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665 회: 파트 9. 하나의 가지, 다른 색의 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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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오르마즈에게도 지난 며칠간처럼 또 다른 ‘새 얼굴’이 모습을 나타냈다.
오르마즈의 머리를 털어주던 니사는 누군가 드는 소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미 의사는 그 양반이 보냈다며?”
시끌시끌하게 떠들며 나즈라와 함께 오르마즈의 병실을 찾아온 건 6척 5촌(195cm)은 되어 보이는 큰 키에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밝은 인상의 사내였다.
언뜻 보기에는 허름한 술집에서 커다란 술통을 껴안고 고성방가하고 있는 광경이 바로 연상되는,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는 사내였다. 게다가 목소리도 굵직한데다가 펑퍼짐하고 허름한 옷차림새는 말 그대로 ‘해적 두목’ 이미지와 딱 어울렸다.
“그런데, 이 친구야?”
남자가 누워있는 오르마즈에게 다짜고짜 코끝이 닿을 듯 얼굴을 바싹 들이댔다. 그리고는 그의 휘둥그레진 그레이오팔 눈동자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허, 완전히 제대로 아냐? 왜 그랬는지 이제야 알겠군. 축하하네.”
사내가 껄껄대고 웃기 시작했다.
멍하니 누워있던 오르마즈는 사내의 검고 짙은 눈썹 아래 형형하게 반짝이는 눈동자와 얼굴 형태를 본능적으로 읽어낼 수 있었다. 긴 구레나룻과 잘 빗지 않은 머리칼은 유달리 큰 눈, 갸름한 턱에서 오는 곱상한 인상을 가리려는 가면 같아보였다.
남자의 이마도 매끈한 것을 보아 나즈라처럼 간택자도 아니었다. 오르마즈는 저런 차림새의 사람이 어떻게 대신관 처소에 들어올 수 있었는지도 의아할 지경이었다.
‘해적두목님’과 마치 친구처럼 이것저것 떠들던 나즈라가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그 친구 왜 안 들어와? 표정이 별로 안 좋던데 정말 괜찮은 거야?”
“괜찮다니? 이봐,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야, 빨리 들어와 인사해.”
그 구레나룻 ‘해적두목님’이 문밖에 손짓을 보냈다. 그의 손짓을 받아 들어온 건 푸른 망토를 얼굴까지 뒤집어쓴 키 큰 남자였다. 망토의 후드 사이로 살짝 드러난 길고 매혹적인 눈꼬리에 오르마즈가 기겁을 했다.
“녀석아, 소개 안 하고 뭐 해?”
‘해적 두목’이 크고 넓적한 손바닥으로 그 미남자의 등짝을 퍽 소리가 나도록 쳤다. 남자는 그제야 망토를 벗으며 고개를 숙였다.
“요아킴이라고 합니다. 이오타라고 부르셔도 됩니다.”
명색이 옛 애인 앞에서 이런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만, 오르마즈는 이 미남자의 매혹적인 얼굴에서 잠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의 허리까지 늘어진 길고 검은 머리칼, 언뜻 성별이 혼동될 정도로 갸름하고 고운 얼굴은 오르마즈의 넋을 단번에 확 빼앗아갔다. 남자의 이마 중간에는 ‘아나히타’교단 간택자임을 뜻하는 나뭇가지 문장이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나즈라가 요아킴의 긴 머리칼을 가리키며 그 ‘해적두목’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허, 이 친구 성직자였을 때 머리 못 기른 게 한이 됐나? 환속하더니 아예 깎을 생각을 안 하네?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나즈라의 농담에 ‘해적두목님’이 방이 떠나가라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르마즈는 이 미남자의 고운 얼굴에 마치 처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같은 근심이 잔뜩 어려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이젠 잘 나가는 교리법 학자님이시라고. 이젠 명색이 신학교 석좌교수인데 때깔도 좀 내야지. 봐봐, 얼마나 잘 생겼어? 팔이 안으로 굽는다지만 이 정도면 정말 콜로니 최고지.”
저 미남자가 ‘석좌교수’라는 말에 오르마즈가 기겁을 했다. 저 석좌교수를 대하는 ‘해적두목님’의 무례한 태도에 문득 의아함이 들었던 오르마즈는 이 둘이 인상은 전혀 딴판이지만 실제로는 어딘지 닮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혹시 친척인가?’
오르마즈의 예상도 무리는 아니었다. 교단 신학교 석좌교수라면 감히 고위급 성직자라고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이 있는 자리였다. 그런 사람을 저렇게 어린애처럼 대할 정도라면 결국은 친척밖에 없었다.
‘해적두목님’이 그 미남자에게 방바닥을 가리켜 보이며 시끌시끌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제 여기 다하카르 교단에 뼈를 묻는 거야. 이마엔 아나히타 문장이 남아있어도 넌 이제 여기 사람이야. 알았냐?”
“무, 물론입니다. 명심하고 있습니다.”
요아킴이 반쯤 울먹이듯 대답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오르마즈도 희미한 의식 속에서 한 번 본 기억이 있는 웬 여자가 방에 불쑥 들어섰다. ‘해적두목님’이 껄껄대고 일어나 두 팔을 벌렸다.
“어허, 안 그래도 얘기하려던 참이었는데, 이거 양반되시긴 틀렸군.”
얼굴에 흰 베일을 뒤집어쓴 큰 키의 그 여자는 이 넉살좋은 남자의 포옹에 자연스럽게 팔을 벌렸지만 곧 그의 뒤에 있는 요아킴, 이오타의 모습에 잠시 멈칫거렸다.
“이오타를 데려오신 거요?”
흰 베일 속에 희미하게 비치는 여자의 검은빛 얼굴에 아쉬움인지, 슬픔인지 알 수 없는 무표정함이 잠시 흘렀다. 하지만 그런 그의 표정은 베일이 드리운 그늘 속으로 곧 감춰지고 말았다. 그 흰 베일의 여자는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해적두목님’과 다정하게 포옹을 나누었다.
하지만 그 여자를 바라보는 미남자, 요아킴의 표정은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이젠 보낼 때가 된 것 같아서.”
니사만큼이나 웃음이 헤픈 이 ‘해적두목님’이 다시 껄껄대며 이오타의 등을 탁 쳤다.
“훗, 잘 선택하셨소.”
흰 베일의 여자는 이오타의 애타는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나즈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깐 좀 나가서 할 말이…….”
오르마즈를 잠시 돌아보았던 그 흰 베일의 여자는 나즈라와 ‘해적두목님’에게 나오라며 눈짓을 보냈다. 그 둘에 이어 니사와 요아킴까지 하나둘씩 자리는 비우고, 오르마즈는 또다시 방 안에 혼자 남게 되었다.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있는 걸까.”
오르마즈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반복했던 질문을 또다시 던졌다. 맥없이 누워있던 오르마즈는 조금 전까지 나즈라가 앉아있던 자리를 문득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오르마즈의 눈에도 익숙한 나즈라의 의사복이 걸쳐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나즈라는 오르마즈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지만 오르마즈가 그에 대해 하는 것이라고는 권위있는 내과의라는 것이 전부였다.
“형편없는 암살수 같으니.”
오르마즈가 갑자기 스스로를 원망했다. 암살수라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 다 의심하고 분석해야 했지만 나즈라에게만은 그렇지 못했었다. 무엇을 보든 그 의미를 분석하고, 사람을 보면 표정과 복장, 행동을 분석하고, 문서나 문장을 보면 암호문이 들어있는지 반사적으로 파악하도록 훈련받은 그였지만 이상하게 나즈라를 대할 때만은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이 되곤 했다.
하지만 나즈라의 행동은 모두 수상쩍었다. 그는 무언가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설명을 해 주지 않았고, 지금까지 벌어진 상황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 투성이었다.
오르마즈는 나즈라의 체취가 배어 있을 의사복과 그곳에 달린 이름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발동한 습관에 그는 나즈라의 이름을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나즈라……라카드……나즈라……아르…….”
순간 창백해진 오르마즈가 입놀림을 멈추었다. 머리맡에 있는 계기에서 그의 심박수를 나타내는 계기가 무섭게 요동을 치면서 경보음까지 울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힘껏 뻗어 그의 머리를 밀어내는 데 썼던 면도칼, 그리고 주사를 놓을 때 쓰는 탄력밴드를 덥석 붙잡았다.
“무슨 일이에요?”
방에서 들려온 경보음을 들은 나즈라가 허겁지겁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 하지만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조금 전처럼 힘없이 병상에 누워있는 옛 애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당신 도대체 누구야.”
오르마즈의 차가운 물음에 나즈라는 문 앞에서 바싹 굳어버렸다. 그는 뒤따라 들어오려는 헤네티 경비병들에게 물러나라며 조심조심 손짓을 보냈다. 오르마즈의 손에서는 면도기에서 뽑아낸 예리한 날이 팽팽하게 당겨진 밴드에 끼워진 채 나즈라를 향하고 있었다. 범죄자들이 종종 급조해서 사용하는 이 도구는 보통은 사람을 죽이기 어려웠지만 솜씨 좋은 암살자라면 한 번에 급소를 맞춰 절명시키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당신 도대체 누구냐고…….”
밴드를 당긴 오른손이 그의 목소리만큼이나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헤네티 중 한 명이 오르마즈에게 석궁을 겨누려 하자 나즈라가 그자의 무기를 한쪽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모두 물러나! 명령이다!”
나즈라의 명령에 문가에 모였던 사람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나즈라는 문을 닫으며 오르마즈에게 진정하라며 손짓했지만 그의 분노는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당신 본명이 도대체 뭐냐고!”
오르마즈가 쉰 목소리로 목이 찢어져라 악을 썼다.
“제기랄, 암살수라는 내가 아직까지 그걸 못 알아챘다니……. 나즈라 라카드?”
자책감 때문인지, 아니면 인정하기 싫은 현실 때문인지 오르마즈의 뺨을 타고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걸 음소로 나눠서 거꾸로 읽으면……그게 당신 진짜 이름인가?”
나즈라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잠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오르마즈가 언성을 높였다.
“아르잔? 아르잔 다하카르, 대신관이 되기 전, 당신의 어릴 적 이름 말이야.”
나즈라는 오르마즈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여전히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르마즈는 밴드를 팽팽히 당긴 채 계속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왜 말을 안 하는데…….”
오르마즈가 고개를 저었다.
“왜 아니라는 말을 안 하냐고.”
“제발 진정해요.”
나즈라가 그제야 자신의 빈 손바닥을 내보이며 오르마즈에게 한 발 다가섰다. 오르마즈가 다시 이를 드러내며 밴드를 팽팽히 당겼다.
“오지 말라고.”
으르렁대는 오르마즈에게 나즈라가 소매를 걷고 두 팔을 벌려 보였다.
“당신을 돌려받으려고 리쿠 가 포로까지 섞어서 100명이나 민병대에 보냈소. 엄청난 몸값도 지불했고.”
나즈라의 굵은 손목에는 처음 보는 백금 팔찌가 채워져 있었다. 팔찌를 빙 두른 12개의 교단문장 위에는 ‘대신관’을 뜻하는 검은 용이 그의 신분을 드러내고 있었다.
“애당초 당신을 죽일 생각 따위는 없었소. 부상을 입힐 생각도 없었고.”
“본명을 말하라고!”
오르마즈가 씩씩댔지만 나즈라는 계속 자기 말만 이어갔다.
“명령을 어기고 감히 당신을 쏜 그 멍청한 헤네티는 다음날로 내가 직접 죽여 버렸고.”
“본명을 왜 말하지 않는데!”
오르마즈는 미친 사람처럼 계속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하지만 당초 그가 받은 ‘표적’인 이 사람에게 차마 칼날을 날리지는 못했다.
나즈라가 다시 한 발 다가섰다.
“당신을 팔아먹은 민병대요. 이제 그쪽에 미련은 제발 접어주시오.”
“그건 내 알 바 없다, 난 군인이야.”
“더 이상은 아니요. 오르마즈라는 사람은 한동안 세상에 없을 테니.”
갑자기 가늘어진 나즈라의 눈가가 조금씩 축축해지기 시작했다.
“뭐라고?”
오르마즈가 밴드를 더 팽팽하게 당겼다.
“제발, 어차피 말해줄 것을 미뤄왔을 뿐이요. 그러니 날 용서해 주시오.”
나즈라가 밴드를 쥔 오르마즈의 왼손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당신 이름이 뭐냐고! 아르잔이 맞냐고!”
오르마즈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나즈라의 목젖을 향해 밴드를 똑바로 겨누었다.
“아르잔은 내가 아니고 당신이요.”
나즈라의 한 마디에 오르마즈의 눈이 주먹만해졌다. 순간, 멍해진 오르마즈의 왼손을 나즈라가 덥석 붙잡았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오르마즈의 오른손은 바싹 당긴 칼날을 그대로 날렸다.
“으읍!”
나즈라가 어깨를 바싹 움츠렸다. 그의 턱과 목을 타고 붉은 피가 주르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오르마즈가 날린 면도날이 그의 목을 베고 날아가 닫힌 문 안쪽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후우.”
나즈라는 턱 밑의 깊은 상처를 힘없이 짚었다. 칼을 놓던 마지막 순간, 표적을 겨눈 오르마즈의 오른손이 조금 움직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군인 오르마즈 카파키의 마지막 임무는 이렇게 끝났군.”
나즈라가 쓴웃음을 지으며 오르마즈의 떨고 있는 오른손을 붙들었다.
“빌어먹을, 형편없는 암살수 같으니. 이런 한심한 놈.”
오르마즈가 이를 빠득 갈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떨고 있는 그의 몸을 나즈라, 아니 현 대신관 야푸르가 다시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는 그의 이마에 있는 다하카르 조각에 입을 맞추고는 손가락 끝에 목에서 나온 자신의 피를 발랐다.
“바 남 야즈드 박사야드 박사야쉬가르 메헤르반, 야타, 아후 바이료, 아타.”
야푸르의 손가락 끝이 자신의 이마에 피로 무언가를 써넣고 있었지만 오르마즈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이 상황이 현실인지 꿈인지 모두 혼돈스러울 뿐이었다.
“알파, 야푸르 아르잔 빈 다하카르, 시그마, 아르잔 오르마즈 빈트 다하카르. 신께서 나와 당신을 지켜주시길, 하가 마나이오 파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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