릿속은 지나온 그의 생애처럼 텅 빈 것만 같았다.
“대장? 대장 맞습니까? 힐러 군단장님의 명으로 대장님을 구하러 왔습니다!”
선두에서 달려온 4군단 참모 가디언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베흔의 말고삐를 얼른 붙들었다. 그는 죽은 줄로 알았던, 심지어 시체까지도 확인했던 근위대장의 모습에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맙소사, 돌아가신 줄 알았습니다!”
병사들이 휘청거리는 베흔을 말 위에서 내려주었지만 그는 이미 죽은 이트닌을 팔에 안은 채 넋 나간 사람처럼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무사하신 겁니까? 말씀을 해 주십시오!”
“헛살았다는 게 뭔지 아나?”
“예?”
베흔의 느닷없는 한 마디에 병사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렸지만 그는 이트닌의 식어가는 가슴에 이마를 기댄 채 어깨만 들썩거리고 있었다. 무슨 이유엔지, 죽기 직전 자신을 올려보던 주페의 슬픔어린 눈빛이 기억 속에 아른거렸다.
“이제 내게 남은 게 도대체 뭐냐고…….”
베흔의 낮은 흐느낌에 이트닌의 시체가 가늘게 떨렸다. 뒤로 축 늘어진 이트닌의 목깃 안에서는 그가 민병대 시절부터 달고 있던 인식표가 흘러나와 바닥에 힘없이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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